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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리풀사진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리풀
이생진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섬여행(9)-흑산도
맨 먼저
나는 수평선에 눈을 베었다
그리고 워럭 달려든 파도에
귀를 찢기고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저 바다만의 세상하면서
당하고 있었다
내 눈이 그렇게 유쾌하게
베인 적은 없었다
내 귀가 그렇게 유쾌하게
찢긴 적은 없었다
이생진 시 <수평선> 전문
그렇다. 바다에서는 수평선에 베어도 기분이 좋고 파도가 귀를 찢고 따귀를 때려도 기분좋게 웃는다. 이생진 시인과 함께 떠나는 섬여행. 자학증 환자처럼 우리는 다시 그 파도의 채칙을 맞으러 섬으로 간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오랜 세월 파도에 부딪쳐 검게 멍든 섬 흑산도로 간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97km 떨어져 있으며 면적 19.7㎢, 인구 2,200여 명(흑산면 전체 4,800명), 해안선 길이 41.8㎞이다. 홍도, 다물도, 대둔도, 영산도 등과 함께 흑산군도를 이룬다.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통일신라시대인 828년(흥덕왕 3)으로,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난 뒤 서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로 이 섬에 반월성을 쌓으면서부터라고 한다. 본래는 월산군에 속하였으나 조선시대인 1678년(숙종 4)에 흑산진이 설치되면서 나주목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무안군에, 1969년에는 신안군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른다.
동양고속훼리 파라다이스호 쾌속여객선을 타면 중간에 도초,비금도를 거쳐 2시간 만에 흑산도에 도착한다. 흑산도항에서는 제일 먼저 반기는 것이 '기암괴석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 흑산도'라고 쓰여진 표지석이다. 오랫만이다. 2006년 5월 홍도 다녀오는 길에 하루 머물렀던 흑산도를 7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이번 섬여행 역시 이생진 시인과 함께 했다. 이 시인은 흑산도에 여러번 왔는데도 필자 일행이 함께 가자고 하니 기꺼이 응해주셨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생진 시인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섬시인이다. 우리나라 섬 1,000개 이상을 다녔고 연세가 80대 중반이신데도 불구하고 지금도 틈 만 나면 섬을 돌아다니는 분이다. <그리운 바다 성산포>, <하늘에 있는 섬>, <우이도로 가야지> 등 이제까지 펴낸 34개의 시집 중 대부분이 섬에 관한 시집들이다. 이와같은 이유로 2001년 제주도 명예도민이 되었고 2012년 7월에는 신안군 명예군민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이 생진 시인은 시인이면서 화가이기도 하다. 섬에 가면 언제나 여유롭게 시를 쓰기도 하고 화첩에 그림을 그리시기도 한다.
이생진 시인은 "해마다 여름이면 시집과 화첩을 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때로는 절벽에서 때로는 동백 숲에서 때로는 등대 밑에서 때로는 어부의 무덤 앞에서 때로는 방파제에서 생활이 뭐고 인생이 뭔가 고독은 뭐고 시는 무엇인가 생각하며 물 위에 뜬 섬을 보았다. 그때마다 나는 섬이었다. 물 위에 뜬 섬이었다. 그러나 통통거리며 지나가는 나룻배 벙 벙 울며 떠나는 여객선 억센 파도에 휘말리며 만년을 사는 기암절벽 양지바른 햇볕에 묻혀 조용히 바다를 듣는 무덤, 이런 것들은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낙원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살아서 낙원을 다닌 셈이다. 그 낙원에서 맑고 깨끗한 고독을 마실 때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을 시로 쓴 것이다"라고 말한다.
필자 일행은 흑산도에 도착하자 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섬 일주여행에 나섰다.필자는 섬이든 육지든 여행은 거의 대부분 가이드 없이 자유롭게 여행을 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일행이 여러명 되고 일정도 빠듯하여 부득이 관광가이드가 직접 운전하는 리무진 택시를 이용했다. 가이드는 김태식(017-228-3703) 이라는 분인데 관광지 정보에 해박할 뿐 아니라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여행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먼저 진리당을 찾았다. 진리당은 마을의 안녕과 어선의 무사고, 풍어를 비는 신당이다.
흑산도를 대표하는 본당인 진리당은 이곳 상당(上堂)과 바닷가 끝에 위치한 용신당(龍神堂)으로 구성된다. 상당은 당신(堂神)들이 모셔져 있는 당집과 그 앞쪽에 제물을 준비하는 부속건물, 그리고 당집 뒷편의 오색 천이 걸린 나무숲과 작은 감실(산신당) 제단이 마련되어 뱃사람들이나 바닷일을 하는 사람들이 정성을 드리고 있다. 상당의 오른쪽 돌담 옆의 산책로를 따라 가면 바다의 신 용왕이 좌정한 용신당이 있으며, 이곳에서는 어선의 무사고와 풍어를 지내는 제를 지냈다고 한다.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의 주무대로 등장하기도 했던 진리당은 당각시와 총각화상의 슬픈 사랑의 전설로도 유명하다.
배낭기미해수욕장, 읍동마을을 지나 12굽이길을 오르면 흑산도아가씨 노래비가 있는 상라산(上羅山)에 이른다.
이미자 씨가 부른 '흑산도 아가씨'노래는 60년대 섬 마을 아가씨들의 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흑산도아가씨' 영화 주제가이다. 1969년 개봉, 감독 권혁진, 주연 윤정희, 이예춘, 남진 등이 출연했다. 개봉을 앞두고 주제가를 정하지못해 애타던 때, 고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해군 군함을 주선해 '흑산심리초교 어린이들 수학여행'을 초청한 청와대의 미담기사를 보고, 65년에 작곡가 고 박춘석 씨와 바닷가에서 자란 작사가 정두수와 만나 충무로 카나리아 다방에서 흑산도가 주는 '검은 뫼섬' 이미지에다 그리움에 애타는 '섬여인의 한'을 결합시켜 노랫말을 지어 66년에 이미자가 발표하였다고 한다. 노래비 옆에 설치된 버튼을 누르면 이미자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온다.
예리항과 12굽이길 조망을 제대로 볼려면 노래비 좌측에 위치한 상라산 정상에 올라가보는 것이 좋다. 상라산은 해발 227m로, 문암산(400m), 깃대봉(378m), 선유봉(300m)에 이어 흑산도에서 네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흑산도, 즉 '검은 섬'이란 이름은 상록활엽수가 95%를 차지하는 수림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이 중 제일은 동백나무(22%)이며, 후박나무, 나도밤나무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상라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예리항과 열두굽이길이 환상적이다. 흑산도 일주도로길은 총 25.4km에 이르는 데 읍동마을에서 상라산으로 올라가는 이 길은 일주도로의 백미이다.
이생진 시인은 이곳에서도 잠깐 사이에 흑산도아가씨노래비와 주변 전경을 멋지게 그래낸다.
상라산 고갯마루를 넘어서면 장도 방향으로 지도바위가 내려다 보인다.바위 중간에 난 구멍이 마치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80-100m 지나다 보면 한반도 지도의 모습이 다름 모양으로 보인다. 광활하게 펼쳐진 모습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만주벌판 일대를 장악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일주도로길도 아름답다. '하늘길'이라고 불리워지는 이 구간은 절벽에 다리를 놓듯 공중에 떠 있는 길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도로 벽에는 다양한 모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 경관을 더한다.
일주도로 우측 바다 건너 장도(長島)가 보인다. 장도는 특히 습지로 유명하다. 장도는 좌측 대장도, 우측 소장도로 구분된다. 대장도에 위치한 장도습지는 도서지역에서 발견된 최초의 산지습지이다. 이곳 습지면적은 약 3만평으로 2003년 7월에 처음 발견됐고 2004년 8월에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2005년 3월, 국내에서는 대암산 용늪, 우포늪에 이어 세번째로 국제습지협약인 람사르협약습지로 등록됐다. 대장도 가는 방법은 예리항에서 요일에 따라 하루 한번 또는 두번씩 배가 떠난다.
일주도로 좌측으로 흑산도 최고봉인 문암산(400m) 정상이 보인다.
문암약수터에서 차로 10여분 가면 심리마을이다. 심리마을에는 수백년된 후박나무가 유명하다.
마을 앞에 어항 모양으로 아늑하게 들어온 심리항 역시 아름답다.
심리마을에서 다시 일주도로 굽이길을 오르면 고갯마루에서 '일주도로준공기념비'를 만난다. 1984년에 착공된 공사는 2010년에야 완공됐다. 총사업비 544억 원으로25.4km를 완공하는데 27년이나 걸린 셈이다.
준공기념비로 올라오는 길 역시 장관이다. 지그자그의 굽이길 아래로 심리항이 아늑하게 바닷길을 열고 있다.
다음은 흑산면 사리에 위치한 사촌서당(沙村書堂). 다산 정약용 선생의 형인 손암 정약전(1758-1816)의 유배지이다. 정약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로, 신유사옥(辛酉邪獄) 당시 흑산도로 유배(1801-1816)되어 15년간 우이도와 흑산도에 머물면서 물고기, 해산물 등 총 227종을 채집,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또한 우이도의 어상(魚商) 문순득이 오끼나와와 필리핀, 중국을 거쳐 극적으로 생환해 돌아온 표류견문록을 듣고 '표해록(漂海錄)'을 남겼으며, 흑산도 사리마을에 사촌서당을 지어 학문을 가르치는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다 순조 16년(1816) 우이도에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8년에 복원된 사촌서당 옆에는 1950년대에 건립된 천주교 흑산성당의 사리공소가 있다. 일제시기에는 사촌서당 자리에 단층 초가건물로 된 동광학원이 있어 사리 인근마을의 아동들이 다녔는데 이것이 현재의 흑산초등학교 사리분교의 전신이라 한다.
사촌서당에서 조금 내려오면 '유배문화공원'이 보인다. 흑산도가 큰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고립성 때문에 고려시대 이후부터 중죄를 지은 죄인에게 내리는 유배지로 활용됐을 뿐 아니라 특히 흑산도 유배가 고관대작 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죄를 지었을 때 오는 곳이기도 했다.
백제 3왕자를 비롯한 고려 의종 2년에 정수개가 문헌상 최초 흑산도 유배자였으며 조선조까지 130여 명이 이곳으로 유배됏다고 한다. 흑산 유배는 왕의 특별하교에 의해서 선택됐됐는데 그 빈도수가 제주, 거제, 진도 다음가는 네번째로 빈도수가 높은 유배지이고 유배인들의 생활은 학문적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물론 토호처럼 횡포를 부리는 등 민초들의 생활고를 가중시키는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흑산도 유배자 중 정약전의 자산어보, 송정사의 집필과 사촌서당, 최익현의 진리 일신당에서의 학동들 가르침 등은 섬문화의 튼실한 뿌리로서 유배문화가 섬주민에게 끼친 영향 또한 컸다.
사리마을 앞 선착장에는 칠형제바위가 있다. 흑산도의 정남쪽에 위치한 사리마을은 동남풍이 불어도 어선들이 정박할 수 있는데, 이는 사리포구 앞에 7개의 작은 섬들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사리에 홀어머니가 아들 7형제와 살고 있었는데, 어느 해 큰 태풍이 불어와 몇날며칠을 어머니가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지못하게 됐다. 이에 7형제들이 바다에 들어가 두 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 일곱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 섬을 칠형제바위라고 불리우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칠형제바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넘으면 흑산면 예리 521번지에 최익현유적지가 있다. 면암 최익현(1833-1906)은 조선 고종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일본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이로 인해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연암 선생은 진리에 일신당(日新堂)이란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였고 천촌마을 지장암(指掌岩)에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라는 글씨를 손수 새겨 독립된 대한민국임을 강조하였다. 1924년 9월 그의 문하생 오준선, 임동선 등이 지장암 아래에 '면암 최선생 적려유허비'를 세우고 선생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의 뜻을 기리고 있다.
최익현 유적지에서 다시 고개를 오르다 보면 바다 위에 제법 큰 구멍바위섬도 보인다. 섬 봉우리 위에 소나무들이 특이하다. 가이드인 김태식 씨는 섬 이름이 '구문여바위'라고 설명해준다. 여행객들은 유머스럽게 '자궁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우측 바다 쪽으로 대봉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가이드 김태식 씨의 말에 의하면 흑산도에도 50인승 이하의 소형비행장 개발이 추진 중인데 대봉산(126m)이 그 후보지라고 한다.
예리마을로 돌아와 우측 방파제 입구에 있는 '흑산도아가씨' 조각상을 둘러본다. 이 노래는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으로, 이미자에 의해 대중가요로 불리면서 대중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흑산도 구경을 하다보니 어느새 일몰. 내영산도와 외영산도 너머로 해가 진다.
다음날 아침. 일출광경을 보기 위해 예리 마을 뒤 언덕을 넘어가 본다. 정면으로 대봉산이 마주보이는 위치다. 해안가에 운무가 가득하다. 대봉산 능선에 걸리는 순간, 빛이 사방으로 갈라진다. 아름다운 광경이다.
일출을 본 후 예리마을 전망대에도 올라가 본다.
전망대에 서면 예리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항구의 아침. 바다도 배도 쥐죽은 듯 고요하다.
아침식사 후 흑산도를 떠나기 위해 여객선터미널로 나왔다. 이생진 시인이 해안가에 먼저 나와 묵묵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시인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갑자기 <전화 걸고 싶네> 라는 그의 시가 생각난다. 나도 엉뚱하다. (글,사진/임윤식)
이런데 오면
그에게 전화 걸고 싶네
그게 누군데
막상 찾아보니
내 수첩엔 없네
이게 현실이야
나의 현실은 무인도
어머니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네
이생진 시 <전화 걸고 싶네>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