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최후의 보루였던 부산과 국제시장
1950년8월 부산을 교두보로한 낙동강전투와 멕아더 장군 휘하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1950년9월에 전개되여 수도 서울을 탈환
9월28일 수복이 이뤄지고 부산에 피난갔던 서울시민들이
수도서울로 환도를 하고 국군은 계속 북진하여 압록강에 닿았는데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의 시기에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이른바
1951년1월4일 1,4후퇴를 하면서 대대적인 피난행열이 이어지고 공업
도시인 흥남부두에는 미국 함선에 수만명의 피난민이 승선을 하여
부산항으로 수송을 하니 부산은 또 다시 피난민으로 북적이고 먹고
살아야만 하기에 해방 이후엔 자유시장이라고 했다던 국제시장으로
몰려들어 삶의 경쟁이 치열했던 부산과 국제시장은 오늘의 대한
민국을 있게한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정치적 민심이
말하는 경상도의 부산이 아니고 대한민국의 부산이고 영남의 항도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항도이고 더 나아가서는 통일한국의 제1항도
부산입니다...
▲ 철수하는 LST미국 군함을 타려고 몰려든 피닌민들
▲ 철수(후퇴)하는 미국 군함을 타기위에 흥남 부두에 몰린 피난민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 어선과 군함 후퇴하는 다국적군과 피난민의 북새통
▲ UN군과 피난민14000명을 태우고 흥남부두와 군수물자를 폭파했다,
▼ 흥남역을 출발한 마지막 열차기 부산을 향해 기적 소리를 울리며
▲북한을 출발한 피난 열차의 종착역은 부산역이였다.
▲화차안 좌석이 없자 화차위에도 피난민이 기득
▲ 화차 위에타고 졸다가 터널에서 많은 목숨도 잃어가며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들
▲ 한강 얼음위를 건너는 1.4후퇴 서울 시민들
▼625한국전쟁 당시 국제시장
1952년 부산 국제시장 풍경
눈물겨운 애환과 추억어린 부산국제시장
1945년 광복이 되자 많은 전시 물자들이 부산 지역으로 유입되었고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국제시장은
도떼기시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시장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 없는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물건을 다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 혹은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1948년 판자 건물 12채를 지어 상인들이 입주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장사하면서
급성장하였다. 특히 미군의 군용 물자와 부산항으로 밀수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전국으로 공급되는 등 국제적인 상품이
거래된다고 하여 1950년 5월 국제시장으로 개칭되었다.
국제 시장은 전체 6개 공구로 구성된 도·소매 종합 시장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가방, 문구, 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 기기,
칠기, 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점, 양품점이 있는 3공구,
포목점, 주단점, 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 기계 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가 이루어져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있는 재래 상설시장.
광복과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생활근거지로 모여들어 터를 잡고 노점을
차림으로써 시장으로 형성되었다.본래 ‘도떼기시장’에서 출발하여 1948년
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다
.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때부터 국제시장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채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유통기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귀환재일동포와
이북피난민들이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장상인으로
등장하였고, 끝내 상권을 장악할 만큼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활황을 누렸다.
원조물자·구호품·군용품이 절대부족상태의 민간소비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서는 외제품이 판을 쳤다.
서울에서 피난살이로 부산에 내려간 문인·식자들 중에서도 국제시장의
어느 구석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장소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이며
정보와 변화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연이은 두 차례의 대화재는 그것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시의 엄동설한에 영세상인과 주민에게 준 충격 또한 매우 컸었다.
화재가난 뒤 2층 건물 12개 동이 재건되고 상가의 면모가 일신되었으나,
국제시장은 이미 이전의 활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휴전과 더불어 피난민
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기 시작하자, 국제시장
은 그 동안의 갖가지 애환을 간직한 채 부산권의 일반 도·소매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1966년 5월 정부가 시장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로
약속하였고,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1968년 1월에는 목조건물
3동을 제외한 9개 동이 철근콘크리트로 개조되었고, 상가대지 2,177평이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별로 등기되었다.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장관의 인가를 받았고,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가 나왔다.
현황
1995년 현재 대지면적 7,197㎡, 시장연면적 1만 2095㎡, 점포 수
1,489개 등의 규모이고, 1,700명이 종사하고 있다. 주로 거래되는
상품은 의류를 비롯해 가전제품, 직물, 신발, 가방, 일용잡화 등이다.
지방화의 큰 흐름에 따라 부산의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부산이 금융과
유통의 전국적 중추기능을 가지게 된다면, 국제시장은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전국 도·소매업체총람』(대한서울상공회의소, 1995)
『한국유통총람』(한국유통물류정보센터,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영도다리
굳세어라 노래비
▼국제시장
굳세어라 금순아
강사랑 작사
박시춘 작곡
현 인 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에 너와 난데 변함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오면
손을 잡고 웃어 보자 얼싸 안고 춤도 춰 보자
원로 가수 현인(玄仁, 1919년 12월 14일 ~ 2002년 4월 13일)의
본명은 현동주(玄東柱)이다. 부산에서 태어나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47년에 〈신라의 달밤〉을 불러 데뷔한 이후,
〈굳세어라 금순아〉, 〈비 내리는 고모령〉, 〈청포도 사랑〉
등을 부르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번안곡 〈베사메무초〉,
〈꿈 속의 사랑〉 등을 불러 번안곡 열풍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현인의 창법은 해방 전후에 퍼져있던 기존의 가요가 가지고 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성악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떨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시원한 느낌을 주면서도,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또한 번안곡
등은 세계적인 추세와 함께, 이국적인 분위기를 함께 선사한 것이
인기로 이어졌다. 한국 전쟁 전후(前後)에는 〈전선야곡〉 등의
노래나, 피난민의 애환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 등도
시대 분위기를 타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지병인 당뇨병을 앓다가 2002년 4월 13일에 향년 84세로
영면했으며, 장례는 한국연예예술인장으로 치러졌다.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에 있다. 사후에 〈굳세어라 금순아〉의 무대였던
부산 영도대교 남단에, 현인의 앉아있는 모습의 동상과 함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음반을 발표하는 것으로 데뷔한 것은 현인이 처음이었므로
'대한민국 가수 제1호'라는 별명이 붙었다.
2016-01-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