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길(尹趌)
[본관] 파평(坡平)
[문과] 선조(宣祖) 22년(1589)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0위(30/34)
[관직]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생졸년] 1567년(명종 22)~1615년(광해 7) / 향년 48세
[거주지] 무안(務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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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장령 윤공 행장(掌令尹公行狀)
공의 휘는 길(趌), 자는 여직(汝直)이다. 윤씨는 파평(坡平)에서 나왔다. 시조는 고려 태사 신달(莘達)이며 그 뒤 대대로 알려진 사람이 있었다. 이조 낭관 처형(處亨)이 능성으로 유배되면서 자손들이 그대로 호남 사람이 되었다.
고조 묵(默)은 직장을 지냈고, 증조 은경(殷卿)과 조부 척(滌)은 모두 참봉을 지냈으며, 부친 시형(時衡)은 주부를 지냈다.
모친은 광주 김씨(光州金氏)로 진사 형필(亨珌)의 딸이다. 공은 가정(嘉靖) 갑자년(甲子年, 1564, 명종 19) 7월 1일에 태어났다.
겨우 예닐곱 살에 이미 어버이 섬기는 방도를 알고서 한 가지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자기가 먹는 것을 잊고 바쳤다.
총명하기가 남달라 눈으로 보면 암송하였으며 사흘 만에 《통감절요(通鑑節要)》 한 질을 모두 마쳤다.
한번은 손에 책을 들고 가다가 잘못하여 깊은 숲으로 들어갔는데 범이 앞에 있는데도 태연히 읽기에 탐닉하였으니 책을 좋아하기가 이와 같았다. 기축년(己丑年, 1589, 선조 22) 증광시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분관되고, 어버이를 편히 뵙기 위해 삼례 찰방(參禮察訪)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묶어두고 지체하며 달아날 계책을 세웠다. 공은 이광을 만나서 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하기를,
“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공은 한 도의 원수가 되어 적 때문에 임금을 버리려는 것입니까?”
하니, 이광이 두려운 낯빛으로 한참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군량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제가 단기(單騎)로 달려가 즉시 운반해 오겠습니다.”
하니, 이광이 부득이 진군하였다가 얼마 후 패배하여 돌아왔다.
체찰사 완평(完平) 이원익(李元翼) 공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와 막부에 등용하도록 아뢰고, 또 공의 재주와 학문은 홍문관에 들어가기에 마땅하다고 말하였다. 마침 급보가 있어 문서로 아뢰어야 했기에 공을 불러 쓰게 하였는데, 말이 복잡하였으나 한번 듣고는 곧 이해하고 순식간에 열 장을 다 썼으나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완평이 손을 잡고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기이한 인재다.”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594, 선조 27), 무주 현감(茂朱縣監)이 되어 원수 권율(權慄)을 따라 행주(幸州)로 나아가 싸워 크게 이겼다.
정유년(丁酉年, 1597, 선조 30), 순찰사 황신(黃愼) 공이 또 격문으로 공을 불러 군무에 참여하게 하였다.
공의 집은 무안(務安)에 있었는데 부모가 모두 적에게 죽었기에 공은 속히 돌아가 장사 지내고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밤낮으로 슬피 통곡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임인년(壬寅年, 1602, 선조 35), 병조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 공주 통판(公州通判)이 되었는데, 공주는 병화를 거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사(公私)가 모두 빈곤하였다.
공이 도착하여 다독이기를 먼저 하니, 유망한 백성이 돌아오고 황야가 개간되었다. 또 대동법을 처음 시행하여 세금의 10분의 7을 줄이니, 백성이 크게 소생하였다. 일이 알려져 포상을 받았다. 중간에 강원 도사(江原都事)에 임명되고, 조정으로 들어가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조정에서 강진(康津)이 몹시 피폐하다는 의견이 있어 특별히 공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적신(賊臣) 박승종(朴承宗)이 전라도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사사로운 일을 공에게 요구하였다. 공은 강직하여 구차히 따르지 않았는데 박승종이 노할 줄 알고 당일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가자 백성이 길을 막고 유임을 원하였다.
박승종은 되레 태도를 굽히고 사죄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큰 원한을 품었다. 이후 경성 판관(鏡城判官)을 거쳐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옮겼다. 어떤 이웃 고을 사람이 대각에 있으면서 옛 유감을 품고 탄핵하였으나 남쪽 땅의 선비들이 번갈아 상소하여 신원하였다. 광해군이 군사를 감독할 때 이미 공의 절개를 들었기에 말한 자를 반좌율(反坐律)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박엽(朴燁)이 북병사가 되어 학대를 자행하자 사람들이 범처럼 두려워하였는데, 공은 평사로서 그의 참람한 태도를 면전에서 논척하고 칼을 뽑아 앉은 탑상의 다리를 쳐서 부러뜨리니 박엽이 조금 위축되었다. 북방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일을 말한다.
공은 평소 강직하여 세상 사람들과 뜻이 맞는 경우가 적어 고을 수령으로 부침하느라 하루도 조정에서 편안히 있은 적이 없었다. 중간에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사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을 보고 답답하여 즐겁지 않은 마음에 홍주(洪州)의 시골집으로 물러나 살았다. 또 파산(坡山)으로 이사하여 몽파(夢坡)라 자호하고 날마다 시와 술을 즐겼다.
이보다 앞서 익산(益山) 사람 소명국(蘇鳴國)이 음험하고 행실이 나빠 향리에서 배척을 받고 이이첨(李爾瞻)과 박승종(朴承宗)의 집으로 달아나 숨어 권력에 의지하여 위세를 부렸기에 많은 남쪽 선비들이 음해를 입었다. 공이 재차 장령에 임명되자 친구들이 공을 두고 탄핵하기를 잘 한다며 출사를 권하였다.
공도 개탄하며 사류를 위해 폐해를 제거하고자 마침내 소명에 응하여 나아간 날 즉시 아전을 보내 이이첨의 집에서 소명국을 체포하고 열 가지 큰 악행을 따지고 죽이려 하니, 이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전율하였다. 마침 공이 휴가를 받아 남쪽으로 내려가자 두 흉인이 소명국을 사주하여 감옥에서 상변(上變)하여, 평릉군(平陵君) 신경희(申景禧)가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있는데 윤 아무개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며 마침내 큰 옥사를 일으켰다.
박승종은 판의금부사로서 생각을 다해 죄를 지어내니 이름난 선비들이 대부분 연루되었다. 능창 공자(綾昌公子 이전(李佺))는 유배되어 죽고, 공은 감옥에서 죽었으니 을묘년(乙卯年, 1615, 광해군 7) 9월 2일이었다. 새문동은 장릉(章陵 원종)의 옛집이며 공의 처가는 인헌왕후(仁獻王后 원종 비)와 가까운 친척이었기에, 흉인들은 호시탐탐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었으나 공이 혀를 깨물고 어지러운 말을 하지 않았기에 마침내 그만두었다.
아, 이는 하늘의 뜻이다. 논자들은 공이 한 번 죽어 성조(聖祖 인조)를 위해 화를 막았으니, 종묘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한다. 계해년(癸亥年, 1623, 인조 1) 반정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능창 공자를 신원하였다. 공도 복관되었으며 즉시 증직하고 또 자손을 녹용하라고 명하였으나 시행되지 않고 중지되었다.
숙종 신유년(辛酉年, 1681, 숙종 7), 손자 혜(寭)가 상소하여 스스로 아뢰고, 정승 민정중(閔鼎重) 공이 또 말하여 비로소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공은 두 번 혼인하였으니,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동지 인지(麟趾)의 딸이고,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절도사 할(硈)의 딸이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지성(之聖), 지상(之商), 지중(之重), 지은(之殷)이며 사위는 참봉 신희영(辛喜永), 이급(李伋), 김세주(金世柱)이다. 지성은 유씨 소생으로 재(宰), 채(寀), 보(寶), 혜(寭)를 낳았다. 지상은 빈(賓), 인(寅), 굉(宏), 식(寔), 헌(憲)을 낳았다. 지중은 관(寬)을 낳았고, 지은은 심(審), 실(實), 정(定)을 낳았다.
공은 사람됨이 뛰어나고 강개하여 큰 절개가 있었다. 당시의 이름난 현인 포저(浦渚) 조익(趙翼) 공, 팔송(八松) 윤황(尹煌) 공과 막역지교(莫逆之交)를 맺었다. 글짓기에 뛰어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공이 한번은 공의 시를 읽다가,
도성 떠난 지 겨우 사흘인데 / 去國只三日
임금 그리워 십 년 같구나 / 懷君猶十年
라는 구절에 이르자,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탄하였다. 또 의기를 숭상하여 재물을 흩어 곤궁한 이들을 도와주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하였으며, 흉년이면 길에서 구걸하는 자들이 제 집으로 가듯 공의 집으로 왔는데 살린 사람이 몹시 많았다.
도적들은 몹시 의롭게 여겨 서로 주의를 주며 감히 공의 집을 침범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은 본현 양동(陽洞)에 장사 지냈다. 증손 갑민(甲民)이 묘갈을 세운 뒤 또 내게 행장을 청하기에 삼가 가승(家乘)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이상과 같이 서술하여 후세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린다. <끝>
[脚註]
[주01] 장령 윤공 행장 :
이 글은 윤길(尹趌)의 행장이다. 윤길의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몽파(夢坡)이다. 1564년(명종19) 7월 1일에 태어나 1615년(광해
군 7) 9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새문동(塞門洞) :
인왕산 아래로 원종(元宗)의 사가(私家)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이 술사 김일룡(金馹龍)에게 이 말을 듣고 인경궁(仁慶宮)을 지어
왕기를 억눌렀다고 한다. 《光海君日記 9年 6月 11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