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승정원 좌승지 임공 묘표
(贈承政院左承旨林公墓表)
임진년과 계사년의 왜란(龍蛇之燹)으로 인해 종묘사직이 거의 폐허가 되었다가 마침내 위태로운 나라를 구한 것은 대개 여러 공들이 전란에 목숨을 바치는 힘을 발휘했기 때문인데 그중에서도 충암 임공이 그 첫째였다.
공(公)의 휘(諱)는 규(𡋣)이고, 자(字)는 계장(季長)이고 나주(羅州) 사람이다.
승지(承旨) 붕(鵬)이 개국 이래의 이름난 신하가 되었고 본관이 나주로 같은 조상이 되어 병마절도사 진(晉)과 진사 선(愃)이 그 뒤 2세와 3세가 되었다.
공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개와 기개(氣槪)가 있었다. 남은 힘을 모아 병서(兵書)를 읽고 활 쏘고 말 타는 연습을 했다.
그러다 임진년(壬辰年), 남원부사 임현(任鉉)의 막하에서 남원성(南原城)을 사수하여 적이 감히 근접하지 못하게 하여 호남(湖南) 우측 땅은 이에 힘입어 편안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정유년(丁酉年)에 다시 미친개처럼 날뛰며 왜적들이 쳐들어오자 공에게 남원읍성 남문(南門)의 쇠사슬과 자물쇠를 맡겨 걸어 잠그듯 지키면서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적이 적지 않았으나 마침내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수많은 적들 앞에서 힘이 다하여 일곱 의사(義士)들과 같은 날 절개를 지켜 죽었으니 그날이 7월 25일이었다(음력 8월 15일). 신미년(1571년)에 태어났으니 나이가 이십칠 세였다.
《시신을 찾지 못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르기 위해》공의 남아 있던 옷과 신발을 묻은 자리 사석리 우측 방수기(防水基)에 수구(水口)를 막아주는 터라고 생각했는데, 후손 28세손 도유사 승규의 말에 따르면 방 아랫목 자리라고 한다.
그래서 공이 묻혀 있는 남원시 대강면(帶江面) 사석리(沙石里) 도선산에는 공의 무덤이 맨 아랫자리에 있고 그 위로 후손들이 뒤를 이어 위로 올라가는 순서를 취하였다.] 임좌 방향으로 모시고 제를 올리는 곳으로 대신 삼았다. 나라에서는 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신하로 책록하여 좌승지에 봉하고 정려를 내려 기렸다.
배위(配位)는 남원양씨(南原梁氏) 달헌(達憲) 의 딸이다. 자식을 기다리며 꿋꿋이 집안을 잘 꾸려 나가다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自決)하여 남편 오른쪽에 묻혔다. 두 아들 중 맏아들 대유(大儒)는 역신 이괄의 난 때 누차 뛰어난 공을 세워 참판 벼슬을 내렸다.
둘째 아들은 동유(東儒) 이다. 대유는 아들 셋을두었는데 선( 㵛 ), 혼(渾), 복(澓)이고. 동유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양(漾)이다.
또 아래로 손자 원(芫)은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행한 무신년(戊申年,1728)의 의로운 행적이 있어 삼대에 걸쳐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내리는 집안이 되었다.
찬란히 빛나는 길모퉁이에서 그 조상들의 풍도의 발자취는 희미해지고 때는 지나갔어도 이분들의 의열(義烈)의 혼(魂)은 남아 있구나. 몸 바쳐 나라 위해 죽음으로써 종묘사직(宗廟社稷)을 부지하게 하여 백성으로서의 도리를 세웠지만 지금에야 이것마저도 없어졌구나.
공의 고향에 찾아와 머무르며 바라보니 무덤과 정문이 서로 바라보고 있구나. 여러 차례 지나면서 예를 취하고 절하며, 몸이야 하늘에 이르렀어도 충성스럽고 굳센 혼백은 죽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비누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에서 우리나라를 돕고 있네.
이제 묘비에 대한 부탁이 있어 사양하지 않고 허락하노라. 공의 묘 앞에 옛 비석이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고쳐서 새겨 이를 새롭게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후손 명수의 어진 노고가 있었다. 병일(炳鎰), 병삼(炳參)등 종친의 뜻을 모아 불민하지만 글을 이루었다.
숭정후 3주 임자년(1912년)
송사 기우만 찬.
출처 : 『송사집/기우만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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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承政院左承旨林公墓表
龍蛇之燹。宗社幾墟。卒致匡復。蓋諸公死綏之力。而忠庵林公其一也。公諱𡋣字季長。羅州人。承旨鵬爲國朝名臣。貫羅同祖之。兵使晉。進士愃。後二世三世。而公慷慨有氣節。餘力讀兵書習弓馬。壬辰。與府使任鉉守城賊不敢近。湖右賴安。丁酉再猘。委公南門鎻鑰。多少斬獲。竟以衆寡力盡。七義士同日立慬。卽七月二十五日。距生辛未爲二十七。以遺衣履藏所居沙村右防水基壬原。以替祈廬。祿宣武功臣。贈承旨命旌。配南原梁氏達憲女。竢子壯克家。下從祔右。二男長大儒逆适之變。屢立奇勳。贈參判。次東儒。大儒三男㵛渾澓。東儒一男漾。曾孫芫有戊申義蹟。三世表宅。煌煌道周。足微其祖風。曩時猶有此等義烈。損身殉國。扶宗社而植民彝。今也或是之無矣。來寓公鄕。見阡旌相望。屢過而軾。黙禱忠魂毅魄終天不死。幸有以冥佑大東。今於阡表之託。不辭而諾。墓舊有石。年久泐頑浮。改竪以新之。始終賢勞。後孫明洙。致宗議而微爲文。炳鎰炳參。崇禎後三周壬子。奇宇萬撰。--林公 墓碑石 <끝>
松沙先生文集卷之四十一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