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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3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은혜 같지 않은 은혜를 만났을 때
본문 : 빌립보서 1장 29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29절, 개역개정>
어느덧 2022년도 1분기가 우리 곁을 흘러지나 갔습니다. 막상 겪을 때는 모르지만 돌아보니 주님의 손길이 안 미친 곳이 하나 없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새롭게 열리게 된 4월도, 남은 2022년의 모든 여정도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오늘 4월의 첫 번째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본문으로 하여 ‘은혜 같지 않은 은혜를 만났을 때’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을 주실 지 기대하면서 본문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29절, 개역개정>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은혜롭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은혜롭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참 좋은 말이기도 합니다. 예배를 드린 후 예배당 밖으로 나오는 분들과 인사를 나눌 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에 하나도 ‘오늘 예배 참 은혜로웠습니다.’입니다. 물론 매번 은혜롭지 않을 수도 있기에 그냥 으레 인사의 한 방법으로 사용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롭다’라는 말은 참 듣기가 좋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삶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이 ‘은혜롭다’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직접 성도님들과 함께 이 ‘은혜롭다’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이 단어를 ‘내 마음에 느껴지는 어떤 감정’에 대해서 표현할 때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위 ‘내가 느끼기에 좋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엇인가 전율을 느꼈다.’, ‘말씀을 깨달은 것 같다.’ 등등의 각자가 느낀 감정들이 '은혜롭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 '은혜롭다'는 것은 내 마음에 느껴지는 어떤 감정보다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은혜롭다’라는 말보다 ‘은혜입니다’라는 말이 더 성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도무지 은혜를 입을만한 조건이 없는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의 입술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지는 말이 바로 ‘은혜입니다’ 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새번역>
분명히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은혜’,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의 ‘은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은혜라고 부르지 않고 우리 입장에서는 ‘감사’로 표현되어지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내가 감사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내가 느끼기에 좋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아도, 무엇인가 전율이 느껴지지 않고,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하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도무지 은혜 같아 보이지 않는 은혜도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런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로 처녀인 마리아가 잉태하게 된 일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리아야, 그대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보아라,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누가복음 1장 30~31절, 새번역>
만약 여러분의 딸이, 여러분의 약혼녀가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었어도 ‘은혜’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처녀가 아들을 낳을 수 있냐고 반문하지 않겠습니까? 나와 연관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어쩌면 저는 크게 화가 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무지 은혜 같지 않은 은혜입니다. 아니 오히려 잘못된 일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저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리아와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우린 그 누구도 ‘요셉’처럼 가만히 끊고자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레위기에 나오는 어떤 말씀이든 꺼내서 심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은혜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고, 때론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은혜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또 이런 은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무지 은혜 같지 않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징계와 채찍질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 <히브리서 12장 6절, 새번역>
사랑하시는 사람을 징계하시고, 아들로 받아들이신 사람을 채찍질 하신다니 어떻게 이 성경 구절이 은혜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지 않는 줄도 모르겠습니다. 기왕이면 축복이 좋지 이런 구절을 은혜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혹시 어쩌면 부모가 되었을 때나 이해할 수 있을만한 구절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징계와 채찍질이 사랑과 은혜의 행동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위로와 안아줌과 따뜻함이 아니던가요? 어떻게 징계와 채찍질을 통해 사랑과 용납이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저런 생각들과 다르게 이 징계와 채찍질을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릇 징계는 어떤 것이든지 그 당시에는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으로 여겨지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에게 정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게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 새번역>
이 구절을 통하여 징계와 채찍질이라는 은혜가 우리를 ‘영적 망나니’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가득한 ‘은혜의 손길’ 이라는 것을 속히 깨닫는 날이 오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쫓으시고, 쏟아 버리고, 둘러엎으시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입가경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은혜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 그런 은혜가 있습니다.
그는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다. <요한복음 2장 14~15절, 새번역>
우리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결과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예수님이 왜 이 행동을 하고 계신지, 왜 이렇게 하셨어야 하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고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당시에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 그리고 제자들이 먼저 이미 해야만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당장에라도 내쫓고, 쏟아 버리고, 둘러엎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성전 뜰에서의 거래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성전이 성전 되는’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행동, ‘의분’을 보면서 놀랄 것이 아니라, 이런 행동을 해 주심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결’을 위하여 우리를 영적 수술대에 누이는 것을 주저치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온 몸에 병이 퍼지기 전에, 손 쓸 수 없을 때가 오기 전에 이렇게 해주신 것은 실로 ‘은혜’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태복음 21장 13절, 새번역>
그렇게 내쫓으시고, 쏟아 버리시고, 둘러엎으시고 나니 진짜 성전이 성전이 되는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21장 14절, 새번역>
이 은혜 같지 않은 은혜가 진짜 은혜입니다. 실로 우리의 생각과는 너무도 다른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멘입니까? 노멘입니까?
또한 때론 은혜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인 ‘시험’으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시험은 'Temptation(넘어뜨리기 위한 유혹)'이 아니라 'Test(올바르게 서기 위한 검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어자체에서 거부감이 드는 단어가 ‘시험’입니다. 어떻게 이 시험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는지, 아무리 올바르게 서기 위한 검증으로 서의 시험일지라도 시험은 시험일뿐이라고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시험도 우리를 위해 허락하시는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뻐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야고보서 1장 2절, 새번역>
짜증을 내는 것이 당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왜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이 시험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답이 바로 왜 시험이 은혜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야말로 진짜 복이라는 것을 아는 은혜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참되다’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 새번역>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거저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독생자 아들'을 희생시키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얻은 생명입니다. 아무 감흥 없이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사랑이었는지를 깨닫게 될 때, 진짜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습니다. <로마서 3장 24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부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혼동하여 사용하거나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은혜의 범주에 대하여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내 방식대로의 은혜,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은혜만을 은혜라고 생각하면서 진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해 혼동하며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징계와 채찍질의 순간도 있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때론 내 맘 속에 정결을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복잡 다양한 것들로 산적해 있는 내 맘 속에 오셔서 너무너무 아프더라도 내쫓으시고, 쏟아 버리시고, 둘러엎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은혜를 은혜로 알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 시험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런 은혜 같아 보이지 않는 모든 순간들을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내가 생각하는 은혜가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은혜'에 대해서 잘 기억하시길 소망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하는 은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은혜가 은혜임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나를 보면 자꾸 은혜가 아니라 고난이고, 어려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고스란히 은혜로 임하는 경험을 하게 되실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은혜 같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은 사람은 나의 약점을 발견하게 되고, 약점을 자랑하게 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약점이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울의 고백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나는 더욱더 기쁜 마음으로 내 약점들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9절, 새번역>
그리고 결론적으로 이 은혜를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평안해지고, 내 삶이 든든히 서 가는 것을 뛰어 넘어, 나 자신만을 위한 우리들을 위한 은혜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주신 '은혜'라는 것도 깨닫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빌립보서 1장 29절, 개역개정>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은 마땅히 고난처럼 보이는 주님의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이라고 쓰고, ‘은혜’라고 읽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것을, 은혜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은, 반드시 삶으로 그 은혜를 드러내며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 같지 않은 은혜도 은혜임을 알게 된 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서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제가 생각하는 은혜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시험도, 징계도, 채찍질도, 고난과 어려움도, 제 안에 일으키시는 모든 전쟁들도 모두가 '은혜'라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원하고 생각하고 바라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 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 가리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지 맙시다. 오해 없이 걸어갈 믿음의 여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시길 다시 한 번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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