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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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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잔재 자료실 스크랩 만주의 친일파 <이제는 말할수 있다>
외솔 추천 0 조회 68 14.11.22 12: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는 적대세력에 속했다. 출신성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

연안(공산당)으로 간 동창들이 있었는데 당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역사의 패배자다." 양춘 만주군관학교 3기 졸업

 

한국 현대사는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울 기회를 놓쳐버렸다.

친일파의 과오를 정리하고자 했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1948년 10월∼49년9월)가 와해됨으로써 일제 때 득세했던 이들은 더더욱

권력의 중심부에서 위세를 떨쳤다. 반성을 생략한 그들의 출세는 진실의

은폐·왜곡을 낳았고 오늘날 과거사 논쟁의 원인(遠因)이 되고 있다.

 

 

                             [방송내용 요약]

 

■1932년, 3월 1일 일제 만주국 건설

 

대동아 공영권의 기치 아래 병참 기지화 전략을 세우던 일제는 소련남하의

방지를 위해 만주국을 건설한다.

 

만주국은 병참기지로서의 중요성도 있었지만

당시 만주가 무력대일항전(武力對日抗戰)이 활발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카야나기 토시요 일본 법정대학 교수 "한반도에서는 3.1 운동 이후에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이 점점 격화됐다.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은

만주 경계의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다가 다시

철수하는 식으로 전개됐는데 일본으로서는 조선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을

근절시키기 위해서라도 만주를 장악해야 했다."

 

만주국의 수도였던 지금의 장춘시에는 국무원 등 당시의 건물들이 아직 남아있다.

일본 침략제국은 드넓은 만주 벌판에 공장을 포함한 신식 도시를 건설해 나갔다.

그것은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소련 등 서방 세계와의 전쟁에 대비해

장기적으로 군수물자를 공급해줄 수송기지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근대적 관료조직과 기반시설, 문화시설 등을 두루 갖춘 독립국가로 위장된

만주국(滿洲國), 그러나 만주국의 실질적인 지배권은 일본의 관동군에 있었다.

 

 

■ 1932년 협화회설립

 

만주를 영유함으로서 중국인(만주)을 해방시킨다는 명목. 이때 각 나라의

친일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민중조직이었지만,

실질적으로 특무조직이었다. 그들은 민중을 감시하고 선동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나라에는 유명한 친일파 윤상필, 이범익, 최남선, 이선근등이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 대규모농장건설

 

주거하고 있던 만주인들을 거의 강제다시피해서 쫓아내고 그 곳에 조선인을

대거 이동시켰다. 그리고 농사를 짓게 하는데, 더러 조선인 중에는 "안가 농장

(이선근 주도의 대규모 농장)"식의 집단농장에서 조선인이 일할 수 있게

만든것에 친일파들에게 고마워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조선인을 만주로 대거 이동시킨것은 조선인들이 가지고

있는 벼농사 기술의 탁월함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쌀은 생산자인

모두 관동군의 군량미가 되었다. 생산자인 조선인들은 배급되는 강냉이와

수수들로 연명해야 했다. 결국 만주의 친일파들이 저지른 짓은 민족의 생존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일제와의 야합을 통한 자신들의 부의 축적이었다.

 

이선근은 1939년 그 공적을 인정받아 만주국 협화회의 협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협화회의 핵심인물로 1943년 전국엽합회에서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 돌아와 서울대학 교수로 변신한 이선근은 문교부 장관과

초대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83년 사망할 때까지 군사정권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며 한국 사학계의 거두로 풍미했다.

 

 

■ 다민족 친일 군관학교 설립

 

이주일, 박정희 강문봉, 김윤근, 이한림

- 대표적인 친일 군관학교 출신들로 해방후 한국군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박정희는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일본 육사에 진입한다.

훗날 그는 만주로 돌아와 팔로군에서 군관으로 지낸다.

 

정일권-박정희 정권때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이. 연변 헌병대 사령부 사령으로

조선인에게 악명이 높았었음.

 

 

 

■ 간도특설부대

 

1930년대 만주를 근거지로 무장반일항쟁(武裝反日抗爭)을 펼치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한국 독립군(韓國獨立軍), 중국 구국군(中國救國軍),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한국과 중국의 무장항일단체(武裝抗日團體)들을

토벌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당시 한,중 연합군 형태로 재편된 동북항일연군이 만주에서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조선인들도 적지 않았다.

 

간도특설대야말로 1930년대와 40년대 조선 독립운동 세력을 가장 악랄하게

탄압한 악명높은 조직이라고 할수 있다."

 

천황의 군대를 자임한 간도특설대의 장교 중에는 신현준, 김일환, 임충식,

백선엽 등 군관학교 출신이 많았는데 백선엽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만주 건국 대학

 

-만주 침략후, 정치적 안정을 위해 건립한 국책기관

 

성적만 좋다고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고. 일제에 대한 충성심이 누구보다도

높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3.1 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나 일제에 전향한 최남선(崔南善)은

일본 중추원 참의원을 지내다가 일제의 고위 관료인 박규선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중이었다. 일부 조선인 학생들은 그를

민족지도자로 따랐다고 한다.

 

강 전 총리 "그때 학병제도로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에 강제 징병될때

내가 그분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일본군에 가담해서 전쟁터로 가라.

내가 너희들에게 전쟁터로 가라는 것은 일본 천황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망한 것이 힘이 부족하기 때문인데 가장 중요한 힘은 군사력이다.

군사력이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야. 지금 일본이 군대가

부족해서 조선 민족까지 끌어가는데 우린 이 기회를 활용해야 된다."

 

진정 최남선은 우국충정으로 학병을 권유했던 것일까. 그는 이광수(李光洙)와

함께 학병을 선동했던 변절한 민족의 지성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세운 만주국을

왕도낙토(王度樂土)라고 찬양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하며 조선 민중의

만주 이주를 적극 독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반민족 행위 특별

처벌위원회에 체포된 이후 옥중 진술서에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인정했다.

 

 

■ 대동학원

 

만주 건국대학과 함께 친일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다

 

대동학원 졸업생 중 대표적인 인물은 제12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崔圭夏)다.

한국 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공삭연고에는 대동학원을 졸업한 사실은

명기돼 있으나, 이후 해방까지의 행적은 제외되어 있다

 

 

■ 이승만

 

미국 측이 친일파 청산을 거부를 하는 바람에 실패하엿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그 순간에는 미군정이 심어놨던 친일파들이

군사,정치,경제,경찰,법조계 다 장악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국내에 정치적 기반이 없던 이승만이 만주국 출신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대거 등용했다. 이후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 청산이 시도되었지만

만주의 친일파들에 대한 조사는 정보 미흡과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렇게 해방정국에서 말을 갈아탄 만주국 출신들은 6.25 동란을 계기로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게 된다. 만주국 헌병대 소좌로 해방을 맞은 정일권은

육군참모총장에, 간도특설대 출신의 백선엽 역시 육군참모총장에 최연소

사성장군(四星將軍), 만주군 군의관을 지냈던 원용덕(元容德)은 최초의 헌병대

사령관, 관동군 벌교대 출신으로 반일항쟁 세력들을 색출하는데 진력했던

김창룡(金昌龍)은 육군 특무대장에 오른다. 이들이 승승장구할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의 친위대 역할을 충실히 했기 때문이었다.

 

 

■ 5.16 구데타

 

 

만주군 출신의 육군소장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당시 쿠데타 주동세력 가운데도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적지 않았다.

 

 

■ 한일협정 조인(1965.6.22)

 

 

 

5.16 쿠데타 성공 직후 박정희는 서둘러 일본을 방문했다.

한일협약과 관련,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수상과의 은밀한 협의를 위해서였다.

그리고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 간의

3억 달러 무상 원조와 3억 달러 차관 제공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합의가 이루어진다.

 

이른바 기므오히라 회담이라는 밀약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박정희 정권은 1965년 6월 한일기본협약을 성사시켰다.

 

일제 침략 통치 36년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단 3억 달러와 맞바꾼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모두 일제 하 만주군 출신이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청구권이라는 말도 굉장히 우스운 얘기다. 사실은

전후 배상으로 제기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엉뚱하게 처리되고 일본 입장에서도

과거사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원래는 같은 가족이었는데 자신의 부하 직원이

따로 살림을 차려서 회사를 창업하게 되니까 창업 축하금으로 주는 셈이죠..."

 

일본내 대표적인 만주군 유력 인사 중 한사람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로부터 한국 정부의 외교 훈장까지 받는다. 오늘날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는 한일협정은 바로 이들 만주 인맥들의 합작품이었다.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내세웠던 박정희는 이후에도 기시 노부스케에게

국정자문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시 노부스케의 자서전에 의하면

쿠데타 직후 일본을 방문했던 박정희가 "나는 메이지 유신 지사들을 존경하며

한국을 일본의 국익에 공헌하는 국가로 새롭게 발전시키려고 하니

신한국 건설에 좋은 의견을 들려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집권 이후 국가 주도의 기간산업과 중화학 공업 육성 등 경제력 발전에 박차를

가했던 박정희, 이런 개발 방식은 바로 기시를 중심으로 한 만주국 개발과

전후 일본재건에 사용했던 방식이었다.

 

기요카와 회장 "그래서 등장한 것이 통제경제국가다. 즉 정치인이나 재계인사가

아닌 관료가 전권을 쥐고 있었는데 바로 관료형 통제경제국가의 시초가 됐다.

그것이 정치,경제,군사를 독접했는데 바로 만주국의 본질이다.

그런 것이 박정희 정권에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유신독재정권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주민동원체제 역시 일제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유산이었다. 만주국 지배에 대한 주민의 불만을 억제하고

항일투쟁 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일제가 했던 방식 그대로 한반도

남쪽에 통제사회를 부활시켰다. 그것은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원죄였다.

 

 

■ 중국의 친일파 숙청

 

중국에서는 3년에 걸쳐 한간(중국의 친일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사업을 벌였다.

그들은 이후 몇십년간 모든 사회활동의 제약을 받았다. 우리와는 대조적으로

만주군관출신이거나, 대동학원등의 일본인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곳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성분이 나쁘다는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발붙이지 못할 정도로

심한 통제와 제약을 받았다.

 

 

 

            [파워엘리트의 산실 ‘만주 군맥]

 

그 뿌리는 만주군 군관을 양성하던 봉천군관학교와 신경군관학교(정식 명칭은

‘만주군 육군군관학교’)다.

 

이 학교 출신 중 우수한 조선인 엘리트들은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다.

 

박정희(신경2기·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를 비롯해 정일권(봉천5기·일본육사

54기·만주군 헌병 대위), 백선엽(봉천9기·간도특설대 중위), 이한림(신경2기·

일본육사 57기·만주군 중위), 김석범(봉천5기·간도특설대 대위), 신현준(봉천5기·

간도특설대 대위) 등이 대표적이다. 원용덕(만주군관학교 교의·중령)과

김창룡(관동군 헌병교습소·헌병오장)도 만주 군맥의 일원이다.

 

해방 후 이들은 모두 귀국해 권력을 향해 ‘돌진’했다.

가장 앞서간 사람은 정일권이다. 그는 일찌감치 육참총장(1950년6월∼51년6월,

54년2월∼56년6월)과 합참의장(56년5월∼57년5월)에 올랐다.

합참의장을 끝으로 예편했지만, 그의 ‘화려한 이력’은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잡으면서부터 더해졌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63년), 국무총리(64년),

국회의장(73년)을 지냈다.

 

원용덕과 김창룡도 일찌감치 1공화국에서 군부를 주도했다.

헌병사령관 원용덕은 1952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돼 이승만 대통령

집권 연장을 위한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해 군의 정치 개입 선례를 남긴 장본인이다.

 

특무대장에 올라 권세를 마구 휘둘러 군 내부의 미움을 산 김창룡은

1956년 1월 암살됐다. 배후는 만주 군맥의 일원인 강문봉(신경5기)

2군사령관으로 밝혀졌다. 강문봉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된 뒤 5·16 이후 정치인(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에는 김동하(신경1기), 김윤근(신경6기), 박창암(간도특설대

출신) 등 만주 군맥이 참여했다. 박정희의 군관학교, 일본 육사 동기인

이한림은 1군사령관 시절 5·16에 반대하다 체포돼 강제 예편되는 등 시련을

겪지만 건설부 장관(69년)에 오르며 재기했다.

 

만주군 출신들은 때론 견제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서로를 도우며 ‘권력 집단’을

형성해갔다. 육사 1중대장이던 박정희가 1948년 11월 남로당 활동 혐의로

체포돼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구명을 위해 만주 군맥이 움직였다.

 

1948년 ‘숙군’(군내 좌익세력 제거) 당시 여순반란사건 토벌사령관이던 원용덕과

1연대 정보주임으로 수사 실무자이던 김창룡, 수사를 주도한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이 박정희 구명에 나섰다.

 

결국 박정희는 형(무기징역)집행정지로 풀려나 문관 생활을 하다 6·25발발 5일 뒤 현역에 복귀했다. 백선엽은 1959년 합참의장을 거쳐 1960년 예편한 뒤 교통부 장관(69년) 한국종합화학 사장(71년)을 지냈으며 현재(87세) 국방부 군사편찬자문위원장을 맡고 있다.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였던 신현준, 김석범은 각각 초대 해병대사령관,

2대 해병대사령관을 지냈다.

 

 

                     [친일 명문가의 탄생]

 

일제 협력자 중에선 대를 이어 일본 정부에 협력한 경우가 더러 눈에 띈다.

이런 집안 중 상당수는 일제 때 내내 영화를 누렸고 해방 후에도

선대의 부를 기반으로 ‘권문세가’가 됐다.

 

친일이 ‘가문의 영광’을 가져온 셈이다.

 

일제 때 경성복심법원(현 서울고법) 판사로 재직한 민복기 전 대법원장은

1910년 한일 병합조약 체결에 ‘공’을 세워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子爵) 작위와

은사금 10만엔(약 10억원)을 받은 친일파 민병석의 아들이다.

 

민 전 대법원장은 해방 후 검찰총장, 대법관, 법무부 장관, 대법원장을 차례로

지내는 희대(稀代)의 관운을 누렸다. 그의 아들들도 법조인, 기업인으로

모두 출세했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은행 오사카지점 지배인으로 근무한

구용서 전 상공부 장관은 친일파 송병준의 외손자다.

그의 부친이자 송병준의 사위인 구연수 역시 일제 때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일본군 대위 출신인 이형근 전 합참의장은 같은 일본군 대령 출신인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의 사위이고, 일본군 대위 경력의 유재흥 전 합참의장

역시 해방 전 일본군 대령이었던 유승렬 장군의 아들이다.

 

 

 

 

 

                     [ 만주국 친일파 이력 ]

 

[이선근]

만주에 안가농장이라는 농장을 짓고 조선인을 고용하여 일본군의 군량미를

조달했던 민족의 배신자

이후 만주괴뢰국 협화회 의원(지금의 국회의원)→서울대교수→문교부장관→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성균관대/영남대총장→대한교육연합회회장(현 교총)을 역임

 

[박정희]

 

[이한림]

만주군관학교→휴전회담 한국군수석대표→건설부장관

 

[김윤군]

만주군관학교→516쿠테타참여→국가재건최고회의 교통체신위원장

 

[이주일]

만주군관학교→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정일권]

만주국 봉천군관학교→육군참모총장→국무총리→자유총연맹회장

 

[백선엽] 최연소 4성장군

만주국 봉천군관학교→간도특설대→육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

중국/프랑스/캐나다 대사

 

[강문봉]

만주군관학교→516쿠테타주도→국회의원→스웨덴/스위스 대사→

태극무공훈장 수여

 

[강영훈]

만주국 건국대학(친일행정관료양성소)→국무총리

 

[최남선]

최고의 친일작위 중추원참의 하사받음→만주국 건국대학교수→

학병지원활동→국사교과서편찬

 

[김창룡] 김구암살, 보도연맹대학살 실무지휘

관동군 헌병대출신→이북에서 친일행위로 사형선고받은후 남쪽으로 탈출→

육군특무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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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01.25 23:07

    첫댓글 을사오적 중 이완용(익산)과 이지용(전주) / 천하간신 조병갑 / 김희선 애비 만주국 순사 앞잡이 / 신기남 애비 헌병 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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