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임진왜란때 명나라 상서복야를 지내다 이여송과 함께 조선에 와 전쟁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사람 중에 杜師忠이란 분이 있었다. 그리하여 두능 두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우리나라에 두능 두씨는 두 갈래가 있는데 고려 7대 목종때 송나라 사람 杜慶寧이 고려에 귀화하였고 두사충은 두번째 귀화하여 두능 두씨 喬林계의 시조가 된다.
1593년 왜군은 평양전투에서 명나라군에게 패하여 후퇴한후 가등청정은 울산 서생포에 진을 치고 있었고 명나라 주력군은 대구 대명동 근처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있었다.1598년 전쟁이 끝나자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하여 흥해 최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대구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매월 초 하룻날에는 관복을 입고 고국 명나라와 두고온 부인을 생각하며 관복을 입고 절을하며 조국과 남편으로서의 의리를 잊지않았다고 합니다. 그 때 쌓은 단을 大明壇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영남대학병원의 최정산부근이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할때 동명을 대명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의 무덤은 느즈미동네(晩村洞) 형제봉에 있고 그를 기리는 사당인 慕明齋가 무덤아래 있고 재실안뜰에 그의 공적을 기리는 큰비석이 서 있는데 그 비문은 이 순신 장군의 7대손인 이 인수가 지었으며
齋室의 네 기둥에는 이 순신 장군이 그에게 보낸 공적을 기리는 詩를 써서 주련으로 걸어 놓았으니 두분들의 전쟁의 와중에 맺은 전우애는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東來同死生, 동쪽 나라로 와서 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어찌 그대의 공을 잊어 버리겠소!
주련에 걸려있는 글의 한 구절입니다.
아마도 충무공은 자기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역만리 동쪽나라에 와서 목숨을 바쳐 싸워준 그의 공로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고마움을 길이길이 잊지않기를 죽기 전에 부탁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곳도 개발제한구역에서 풀리면 묘소와 재실이 남아 있을련지 안타까운 마음이 남는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