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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륙이니라” (개역개정)
“또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다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사람,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 육십 육입니다” (표준새번역)
“그 짐승은 신분이 높건 낮건 부자이건 가난한 사람이건 자유인이건 종이건 모조리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그 표를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사거나 팔지 못하게 했는데 이 표는 짐승의 이름 또는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지혜가 필요합니다. 총명한 사람은 그 짐승의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숫자는 사람의 이름이며 666입니다” (현대인의 성경) |
성경은 666을 아무나 셀 수 있는 수가 아니라 지혜와 총명(지각)이 있는 자가 셀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 ‘세어 보라’는 것은 ‘지혜’와 ‘총명’ 곧 사람의 개인별 지능지수를 동원하여 숫자를 합산하여 666인지 아닌지를 알아 마쳐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지혜’와 ‘총명’은 지능지수(IQ)가 아니라 ‘시기적, 문자적, 기능적, 종말론적’으로 ‘알라’는 영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지수(EQ)도 아닙니다.
1. 계시록에 나온 666 표의 정체
본 논제는 666표에 대한 진실이다. 666표의 진실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계시록 13장에 나온 종말의 현상이 예언대로 세상에 실현될 때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는 666표와 관련된 어떠한 징조나 현상을 가지고 666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마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666표가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소문내고 있기 때문에 종말의 이슈가 되어 666표에 대한 진실 공방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3장을 시작으로 짐승의 수(666)와 관련된 짐승의 표를 아홉 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단락에서는 사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짐승의 표를 중심으로 고찰하려고 합니다.
1)계시록 13장과 짐승의 표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계시록의 가장 큰 특징으로 나타나 있는 상징성을 거부하고 대부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하여 이런 사단(事端)이 일어난 것입니다. 666이라는 숫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들이 666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당위성은 이렇습니다. ‘종말이 실제적이지 어떻게 상징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단순하게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입니다. 마치 지구는 가만히 있는데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시록의 상징성에서 자세하게 다루겠지만, 종말은 문자적이냐 상징적이냐는 것보다는 실상은 시기나 기능이 더 관건이라는 것을 목사님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이나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문자와 상징성에 가장 근간이 되는 원리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짐승의 이름과 그의 수 혹은 짐승의 표(666)는 유일하게 계시록에만 나오는데 13장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20장에서 끝납니다.
계시록 13장은 두 마리 짐승에 관한 환상입니다. 1-10절까지는 첫 번째 짐승이 세상에 출현한 내용이며, 11-18절까지는 두 번째 짐승이 출현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3장은 보편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666 표를 논할 때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본 것이 통례입니다. 반면에 첫 번째 짐승은 666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두 부분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두 번째 짐승의 출현(계 13:11-15)
첫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오는데 둘째 짐승은 땅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첫째 짐승과 다릅니다. 그 외에 외형적인 모습은 특별한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짐승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①첫 번째 짐승의 특징: 첫 번째 특징은 땅에서 어린 양같이 나타납니다. 여기 어린 양 같다는 말은 ‘예수’와 닮아서 똑같다는 것입니다. 둘째 짐승이 왜 어린 양인 그리스도처럼 나타날까? 이것은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둘째 짐승의 출현은 사단의 최대의 술수라 할 수 있는 ‘모방’ 곧 ‘흉내’를 내며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서 짝퉁에 불과한 것으로 모방한 것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단이 어린 양으로 모방한다고 해도 사단은 사단이며, 가짜이며 진짜일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리칩을 666표라고 아무리 우겨도 베리칩은 베리칩이며, 가짜이며 진짜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짐승이 ‘용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용처럼 말하는 것’은 둘째 짐승의 실체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지혜의 말과 술수로 짐승의 표를 받도록 유혹할 것을 말합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사단, 용)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대화와 같습니다. 뱀(사단)은 자기의 지혜를 가지고 하와를 미혹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기세로 예수님의 초림은 물론 재림까지 같은 술책과 궤계를 계속 쓰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처럼 고도의 지혜의 말과 술수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적인 핍박에 인내할 준비를 해야 하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종말의 가르침으로 교회 내부적인 동요가 없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짐승이 어린 양으로 모방하여 나타나서 종말을 잘못 가르치며, 유혹하며 소문내는 거짓 교사들을 상징적으로 본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베리칩을 666표라고 잘못 가르치는 교사(목사)들을 2000년 전에 이미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세 번째 특징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 최고의 사망률을 가지고 있는 암을 고칠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던 사건을 기억합니다(왕상 18장).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갈멜산에서 자기 신에게 기도(요청)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리도록 대결했던 소위 ‘갈멜산 사건’입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오전 내내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불을 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며 미친 듯이 이리저리 뛰며 간청을 해보았지만, 불은커녕 불빛 하나 깜박이는 현상도 없었습니다. 오전뿐만 아니라 저녁때까지 동일한 방법으로 계속했지만 결국 불을 내리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두세 번도 아닌 한 번 불렸지만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했습니다. 결국 1:850 대결에서 엘리야 선지자의 대승(완승)으로 싱겁게 끝난 영적 결투였습니다. 이처럼 둘째 짐승은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의 ‘보좌’를 모방한 ‘권세’를 가지고 만국을 다스릴 것을 암시합니다(계13:2). 짐승은 이 세 가지로 세상에서 판을 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② 둘째 짐승의 임무. 둘째 짐승의 주된 임무는 첫 번째 짐승(용)에게 숭배하도록 모방의 술책과 능력을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무릎을 꿇게 하는 것과 그 증표로 666 짐승의 표를 주는 일입니다(계13:8, 12-15). 지금 종말론자들이 소문내고 있는 베리칩은 짐승이 어린 양으로 모방된 것처럼, 베리칩이 666표로 모방되어 소문의 날개를 달고 떠돌고 있습니다. 용이 자신의 권세를 바다의 짐승에게 준 것처럼(4절),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부여 받아 이런 일을 합니다. 여기 둘째 짐승은 주먹 세계에서 행동대원들을 주도하는 두목 급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처럼 둘째 짐승이 주로 하는 일은 첫째 짐승을 대신하여 그의 모든 권세를 행사하여 용(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하도록 돕는 것이 주 임무입니다.
두 번째 짐승이 출현함으로써 사단의 세력은 하늘의 용, 바다의 짐승, 땅의 짐승 세 체제가 됩니다. 용과 두 짐승은 세상에서 통치는 왕의 권세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할 뿐만 아니라 양의 탈을 쓰고 거짓 교리와 이단 사설로 사람들로 하여금 인본주의에 몰두하도록 하여 교회를 타락시키는 존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계 16:13;19:20; 20:10).
그래서 사단은 마지막까지 완벽할 정도로 모방하고 또 모방하여 어린양뿐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까지 말할 것입니다(살후 2:24; 계 13:2). 모방품은 진품보다 더 진품처럼 보여 사람들이 쉽게 속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종말론자들이 종말의 탈을 쓰고 정직한 의료용 베리칩을 가지고 666표라고 종말의 소문을 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2) 짐승의 수 666(계 13:16-18)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 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
본 절은 666표에 대한 핵심 구절로서 둘째 짐승이 종말에 마지막수단으로 666표를 활용할 것을 본 환상입니다. 요한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베리칩 종말론,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666 베리칩은 혼란과 혼동으로 얼룩진 공포의 괴소문으로 떠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 절은 계시록 해석 중에서도 가장 오역되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16절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짐승의 표(標)에 대한 최초의 정보입니다. 둘째는 666표를 분배하는 것은 짐승의 마지막 임무이며, 셋째는 표를 받을 대상과 위치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 ‘그’는 둘째 짐승을 말하며, ‘표를 받게 한다’는 말은 그의 마지막 임무로서 하늘에서 불을 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사단(용)에게 숭배하도록 모방과 술책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무릎을 꿇어 경배하도록 하는 일을 하게 할 것입니다(계 13:8, 12, 14, 15). 이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입니다.
다음은 표를 받는 대상으로서 전 우주적으로 모든 사람이 해당됩니다. 그래서 짐승은 모든 사람을 표를 받을 대상으로 삼고 그의 능력과 술책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표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침을 받아 거룩한 백성으로 일컬음을 받은 성도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계 9:4, 13:8, 17:8, 20:15). 우리가 전도하기가 힘들 듯 표를 받지 않을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짐승도 우상의 표를 받게 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표를 받는 위치입니다. 짐승의 표를 받는 위치는 사람의 신체 중에서 오른손과 이마 두 군데뿐입니다. 베리칩 종말론자들의 문자적 해석에 기인하면 오른손과 이마 외에 어떤 다른 곳은 표를 받을 위치가 아닙니다. 반면에 우상에게 경배하고 666표를 받았으나 오른손과 이마가 아닌 왼손에 주입하면 아이러니하게 666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요한은 결코 666표를 좌우에 문제가 되는 환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6절은 이와 같이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짐승의 표에 대한 최초의 정보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어느 정도 표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시비적인 양상으로까지 비화(飛火)된 상징적 해석이냐 문자적 해석이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17절 역시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첫째, 표(標)는 숫자와 관련된 최초의 정보입니다. 둘째, 표의 기능으로 표를 받지 못한 사람은 상거래를 할 수 없습니다. 셋째,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의 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표가 없으면 생활에 적잖은 불편함이 도래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17절은 ‘표의 정체’에 관한 것으로서 표의 주인을 말합니다. 그러나 표의 주인은 지금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물론 18절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면 알 수 있지만 그것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표인 666은 그 주인의 ‘이름의 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결코 베리칩과 같은 물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18절은 짐승의 표에 대한 총체적 구절로서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이 13장에서 본 두 짐승에 대한 결론적 의미이며, 둘째는 짐승표는 계시록에서 아홉 번 나오지만 18절은 전체 짐승의 표에 대한 핵심구절입니다. 그래서 본 절은 종말론에 있어서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구절이지만, 반면에 잘못된 종말론을 유추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17절에 처음으로 언급하고 있는 이름의 수는 아무나 셀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지혜 있는 자는 셀 수 있는 수입니다. 네 번째는 짐승과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짐승과 베리칩과 같은 물체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짐승의 표는 곧 사람의 수는 ‘육백육십육(666)’이라는(17절은 숫자가 없음)숫자에 대한 최초의 정보입니다.
결론적으로, 18절은 두 가지가 중요한 관건입니다. 하나는 짐승과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짐승으로 상징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다른 하나는 짐승 곧 사람의 수인 666을 셈(해석)하는 문제입니다. 양자는 계시록의 종말의 현장이 임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전자는 사람을 알 수 없으며, 후자는 베리칩과 같은 물체가 아니라 숫자이나 어떤 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당당하게 미국이나 로마교황을 지목하고 있으나 난센스이며, 성경의 종말보다 앞서가는 그릇된 종말론의 사상입니다. 반면에 666은 지혜 곧 총명이 있는 자만이 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 역시 사도시대 이후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 누구도 함부로 셀 수 있는 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종말론자들은 666을 베리칩으로 당당하게 셈하고 있습니다.
666은 사도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활용하는 666과 같은‘수’를 본 것입니다. 666은 수이나 나타나는 형태는 표입니다. 그러나 이 표는 항공 티켓이나 기차표처럼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몸에 소지해야 활용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666표는 마지막 종말을 주도할 적그리스도가 도래하여 짐승 곧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이식하는 일종의 종교의 표입니다. 그래서 수를 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가 없으면 매매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성경적인 증명입니다. 반면에 베리칩과 같은 물체는 666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성경적인 증명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베리칩은 시기적(적그리스도가 도래하지 않음), 문자적(숫자), 기능적(몸에 소지하는 표이나 눈에 보이지 않음), 종말론적(우상의 표)으로도 666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확연하게 증명됩니다.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베리칩의 허구성의 실상과 666의 진상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p. 92-104; pp. 118-120)
二. 신학적 증명
요한이 말하고 있는 지혜와 총명에는 실상은 신학적 요소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는 신학이 발전한 시대이기 때문에 베리칩이 왜 666표인가는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조명되어야 할 요소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다루고 있습니다.
666은 완벽한 숫자 형태이지 베리칩과 같은 물체가 아니며, 666은 인칭적인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또한 물체와 같은 베리칩이 666이 될 수 없으며, 666을 받을 위치마저도 성경은 오른손과 이마 두 군데만 지목해 놓았기 때문에 베리칩을 왼손이나 팔에 받으면 666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증명에 의한 신학적인 입장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베리칩 종말론자 중에는 계시록 14:9절에 나온 ‘이마에나 손’을 ‘이마에나 양손’으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어불성설입니다. 여기 ‘손’은 이미 13:16절에서 밝힌 ‘오른손’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13장에 최초로 나온 짐승의 표는 여기서부터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왼손도 표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애초부터 13:16절에 ‘오른손’이 아닌 ‘손’ 혹은 ‘양손’으로 표기를 했을 것이며, 만약에 13:16절의 이미 표기한 ‘오른손’을 변경할 의도가 있었다면, 14:9절에 ‘왼손’ 혹은 ‘양손’으로 기록했어야 합니다.
오른손과 이마에 외에 666표를 주입할 위치는 많습니다. 왼손, 양쪽 팔, 양쪽 어깨, 양측 전두엽 등 일곱 곳이 더 있습니다. 일곱 곳도 칩을 활용하는데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오른손과 이마 두 군데만 지목하고 있는 것은 표를 주입할 위치보다는 오히려 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마는 그 사람의 얼굴의 중심입니다. 사람은 자기 얼굴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마는 인격을 대변(상징)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람은 손으로 모든 일을 합니다. 오른손은 일의 중심부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도 오른손으로 능력과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시60:5).
오른손과 이마에 표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인격과 행위를 통해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베리칩 종말론자들의 문자적 해석에 따르면 우상에게 경배하고 왼손에 주입하면 666표가 될 수 없습니다. 요한은 결코 이런 환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666은 좌우나 위아래의 문제가 아니라 우상에게 경배의 문제입니다.
14:9절의 ‘손’은 양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뜻하는 것이 맞습니다. 반면에 ‘손’은 ‘왼손’ 혹은 ‘양손’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666은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신용카드의 인증서처럼 인증서 역할만 하게 됩니다. 666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주입될 (베리)칩의 개인의 비밀번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666은 물건을 매매하는데 필요한 단순한 인증서 역할만 한다는 것이 신학적 증명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인 견해는 너무 다양한 요소이기 때문에 ‘666 베리칩의 허구성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니 보시면 됩니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p. 121-129)
三. 시기적인 증명
종말론자들은 ‘징조’가 종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떠들어 되면서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을 끌어 모으는 양상을 보여 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쓰레기 종말론, 자료 종말론’등으로 말합니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 185, pp. 224-225)
그러나 종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시기’입니다. 종말에 대해 다루면서 ‘종말의 시기’는 열 번, 백 번, 천 번, 만 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종말을 모토로 하는 이단들은 90% 이상이 종말의 시기를 예언하였다가 불발되어 이단으로 낙인을 찍힙니다. 안식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밀러는 1843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예언을 했다가 불발하자 1년을 연기하여 1844년에 다시 오실 것으로 예언을 했으나 역시 불발하여 소위 공중 재림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장림의 다미선교회는 1992년에 예수님이 재림을 예언했으나 역시 불발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계시록 13장은 666표와 관련한 종말의 시기와 가장 맞물려 있어서 ‘시기적인 증명’의 생명수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13장에 비로소 666표를 활용할 두 짐승이 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3장은 7년 대환난 중에 후반기(삼년 반)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베리칩이 666표라면 첫 번째 짐승뿐만 아니라 두 번째 짐승도 이미 출현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두 짐승이 출현하고 있는 계시록 13장 이전에는 그 어떤 물체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666의 숫자라도 성경적인 666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 말로 (베리칩은 666표가 아니라는)시기적인 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증명이요, 문자적인 증명이요, 종말론적인 증명이요, 신학적인 증명이기도 합니다.
계시록의 13장은 첫 번째 짐승과 두 번째 짐승이 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초기나 중간이 아닌 말미 중에 말미입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성경의 666표는 짐승 곧 적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 까지는 어떤 숫자라도 심지어는 666이라도 666표가 아니며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컴퓨터나 바코드로 충분히 증명된 셈입니다. 그동안 종말론자들은 숫자풀이로 컴퓨터와 바코드를 666이라고 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도 컴퓨터와 바코드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베리칩과 같은 물체는 더욱더 666이 될 수 없습니다. 아직 두 짐승으로 상징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베리칩은 시기적으로 666이 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종말은 시기가 가장 핵심이며, 관건입니다. 아무리 그럴싸한 징조를 들이 되며 종말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종말 곧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는다면 무(無)라면 무이며, 허망(虛妄)이라면 허망이며, 거짓이라면 거짓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그 누구도 짐승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숫자나 물체를 가지고 666표라고 해도 아니며, 될 수도 없습니다. 장경동 목사가 기독교 방송에서 웃기며 베리칩이 666표라 하든 인천주안장로교회 원로 나겸일 목사가 진지하게 하든, 미국한인교회 전효성 목사가 큰 소리로 떠들어 되며 집회에서 말하든 베리칩이 666이라고 해도 절대로 아닙니다. 성막으로 유명세를 탄 강문호 목사가 마지막 번개로 종말을 성막처럼 열정을 가지고 강의를 한다 해도 베리칩은 666이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평신도 아닌 많은 목회자들, 소위 유명세를 탄 목사들마저도 아쉽게도 베리칩 종말론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666(베리칩이 아닌)의 주인이 아직 없는데 어떤 것을 가지고 666이라고 한다는 말입니까? 이처럼 베리칩은 시기적으로 666표가 될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책을 보십시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p. 121-129)
四. 문자적인 증명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계13:18)
성경인 하나님의 말씀은 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 역시 중요한 요소입니다.
베리칩 종말론에서 논쟁이라면 논쟁, 차이라면 차이, 충돌이라면 충돌은 문자적 해석과 상징적 해석입니다. 그동안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베리칩은 666표였으나 상징적으로 해석하면 아니었습니다.’ 666이 ‘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압니다. 반면에 베리칩은 물체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리칩 종말 논쟁은 귀가 찰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본문 16절은 그리 길지도 않은 짤막한 절인데도 불구하고 ‘수’와 연관된 말이 무려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666이라는 수는 사람과 연관된 것으로 종결되어 집니다. 따라서 물체인 베리칩은 문자적으로도 666이 될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이며, 반면에 666은 물체가 아닌 사람과 관련된 숫자라는 것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베리칩은 문자적으로도 666이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부연 설명하면, 상징적 해석은 666 자체가 상징이 아니라 나타나는 현상이 상징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개역개정, 표준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세 군데입니다. 개역개정을 제외한 두 성경은 “그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를 세어 보십시오”, “그 이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라고 각각 번역하고 있습니다. 아예 ‘상징’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여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본 절 모두를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본 절은 상징적 해석과 문자적 해석을 겸해야 합니다. 여기 ‘짐승’은 상징이지만 ‘수’는 상징이 아니라 문자적으로 그야말로 수(666)입니다. 짐승은 사람을 상징하고 있으나 반면에 사람은 상징이 아니나 앞으로 도래할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상징과 문자적 해석은 본 단락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논쟁, 차이, 충돌’일 수 있기 때문에 ‘666 베리칩의 허구성’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종말론자들이 어떠한 항변을 한다고 해도 666은 물체가 아니라 숫자가 분명합니다. 베리칩이 666표가 되려면 문자적이기 보다는 상징적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물체가 숫자로 혹은 숫자가 물체로 의미화 되려면 상징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자들은 상징적인 의미화는 모르고 문자적 해석으로 베리칩에 생명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요소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며,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할 요소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p. 198)
그동안 종말론자들은 문자적인 해석으로 베리칩이 666표라고 주장해 왔는데 저는 오히려 문자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베리칩은 666표가 될 수도 없다고 말해 왔습니다. 그 진실을 가르는 것은 독자들이나 목사님의 몫입니다.
목사님!
깊이 생각하지 않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물체인 베리칩이 수인 666으로 변환되려면 오히려 상징적이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베리칩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죽었다 깨도 666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목사님을 비롯한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문자적으로 해석하며 베리칩을 666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 우리말은 ‘아’다르고, ‘어’ 다르지만, 헬라어는 ‘일점일획’이 다릅니다. ‘물체’와 ‘수’는 일점일획이 다를 정도가 아니라 글자와 그 의미까지도 다릅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해석을 하더라도 누가 진실이며, 누가 거짓입니까? 나머지는 책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666 베리칩의 허구성, pp. 123-126, 157-160, 174-181, 243-244)
五. 종말론적인 증명
세상의 종말은 여러 번 국소적으로 올 수 있습니다. 세상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예언자들의 예언은 그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시시때때로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되었기 때문에 가장 진실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예언과 성경의 예언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성경의 종말은 오직 ‘일회적’이며, 전 세계적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옵니다. 성경의 종말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죽음은 연습이 없듯이 성경의 종말도 연습이 있을 수 없으며, 단회적으로 끝이 나고 맙니다.
성경의 종말은 세상의 종말처럼 실패하면 다시 등장하는 그런 종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의 종말도 세상의 종말처럼 실패하면 사라졌다가 다시 등장하는 일이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없이 반복되고 반복되어 왔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현실이 된 것입니다. 92년도 다미선교회의 1992년 10월 28일 종말까지 멀리 가지 않아도 컴퓨터, 바코드가 666표라고 반복했던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의 종말이 패션처럼 유행을 타고 있다는 소위 ‘성경의 종말 유행론 혹은 패션 종말론’을 설파한 바 있습니다.
베리칩은 지금 우리 코앞에서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현상들을 계속 목도(目睹)하면서 성경의 종말이 마치 패션처럼 유행을 타고 있어서 ‘패션 종말론’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성경의 종말을 ‘종말의 유행론’이라는 개념은 아마 제가 가장 먼저 쓰고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종말이 유행을 탄다는 것이 너무 허무맹랑하지만 재미도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666 베리칩의 허구성, p. 7)
성경의 종말은 국소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동시 다발적으로 옵니다.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이나 이슬람권인 중동에 먼저오고, 몇 년 쉬었다가 다시 옛 공산권의 주도국이었던 중국이나 러시아를 엄습했다가 다음은 프리메이슨의 원산지 영국과 유럽, 베리칩의 발원지인 미국을 초토화하고, 그리고 전자산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을 중심으로 종말이 오고, 나머지 세계 모든 나라들을 하나하나 잠식한 다음에 베리칩을 순교적 각오로 666표라고 소문내며 방탄 베리칩으로 방어선을 분명히 하고 있는 종말론자들의 공로가 인정되어 대한민국은 맨 마지막으로 올 것인가? 물음을 던지며 이 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한 순서대로 오면 좋으련만(한국이 가장 마지막이니까) 이런 식으로 종말은 오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종말의 순서까지 나열해 가면서 국소적인 현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 다발적으로 올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바로 베리칩은 국소적인 엉터리 종말의 징조라는 것을 종말론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작금의 종말론 징조의 대세는 성경에 나온 전쟁, 기근, 대적 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직 베리칩에만 몰입되어 있으며, 대신에 예수님이 그토록 주의를 요했던 ‘소문과 유혹’만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맞으나 베리칩 종말론자들은 틀린 것입니다.
베리칩이 종말의 최대의 징조이며, 가장 시급한 징조라면(시술이 지금 진행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베리칩 시술이 세계적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가능하겠는가? 베리칩을 666표로 인정한다고 치더라도 베리칩 시술이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나라별로 국소적으로 시술이 진행된다면 666이 될 수 없습니다. 베리칩은 종말론적 징조로도 666이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부연 설명하면, 지금의 전자칩보다 더 정교하고 치밀한 칩 시대가 앞으로 다가 올 것은 분명하며, 또한 이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저는 베리칩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현재까지 국가적으로 베리칩 정책을 시행한 나라는 없습니다. 그동안 소문이 난무했던 2013년 미국의 베리칩 시술은 아예 없었던 것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소문과 유혹으로 결국 끝이 났습니다. 2017년 시술 역시도 이와 유사하기 때문에 시도된 일이 끝이 날 것입니다. 간혹 러시아 베리칩 시술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런 근거 없는 낭설일 수 있습니다. (아래 댓글 참조)
지금 세계는 200국가가 약간 넘습니다. 200국가에서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최초로 베리칩 정책을 시행할 개연성은 있으나 200국가가 동시 다발적으로는 실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종말은 국소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계(우주)적으로 동시에 있게 됩니다. 현 정세로 보면 베리칩 종말론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세계적으로 동시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베리칩을 첫 번째로 실시한 국가와 마지막으로 실시한 국가는 아마 100년 1세기 차이도 날 것입니다. 베리칩이 종말의 징조라면 먼저 베리칩을 시술한 나라는 이미 종말은 도래한 것이나 아직 시술하지 않는 나라는 종말이 오지 않은 것이 됩니다.
베리칩이 666이라면 베리칩 시술이 종말의 기준이 되고 맙니다. 이런 종말은 성경의 기준이 아닙니다. 따라서 베리칩은 종말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성경적, 문자적, 기능적, 시기적으로도 종말의 징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첫댓글 이제 마지막 세번째 글 '기능적인 증명' 한 가지만 남아 있습니다.
기능적인 증명에서 우리 몸에 전자(베리)칩이 10개 100개가 들어와도 결코 칩은 666이 아니며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