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증(便執症)
성 병 조
나는 편집증이 좀 심한 편이다. 편견을 고집하여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의미의 편집증(偏執症)이 아니라 편지를 고집하여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는 버릇을 일컫는 소위 편집증(便執症)이란 걸 갖고 있다.
편지를 끈질기게 보관하는 데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로 편지 보관은 편지를 보내준 사람에 대한 예의인 동시에
상호 유대를 오래도록 지속시키는데 있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요, 둘째로는 주고받은 편지는 지난 날의 역사이므로 일기장 이상으로 보관 가치가 있고, 셋째로 편지는 흔한 낙서가 아니라 보내준 사람의 정성과 사랑이 깃든 서간체 문학에 가깝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발신인의 주소를 편지 원본의 맨 끝에다 기록한 후 편철해 둔 것만 해도 십여 권이나 되고 이런저런 일로 펼쳐 볼 때면 옛 일이
실감있게 되살아나곤 한다. 부모 형제 친척들, 성장과정에서 사귀었던 다양한 친구들, 존경하는 은사님, 육영수 여사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군대시절의 위문편지, 내 작품을 읽고 보내준 고마운 편지 등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군대 시절
월간 잡지에 실린 내 글을 읽고 보내준 삼백여 통의 젊은 여성
편지는 그 중에서도 압권에 속한다.
그러한 편지들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국민학교 4학년때 받은 내 생애 최초의 편지다. 혹독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60년대 초 부산 토성국민학교 조월선 학생으로부터
받은 위문 편지는 두고두고 잊혀지질 않는다. 담임 선생님이 잘못 일러준 때문인지, 아니면 고생하는 농촌 부모님께 전해질 편지를 우리가 읽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편지 내용 중 '아저씨'란 호칭이 매우 어색하게 여겨졌고 내 또래의 그 여학생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을까 하는 상상도 여러 번 해 보았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67년 고려대 정외과 2학년에 재학중 김경한 형으로부터 받은 편지다. '현풍중학교 회장!'으로 시작되는 글은 아르바이트로 학용품을 팔러왔다가 마침 현풍중학교가
자신의 선배인 김성곤 의원이 설립한 걸 알고 반갑다는 인사와
함께 격려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였는데 문장에 힘이 있고 필체가 좋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지상 공개가 좀 쑥스러울 정도의 붉은 사연이다. 결혼 전 이성과 교환했던 연서의 보관문제는 자칫 불순한
과거를 보인다거나 옛 추억의 심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듯한 인상을 줄 우려가 있어 누구나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2년전 여름, KBS 스튜디오 녹화 때 있었던 일로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기분이 든다. 그 무렵 나는 대구시내에 살고 있는 십여
명의 군대 친구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었는데 만남이 거듭되면서 우리들의 결속력을 과시하고 싶어 방송사를 노크하게
되었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 저녁에 방영되고 있는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프로는 꼭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여겨져 나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대시절의 잊지 못할 추억과 새콤달콤한 에피소드를 잔잔하게 엮은 시나리오를 방송사에 보냈더니 며칠 후 담당자로부터 출연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며칠 후 70년대 초 근무했던 옛 부대를 방문하여 이틀간의 고된 촬영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스튜디오에서 녹화가 있는 날이었다. 한사코 출연을 꺼리는 아내에게는 방송사의 요청이 있어 어쩔 수 없다고 겨우 사정하여 문제가 없었지만 나중에
공개될 편지 내용이 맘에 걸려 이렇게 당부했다.
"녹화장에서 과거의 군용품과 함께 옛 편지 등이 소개되는데 혹시 거슬리더라도 너무 기분 나빠 말고 잘 이해해 주면 좋겠어요" 30여년 동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계급장, 호루라기, 군번줄, 견장, 보도기자 명찰과 여자 친구로부터 받은 장문의 연서를 공개하기로 담당 프로듀서와 은밀히 약속한 후부터 아내의
심기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본격적인 녹화에 들어 가기 전 이계진 이용식씨의 사회로 리허설이 있었다. "성병조 병장은 무슨 물품이던 오래 보관하는 별난 버릇이 있다지요?" 라는 질문이 나오자 나는 호주머니에서
소지품을 서서히 꺼집어 내고, 이어 연애편지를 펼쳐 들었다.
"원고지 60매에 달한다는 장문의 편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편지를 보낸 어느 여성과의 사연을 간단히 소개한 후 사회자의 요청으로 주요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고싶은 사람아/ 인내와 기다림에서만이 가꾸는 사랑의 외로움을/ 그 진실의 손시러움을 그러나/ 그대는 속속들이 알리라/
왜냐하면 그대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대 자신이 지상에서 살고있는 나의/ 반신이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들려온 아내의 음성, "이건 곤란합니다. 공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듣다듣다 속이 뒤틀렸던지 읽기를 중단시켰던
것이다. 분위기가 일순간에 돌변하면서 참석자 모두도 안절부절 못했다. 이번 프로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연서 공개가
무산될 것을 우려한 방송사 측의 걱정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편지 말미에 남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맨트를 삽입시켜 우리의 부부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점을 시청자에게
인식시키는 조건으로 겨우 무마되었지만 하마터면 부부 싸움에다 방송 차질까지 빚을 뻔했다. 전체의 스토리가 흥미진진했고
출연한 전우들이 열성을 기울인 덕분에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방송 스탭진들이 만족한데 비해 연서공개로 마음 편치
않았던 처가 분들이 있어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
차곡차곡 쌓인 옛 편지를 펼칠 때면 소록소록 향기가 나는 것 같다. 아쉽게도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나 살아있는 친구나 모두는
저마다의 개성과 꿈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 개성과 꿈이 소담스럽게 담긴 편지를 버린다는 것은 그들과 맺은 소중한 인연의 고리를 끊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싫은 것이다.
지금까지 소중하게 모아둔 편지들이 한 권, 아니 몇 권의 책으로
탄생하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편지가 먼 옛날 이야기로만 회자될 무렵 청소년들을 위한 교훈서 정도로 엮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주제 넘는 욕심도 가져 본다. 휴대폰의 만능시대에 무슨 고리타분한 옛 편지타령이냐고 질책하더라도 잔잔한 감동으로 나를
매료시키는 편집증(便執症)은 결코 사라질 것 같지가 않다.
(200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