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성자 : 안 재붕
1. 아침의 느낌
새벽에 일어나니 날씨는 언제나처럼 맑았다.
산행하기에는 좋은 날씨. 다만 전날 폭염주의보가 있었기에 당일에도 있을 가능성이 높아 낯선 지역의 산행에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일단은 오케이다.
그러나 산행과는 별도로 잠재의식의 한 구석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농민들은 가뭄 때문에 시름에 겨워 민감해 있을 텐데 도시에서 놀러 가 본의 아니게 그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해 놓고 오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편할까 싶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일이 문득 떠올랐다.
동기 몇 명이 송정리 근방에서 취한 김에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밤길을 지나가다가 파출소 순경에게 잡혀가 ‘지금 가뭄이 심해 온통 민심이 흉흉한데 알만한 학생들이 그렇게 다니면 되겠느냐’는 일장 훈계를 듣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계절이 이맘 때 쯤이었으리라.
최근 가뭄과 녹조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4대강의 녹조 해소를 위해 봇물의 방류를 결정했다.
물이 썪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나마 없는 물을 조금 흘려 보낸다고 과연 수질이 개선되기나 할까 싶다. 심리적 위안은 될지언정 비가 빨리 오지 않는 한 기술적 해법은 없어 보인다는 게 현실적 한계인 것 같다.
어쨌든 기왕 명산대천을 찾아 가는 김에 장마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지길 기원하고 온다면 내 마음의 부담이 조금이라도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2. 버스를 타고
양재역에서 잠시 기다리는 동안 햇살이 점차 따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사당, 양재, 복정 모두 집결지에 미리 도착하여 예정대로 출발하였다.
고속도로는 지체가 반복되었지만 그런대로 가고는 있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하고 바로 출발했다. 산행을 지원하는 갈멜 측에서 김밥과 삶은 계란을 나눠 주었다. 시원한 냉수도 따라 주었다. 하산 후에는 냉막걸리와 얼음에 재운 수박을 큰 걸로 네 통이나 넉넉히 준비했으니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안내석까지 꽉 채운 완전 만석 운행이었다. 비즈니스로 보자면 제대로 수지맞는 장사였다. 안내하는 분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감출 수 없다.
코스와 일정 안내에 이어 최대장이 대원들에게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전했다. 인원을 제한해야 할 정도로 참여도가 높아 기분이 좋지만 좌석에 여유가 없어 불편을 주지는 않았는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대장다운 말씀을 했다. 잠에서 깨어 아침을 해결하면서 모두 생기가 돋아났다.
3. 천년고찰 낙영산 공림사
공림사 산문을 통과하여 10시 20분 경 주차장에 도착했다.
날씨가 제법 달아 오르고 있었다. 장구를 준비하자마자 바로 출발이다. 몇 분 걸으니 공림사 언덕 밑에 아담한 연못이 있다. ‘청수에 비친 낙영산’이란 표지석이 서 있다. 연 잎이 수면을 덮고 있지 않다면 낙영산의 그림자가 맑은 물위에 드리워져 있을 텐데….
절 입구에 종루가 있다. 부도탑을 거쳐 이어진 산길을 따라 바로 등산을 시작한다. 일부는 절에 들어가 예를 올리고 간다.
공림사는 신라시대에 지은 천년 고찰인데 마당 가운데 서 있는 정교한 석탑은 최근에 쌓은 것 같다. 탑의 양식과 새겨진 형태가 한눈에 보아 탑골 공원의 석탑과 매우 닮아 있다. 탑골은 대리석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는 화강암이고 저기는 10층인데 여기는 5층이라는 정도의 차이?
4. 폭염주의보 그리고 대소 슬랩
조금 오르면서 11시쯤 되자 휴대전화에서 요란한 경보음과 함께 폭염주의보가 발령된다. 재난안전처의 전형적 전시성 행정이다. 한밤중에 요란한 경보음을 내며 주택가 돌아다니는 파출소 순찰차와 같은 행태다. 범죄를 막거나 예방하려는 주도면밀한 조치가 아니라 우리 여기 이런 일도 하고 있으니 일 안한다고 오해는 말아줘 하는 정도의 헛 생색내기 같은 것인다. 세월호 사고 이후엔가 재난구조에 나라가 한 일이 뭔데? 하는 여론이 일자 언제부턴가 지진, 짙은 먼지, 폭염 등의 주의보 경보를 발령할 때 모바일을 통해 비상벨부터 요란하게 울리는 관행이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지진 시는 사후약방문이라 실효성이 낮고, 경보, 주의보 등 예보는 그리 요란하게 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없어 굳이 소음을 남발할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다. 말하자면 핵심을 개선하기 보다 열심히 하는 척 하는 흉내라도 요란하게 내자는 것과 같아 보인다. 똥개가 한밤중에 주인님 잠 못자게 시도 때도 없이 짓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더위 먹지 않도록 조심은 해야 할 것 같다.
산길이 제법 가파르기는 해도 다행히 그늘밑으로 지나가니 그리 덥지는 않은 것 같다. 암반 슬랩을 오르니 멋진 노송이 나온다. 잠시 땀을 닦으며 숨을 돌리고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왼쪽 골짜기 건너편에도 제법 볼만한 암릉이 자태를 드러낸다. 분위기가 북한산 어느 능선 쯤 지나는 느낌이다. 고승께서는 쉬지도 않고 휙 지나간다.
조금 더 오르니 제법 경사진 대 슬랩이 나타난다. 거대한 암괴가 가로막으니 길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저 위쪽에 사람들이 앉아 쉬고 있다. 그렇잖아도 좀 밋밋했는데 약간 구미가 당긴다. 따로 길이 없으니 경사진 슬랩으로 올라 가는 게 맞겠거니 생각하고 네발로 기어 오른다. 다 오르니 그 사람들이 묻는다. 그 아래로도 길이 있나요? 알고 보니 내려오던 사람들이다. 몇 명은 그냥 따라 올라온다. 그런데 남이 오르는 것을 보니 좀 위태로워 보인다. 따라 오라고 권한 건 아니지만 속으로 좀 미안하다. 달리 길이 안보여 그냥 바위에 오르긴 했지만 경사가 약간 심해 모두가 다 이곳으로 오르기엔 위험해 보인다. 물어보니 옆으로 길이 있단다. 후발대에 알려주어 모두 안전하게 우측으로 올라왔다. 슬랩 정상부에서 다시 숨을 고르고 한참을 쉬었다. 인원을 대충 확인해 보니 고승님이 보이질 않는다. 아래서 먼저 지나갔는데? 아직 안 지나 갔거나 위에 어디서 기다리고 있겠지….
쉬면서 오던 쪽을 향해 바라보니 전망이 툭 트여 속리산의 주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암반 위 한편에 기린초와 나리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긴 가뭄 중 뜨거운 바위 한가운데서 생명을 부지하기도 힘들 텐데 예쁜 꽃까지 피워 등산객을 기쁘게 해 주다니 참 기특한 것들.
조금 더 오르니 작은 바위가 있고 또 다른 전망처가 나타난다.
이번엔 뒤쪽 속리산 능선 뿐 아니라 바로 이어진 우측 계곡너머로도 산세가 드러난다. 지도상으로 볼 때 무영산, 가령산 등이리라. 고사목도 보이고 앞쪽 절벽엔 노송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제 조금씩 나무 그늘이 없는 곳을 지나게 되니 더위가 제법 느껴진다.
5. 거북이와 토끼 바위
조금 더 오르니 헬리포트다.
왼쪽으로 낙영산 1km 팻말이 있다. 곧 이어 가령산과 낙영산의 갈랫길이 나온다. 표지엔 낙영산 0.3km.
조금 내려가니 주전자 모양의 바위가 서있다.
여기서 각자 돌아가며 폼을 잡고 사진을 찍는다. 바위를 우로 돌아 내려가니 더 큰 바위가 나온다. 우측은 낙타 등 모양이고 반대쪽은 절벽 위로 위태롭게 뿔처럼 치솟은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이 저 아래 쪽에서 보면 귀가 쫑긋 솟은 토끼처럼 보인다고 한다. 토끼 귀 너머로 공림사와 주자창이 내려다 보인다. 사진을 찍다 뒤돌아 보니 위에서 막 지나온 주전자 바위가 완전히 달리 보인다. 거북이 모양 같다. 그래서 고장 사람들은 위쪽 바위를 거북이 바위, 아랫 쪽 바위를 토끼바위라고 한단다.
찬균 회원이 날렵하게 토끼 귀 끝에 올라 앉아 여유 시간을 갖는다.
막힘 없이 툭 트인 바위 꼭대기에서 시원한 바람 쐬면서 편안한 자세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쉬는 잠시의 여유. 산에 오르는 참 맛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태환 대원과과 기탁 대원은 낙타 등에 올라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을, 승렬 대원은 절벽 위로 치솟은 토끼 머리를 밀쳐서 굴려 버리겠다고 용을 쓴다. 역발산의 기개를 뽐냄인가?
산은 함께 오르지만 몸짓은 모두 다르다. 각자 잠재의식 속에 자리잡은 자신의 소망을 자연스레 표출하는 것은 아닐는지?
바위 꼭대기에서 세상을 호령하듯 내려다보며 휴식할 때는 그리 여유로워 보였는데 내려오는 동료의 모습을 보니 좀 위태로워 보인다.
인생도 산도 내려올 때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지?
이 때 누군가 그곳에 오르려고 한다. 턱이 높고 경사져 아무나 오르기 쉽지 않게 생겼다. 미끄러지면 바로 절벽인데…. 위에 있던 이가 그 턱을 조심스레 막 내려오려는 순간 오르려는 이가 윗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사이 부탁인데 잡아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손을 내밀려던 이가 잠시 주저하다 단호히 말한다. 안돼!
스스로 오를 수 없는 곳엔 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잠시 스치는 순간이었지만 함께 안전해지자는 결정을 한 것 같다.
인생에는 위험이 따른다.
위험관리는 자기책임이다.
살면서 위험이 없을 수는 없다. 문제는 원칙에 따라 안전한 행동을 실행하느냐가 관건이다. 순간적인 결단력과 안전 복원성이 핵심이리라. 평생 위험관리가 몸에 밴 사람은 산에서도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6. 낙영산 정상
바위와 한참 노닐다 잠시 더 오르니 낙영산 정상이다.
정상 표지석이 해발 고도 684m라고 알려준다. 정상이 평평한데다 한쪽이 잔솔에 가려 전망이 수려하지도 않고 거껏해야 공림사 쪽이 약간 내려다 보이는 정도인데 표지석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한쪽에선 사람들이 대기하고 주변에선 판 벌리고 식사하는 등 번잡스럽기만 하다. 따라서 가볍게 패스. 이제 다시 내리막이다.
몇 걸음 옮기니 명품송이 눈을 번쩍 뜨이게 한다.
두 개의 바위가 서로 연인처럼 기대어 서있는데 거대한 뿌리를 비늘로 덮어 용트림하듯 한쪽 바위에 틀어 박고 위로는 머리를 구불구불 풀어 헤친 듯 한 독특한 소나무 한 그루가 절벽 위에 서 있다. 쉽게 보기 어려운 국보급 소나무다. 나무에 돌아가며 올라 사진을 찍고 내리막 길을 재촉한다.
7. 도명산도 식후경
내려가다 안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도명산 쪽을 향해 한참을 더 내려간다.
큰 나무가 빽빽하여 그늘이 제법 시원하다. 중간에 평평하고 널찍한 곳이 있어 휴식도 할 겸 다 함께 점심을 나눠 먹는다. 이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 아닌가? 편안하게 퍼질러 앉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면서 가슴으로 소통하는 시간이므로. 그런데 여기서도 고승님이 보이질 않는다. 도중에 여러 차례 쉬면서 왔기 때문에 아직 안 내려왔을 리는 없다. 길을 잘못 들었거나 먼저 내려갔음에 틀림없다. 어쨌든 지도는 가지고 있고 코스가 길지 않으니 걱정은 안 되지만 고승대덕께서 식사는 하셨을려나? 식사를 하고 쉬었다 다시 출발하니 오르막도 발걸음이 가볍다.
8. 미륵산성
슬슬 오르막으로 변하는 길에 비스듬한 바윗돌 밑에 지게 작대기 같은 수많은 막대를 받쳐놓은 곳이 보인다.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보태 수백 개의 작대기가 받쳐져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산 어디를 가나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징적인 두 가지가 눈에 띄는데, 하나는 고개나 쉼터 부근 곳곳에 있는 돌무더기나 돌탑이요, 다른 하나는 기울어진 바위를 수 많은 나뭇가지로 받쳐 놓은 것이다. 이런 것도 어찌 보면 민족의 집단 무의식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지나온 일대엔 석성인 미륵산성 터가 남아 있다. 산 위의 돌무더기도 생각해 보면 성황당이라든가 하는 단순한 미신의 대상이 아니라 고갯마루 같은데 평소 돌을 모아 두었다가 나라가 위급할 때 목을 지키면서 돌팔매라도 하여 침입하는 적을 격퇴시키던 전통적 산성 수성전략의 일부분이 민간에 면면히 이어져 온 건 아닐는지.
또한 산에서 흔히 보듯 작대기로 바위를 받친 광경을 보면 좀 장난스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진짜 받침으로 생각해 그리 했겠는가? 공동체에 커다란 과제가 있다면 비록 작은 힘일지라도 기꺼이 보태 해결하는 데 뜻을 함께 하겠다는 동참과 협력 의지의 해학적 은유적 표현이 아닐까 싶다.
진, 한, 수, 당, 요, 금, 원, 왜 등과 같은 당대 세계 최강의 주변 세력과의 천하 질서 주도권 쟁탈 또는 역내 질서 재편 전쟁에서 이들의 압력과 군사적 침략에 맞서 우리의 선조들은 한 번도 만만하게 물러서거나 쉽게 길을 내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승리를 거두어 그들이 스스로 자멸하게 하거나 끝내 물리쳐 부질없음을 알고 스스로 돌아가게 하였다.
동북아에서 밀려난 훈족에 의해 유럽에 민족 대이동이 있어났고, 칭기스칸의 침공에 의해 유럽 제국은 순식간에 무너지지 않았던가? 훈족의 아틸라와 유럽을 지배하던 로마제국간에 있었던 명운을 건 전쟁이 벌어졌을 때 각군은 기껏해야 오만을 넘지도 못했다. 그런데 동북아의 강자 고구려는 중원을 통일하여 기세등등한 수양제의 113만 대군을 무너뜨리고 결국 수나라를 멸망시켰고 세계를 단숨에 휩쓴 몽골 기병으로부터도 40여년을 항거해 내지 않았던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는 세계 최강국과의 맞짱 생존투쟁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민족인 것이다.
우리 민족의 생존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결코 흡수 동화되어 소멸되지도 않았고 어떤 시련에도 독립성 주체성을 면면히 유지해 온 것만 보더라도 우리는 매우 특별할 정도로 강인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바탕에는 위기 시 돌맹이 하나, 작대기 하나, 금붙이 하나라도 힘을 보태려는 백성들의 자발적 대동단결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언제고 늘 의병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9. 도명산에서 도를 깨치다 ?
비탈길을 올라가니 도명산이 보인다.
정상으로 가는 길이 산허리를 감아 이어진다. 그런데 경사진 능선을 따라 시원한 암릉길이 이어져 있다. 나무가 없는 암릉은 전망이 좋다. 특히 도명산은 암릉, 소나무, 속리산과 연결된 전체적 조망이 볼만하다는데….
당연히 선택은 암릉 길이다.
몇명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택했다. 그런데 제법 경사가 있고 슬랩 구간이 긴데다 중간에 경사가 심한 턱이 하나 있고 위쪽 끝에는 배낭을 맨 채로 바로 통과하기가 어려운 바위틈 검문소도 있었다. 네발로 기어오른 후 비만 검문소에서는 한 명씩 몸을 비틀어가며 요령껏 비집고 올랐다. 슬랩을 다 오르고 보니 건너편 옆에 기차바위가 있고 앞쪽에는 도명산 꼭대기가 지척에 보인다.
이제부터는 바위와 솔숲이 어우러진 길을 네발로 두발로 구불구불 헤치고 오른다. 거의 꼭대기에 다 갔는데 선두에 섰던 태환대원이 검지 손가락을 입에 세우며 조심조심 뒤돌아 내려온다. 국공님이 길목을 지키고 계시단다.
그 길은 허용된 길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아까 암릉 시작점에 무슨 플래카드 같은 게 붙어 있긴 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출입금지 문구는 보지 못했는데….
거의 다 온 마당에 물러서기가 좀 거시기 했지만 산악회에 누를 끼쳐서도 안되고 제법 센 과태료를 물 수도 있다는데 그냥 전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국립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도명산은 속리산에서 보면 아주 먼 변두리인데 이런 곳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을 줄이야….
그런데 암릉 길이란 게 오르기는 쉬워도 내려가기는 훨씬 어렵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를 어쩐디야…?.
안되면 돌아가라.
쉽게 돌아나갈 다른 길을 찾아 보았으나 바위 능선길이라 절벽으로 치달아 있어 달리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별 다른 길이 없으면 다시 원점에 생각하라.
어차피 운동 겸해서 온 것이고 코스도 당초보다 대폭 단축된 것이니 한 바퀴 더 돈다 한들 그리 나쁘진 않을 듯 싶다. 개운치는 않지만 달리 방법이 없이 원점 회귀 후 정상코스로 진입했다.
스스로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도명산 정상 바로 아래 삼거리에서 거대한 바위 돌 들어 올리기 단체 얼차려를 실시했다.
너희들의 죄를 스스로 잘 알고 있으렸다.
이제 정상을 향한 마지막 관문 철계단이다.
다른 회원들은 벌써 내려오고 있다. 폭이 좁아 한 사람씩만 이용할 수 있는데 내려오는 사람이 많아 우린 한쪽에서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가파른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두 번의 도전 끝에 도명산 정상에 올랐다.
정상은 다섯 장의 바위가 일정 간격을 두고 겹쳐 세워져 있는 모양새다. 속리산 주능선과 여러 봉우리들이 360도로 펼쳐져 있고 아래 계곡도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사방으로 경치가 툭 트여 가슴속까지 시원하다.
도명. 그래서 막힘 없이 도가 트이는 산인가?
두 번의 도전 끝에 어렵게 오른 정상인지라 더욱 시원함을 느낀다.
10. 나무에게도 생명권을
정상 바로 밑에 누운 소나무 한 그루가 멋드러지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철계단 쪽 오르내리는 쪽의 바위 위에도 꼿꼿한 채 기품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명품 소나무마다 표지가 매여있어 자세히 보니 ‘소나무가 아파합니다. 올라가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 못하는 소나무를 대신하여 관리공단에서 애절하게 사정하는 문구를 써 놓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올랐던지 누운 소나무의 뿌리 부분은 반쯤 닳아 있었다.
바로 곁에는 이미 죽은 고사목이 한 그루 서있었다. 경관을 해치면서까지 옆에 철제 울타리를 설치하여 소나무에 접근하기 어렵도록 해 놓았다. 사람들은 한 번 왔다 가면 잊어버리지만 나무는 수 없이 어려움을 당해야 하니 결국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국립공원 측이 조치를 한 것 같다.
이런 명품송 들은 바위틈에 어렵게 뿌리를 박고 자라기 때문에 대체로 뿌리 부위가 약한 편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끝도 없이 올라와 등산화로 밟고 올라타고 스틱으로 찌르고 다니니 튼튼한 나무라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특히 누운 나무는 지렛대 작용에 의해 뿌리 쪽에 훨씬 더 큰 힘을 받을 것이다. 한번 고사하고 나면 나중에는 수십 년 동안 그만한 명품을 볼 기회조차 없을 것 아닌가?
우리가 산에서 얻는 즐거움이 어찌 육체적 운동 효과만이겠는가? 아름다운 경치, 맑은 물과 공기, 기묘한 바위와 나무 등이 주는 힐링 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산을 플러스적 외부효과를 주는 일종의 공공재로 본다면 개인이 즐길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에게도 생명권을 보장해야 하지 않을까?
지나온 길을 되새겨 보니 고사목이 자주 눈에 띄었었다.
토끼바위 앞에는 두 갈래로 갈라진 누운 소나무가 있어 딱 걸터앉아 쉬기 좋게 생겼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팀도 많은 사람들이 올라 앉아 쉬거나 사진을 찍었다. 거기도 뿌리가 점점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주변에 고사목이 두 그루나 눈에 띄었다. 한 그루는 바로 앞에 있던 누운 쌍가지 소나무를 완전히 닮아 있었다. 딱 보아도 고사 원인이 사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젊은 시절 산을 정복 대상으로 바라보며 통과 속도에 관심을 두었다면 이제 우리 나이쯤에서는 산과 자연은 마음의 고향이요 어울려 함께 즐겨야 할 친구이자 돌봐줘야 할 보호 대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1. 마애삼존불
정상에서 막 내려가려 하니 첨성대와 학소대 갈림길이 나온다.
학소대 방향으로 철제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삼거리가 있고 왼쪽으로 가면 학소대 방향이다.
몇 발짝 옮기면 바로 마애삼존불이다.
고려 초기 작품이라고 한다. 첫 번째 부처는 작은 바위에 비교적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데 그 바위 왼쪽 아래에 샘물이 솟고 있다. 오랜 가뭄 끝에도 물은 마르지 않고 시원했으나 마시려고 보니 올챙이가 헤엄을 치고 있어 손에만 잠시 흘려 열기를 식혔다.
그 우측으로 큰 암벽이 서 있는데 그곳에 양위의 부처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본존불에 해당하는 가운데 부처가 가장 큰 것 같다. 조항관이라고 하는 새의 목처럼 좁은 바위 틈 사이를 지나면 평평한 공간이 있는데 그곳이 절터였다고 한다.
거기를 지나면 잔도 형식의 철제 다리가 절벽의 옆을 감싸고 돌며 학소대를 향한 아랫길로 인도한다. 정상 부근의 내리막 길이 아기자기 하다.
12. 학소대 물놀이
반쯤 내려가니 산속 계곡이 나오는데 물은 다 마르고 거의 없다.
길은 넓고 평탄해져 평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편하게 내려가다 보니 곧 화양계곡이 나온다.
계곡의 폭은 4,50미터로 제법 넓다. 철 다리를 건너니 바로 위에 학소대가 보인다.
우리 팀은 그 위쪽 그늘진 암반에 터를 잡고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먼저 온 팀은 입수한지 한참 되었다. 물이 풍부하거나 아주 시원한 느낌은 들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만 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등산을 자주한 대원들도 대부분 중후한 인격이 드러난다. 당연히 허리둘레가 가슴보다는 커야지.
몸집은 커지고 체형은 달라졌지만 물속에서 즐기는 모습은 수십 년 전 어렸을 적 멱감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머리가 무성해 지라고 폭포에서 물 맞고 있는 두식 쌤에게 연거푸 물을 뿌리며 장난끼를 발동하는 강훈 대원, 물에서 솟구치며 인간 SLBM 발사에 연방 성공하는 중태 대원, 자신의 빵빵한 가슴을 자랑스럽게 감싸쥐며 강조하는 고승대덕, 유독 특정 부위에 힘이 들어가신 분, 자신의 각 부위가 제대로 있는지 만수무강 점검하는 어르신.
이 대목에서 성주풀이나 한 가락 뽑아보면 어떠하리.
낙영산 십리하에 멱을 감는 이륙산우~ 에라 만수 !
에라 ~ 보나마나 대신이야 ~
대원 각자 자신에 심취한 걸 보니 모두가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트 인 듯 싶다.
각자 특히 자신을 사랑해야 할 나이임에 틀림없다.
이제부터 자신이 스스로 잘 돌보지 않는다면 순번도 알 수 없이 마구 뽑혀 갈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정도 딱 적당하게 물에서 머물렀다.
모두가 개운해 한다.
13. 화양구곡
화양구곡은 도명산 아래 긴 계곡의 9군데 명소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양구곡은 조선시대 송자라고까지 불리던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자리잡고 화양서원 건너편 암서재에 살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상류에서부터 파천, 학소대, 와룡암, 능운대, 첨성대, 금사담, 읍궁암, 운영담, 경천벽까지 9곳인데 우리가 물놀이 후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길에 맨 위쪽의 파천과 맨 아래쪽의 경천벽만 빼고는 다 지나왔다. 계곡이 길다 보니 우리가 들르지 않은 상류쪽에는 선유동 구곡이 따로 있다고 한다. 이제 화양구곡을 거쳐 주차장으로 향한다.
국시가 성리학이었던 조선에서는 뜻을 세우려는 선비들은 성리학을 자신에게 철저히 체화시키는데 힘썼던 것 같다. 특히 성리학의 핵심 창시자인 주자를 뼈 속까지 본받으려는 선비가 조선에 많았던 것 같다. 이기론이나 성명론, 예송 논쟁과 같은 이론적 추상적 논쟁이 선비사회의 이슈로 자주 등장하여 정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중기 이후에는 예의 실천에 관한 구체적 방법론을 두고 그야말로 피 튀기는 정치적 논쟁이 벌어졌다.
주자가 복건성 무이산 무이구곡에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였으므로 조선의 선비들은 그를 정신적 멘토로 삼아 외형적, 정신적인 것을 모두 다 본뜨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사림의 주요 인물들이 그러했는데 이황의 도산구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등이 특히 유명하다. 게다가 이들은 예찬 시까지 스스로 지었다.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등이다. 이황은 중국에서 송대의 무이구곡도까지 베껴와 벽에 걸어 놓고 학문을 닦은 것을 보면 자신의 이상세계를 조선에서 완벽히 실현하려 했던 것이리라.
효종의 스승이었던 이곳 출신 송 시열은 왕과 함께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했다.
송시열은 왕과 독대하며 북벌 방안을 구상한 정치가였다. 청이 전성기에 접어드는 시기라서 무리한 면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남중국에 명의 잔존세력으로서 청에 대항하여 삼번의 난을 일으킨 세명의 지방세력이 저항하던 시절이었고 조선으로서는 병자호란의 치욕 뒤끝이었으므로 국제 정세에 밝고 기개가 있는 조선의 왕과 정치지도자라면 북벌을 선택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은 왕과 방법론이 달랐고, 김자점이 청에 북벌 계획을 사전에 밀고하는 바람에 내외 여건이 녹록치 않아 비록 북벌을 실현시키지는 못했지만 현실적 성공 가능성을 떠나 조선이 그런 생각이나마 펼쳐 본 것만으로도 늘 주변국 동정에 좌고우면 눈치만 보며 문약했던 조선조의 전반적 풍토에 비하면 통쾌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쨌든 송시열은 화양구곡에 은거하며 화양서원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자신과 뜻을 함께 하던 효종이 갑자기 승하함에 따라 매일 읍궁암에서 통곡하고 애도를 표했다 하니 당시 그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중원의 세력교체기나 대륙과 해양세력간의 충돌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어느 한 쪽에 명확히 서기를 강요 당했던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작금의 중국의 부상과 싸드 논쟁 등에서 어려운 입장에 낀 우리의 현실을 볼 때 중지를 모아 정말 현명한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 처신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어지러이 스친다.
오늘 산행을 요약하자면 약 9km 남짓의 산행거리에 5시간 정도, 물놀이에 1시간 정도 소요된 아기자기한 산행이었다.
14. 팔각정 휴게소에서의 마무리
휴게소에 도착하니 만식 총무가 모두를 위해 미리 준비해 온 목포산 홍어를 내놓는다.
이륙산악회의 설악산 공룡능선 번개산행 완주 및 산악회 활동을 통한 체중감소 실현 기념이란다. 노 총무님 감사. 갈멜 측에서도 아침에 약속한대로 냉수박과 막걸리를 푸짐하게 내놓는다. 여기에 따뜻한 밥과 국 돼지볶음 등 모두 꿀맛이다.
처음 나온 허몽린 대원의 소개 및 인사가 있다. 다음부터는 어렵더라도 적극 행사에 참여하겠단다. 그래 그런 마음 참 마음에 들어요. 박수 처 드릴께요.
다음으로 박인수 대원의 차기 산행 홍어 도네이션 약속이 이어진다.
산악회 활동을 통해 체력을 길러 홀로 2박3일간 공룡능선을 완주할 때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은 회원들께 드리는 감사의 의미로 희사를 결정했다는 말씀.
이어 최 대장님의 차기 산행 공지와 함께 앞으로 참여도가 지속 높아져 이륙 단독으로도 산행을 구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
오후 6시 현지에서 서울을 향해 출발. 회원님 오늘 하루 모두 즐거웠어요. 안녕!
첫댓글 많이 기다렸다. 반갑다. 산행기여!
근데 이게 웬 복이냐? 하루에 두 편의 산행기를 읽게 되는 복을 누리다니! 도명산 스랩을 오르다 되돌아 오는 장면이 재미있다. 거의 다올랐으면 '고!'를 불러야지! 잡혀서 무릅 꿁고 비는 한이 있더라도ㅎㅎㅎ . 이제 연륜이 있는 만큼 현명한 결정을 한거지.
암튼 현장감 있는 산행기 올려줘서 감사! 감사! 감사!
7월 산행후기가 올라왔는데, 모두가 너무도 기대했던 다크호스 안작가의 작품이 아직도 오리무중이라 혹시나 산행후 맛깔스러운 짧은 소감과 사진작품으로 산행후기 대신이라는 착각을 한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본 내가 후기를 접하고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이런 역작을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위해 고심한 안작가의 산행후기 작품에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역시 안작가의 깊은 역사의식과 산행의 정도를 적절히 가미해 산행후기를 맛깔스럽게 서술해, 다시한번 그날 산행을 리마인드 해주는 안작가라는 호칭을 받을만 하구만! 오늘 6, 7월 산행후기를 함께 맛보니 더운 여름날 한편의 소설을 읽은 듯한 풍성한 느낌이다!
한편의 시를 읽는것 같다.
6월 7월 산행기를 한몫에 볼 수 있고 되돌아 볼 수 있어서...
사실 화양구곡에서 수량의 부족으로 완전한 알탕의 느낌을 가질수 없어서...
지금 다시 가본다면 학소대 근처에서 물놀이만 하고 올것 같다.
도명산 낙영산.. 특히 낙영산으로 암벽을 타고 올라 맞은편의 문장대를 보는 시원함은 가히 장관이었다 생각된다. 잊혀지는 기억의 한덩어리를 찾아 낸듯한 기분이드는 재붕이의 산행후기 멋져~~^^
감사해요.
사진과 글로 재봉이는 작가로 대접받아도 손색이 없다..7월 정기 산행에서도 많은 산우들이 안 작가의 후기가 올라 오지 않는다며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사진과 글이 어을려 하나의 명작품이 된다. 안 작가의 깊은 내공과 다양한 암반 경력이 묻어나는 깔끔한 글이다. 수고했어요...
멋진 사진들과 거기에 잘 어울리는 글 솜씨!
그리고 해박한 역사 지식!
너무 멋있다.
자주자주 보여주길....
낙영산 십리하에 멱을 감는 이륙산우~ 에라 만수 !에라 ~ 보나마나 대신이야 ~ ㅋㅋ 얼쑤! 성주풀이 좋을씨고^^
글이 시원스럽네~~
폭염 속에 헐떡이는 심령에 한줄기 생수 같기도하고.....
은유적이면서도 해학적인 글, ㅋㅋ 내 실력으로는 난해한 부분이 많어~~
사고의 깊이를 알 수 없는,,,고수 앞에 절로 고개숙여진당.
근데 재붕이는 글보다 실제로 만나보면 더 재밋닷...아닌가?!
사진 박는 기술뿐만 아니라 글 쏨씨야 선조적(?)부터 익히 알려진 바이니 더 이상 뭐라 말해 무엇이겠는가....
아무튼 글 쏨씨 아깝다~~~ㅇ
이 심야에 한 번 더 읽어보네. 감사허이.....!!
안재붕~포스코에서 회장님도 칭찬한 대단한 글쟁이실력 유감없이 발휘했구나
정성도 대단하고,반갑다.언제 광양 함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