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광주대단지, 경기도 성남시의 출발점
우리나라 도시정책과 도시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친 광주대단지 조성 사업
[뉴스포스트=강대호 기자] 성남(城南)은 성의 남쪽을 말한다.
서울이 경성이었던 시절 도성 남쪽에 있던 용산을 성남으로 부르기도 했다.
중국과 일본에도 성남이라는 지명을 가진 도시들이 있는데 아마도 성의 남쪽에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럼 경기도 성남은 어느 성의 남쪽에 있는 것일까.
경기도 성남시 지명의 유래는 남한산성과 관련 있다. 보통은 일제강점기에 남한산성 남문과
인접한 지역들을 관할하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의 ‘성남출장소’가 설치된 것을 그 시작으로 본다.
(2017. 11. 11) 남한산성의 남문인 '지화문'.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이 지역을 ‘성남’이라 부른 기록이 있고, 세종 때 태종의 묘인 ‘헌릉’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 남쪽 마을을 ‘성내미 마을’이라고 한 기록도 있다. 경부고속도로 ‘달래내고개’ 인근에 그
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현재 판교에 ‘성내미 마을’ 이름을 딴 곳이 있다.
그 유래가 어떻든 성남은 지금 인구 100만을 바라보는 커다란 도시이다. 하지만 50년 전만 해도
성남은 인구가 많지 않았고, 남한산성 남쪽 자락에 허름하게 지은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외진 곳이었다.
광주대단지 개발, 서울시의 무허가 불량 주택 대책
전쟁 후 서울에는 고향을 떠난 이주민들이 몰려들었다. 경제적 기반을 갖춘 계층들은 번듯한 집을 주거
공간으로 삼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계층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집들이 들어서지 않은
하천 주변이나 산자락에 집을 지었다. 일명 판자촌이다.
땅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설사 소유할 능력이 되어도 건축 허가가 나지 않는 땅에다 집을 지었으니
무허가 주택이다. 관청 입장에서는 모두 철거해야 할 불량 주택일 뿐이었다. 하지만 헐어버려도
그 주변에 다시 들어서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1962년 서울 한남동의 판자촌.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70년 청계천 인근 마장동 화재 현장.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자료에 의하면 1966년 당시 서울시 인구 약 380만 명 중 1/3인 약 127만 명이 무허가 주택에 살고 있었다.
주택 수로는 13만 6,500동이었다. 서울시는 도시 미관을 해치고 태풍이나 화재 등 재해에 취약한 관점에서
이들이 부담되었다. 정책 관점에서 근본적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시는 1968년 무허가 불량 주택에 대한 대책으로 ‘무허가 주택의 양성화’, ‘시민아파트 건립’,
그리고 ‘대단지 조성에 의한 집단 이주 계획’을 마련했다. 그중에서도 ‘대단지 조성’과 ‘집단 이주 계획’은
오늘날 경기도 성남시를 탄생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일대를 그 대상지로 선택했다. 현재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지역이다.
지도를 보면 서울과 바로 붙어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아주 외딴 곳이었다. 서울시는 광주군의 땅을 택지로
개발하여 이주민들에게 분양하고, 그 인근에 공장도 설립해 이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요량이었다.
이러한 서울시의 ‘광주대단지사업 종합계획’으로 1969년부터 토지분양과 주민이주가 시작되었다.
정부 자료에 의하면 1971년 8월 현재 25,267세대, 124,356명이 광주대단지로 이주했다. 공식 집계된 숫자가
그렇고 전매입주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전입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약 15만명에서 20만명에 달한다는 자료도 있다.
1970년 광주대단지 전경. 판자집과 천막들이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070년 광주대단지 모습.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광주대단지는 ‘대단위 주거단지 조성’이라는 계획이 무색하게 도시기반시설이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다.
택지라는 것도 야산에 나무를 뽑고 한 집에 약 20평 정도의 구획을 내어 준 것뿐이었다. 집을 짓는 것은 이주민들의
몫이었다. 서울에서처럼 판자로 얼기설기 집을 짓거나 그도 안되면 서울시에서 지급한 천막을 쳐야 했다.
게다가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 도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자료에 의하면 광주대단지로 이주한 사람들은
주로 서울 도심에 일터를 가졌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먼 거리를 통근해야 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광주대단지에서 서울 도심으로 진입하려면 천호동을 거쳐 광진교를 건너야 했다.
물론 1969년에 제3한강교, 지금의 한남대교가 개통되었지만 당시 광주대단지에서 강남 지역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없었다. 시영버스도 한 개 노선이었는데 배차도 엉망이었다고.
생활 환경도 최악이었지만 정부의 약속 위반이 이주민들을 좌절하게 했다. 애초 서울시는 이주민들에게 저렴한
택지 분양을, 그것도 장기 분할납부를 약속했었다. 하지만 약속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일괄납부는 물론 높은
취득세까지 예고되었다. 게다가 공장 설립 계획도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광주대단지 사건, 한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시민 집단행동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은 ‘토지 분양가 인하와 세금 감면’, ‘공장과 상업시설 설치’, ‘생활기반 개선과
구호사업 확대’ 등을 서울시에 요구한다. 하지만 책임 있는 답변이 없자 주민들은 폭발하고 만다.
결국,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은 집단행동을 벌인다. 주민과의 대화에 나오기로 한
서울시장이 약속 시각에 보이지 않자 흥분한 주민들이 관공서와 차량 등을 파손했다.
당시 일간지에 ‘난동’ 혹은 ‘폭동’으로 보도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3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모였다고 한다.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이 집단 행동을 벌였다. 사진은 수진리고개, 지금의 태평고개 인근으로 보인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집단 행동에 들어간다. 관공서와 차량들이 파손되었다. (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결국, 정부는 주민이 내세운 의견들을 전격 수용하며 이날의 사건은 마무리된다.
이후 송파대로와 잠실대교가 건설돼 강북과 연결되었고, 헌릉로가 뚫려 강남과 한남대교를 거쳐
강북까지 가는 길이 가까워졌다. 지금의 단대오거리 일대에는 ‘성남1공단’도 설치되었다.
하지만 주민 22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와 ‘폭력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구속되었다.
일명 ‘광주대단지 사건’은 우리나라 여러 부문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도시정책과 빈민운동 분야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지배당하는 힘없는 백성으로만 여겨온 주민들의 결집에 놀란 정부가 도시정책을 크게 손보는
계기를 마련했고, 훗날 체계적인 빈민운동의 초석이 되기도 했다.
(2021. 06. 23) 현재의 수진리고개(태평고개). 멀리 서울이 보인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단대천을 복개한 산성대로. 옛 건물들은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광주대단지는 성남을, 성남은 분당을, 분당은 판교를
성남 도심을 걷다 보면 경사진 길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택들이 언덕 사이에 빼곡히 들어섰다.
오래전 광주대단지 시절 야산에 나무를 뽑고 들어선 택지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있는 것이다.
(2021. 06. 22) 성남시 수정구의 주택가. 약 20평 대지에 건축한 다가구 주택들이 들어섰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6. 22) 성남시 수정구의 한 주택가. 경사가 높아 계단을 설치했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경사진 골목길의 다가구 주택들을 보면 대략 20평 정도의 대지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광주대단지 시절 한 가구에 20평 정도의 땅에 택지 구획을 그어 분양한 흔적이다.
한편 오래된 주택가와 상업시설이 들어선 성남 도심은 지금 재개발 소식이 한창이다.
이미 재개발을 마친 곳도 있지만 갈등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
(2021. 6. 22) 재개발이 진행 중인 성남 원도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06. 24) 재개발은 갈등을 낳기도 한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경기도 광주군의 출장소였던 성남은 1973년에 성남시로 승격한다.
지금의 수정구와 중원구 지역은 물론 인근의 광주군 대왕면, 낙생면, 돌마면이 함께 성남시에 편입된다.
그리고 서울이 팽창하며 성남은 그 영향권에 들어간다.
옛 돌마면 일대가 우리나라 신도시의 대명사인 성남시 분당구로 분구되고,
옛 낙생면 일대는 첨단 벤처기업이 모여 있는 판교로 성장한다.
한때 광주대단지였던 성남은 오늘날 분당과 판교를 낳았다. 하지만 성남과 분당을, 때로는 분당과 판교를
서로 다른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도시는 다양함이 공존하는 유기체와도 같은 듯하다.
첫댓글 성남에 대해서 잘 배웁니다.
옛날 사진들을 보니
우리나라 발전사가 보입니다.
성남쪽에도 걷기가 좋은 코스가 많이 있는곳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