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예 개요 ]
서예는 한자의 글씨 예술이며 그것은 한자의 출현과 함께 탄생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에만 있었으나 나중에는 한자와 함께 일본 한국 동남아 등의 다른 국가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중국의 서예는 본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중국 문화 애호가들에게도 환영을 받았다.
세계의 문자는 그 종류가 매우 많은데 어찌하여 유독 한자의 글씨만 예술이 되었을까? 이것은 한자의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어 독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힌디어(Hindi어) 등과 같은 세계의 다른 문자는 모두 표음문자이다. 서면어는 일정한 몇 십 개의 자모로 구성되는데 필획이 간단하고 쓰기가 단조로우며 자형의 변화가 적어 예술적 감상 가치가 부족하다. 그러나 한자는 사물의 형태를 본떠 만든 방괴자(方塊字)로 필획이 많고 구조가 복잡하며 자수가 많고 자형의 변화가 크다.
그리고 같은 한자도 다른 글자체로 쓰면 다른 형상을 구성하여 다른 느낌을 갖도록 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문자에는 없는 심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쓰고, 어떤 글자체를 구사하며, 어떤 미감을 조성하는가에 대해서 그 속에는 많은 기교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기교를 배우고 연구하고 정복하여 독특한 풍격을 갖춘 그리고 누구나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글자체를 쓰는 것, 이것이 바로 서예이다.
중국의 서예는 감상과 심미적 가치 외에도 중요한 실용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제자(題字), 비문, 현판, 출판물의 제목, 방이나 거실의 장식 등은 모두 서예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서예는 또한 시문 회화 전각 건축 등의 다른 예술 형식과 결합하여 종합적인 예술 효과를 이루어 낼 수 있다.
중국의 서예는 어떻게 탄생되고 발전해 왔으며, 그것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이 문제는 단지 한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한자의 역사가 바로 서예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자의 발전은 대체로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전서(篆書) 예서(隸書) 초서(草書) 해서(楷書) 행서(行書)의 몇 단계를 거쳤으며, 중국 서예의 기본 글자체도 바로 이 몇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중국 문자는 일찍이 5천년 전에 탄생되었는데 그 때에는 단지 몇 개의 간단한 상형(象形) 부호뿐이었다. 중국 최초의 비교적 성숙한 문자는 3,400여년 전의 갑골문이다. 그 문자는 거북의 껍질이나 짐승의 뼈에 새긴 것이기 때문에 "갑골문(甲骨文)"이라 한다. 갑골문은 칼로써 단단한 뼈에 새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필획은 가늘면서도 억세고, 자형은 여위면서도 길며, 글자의 크기도 다르고, 사람에게 주는 감각은 굳고 억세면서 소박하다.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서예이다.
갑골문과 같은 시기, 특히 주대(周代)에 진입한 이후에 사회가 발전하고 사용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한자의 글자체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이 때의 문자는 주로 청동기에 주조하였는데 당시에는 동(銅)을 "금(金)"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금문(金文)"이라 하였고, 청동기는 종(鐘)과 정(鼎)이 많기 때문에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하였다.
금문의 글자체는 갑골문과 비슷하지만 필획이 갑골문보다 굵고 웅장하며, 선이 갑골문보다 세련되고, 글자체의 구성 크기에도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여 균형이 잡히고 정연하다. 그리고 표현된 풍격은 장엄하면서 돈후(敦厚)하여 이미 상당히 강한 예술성을 갖추었다. 오늘날 고대로부터 보존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금문"은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모공정(毛公鼎)≫ ≪우정(盂鼎)≫ ≪산씨반(散氏盤)≫ 등이다.
춘추시기에 문자를 화폐 죽간(竹簡) 면백(綿帛) 칠기(漆器) 위에 쓰기 시작하면서 한자의 글자체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전국 시기에 제후국들이 각각 일정한 지역을 독점하게 되면서 한자의 글자체에는 지역적인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제(齊) 초(楚) 연(燕) 한(韓) 조(趙) 위(魏) 등의 문자를 "육국고문(六國古文)"이라 하였으며, 스스로 체계를 세운 진(秦)나라의 문자를 "대전(大篆)"이라 하였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 육국고문(六國古文)을 폐지한 동시에 대전(大篆)을 기초로 삼고 이것을 간단하게 정리하여 소전(小篆)을 만들고 소전(小篆)으로써 전국의 문자를 통일하였다. 소전은 식별하거나 쓰기가 비교적 쉬울 뿐만 아니라 규범화 정형화되었다. 윤곽은 원래 길이와 크기가 정연하지 않던 것에서 기본적으로 정연한 장방형(長方形)으로 바뀌고, 필획은 원래 굵기가 다르던 것에서 균등하고 둥근선으로 바뀌었으며, 구성 부분은 원래 자유롭게 배치된 것에서 상대적으로 고정된 위치로 바뀌었다.
정형화된 소전은 한자가 비교적 성숙한 시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소전을 포함하여 중국의 고문자는 이미 기본적으로 실용적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서예의 하나로써 중요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예술 분야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서예에서는 대전과 소전을 통칭하여 "전서(篆書)"라고 하며, 이 전서는 인장 전각 속에서 매우 유행하고 있다.
소전은 비록 많이 진보하였지만 쓰기에는 여전히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다. 진대(秦代)에는 형벌이 엄격하여 노예(죄인)가 매우 많았다. 노예 사건과 관련된 문서를 처리할 때에는 종종 간단하게 대충대충 글을 썼으며, 그래서 일종의 새로운 글자체인 "예서(隸書)"가 형성되었다. 진(秦)왕조가 멸망한 후에 예서는 더욱 발전하여 점차 성숙해졌으며, 서한(西漢) 중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소전의 위치를 대신하여 사회에 통행되는 정식 글자체가 되었다. 후래에 규범화 된 예서는 소전에 비해서 주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소전의 불규칙적인 곡선과 둥근선을 곧고 반듯한 필획으로 변화시켰다.
둘째, 필획은 가로(橫: 一) 세로(竪: ) 점(點: )과 곡선 외에도 삐침( : ) 파임(捺: )이 추가되었으며, 특히 가로획은 "잠두안미(蠶頭雁尾: 누에 머리에 기러기 꼬리)"의 필세가 나타났다.
셋째, 구성은 상하가 긴밀하고 좌우가 펴졌으며, 필봉은 둥근 것도 있고 각진 것도 있으며, 필획은 굵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어 변화가 풍부하다.
예서체의 모든 윤곽은 납작한 모양을 나타내어 사람들에게 단정하고 장중하며 안정된 느낌을 준다. 예서를 쓰는 방법은 더욱 규범화되고 편리하여 실용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새로운 예술적 감상을 가져다주었다.
예서가 발전한 동시에 다른 새로운 한자체의 일종인 "초서(草書)"가 출현하였다. 초서는 예서를 흘려 쓰는 방법으로 그 특징은 흘려 쓰고 빨리 써서 필획과 필획이 연결되고 글자와 글자가 연결되어 글자의 형상이 고도로 간단해졌다는 것인데, 심지어는 단지 대략적인 윤곽만 있는 것도 있다.
초서는 너무 흘려 써서 임의성이 비교적 강하여 식별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단지 서예로서 감상만 할 뿐 실용적 가치는 다른 글자체보다 크지 않다.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예서의 기초 위에서 다시 새로운 글자체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해서(楷書)"이다. 글자의 구성 방면에서 해서는 예서와 차이가 크지만 해서는 예서의 필획 방법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즉 가로획의 끝은 다시 위로 올리지 않고 필봉을 마무리하고, 점은 긴 형태에서 둥근 모양으로 바뀌었으며, 삐침의 방향은 아래로 비스듬하게 그어서 끝이 뾰족하게 하였고, 갈고리획(勾: )은 방향을 돌리지 않고 딱딱하게 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글자체의 형태가 예서의 납작한 모양에서 사각형으로 바뀌었으며, 이로부터 최초로 중국의 한자는 방괴자(方塊字)로 변하였다는 사실이다.
수당(隋唐)시기에 이르러 해서의 글자체는 기본적으로 성숙되었다. 정형화 된 후의 해서는 필획이 정교하고 구성이 엄격하며 깔끔하고 분명하여 가장 주요한 글자체가 되었다.
진대(晋代)에는 서예의 또다른 한 형식이 출현하였는데, 그것은 해서와 초서의 중간에 있는 것으로 "행서(行書)"라 일컬어진다. 행서는 해서처럼 깔끔하지도 않고 초서처럼 흘리지도 않았다. 그것의 뛰어난 점은 해서보다 자유롭고 비교적 빨리 쓸 수 있지만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빨리 흘려 쓰지는 않아 보기에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편리하고 실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즐겨 사용하는 글자체가 되었다.
갑골문 금문 소전 예서 초서 해서 행서의 변천 과정은 중국 한자의 탄생과 변천 과정이면서 또한 중국 서예의 각종 글자체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 서예의 다섯 가지 기본 글자체인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는 수당(隋唐) 시기에 이미 정형화되었으며, 그 후에 비록 수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창작이 출현하였지만, 기본 자형은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의 유형을 끝내 벗어난 적이 없었다. 즉 다시는 더이상 새로운 글자체가 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 다섯 종류의 글자체는 단지 중국 서예의 기본적인 글자체일 뿐이다. 실제로는 설령 같은 글자체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람이 쓰면 개인의 개성 기질 애호 취미 수양 기초 추구 등의 각종 차이로 말미암아 그들이 쓴 글자도 제각기 독특한 점을 가질 것이며 결코 같을리 없다. 이것은 바로 사람의 외모에 비유하면, 비록 코 눈 입 귀는 대체로 같을지라도 구체적인 용모는 천차만별이어서 완전히 같지는 않는 것과 같다. 중국 역사상에서 유명한 서예가들이 끊임없이 출현하여 그 유파가 매우 많고 풍격도 각기 다르며, 우수한 서예 작품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갖가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치이다.
고대 중국의 가장 뛰어난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주로 진대(晋代)의 왕희지(王羲之) 왕헌지(王獻之) 부자, 당대(唐代)의 장욱(張旭) 회소(懷素) 안진경(顔眞卿) 류공권(柳公權) 구양순(歐陽詢), 송대(宋代)의 소동파(蘇東波) 황정견(黃庭堅), 원대(元代)의 조맹부(趙孟 ), 명대(明代)의 동기창(董其昌) 장서도(張瑞圖), 청대(淸代)의 정판교(鄭板橋) 오창석(吳昌碩) 등이 있다. 이 서예 대가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작품은 일찍이 보기 드문 진귀한 보배가 되었다.
만약 중국 고대의 서예를 감상하고자 한다면, 유명한 서예가들의 글씨본과 명승고적상의 제자(題字) 외에도, 중국의 3대 비림(碑林)인 공묘비림(孔廟碑林) 서안비림(西安碑林) 소릉비림(昭陵碑林)이 가장 가볼 만한 곳이다. 거기에는 매우 많은 비석이 모여 있는데, 돌에 새긴 비문의 필법이 정밀하고 뛰어나며 내용이 풍부하여 그야말로 중국 고대 서예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서예는 오래된 예술의 한 영역으로서 고대 중국에서는 매우 번성하였고, 근현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신중국 성립 이후에도 더욱 번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의 지원 아래에서 전국 각지에 서예협회(書法協會)와 서화사(書畵社)가 설립되어 항상 서예의 전시와 연구 토론, 서예의 양성 및 국제교류 등의 활동을 거행하고 있으며, 이렇게 서예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양호한 조건을 조성하여 노 중 청년 서예가들이 매우 활약하고 있다. 현재 전국 서예협회에는 3,800여명의 회원이 있고 유명한 서예가로는 조박초(趙朴初) 유해속(劉海粟) 진숙량(陳叔亮) 계공(啓功) 심붕(沈鵬) 사맹해(沙孟海) 주이복(周而復) 윤수석(尹瘦石) 왕학중(王學中) 방거질(方去疾) 황묘자(黃苗子) 장욱(張旭) 등이 있다,
-자료 출처:중국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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