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 시대와 고려의 건국]
안녕하세요? 고미경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앞에서 설명해 주신 선생님들과 함께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를 바쁘게 지나왔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는, 통일 신라가 말기에 아주 복잡했던 정치상황 때문에 점점 힘을 잃어 가고있고, 그러면서 시작된 후삼국의 형성 과정과 고려의 건국에 대해서 함께 나눠 보기로 하겠어요.
저는 이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조금 후에 함께 보게 될 전시 자료 중 하나인 진성여왕 때 만들어진 ‘오대산 길상탑지’에 새겨진 글을 읽고 시작하려고 해요.
이 글은 신라의 혼란했던 상황속에서 목숨을 잃었던 스님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썼던 글이라고 하네요.
기유년(진성 3년 889년)에서 을묘년(진성 9년 895년) 7년동안 천지가 온통 난리로 어지럽고 들판은 전쟁터가 되니, 사람들이 방향을 잃고 행동이 짐승과 같았으며, 나라는 기울어 질 듯 하고 재앙이 절에까지 이르렀다. 나라와 삼보를 지키려는 마음은 승속이 같은데 숲 속에 난무하고 몸은 바윗돌에서 잃었구나.
이 글에서 엿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는 혜공왕이 살해되면서 시작된 왕위 쟁탈전이, 통일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까지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허덕이고, 나라에 대한 원망만 점점 늘어가고 있었어요. 지방에서는 이렇게 허약해진 왕권을 틈타서 밀려난 귀족이나 해상무역으로 돈을 번 세력들, 그리고 군인출신의 호족들이 자신들의 토지로 경제적인 힘을 키우면서 점점 그 세력을 크게 키워가고 있었어요.
호족들이 이렇게 클 수 있었던 이유는 뒤에서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신라의 골품제도에 불만을 많이 품고 있었던 육두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하고 유학까지 다녀와도 철저한 신분제도 때문에 중앙 정부에 진출할 수도 없었고 이렇게 되니까 자신의 뜻도 한번 펼칠 수 없었거든요. 그러던 차에 비록 지방 세력이지만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났고, 이 육두품들은 국가보다는 지방 호족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로 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돌보아주지도 않고 세금만 뜯어내는 나라에 반발한 백성들이 있었는데요, 이들 생각도 중앙 정부보다는 차라리 호족들의 땅을 일구고 그들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사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호족들을 위해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 말에는 귀족들의 반란과 농민들의 봉기가 많이 있었는데‘ 이것을 계기로 해서, 커진 호족들 중에 드디어 두 나라가 세워지게 되는데, 하나는 옛 백제를 다시 일으키자는 후백제이고 또다른 하나가 궁예의 후고구려입니다.
드디어 한반도는 약해진 신라와 후백제, 그리고 후고구려의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죠.
그러면 지금부터 후백제를 자세히 볼까요?
견훤은 신라 땅 상주 호족, 아자개의 아들로 신라의 장교가 되어 농민 봉기나 이곳 저곳에서 일어난 반란 세력들을 진압하던 중에 사회가 혼란해지니까 오히려 반란군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모아서 무진주(광주)를 점령하고 뒤이어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옛 백제의 부흥을 내걸며 900년 후백제를 세웠던 거에요.
그렇지만 백제의 부흥을 내걸고 나라를 세운 견훤은 신라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자신의 출생을 내세운 탄생설화를 만들게 되었지요, 그 얘기에 따르면 견훤의 아버지는 지렁이이고, 즉 토룡(토룡도 용은 용이니까요.)이고 어머니는 무진주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은 옛 백제 땅에서 태어난 용의 후손이라는 얘기였어요. 지렁이 얘기하다 갑자기 왠 용이냐구요? 좀 우습지만 지렁이는 한자로 토룡, 그래서 용자가 들어가니까 용의 아들이 되는 거래요. 삼국시대 이전에는 하늘의 태양이 최고의 신이였지만 농사를 짓는 지금은 물이 최고이기 때문에 물의 신, 용이 최고의 신으로 생각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 시기의 설화중에는 용이 많이 나타나고 있지요.
후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차지하면서 옛날에 백제 땅이었던 곳을 거의 되찾을 정도로 활략이 대단했지만, 미숙한 정치운영과 왕의 거친 성격은, 전쟁에 진 호족들을 제대로 수용하지도 못하고 마구 죽이거나, 백성에게도 세금을 많이 걷는다거나, 신라의 수도 경주를 습격해서 경애왕을 죽이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견훤을 미워하게 되었어요. 더군다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견훤은 맏아들인 신검을 제치고 4째 아들 금강을 왕을 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화가 난 신검은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금산사에 가둬 버리고 자신이 왕이 되었어요. 물론 동생인 금강도 죽였겠지요. 후백제는 이렇게 세력 다툼에 정신이 없었고, 그러는 가운데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고려에게 스스로 손을 들고 항복하게 되었고, 일년 뒤에는 (936년에) 신검의 군대와 고려군대가 일리천(구미시 낙동강 지류) 전투에서 서로 한 판 승부를 걸었는데 후백제는 그 전쟁에서 지게 되고 나라는 망하게 되었던 것이에요.
이제는 후고구려, 태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견훤이 신라 군인 출신이었다면 궁예는 신라 왕족으로 (헌안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태어날 때 아기의 이가 모두 나 있었다고 해서, 또 그날 하늘의 빛이 수상했다는 이유로 나라를 망하게 할 아이라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궁예는 아버지인 왕의 명령으로 죽어야 했어요. 그렇지만 키우던 유모느 가엾은 생각이 들어 궁녀에게 아기를 몰래 빼돌려 해서 아기는 근근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답니다.
급하게 탈출하는 바람에 궁예는 궁녀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그만 한쪽 눈을 잃게 되었고, 그 후로 절에서 키워졌지만 어려서부터 성격은 매우 난폭했다고 합니다.
나라가 복잡하고 혼란해졌을 때 궁예는 살기 싫은 절을 뛰쳐 나와서 북원지방의 중심세력인 양길의 부하로 들어가서 양길의 뒷바라지를 열심히 하면서도 다른한편으로는 원주, 영월, 강릉과 황해도 일대를 점령해 가면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요. 궁예가 열심히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양길은 점점 더 포악해졌고, 그래서 오히려 백성들은 궁예를 더 좋아하게 되었지요. 마침내 궁예는 자신의 세력을 끌고 송악으로 왕륭을 찾아갔어요. 왕륭은 송악 일대에서 해상 무역으로 어마어마한 부자였고, 그런 왕륭에게 자신이 나라를 세우려는 뜻을 의논하였고, 왕륭은 뛰어난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궁예를 위해 아들 왕건과 함께 일하기로 결심하게 되고, 드디어 궁예는 왕륭과 왕건의 도움을 받아 901년에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후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궁예는 904년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마진으로 세웠고 911년에 한번 더 태봉으로 국호를 고치게 되지요.
궁예는 한때 신라에 반대하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옛날 고구려 땅 주민들의 호응을 받아서 세력이 막강했지만, 거친 궁예의 성격은 점점 드러나게 되고, 다른 사람을 포용할 줄도 모르고 힘으로 무엇이든 해버리는 성격으로 인해서, 항복해 오는 신라 귀족들을 잔인하게 죽이기도 하고, 자신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미륵불이라고 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무조건 죽여버리는 아주 포악한 정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 반면에 부하였던 왕건은 해상무역을 했던 아버지 덕분이었는지 상대방과 협상하는 법도 잘 알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달래주는 능력도 있어서 궁예보다 훨씬 인기가 있었어요.
궁예도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이런 인기는 눈치채었겠지요?
인기 있는 왕건을 질투한 궁예가 왕건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에 왕건은 늘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에 궁예의 신하였던 신승겸,을 (홍유, 배현경, 복지겸등이) 비롯한 몇명이 왕건을 찾아와서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거에요. 왕건은 이곳저곳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드디어 궁예를 쫓아내고 (918년) 새 나라 고려를 세우게 됩니다. 숨차고 지루하게 후삼국을 넘어뜨리고 고려를 세웠으니까, 여기서 잠깐 고려 태조가 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얘기해 볼까요?
왕건은 예언에 따라 왕이 되어야만 할 운명이었다고 합니다. 자, 여기서도 역시 용이 등장합니다.
용왕을 도와준 왕건의 할아버지가 용왕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그 손자인 왕건도 용의 후손임이 확실한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왕건 할아버지가 도움을 준 용왕에게 동쪽 땅의 왕이 되고 싶다고 졸랐대요. 그런데 용왕은 지금은 안 되고 삼건에 가서야 왕이 될 수 있다고 예언을 했다는 거에요. 삼건이란, 할아버지 이름 작제건, 아버지 이름 용건(왕륭의 원래 이름) 그리고 왕건으로 ‘건’이 세 개, 즉 삼건이 되는 것이고, 이렇게 해서 왕건은 운명적으로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지요.
고려는 한 때 후백제보다도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렇지만 태조 왕건은 넓은 포용 정책으로 불교계와 6두품 출신 지식인들을 대우해주고, 항복해 오는 다른 나라 유민들에게도 귀족 대우를 해주었고 혼인 정책으로 크고 작은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점점 백제보다 힘이 센 나라가 되었던 거지요. 특히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거둘 때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백성들의 세금을 줄여주었고 왕건은 그 덕분에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데도 성공을 하였어요. 고려는 스스로 항복해 오는 신라 경순왕을 받아들이면서(935년) 자신보다 힘이 세었던 후백제를 제치고 후삼국 통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조 왕건의 탁월한 정치 능력과 포용력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무엇이든 잘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정치를 했던 고려 태조 왕건은 926년에 요나라에 망한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935년에는 왕실 내분으로 인해 도망친 후백제의 견훤을 받아들였으며 같은해에 스스로 항복해 온 신라 경순왕과 평화로운 합의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936년에 견훤의 아들 신검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드디어 왕건은 후삼국을 완전히 통일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상 두 번째의 통일 국가인 고려는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을 사실상 없앴고, 패망해서 고려에 합해진 유민들과 잘 화합하기 위해서 결혼정책과 그들에게 귀족 대우를 해주는 포용정책을 썼습니다. 또 왕건은 북진정책을 쓰면서 옛 고구려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찾으려고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고려가 통일 신라보다 더 앞선 통일국가의 모습을 가질수 있게 해 주었죠.
*태조 왕건상은 지금 개성에 있는 태조능인 현릉에서 발견된 동상으로써 전체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완전히 벗은 몸에다가 통천관을 쓴 모습입니다. 통천관은 황제가 쓰는 관입니다. 이 관을 쓴 의미는 태조는 스스로 ‘나는 왕이 아니라 황제로써 고려를 세웠다’는 뜻이고 고려는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한 것이고, 그만큼 왕건은 자신의 나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왕건상이 나신을 한것은 영웅숭배전통에서 비롯한 것이랍니다, 또 실제 인물의 크기인 동상에 비해 남근이 2센티미터밖에 안되게 작게 표현한 것은 색욕을 멀리 한다는 불교적 사상에서 나온 뜻이라네요. 실제로 북한에서 이 왕건상이 들어와서 이곳 중앙 박물관에 전시가 됬었는데요, 전시중에는 하반신을 천으로 가리고 전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첫댓글 모래부터는 완전히 방학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