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월간에세이》로 등단
•수필집 『먼 곳 또는 섬』, 『새』, 『감감무소식』 외
•한국수필문학상, 김규련수필문학상, 대구문학상,
약사문학상 수상
•한국수필가협회, 수필문우회, 대구수필가협회 회원
한낱 비닐봉지가 불쌍하다고 했다. 그것의 최대 비참은 불멸이라고 썼다. 폭우가 내리던 날 뒤꼍 단풍나무 가지에 찢어진 검정 비닐봉지가 걸려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높은 가지 위에 흙먼지가 잔뜩 낀 채 찢어진 몸으로 펄럭이다가 생을 마쳤으나 그것은 없어지지 못한다.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대량 생산된, 몸값이 그야말로 싸구려인 그것은 그래서 마구 쓰고 함부로 버려져서 ‘오염’이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도 죽지 못한 채 어딘가에 내박쳐진다.
그 비닐봉지는 어디서 왔을까. 이를테면 김순분 아지매가 시장에 가서 고등어를 샀는데 가게 주인이 비닐봉지에 담아서 건네줬다. 김순분 아지매가 고등어를 씻을 때 검정 비닐봉지는 바람을 가득 물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높이곰’ 솟아서 저 나뭇가지에 걸렸다. 그리고 때마침 내리는 폭우에 저 지경이 되었다. 몇 년 전에 쓴 「김순분 아지매의 비닐봉지」를 요약해 보았다. 그때 나는 사멸하지 못하는 그것이 불쌍하다고 했다. 불쌍한 것들이 넘치고 넘쳐서 얼음조각을 잃어버린 북극곰이 불쌍하다고 썼다.
혹한과 폭서, 유례없는 가뭄과 가공할 만한 폭풍우가 푸른 별 지구의 여기저기에 들이닥쳐서 인류를 위협한다. 재앙이다. 이상기후, 기후위기, 거의 날마다 듣는데 들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온실가스 배출, 탄소중립 같은 전문용어들을 매스컴에서 자주 듣는다. 지난해 파키스탄은 대홍수가 나서 국토의 1/3이 물에 잠겼다. 끔직했다. 오늘 북미 최북단 어디는 체감온도가 –77°C나 되어 문을 열면 바로 동상에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기록적인 폭우와 태풍 힌남로로 수도권과 포항에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인명 피해가 커서 마음 아팠다. 지구는 정말 위기에 처한 것인가.
누구의 잘못인가. 생선가게 주인이 잘못하였나, 김순분 아지매가 잘못하였을까. 내가 생선가게 주인이고 김순분 아지매다. 썩지 않고 재활용되지 않는 쓰레기를 날마다 내놓는다. 아닌 줄 알면서 그치지를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잘 씻어서 분리수거를 하는 정도다. 그건 누구나 하는 일이다. 쓰레기 배출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데 그게 잘되지 않는다. 내가 던진 쓰레기는 모이고 모여서 산더미가 되고 사방으로 흩어져서 지구를 더럽힌다. 그러니 어쩌면 좋으랴.
어느 TV 채널에서 다큐멘터리 「세 개의 전쟁」을 방영했는데 미처 몰라서 1, 2부를 놓치고 3부를 시청하였다. 3부는 ‘인류 최후의 전쟁, 기후 위기’가 주제였다. 지구 최북단 스발바르제도가 주 무대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빙하가 녹아내리면 생태계가 무너
진다고 한다. 빙하 동굴 하나는 지붕이 무너져서 하늘이 보였다. 빙하가 털썩 쏟아져 내리는 장면을 거듭 방영하는데 두려웠다. 스발바르에는 현대판 노아의 방주라 일컫는 씨앗 보관 시설이 있다. 최후의 인류를 위해서 모든 유용한 씨앗의 샘플을 보관하는데 온도 습도가 다 맞아야 한다. 그것은 빙하 속에 묻혀 있는데 빙하의 일부가 녹기 시작해서 씨앗 보존이 어려울 수도 있다고 한다.
지구의 온도가 2°C 오르면 생명 다양성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이 세상에 생존하는 종種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상상이 되는가. 게다가 끔찍하게도 호모 사피엔스의 멸망을 예측하고 있다. 이미 디스토피아가 눈앞에 열려 있다. 우리는 최첨단의 문명을 누리면서 바로 그 문명이 낳은 이기들 때문에 머지않은 미래에 멸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내용들을 담은 내레이션은 가슴 떨리게 했다. 그러니 어쩌면 좋으랴.
일요일 저녁이면 아이들이 모인다. 우리 부부까지 다섯 식구다. 큰아이가 휴대폰을 들고 음식 주문을 한다. 코로나 팬데믹 3년을 겪으면서 비대면으로 음식을 시켜 먹다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일종의 문화가 되었다. 아이들은 모이면 꼭 음식을 주문한다. 나도 못 이긴 척 넘어간다. 음식이 도착하면 펼쳐놓고 먹는다. 대체 이 식탁에 널린 플라스틱 용기가 몇 개냐. 시켜 먹으니까 한두 종류로 그치지 않는다, 먹고 싶은 걸 조금씩 다 시킨다. 자~ 보자. 돈까스, 떡볶이, 비빔국수, 잔치국수, 회초밥이 왔다. 그것들을 담은 큰 그릇들과 갖가지 소스를 담은 작은 종지들이(플라스틱 숟가락과 나무젓가락은 주문할 때 넣지 말라고 한다.) 식탁을 가득 채운다. 잘도 먹으면서 뭔가 켕겨서 변설을 늘어놓는다. 탄소중립, 어렵다. 기업이, 국가가, 세계가 할 일이 따로 있겠지만 개개인이 해야 할 바는 너무나 뻔하다. 더도 덜도 아니고 오직 생활쓰레기를 줄이는 일일 터. 오, 그러나 아이들은 다음에도 시켜 먹을 것이고 나는 또 눈감고 넘어가겠지. 잘 알고 있으면서 잘못하고 있다. 이번에만, 이것만, 나 하나쯤 하면서 거듭 오류를 범한다. 그러니 어쩌면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