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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111)
띠 띠는 비유....
본문 : 21:15-23
예수님의 비유 설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긴 말씀의 여정에 함께 동참해 주신
성도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때로 긴장되고, 고민되었지만,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베드로를 찾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디베랴 호수)에서 고기잡이 하던 ....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물을 내리는 순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153마리).
그 순간 눈치 빠른 요한이
“주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듭니다.
단 1초라도 먼저 주님을 만나기 위한
베드로의 열정과 사랑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며
제자들을 부르신 주님은 ....
제자들을 위해서 친히 준비하신
떡과 고기를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손수 떡을 가져다주시고
생선을 발라 주셨습니다.
단 한 마디의 책망도 없으셨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함께 해야
진정한 친구요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모두는 다 도망갔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불신앙과 신의를 저버린
행위에 대한 그 어떤 책망의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
오직 사랑으로 그들을 당신의 식탁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진한 사랑
(아가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질문하셨습니다.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6절과 17절에서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질문은 특징이 하나 있는데 ....
비교급으로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
왜 비교급으로 물었을까 ?
그것은 과거 베드로의 장담과
비교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앞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다 자신을 버리고 도망갈 것임을
예언하셨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했습니까?(마 26:31-35)
"모두(다른 제자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하고
장담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자신의 의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기분 나빴겠지요.
그런데 그 말을 가식이나 외식으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그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직 하나,....
자기 자신(수준)을 몰랐습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후 닭이 세 번 울었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
그리고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실감하고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당황하였겠습니까?
마음이 얼마나 찔렸겠습니까?
엉겁결에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글 성경에는 전부 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헬라어 성경에는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육적인 사랑 – 에로스,
친구의 사랑...우정 - ‘필레오’,
가족 간의 사랑
-(성경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개념인데) 스트로게,
신적인 사랑 – 아가페)
주님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 때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가장 높고 고상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필레오’, 곧 친구간의 사랑으로 사랑한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모두(다른 제자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하고 장담하던
베드로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주님이 “네가 아가폐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차마 주님이 물으신
그 사랑으로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주님, 아가페는 안 되고,
그저 친구가 친구를 사랑하는 우정적인
사랑밖에 안 되는 사랑을 합니다.
그 수준밖에는 안 됩니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전의 베드로 같았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
아마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 가면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 내가 이 사람들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늦게나마 깨달았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의지나,
힘이나, 능력이나, 결심만으로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앞에 산산이 깨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교급으로 물으셨지만,
베드로는 비교급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도 베드로처럼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이 깨어지고
겸손해 질 수 있다면,
우리의 실패와 넘어짐은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교만이 깨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실상은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성공이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바로 교만이기 때문에 나의 실패를 통해
겸손해 질수만 있다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두 번째도 똑 같은
질문의 반복입니다(16절).
비교급은 아니지만....
주님은 “네가 아가페의 사랑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 역시 똑 같습니다.
감히 아가페 사랑으로 대답을 못하고
필레오의 사랑으로 답변합니다.
16절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물으시는 주님>....
그러자 주님은 세 번째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17절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그런데 이 세 번째 질문에서 사용한
‘사랑’에 해당하는 단어가
앞의 두 번과 다릅니다.
베드로가 대답한대로 한 단계 낮취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수준을 낮춰서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셔서
사랑의 질문을 하시는 것입니다.
왜 아가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의 그 불완전한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베드로가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의 수준으로
당신 자신을 낮추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조건 없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드로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좋아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의외입니다.
베드로가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이 근심의 정체는 무엇일까 ?
베드로가 대답한 대답을 가지고 ....
“네가 나를 필레오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되짚어 물으셨을 때,....
그것마저도 자신이
없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마저도 자신이
없었을 정도로 자기 존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너져 있었습니다.
자기가 이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을 때에도 진심으로 이야기했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진심으로 꺼내놓은
그 사랑의 고백마저도 주님이 되물으셨을 때에....
그 대답마저도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고 말합니다.
“제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주님 아시쟎아요? ....
그럼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하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이것은 진심입니다.
교만이 깨어져 장담은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 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고기 잡다 말고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겉옷입고
호수로 뛰어들었겠습니까?
“자주 실패하고, 자주 쓰러지고,
자주 넘어지지만 그래도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연약, 내 실패, 내 모든 부족함 그대로,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부족한 사랑이라도, 낮은 사랑이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주님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라도...
우리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만만하고 교만할 때
자신의 양을 맡기시지 않고...,
실패하고 무너진.....
그러나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앞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반을
예언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눅22:31-32 읽어라>
31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하나님은 애굽의 왕궁에 있던 혈기왕성하고
자기 의로 가득찬 모세를 들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미디안의 광야에서
오랜 시간 자신을 내려놓은
모세를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자기를 내려놓음으로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의가 깨어진 베드로를
주님께서 당신을 대신한 목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철이 없고
모를 때에는 자기를 덧칠하는 싸움을 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고..,
잘못된 열정과 잘못된 헌신으로
‘하나님 앞에 내가 이 정도다.’ ...
그리고 잘못된 경쟁과 비교를 통해서
계속 자기를 덧칠하는 싸움을 합니다.
베드로의 전반기 생애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깨졌습니다.
자기 의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신앙이라는 것은 내 열정과 내 열심과
내 헌신을 뿜어내는.....
그래서 내가 이 정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출발점은 무엇입니까?
“내 속에 여지가 없구나.
내 속에 가능성이 없구나.
내 안에 주님이 일하셔야 되겠구나” 하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오히려 나 같은 어눌하고 부족한 사람을
주님께서 생명을 내어주실 만큼 사랑해주셨고...
나 같은 사람에게 귀한 직분을
허락해 주셨구나하고 감사하고
더욱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띠 띠는 비유>....
그리고 나서 주님은 이후로 달라질
베드로의 생애를 비유를 들어
예언하여 주십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유대인이 입는 옷은 겉옷 위에
띠를 띠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띠를 띤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남이 띠를 띠어 준다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행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 내용은....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할 것을 예수님께서
예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19절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후로의 삶이 자신이 주인 된 삶이 아니라,
성령께 사로잡힌바 된 삶을
살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 충만하여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에도
죽음이 두려워 도망가던 베드로가 ....
성령 받은 후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말하지 말 것을
협박 받았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행4:18-19절 읽어라>
18절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일으킨 후,
신문하는 대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그리고 끝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는 영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남이 자신을 죽음의 자리로 끌고 가려고
띠를 띠는 순간에도 두 팔을 벌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을 감격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해 주신
주님의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성령님의 충만하신 역사가 이 일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진정한 제자됨이 무엇인지를
교훈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것 같이"(롬 15:3)....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됨을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권한을 내려놓는 것이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눅 14:26-27 읽어라>
26절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믿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자기 인생의 띠를 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두 팔을 벌려 주님에 의해 띠 띠워져,.....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신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베드로와 같이 겸손해져.....
온전히 주님의 손에 의해 띠 띠워져 ...
주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쓰임 받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띠 띠는 비유’의 말씀을
하신 후 “나를 따르라”(1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대답 대신 뒤를
돌아다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요한의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본문 20-21절 읽어라>
20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요한을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패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요한을 보았을 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왜 나만 늙어서까지 두 팔을 벌리고
남이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끌고 가는
꼴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도 종종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왜 나만 교회 일을 다 해야 하지?
왜 나만 꾸중을 들어야 하는 거야?
왜 나만 이래야 하는 거야?”
그래서 남을 끌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물귀신 작전이란 말이 있습니다.
죽어도 나만 죽을 수 없다는
심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우리가 함께 신앙생활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주님께
등을 돌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바로 서야 합니다.
진리의 절대성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상대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옆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시다.
“당신이 내 신앙의 기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드로는 베드로지 요한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답게 사는 것이지
요한처럼 사는 것이 아니야" 하고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너는 나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고
요한은 요한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23절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것입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요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있습니다.
진리의 절대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명과 은사는 다 다릅니다.
내게 주어진 소명을 따라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따르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