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흥동 호압사
호랑이 기세 누른 절, 나눔으로 세상과 통하다.
호암산 호압사는
역성혁명 일으킨 이성계
반란 다스리는 상징으로
사찰 세워 ‘호랑이’ 제압
근대엔 서민들 도량으로
▲호압사는 호암산 둘레길과 맞물려 있다. 일요일이면 잠시 쉬어가려는 등산객들로,
혹은 산책 삼아 찾아 온 인근 주민들로 늘 북적인다.
정묵 스님은 사찰 문을 활짝 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포교라고 강조한다.
호암산(삼성산) 호압사(주지 정묵 스님)는 서울 금천구 유일의 전통사찰이다.
산문 앞에 ‘호암산 호압사’라 새겨진 육중한 바위가 서있다.
산문을 지나면 가파른 언덕길이다. 오르다 문득 뒤돌아보면 저 멀리 온통 아파트들이다.
그만그만한 크기에 그만그만한 색을 칠했다.
그 속에 또 그만그만한 인간들을 품고 있을 것이다.
다시 언덕을 오르자 먼저 온 가을이 길 위에 드문드문 잎들을 뿌려 놓았다.
절 앞에 이르니 호압사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호랑이(虎)가 들어간 이름과 달리 아담하고 정갈하며 또한 예쁘다.
산 위에서 내려온 단풍은 아직 호압사 경내를 범하지 못했다.
창건 때 심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아직 푸른 잎을 달고 있었다.
경내에는 제법 넓은 원두막이 있다.
바쁘게 종종 걸음치는 사람들에게 잠시 쉬었다가라는 ‘여백’ 같아 보였다.
호압사는 호암산 둘레길에 물려있다.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타난다.
그러니 호압사 가는 길이 무수히 많은 셈이다.
▲호암산과 둘레길을 찾은 사람들이 경내 원두막에서 쉬고 있다.
호압사란 사찰명은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없을 것이다.
‘호랑이를 누른다’는 호압(虎壓)은 절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만큼 그 속에는 분명한 사연이 있다.
창건에 관한 전설에서 황당함을 지우고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하고 개국을 선언했지만, 칼에 묻은 피를 채 씻어내지 못한 시기였다.
짓던 궁궐이 몇 차례나 무너져 내렸다.
낮에는 멀쩡한데 밤이 되면 어찌된 일인지 부서지고 넘어졌다.
역성혁명으로 잡은 왕권이기에 매우 불길했다.
권력의 상징인 궁궐이 있어야 했지만 공사는 진척이 없었다.
태조 이성계는 초조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이 눈에 어른거렸을 것이고,
누가 다시 모반을 할지 두려웠을 것이다.
꿈을 꾸었다. 반쪽은 호랑이 모습이고, 반쪽은 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은 불을 뿜으며 궁궐 공사현장을 짓이기고 사라졌다.
이성계는 놀라서 잠이 깼다. 꿈속의 괴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달빛 고인 뜨락을 거닐다가 문득 눈을 들어 한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달빛 아래 멀리 남쪽 산봉우리가 달려들듯 다가왔다.
바로 꿈에서 본 괴물 형상이었다. 관악산 옆 삼성산이었다.
인왕산 바위를 정면으로 노려보며 한양을 집어 삼킬 듯 앞발을 움켜쥐며 포효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무학 대사를 찾았다.
대사는 삼성산에 올라 거대한 호랑이 바위의 심장부를 찾아냈다.
그곳에 절을 짓고 호압사라 명했다. 이름대로 ‘호랑이 기세’를 누르려고 했던 비보사찰이었다.
그것은 정통성이 없는 개국의 무리들이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조를 지키다 죽어간 충신들의 기세는 삼성산 범바위처럼 용맹스러웠으니
변절자들은 두려웠을 것이다.
호압사만으로도 안심할 수 없어 근처에 호랑이 바위를 겨냥한 화살다리,
즉 궁교(弓橋)를 설치했다. 또 호랑이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동물인 사자를 불러왔다.
십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사자암을 지은 것이다.
호압사가 호랑이 내부를 짓누르고 있다면
사자암은 외부에서 기운이 번지는 것을 막아내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모자라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지금의 시흥3동에 탑을 세워 호랑이 기세를 묶어두었다.
호압사는 1394년(태조 3)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창건의 얘기는 선명하게 전해지지만 그 후의 변천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호랑이 기운을 다스려 반대세력을 무력화시켰는지 몰라도,
정작 호랑이는 내부에 있었다. 왕자의 난이란 왕실반란이 있었고,
이성계는 자식에 의해 유폐되는 운명을 맞아야했다.
태조와 무학 대사가 사라지자 자연 호압사도 잊혀졌을 것이다.
호압사는 1841년(헌종 7)이 돼서야 기록에 나온다.
그해 두 사람의 상궁이 시주하여 법당을 고쳐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잊혀졌다.
그러나 민초들은 끊임없이 호압사를 찾았다.
왕가 대신 백성들이 절을 지켰다.
거대한 바위산은 ‘정치’를 벗어나 서울 외곽 가난한 사람들의 소원을 품었다.
서울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바위산 밑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고향을 떠나왔거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산 뒤라서 도시의 불빛도 찾아들지 않았다.
몸은 비록 판잣집에 뉘었지만 그들에게는 내일이 있었다.
김경숙(66세, 불명 능인화) 보살이 처음 호압사를 찾아 온 것은 1979년 봄이었다.
딸만 둘을 두고 있던 김씨는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처를 찾고 있었다.
물어물어, 고개를 넘고 넘어 호압사를 찾았다. 호압사 경내는 황량했다.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법당을 지키고 있었다.
법당은 작고 낡았지만 그 속의 부처님은 단정하고 근엄했다.
약사여래부처님(서울시 문화재자료 제8호)은 소원 하나씩은 들어주신다고 했다.
그 앞에 날마다 무릎을 꿇었다. 능인화 보살은 이듬 해 아들을 얻었다.
재진, 성광, 원욱, 정휴, 원형 스님이 다녀갔고 지금은 정묵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다.
호압사에서의 33년, 김 보살과 호압사에서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공양간이 없어 부처님오신날이 오면 야외에서 음식을 장만했다.
연료도 변변치 않아 생솔을 태웠다. 그 매운 연기에 너나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경내에 물이 없어 보살들의 남편들이 물지게를 지기도 했다.
신도들도, 절도 모두 가난했지만 돌아보면 정겨운 풍경들이다.
김경숙 보살과 호압사는
득남 소원 풀고 불사에 전념
다친 남편 기적같이 회복 후
부처님 가피 이웃과 나누려
일요일마다 무료 국수 봉사
1994년 원욱 스님이 불사를 일으켰다.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 등을 지었다.
비로소 전통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봄날 법당에 괴한이 잠입했다.
마침 김 보살이 성지순례를 떠나는 날이었다. 이상하게 부처님을 뵙고 싶었다.
새벽 절에 들었다. 경내는 어둠이 채 빠져나가지 않았다.
법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부처님을 올려다 본 순간 까무러칠듯 놀랐다.
부처님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누군가 부처님 얼굴과 몸에 신나를 뿌리고 페인트칠을 했던 것이다.
그 일로 부처님은 개금을 해야 했다. 금색 옷을 입어야 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지금껏 알지 못한다. 오직 부처님만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단정히 앉아계신다.
집안에서도 큰일이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3층 집 옥상에서 떨어졌다.
식구들은 집 문짝을 떼어 들것을 만들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남편을 살펴 본 의사들은 다시 걷기 힘들 것이라고 했다.
김 보살은 울면서 기도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구했다.
그런데 기도 중 어느 순간 자신이 보였다. 참으로 하찮은 존재였다.
그러자 부처님이 많은 것을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에 가장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도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구나.’
▲일요일이면 점심으로 국수를 나눠준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국수 한 그릇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
남편은 다시 걸었다. 주변은 물론이고 의사들도 기적이라고 했다.
김 보살은 받은 것 만큼 부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것은 봉사였다. 섬김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 그들을 품었다.
요즘은 일요일마다 절을 찾아오는 일반인들에게 나눠주는 ‘국수 공양’을 돕고 있다.
무료로 베푸는 것인 만큼 더 신경을 써야한다.
100명도 넘는 봉사요원들과 함께 국물 맛을 내는 재미에 빠져있다.
인근에 소문이 나서 지금은 1000그릇이 넘게 나간다.
점심 공양을 한 사람들은 다시 찾아온다.
그러고 보면 한 그릇 국수에도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김 보살은 그래서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봉사 활동의 중심에는 정묵 주지스님이 있다.
스님은 봉사야말로 최고의 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베푸는 것이 가장 확실한 비움이며, 또 비워야 비로소 채울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호압사는 경내를 24시간 개방하고, 또 곳곳에 쉼터를 마련하고 있다.
호압사는 종일 사람들로 붐빈다. 등산복 차림으로도 스스럼없이 경내에 들어선다.
한 켠에 마련된 원두막에는 책을 읽거나 태연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스님은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경내를 쓸고 법당을 닦는다.
빗자루와 걸레를 쥐고 있는 스님- 세상을 닦는, 참으로 멋진 모습이다.
호압사는 편하게 열려 있고, 사람 속으로 내려와 있다.
어찌 보면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다.
민초들이 끊임없이 밟고 있으니 호랑이의 나쁜 기운은 사라졌을 것이다.
호압사가 있음으로 호암산 범바위는 서울을 향해, 그리고 누리에 불심을 뿜을 것이다.
2012. 10. 31
김택근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