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
“나를 놓아가는 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자유로워지는 과정”
8살 때 5남매 친척·절에 의탁 막내 동생과 손잡고 실상사
지하 스님과 은사 인연 맺고 1986년 출가해 사문의 길
조계종 종단개혁·실천승가회 활동하며 인권·환경에도 헌신
참선·명상수행 병행하며 두 수행법의 정수 관통
대념처경·반야심경 접목한 무상·무아 통찰 수행법 지도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은 “젊었을 때부터 펜, 종이,
그리고 경전 한 권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며 “주련 하나, 경전 한 구절 읽고 음미하며
느낀 감정을 원고지에 진솔히 담아가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2015년 10월의 가을.
쌍계사 새벽예불을 마치고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 봉안돼 있는 금당(金堂)으로 향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도량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금당까지 길게 놓인 돌길!
성스러웠다. 중국 남종선(南宗禪)을 이끈 육조 혜능 스님에게 연결된
태고(太古)의 탯줄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참배 때마다 마주했지만 이토록 압도적으로 느껴보는 건 처음이다.
돌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연거푸 일곱 번의 절을 올렸다. 고개를 들었다.
기둥에 걸린 육조 혜능 선사의 선시가 새겨진 주련이 시야에 명징하게 잡혔다.
菩提本無樹(보리본무수)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하처약진애)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가 심중에 박혀온다.
순간, 무겁게 지고 있던 등짐이 ‘툭’ 떨어지는가 싶더니 갑갑했던 가슴이 뚫렸다.
그리고 이내 새벽의 차고 맑은 바람이 들어찼다.
인월에서 유년을 보내던 8살 때 넉 달 사이로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장남을 제외한 네 남매는 친척 집과 절로 흩어졌다.
이 절, 저 절로 거처를 옮기다가 외할머니를 따라 영원사에 들었다.
그곳에서 4년 전 헤어졌던 바로 아래의 막내 동생을 만났고,
얼마 후 동생과 함께 실상사에 들었다.(1977)
백장암, 약수암, 상무주암 등 지리산 기슭의 절을 순례하듯 다니며
해우소 등의 도량 청소를 평생 도맡았던 ‘수덕화 보살’이 외할머니였다.
한 암자에서 일 마치고 나면 바랑 하나 메고 다음 암자로 유유히 떠나는
‘수덕화 보살’은 지리산 자락에서 ‘도인’으로 소문났을 정도로 안목과 신심이 깊었다.
그런 외할머니가 실상사에 주석하고 있던
지하 스님에게 저간의 사정을 어렵사리 털어 놓았던 것이다.
“데려오세요. 제가 학교도 보내며 키우겠습니다.”
형이 새벽 도량을 돌며 목탁을 칠 때 동생은 종을 쳤다.
훗날 하림 스님은 지하 스님과 사제인연을 맺었고 동생은 노무사가 되었다.
은사는 지하 스님과 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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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 대작불사 대열에 은사 스님을 따라 뛰어들었는데
비구니스님들의 숙원이었던 동국대 종비생 기숙사 ‘평창동 혜광원’을 여는데
중추 역할을 담당했던 장본인이 당시 석림회장을 맡았던 하림 스님이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에 몸담으며 인권·평화·통일·환경 등
불교의 대사회적 역할을 다하는 데도 젊은 열정을 바쳤다.
어느 날, 미국 뉴욕의 불광선원에 머물고 있던 일미 스님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하버드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부득이 절을 떠나야 하는데
홀로 계신 주지 휘광 스님이 걱정이 된다는 얘기였다.
“쉰다 생각하고 6개월 정도만 머물러 달라”는 청에 미국으로 날아갔다.
해외포교에 매진하는 휘광 스님을 정확히 6개월 보필한 후 귀국했다.
그런데 케네디공항까지 배웅 나왔다가 홀로 돌아가는 휘광 스님의 뒷모습이 아른거렸다.
다시 불광선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6개월 마다 귀국과 출국을 네 번이나 반복하다보니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다시는 미국에 오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도반들과 ‘미국 종주’ 여행도 했더랬다.
한국에 내린 자신의 뿌리를 더욱 깊게 내리려함이었을 것이다.
케네디공항에 닿기 전 휘광 스님은 “공양하자!”며
뉴욕 퀸즈의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으로 데려갔다.
식당으로 들어서려는데 길 가던
한국인 할머니가 붙들더니 골목으로 끌고 가다시피하고는 말했다.
“스님, 한국에서는 평생 절에 다녔는데 여기 와서는 갈 수가 없습니다.
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후 한국인 할아버지와 마주쳤는데 반색하며 말했다.
“승복 입으신 스님 만나니 참 좋습니다.”
귀국해 잠시 쉬었다가 2년의 체류가 가능한 종교비자를 받아
2003년 1월 다시 미국 뉴욕 땅을 밟았다.
휘광 스님에게 건의해 ‘뉴욕조계종연합회(회장 휘광 스님)’를 결성하고는
플러싱에 사무실을 두고 사무장을 맡았다.
한국어와 영어로 쓰인 ‘뉴욕불교’를 창간 해 한국문화와 불법의 정수를 전했고,
뉴욕을 중심으로 한 한국사찰의 연대도 탄탄히 다졌다.
2005년 11월 부산의 미타선원 주지를 맡으며 수행을 토대로 한 포교의 장을 열었다.
벽송사 월암 스님에게 자문을 구해 ‘행복선수행학교’를 열었고,
서장·선어록·육조단경·선요 등의 강의 프로그램만도 6년을 진행했다.
아울러 지금의 동방문화대학원대학에 입학해
한국 명상계의 대가로 손꼽히는 인경 스님의 지도를 받으며 4년간의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행복선명상상담센터를 열어 후학 양성의 발판을 삼았는데
인경 스님과 서광 스님의 도움이 실로 컸다.
2년간의 ‘뉴욕조계종연합회’, 10여년간의 미타선원을 쉼없이 이끌어왔던 탓이었을까?
“절 집에 든 이상 밥값은 해야 한다”는 생각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하림 스님에게 언제인가부터 그것은 태산보다 무거운 ‘짐’으로 작용했는데
그게 쌍계사 금당 앞에서 내려놓아진 것이었다.
하림 스님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술회한 바 있다.
‘밤사이 무서운 호랑이에 쫓기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처럼
현실에서도 의무감과 강박감이 쫓아옵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말에 갑자기 나를 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아무것도 나를 쫓아오지 않는다’라는 현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비로소 고요와 평화를 만납니다.’
그해 동안거 때 쌍계사 선원에 좌복을 깔고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6년 10월 미타선원 주지도 도반에게 맡기고는 길을 떠났다.
여름에는 프랑스 등지의 플럼빌리지, 겨울에는 백장암·벽송사로 걸음해 동안거를 보냈다.
명상·참선수행을 병행한 후 2020년 6월 미타선원 주지로 돌아왔다.
10년 명상 노하우 응축해 CM명상상담센터 개원
“도통하겠다” 잦은 가출에 묵묵히 기다려 준 은사 존경
펜·종이·경전 한 권이면 만족진솔함 담긴 글 쓰고 싶어
2021년 3월 ‘CM(Clear Mind) 명상센터’가 개원했다.
2021년 3월 새롭게 문을 연 ‘CM(Clear Mind)명상센터’에서 미타선원 주지 하림 스님을 만났다.
평생의 은사 지하 스님을 어떻게 시봉했는지를 여쭈니 크게 웃으며
“은사 스님께서 저를 ‘시봉’하셨습니다. 속 많이 썩혀 드렸습니다.”
진주 대아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은사 스님이 잘 아는 신도에게 부탁해
방도 잡고 밥도 해주도록 세심히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석달 후 ‘학교 공부 의미 없다’는 편지 한 장 남기고 지리산 영원사로 떠났다.
‘사제지간의 대충돌’은 단 하나의 사안에서 비롯됐다.
“공부해라!”
“도통하는데 학교 공부는 필요 없습니다!”
이전에도 봄·가을이면 ‘도통하겠다’며 가출해 학교를 일주일씩 빼먹곤 했다.
영원사에 머물던 스님들이 반겨주며 던진 말들이 일품이다.
“잘 왔다. 그 공부를 왜 해. 이 공부를 해야지!”
‘일단 왔으니 잠시 머물라’는 뜻의 농반진반의 말인 줄 알면서도 은근히 위로가 되었다.
‘여기가 진짜 내 세상이지!’
대충돌에 따른 후폭풍이 엄청났을 법한데 하림 스님은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큰 소리로 나무란 적이 없으셨습니다.
가출한 제가 어디 있는지를 아시지만
직접 찾아오시거나 사람을 보내 전갈을 띄우지도 않으셨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돌아온 제자를 보고는 은근히 기뻐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를 묻고, 저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주시고는
‘너의 생각도 일리 있다’고 인정해주셨습니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장을 연임한 지하 스님은
세납 60대 중반이던 2004년 겨울 문경 봉암사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봉암사 3년·정혜사 3년의 동·하안거를 성만했다.
실상사, 쌍계사, 자재암 등 주지와 여덟번의 중앙종회의원을 지내고도
인천의 200평 남짓 작은 절 법융사가 전부였을 정도로 소박한 삶을 지향해왔다.
사실 그 절을 소유한 것도 동두천 자재암 주지를 맡을 때 찾아온
비구니스님이 “무허가이지만 절을 인수해 달라”는 간청을 외면할 수 없어서였다.
몸 뉘일 만한 공간은 절 살림 도와주는 두 보살님들에게 다 내어주고
다락방에 머무르며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은 지하 스님이다.
하림 스님이 품고 있는 공심·원력·수행력. 아마도 그 시원은 은사스님만의 무언의 가르침일 것이다.
“지금은 부산 영도로 모셨습니다.
가까운 곳에 계시기에 아침공양도 함께 하고 미타선원으로 초청해 법문도 청해 듣습니다.”
2019년 하림 스님의 명상상담 노하우를 응축한 ‘행복선명상센터’를 열었다.
지금의 ‘CM명상상담센터’ 전신이다. 명상을 위한 교재들이 있는데
일상에서도 구체적인 수행을 올곧이 할 수 있도록 짜놓은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특히 ‘대념처경’의 신수심법과 ‘반야심경’의 무상·무아의 관계성을 파악해
구축한 단계별 명상법이 이채롭다.
“‘대념처경’ 서두에 나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의 청정을 위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기 위한 것이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다.”
신수심법을 통해 해탈·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반야심경’ 서두에도 ‘몸으로 마음으로 경험하는 것들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임을 분명하게 보고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 경의 맥이 통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대념처경’의 신수심법 수행을 한 후
‘반야심경’을 들여다보면 무상을 좀 더 명징하게 체득할 것 같다.
‘CM명상상담센터’는 일반 명상 수련원은 물론
승속을 떠난 지도자 배출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명칭에서도 엿볼 수 있듯
‘상담’에도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다.
“도반스님들을 만나 얘기하다 보면 이런 말을 자주하거나 듣게 됩니다.
‘절에 오는 사람은 없는데 정신병원으로 향하는 사람은 줄을 섰다.
’ 심리치료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인데 불안감, 우울증, 알코올 중독에 빠진
현대인들이 의외로 많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지 오래입니다.
명상과 심리치료를 겸한 명상상담이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유수 사찰, 아니 전 사찰에 명상상담 센터가 들어서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미타선원 전경.
그렇다고 해서 미타선원이 명상수행 프로그램만 가동하는 것은 아니다.
극락보전이 있고 참선과 명상수행 공간이 따로 독립돼 있다.
기도, 염불, 명상, 참선을 택할 자유는 신도들에게 있다.
미타선원 외의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지 궁금했다.
“젊었을 때부터 생각해 왔습니다. ‘펜, 종이 그리고 경전 한 권이면 족하다.
내 생애 더 이상 필요한 건 없다.’ 그러고도 ‘뭔가 해내야 한다’는 생각만 좇아 달린 저입니다.
주련 하나, 경전 한 구절 읽고 음미하며 느낀 감정을
원고지에 진솔하게 담아가는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정말이지 이제는 펜, 종이, 그리고 경전 한 권이면 족합니다.”
미타선원과 CM명상상담센터 사이에 서 있는 용두불(龍頭佛)이 한껏 미소를 머금었다.
참 마음 편한 도량이다. ‘명상힐링 도량’으로 정평이 난 그 이유를 알겠다.
언제가 법보신문 기고에서 큰 울림으로 다가온 글이 떠올랐다.
‘나라는 존재를 놓아가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2021년 5월 12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