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장26-31절 비아돌로로사의 길 중에서 260408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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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아 돌로로사, 억지로 지워진 은혜의 십자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걸으셨던 그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앞에 서 있습니다. 이 길은 라틴어로 '고난의 길',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판결을 받으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이어지는 이 여정은, 인류 구원을 향한 주님의 처절한 걸음걸음이 새겨진 길입니다. 오늘날 이 길은 이스라엘의 북적이는 도시 한복판을 지나가는 평범한 길처럼 보이지만, 그날 그곳에는 하늘 아버지의 눈물과 아들의 핏방울이 가득했습니다.
주님은 이 여정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마주하십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구레네 사람 시몬'과의 만남입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로마 병정들에게 서른아홉 대의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신 후였습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마디가 드러나는 고통 속에서, 그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파른 언덕을 오르기란 인간의 몸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쓰러지고 또 쓰러지자, 로마 병정들은 당황했습니다. 사형수가 골고다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때 로마 병정들이 사용한 것이 바로 '즉시 징발권'입니다. 길가에 서 있던 누구라도 지목해서 일을 시키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무서운 권한입니다. 마침 시골에서 올라와 구경하고 있던 덩치 큰 사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 이리 와! 이 십자가 대신 져!" 시몬의 입장에서 이게 얼마나 날벼락 같은 일입니까? "왜 하필 접니까? 저 사람은 죄수고 나는 아무 죄도 없는데, 왜 내가 이 부정한 사형틀을 지고 가야 합니까?" 시몬은 억울했을 겁니다. 분통이 터졌을 겁니다.
원래 그 자리는 누구의 자리였습니까? "주님, 죽는 데까지 따라가겠습니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의 자리 아닙니까? 하지만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십자가와는 아무 상관도 없던 이방인 시몬이 억지로 그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놀라운 반전이 여기 있습니다. 이 '억지로 진 십자가'가 시몬의 가문을 살렸습니다! 훗날 성경을 보면 그의 아들 루포가 초대교회의 귀한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주님은 홀로 지기 힘든 그 고난의 여정에 함께 짐을 나눌 사람을 붙여주셨고, 억지로라도 순종한 그에게 복음의 문을 여시는 마땅한 상급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2. 성극의 추억 속에 담긴 십자가의 실재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교회에서 성탄 전야 성극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로마 군병 역할을 맡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친구 옆에서 채찍을 휘두르며 "빨리 가!"라고 소리치는 역할이었지요. 중학교 난간에 십자가를 매다는 연출까지 하며 나름대로 열연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는 그때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성령 체험도 없고 은혜도 없으니, 그저 연극 대사에만 충실했지요.
그런데 깜깜한 밤, 채찍질 소리가 "착!" 하고 울려 퍼질 때마다 객석에서 성도들이 펑펑 우는 겁니다. 고등학생인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울지? 이건 그냥 연극인데?' 하지만 여러분, 은혜를 아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당하신 실제적인 통곡이었던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도 처음에는 억지로 그 길을 걸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과 나란히 걸으며, 주님의 눈빛을 보고 그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 이분은 죄 때문에 죽는 게 아니구나. 이분은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구나!" 시몬은 비아 돌로로사의 길 위에서 단순한 구경꾼에서 십자가의 동역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삶의 무게가 억지로 지워진 십자가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 길 끝에 주님의 위로와 가문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3. 예루살렘의 딸들아, 시대를 위해 울라
십자가 행렬 뒤에는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인들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처참하셨으면 여인들이 저렇게 울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돌이켜 그들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씀은 위로가 아니라 준엄한 경고이자 사랑의 예언이었습니다.
주님은 40년 뒤인 AD 70년에 일어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 계셨습니다.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성벽을 에워싸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만큼 처절한 파괴가 일어날 그날을 보신 것입니다. 그때 잉태한 자와 젖 먹이는 여인들이 겪을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배고픔에 지쳐 자기 자식을 삶아 먹을 만큼 비참한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주님은 "내 죽음을 동정하지 말고, 곧 닥칠 너희의 심판을 대비하며 중보의 눈물을 흘리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예언적 원근법'으로 말씀하십니다. 눈앞의 예루살렘 멸망과 먼 훗날의 인류 종말을 겹쳐서 보여주십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죄 없으신 생명 나무 예수님께도 이런 고난이 임했다면, 죄로 인해 바싹 말라버린 인간들이 맞이할 심판의 불길은 얼마나 뜨겁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흘려야 할 눈물은 주님을 향한 값싼 동정이 아닙니다. 우리 자녀의 신앙을 위해, 이 민족의 미래를 위해 가슴을 치며 우는 중보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4. 역사의 파도와 종말의 시간표
지금 세계 정세를 보십시오. 중동에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식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란, 그리고 미국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 세계의 경제와 안보, 그리고 에너지가 얽힌 거대한 폭풍입니다. 중동 전쟁은 곧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달러화의 위기가 오고, 석유 주도권이 흔들리고, 러시아가 그 틈을 타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이 냉혹한 국제 정세는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시간표가 가동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단순한 경제적 타격을 걱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기름값이 올라서 큰일이다, 물가가 올라서 살기 힘들다"는 탄식을 넘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역사를 움직여 가시는 종말의 징조들을 보며 영적인 믿음의 안목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은 잠들 때가 아니라,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5. 이너 서클의 장벽을 허물고 열방으로
왜 이스라엘은 주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비극적인 역사를 걷게 되었을까요? 살길은 분명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깨닫고, 짐승의 피 제사를 폐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돌이켰다면 그들은 열방을 구원하는 제사장 민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오랜 핍박 속에서 '이너 서클(Inner circle)'의 성향을 너무나 강하게 키워왔습니다. 외부에서 치이고 억눌리니까 자기들끼리만 뭉치는 겁니다.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전라도 지역이 겪어온 소외와 그에 따른 강력한 결속력을 보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그 결속력을 성경에 근거한 '선민의식'으로 굳혔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았고 너희는 이방인이다!" 이 초롱성 같은 교만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제사법을 주셨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잠시 보는 '사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실체인 아들이 오셨으면 사진을 내려놓고 아들을 맞이해야지요!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성도가 2만 명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을 거부했습니다. 안식일엔 성전에 가서 양을 잡고, 주일엔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이중적인 신앙에 머물렀습니다. "우리끼리 잘 믿으면 되지" 하는 이너 서클에 갇혀버린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촛대를 옮기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악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경건했고 기도하는 교회였지만, 열방을 향해 나아가라는 주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주님은 환난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고난은 아프지만, 그 결과 복음은 예루살렘의 담을 넘어 소아시아와 로마,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6.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한 성도들은 미리 피신하여 생명을 건졌습니다. 비록 유대 사회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회당에서 쫓겨났지만, 그들은 가는 곳마다 물고기 그림(익투스)을 그리며 서로를 확인하고 가정에서 모였습니다. 그 당시엔 화려한 교회 건물이 없었습니다. 몇 명씩 모여 예배드리는 미약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에게는 아브라함부터 내려온 수천 년의 신앙 자산과 사도들의 생생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 영적인 힘이 이방 땅의 갈급한 영혼들과 부딪힐 때, 소아시아 전역에 폭발적인 부흥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사명을 깨우시고, 흩어짐을 통해 위대한 역사를 창조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도 비아 돌로로사의 여정 속에서 두 부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첫째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십자가의 짐을 기꺼이 나누어 지는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억지로 진 것 같은 사명이라도 감당하십시오. 그곳에 여러분 가문을 향한 축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둘째는 시대를 분별하며 자신과 자녀를 위해 눈물로 씨를 뿌리는 중보자입니다.
우리가 울어야 할 대상은 주님이 아니라, 이 시대와 우리 자녀들의 영혼입니다.
중보자가 일어날 때 심판의 역사는 축복의 역사가 됩니다. 멸망의 길은 구원의 길이 됩니다. 피 묻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슴에 새기고, 이 시대를 짊어지고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촛대가 끝까지 머무는 인생, 열방을 살리는 제사장 민족의 사명을 회복하는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비아 돌로로사의 길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을 듣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깊이 새겨주옵소서. 내게 주어진 사명의 짐을 피하지 않고 시몬처럼 짊어지게 하시고, 무너져가는 이 시대를 보며 가슴을 치며 우는 예루살렘의 딸들이 되게 하옵소서. 촛대를 옮기지 마시고 우리를 통하여 대한민국과 전 세계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를 중보자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