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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추에서
김 동 리
졸업반 학생들이 가을 소풍을 가니 나도 꼭 같이 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보다 먼저, 설악산으로 간다기에(역시 같은 졸업반이) 나도 그럼, 하고 응낙을 했었더니, 설악은 너무 멀다고 근교로 갑자기 목적지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로서 볼 때는, 설악은 설악이요, 근교는 근교니까 곳에 따라 갈 수도 또한 안 갈 수도 있는 거지만, 그렇게 하면 통 아이들(졸업반 학생) 생각은 않고 자기만 위주라고 섭섭해할 것 같아서, 이왕 학교를 마치고 나가는 그네들이니까 나도 양보를 할 수밖에 없어, 한 번 더, 그럼, 하고 약속을 했었다. 그것이 마침 C양(지희)과 만나기로 한 날짜와 겹쳐져서 속으로 찔끔했지만, 학생들 쪽에서도 이제 와선 날짜를 물릴 도리는 없으니까 선생님이 하루만 만사를 제폐하시고 시간을 내셔야 한다고 떼를 써서, 그렇다면 점심이나 같이 하고 나 먼저 돌아오게 해달라고 조건을 붙여서 확인을 했던 셈이다. 지희와 만날 시간이 여섯시니까, 아무리 점심이 늦더라도 세시쯤은 일어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다시 한두 시간 이렁저렁 부서진다손 치더라도 그 시간까지는 넉넉 댈 수 있으리란 속셈이었던 것이다.
“근교 어디야?”
“교외선을 타볼까 합니다.”
“교외선?”
나는 왠지 명랑한 느낌이 든다. 언젠가 송추(松湫)로 갔을 때, 뚝섬 쪽으로 돌다가, 거기가 한강 어디쯤인지, 일찍이 보지 못하던, 짙푸른 물을 바로 차창 아래로 내려다본 적이 있었지만, 사실 그 밖에는 그리 선명한 인상이라고 머릿속에 남은 것도 없는 채, 그래도 교외선을 타고 돌면, 무언가 참 즐겁고 명랑한 광경이 많을 것 같은 까닭 모를 기대에 가슴이 부푸는 것 같다.
“교외선 타보셨어요?”'
“음.”
“괜찮겠어요?”
“좋아.”
이튿날, 아홉시에 장군이 차를 가지고 왔다. 아홉시면 내가 자리에서 미처 일어나기도 전이다. 나도 여름철엔 곧잘 일곱시 이전에 일어나지만 시월 하순께부터는 아홉시도 여간 힘들지 않다.
하여간 차를 가지고 왔다는 바람에 더 지체할 수 없어 일어나긴 했지만, 장군더러는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하는 시간만 해도 십오 분 내지 삼십 분 잡아야 할 테니, 짐작해서 하라고 일러두고 바로 세수간으로 갔다. 그동안 장군은 밖에 나가, 택시 운전사와 꽤 오래 말을 맞추다가 끝내 결렬이 난 모양으로 한풀 꺾인 얼굴이 되어 들어온다.
“보내지?”
내가 넘겨짚고 묻는데 그는 덤덤히,
“네.”
할 뿐이다. 붙잡아놓지도 못하고 돌아온 주제에 무슨 여러 말을 늘어놓겠냐는 생각인 모양이다.
옷을 갈아입고, 아침밥 대신 밀크커피를 한 잔씩 들고, 시계를 보니 아홉시 반이다.
“됐어.”
나는 삼십 분보다 지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곧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 집 앞에서 택시 잡기가 특히 어렵다는 것을 장군은 모르리라. 십오 분이 넘도록 끈덕지게 팔을 쳐들고 서 있는 장군에게 합승이라도 타보자고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다. 그의 대답은 “마찬가지 예요” 다.
“이러면 어떡하지?”
나는 차 시간을 걱정하는 것이다.
“박군이 기다리겠지요.”
박군인들 차표를 샀을 경우엔 어떡하겠느냐고 또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선생님 타세요.”
드디어 장군의 개가다.
시계는 아홉시 오십일분.
“차 시간은 어떻게 되지?”
“박군이 기다릴 거예요.”
나는 이번에도 다음 말을 물으려다 그만둔다. 창밖을 내다보니 잔뜩 부옇게 부르튼 하늘이 빗방울까지 질금거리다 거둬들이다 하고 있다.
“날씨 까지 이 모양야.”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린다는 것이 불쑥 이렇게 밖으로 터뜨려 버렸다.
“라디오서도 흐렸다 걘 댔어요.”
장군의 대꾸다.
역 광장 대기소(텐트를 쳐둔 곳)에는 스무 사람가량 나와 있었다.
“이뿐인가?”
마중나온 박군에게 묻는다.
“아직 좀더 나올 겁니다.”
박군의 대답에, 그렇다면 늦은 사람은 나뿐이 아니란 생각을 하며,
“그렇다면 뭐야? 좀더 늦게 차를 보내지 않고…….”
“그렇지만 선생님 이 혹시, 알 수 없어서…….”
박군의 얼버무리는 듯한 대답이다. 내가 딴 데로 새어버릴까 봐 미리 와서 지켰던 모양이다. 곁에 선 장군은 고개를 수그린 채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다. 자기들끼리는 미리 내통이 되어 있었던 듯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메우려는 듯, 또 박군이 입을 열었다.
“졸업반 소풍이라고 하지만 학회 행사가 돼서 학생 전부가 참석하지는 못할 겁니다.”
박군의 이 말은 물론 출발 시간의 문제와 직접 관계되지 않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에 문득 아까 한 그의 말뜻이 깨달아졌다. ……내가 늘 바쁘다고 하니까, 오늘도 아침부터 일찍이 어디 다른 델 나가버릴까 해서, 앞질러 사람을 보냈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가 말하는 ‘학회’란 창작 학회(創作學會)를 가리킨다. 박군은 이 학회의 회장이요, 나는 명색 지도교수로 되어 있다. 따라서 졸업반 소풍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창작 학회의 졸업 소풍이 되므로, 학교측의 다른 교강사¹는 굳이 초청하지 않더라도 지도교수만은 강제 초대라도 해야 할 형편이었다는 뜻이리라. 그런 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니까 더 따짙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다음 차를 타려면 한 시간 남짓 여유가 있다기에 나는 건너편 쪽 다방을 가리키며,
“나 저기 가 있을게.”
광장을 빠져 나왔다.
다방에서 커피와 토스트를 시켜놓고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다.
……안개 낀 부두에……
다방 안의 전축인지 라디오에선지 쉴 새 없이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토스트를 씹으면서도, 곧장, ‘안개 낀 부두에…….’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붉은 입술에 아이새도의 두 눈을 벌려 뜨고 다가오는 환상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안개 낀 부두에…….’의 흐느낌 같은 목쉰 소리가 곧장 내 목을 휘감아온다고 느낄 때 나는 이미 코를 골고 있었던 모양으로,
“선생님 주무세요?”
하는 여자 목소리에 눈을 뜨니, 김양과 이양이 미소들을 짓고 서 있다.
“음, 언제 왔어? 앉아.”
“시간 됐어요.”
둘은 선 채였다. 그녀들이 서 있는 것은 나더러 일어나란 뜻이다.
“그래, 그럼…….”
내가 카운터 쪽으로 가니까,
“선생님 찻값 치렀어요.”
한다.
차가 신촌 쪽으로 돌아간다기에, 먼젓번엔 뚝섬 쪽으로 돌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더욱 좋겠다고 했다. 반대 방향으로 돌면 또한 새로운 흥취가 있을 것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신촌역을 막 떠나려 할 때였다. 박군이, 내 곁에 앉은 장군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 자리에 김 양(명자)과 이양(일순)을 앉힌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정군과 윤군도 이에 동조(同調)하는 셈인지 슬그머니 자리를 내주고 일어나버린다. 이 사람들은 또 왜 이러나, 하고 의아하게 생각한 것도 한순간이요, 그새 이미 박군 뒤에 대기하고 서 있었던 듯한 안양(명희), 최양(경자), 박양(순옥)이 쪼르르 나타나 생글거리며 그 자리를 메운다. 이 지극히 짧은 여행 중이나마 남자보다 여제자 상대하기를 내가 더 즐겨 하리라는 박군들의 배려인 줄 짐작은 되나 나는 내 얼굴이 뜨뜻해짐을 느꼈다. 물론 박군들의 ‘배려’랄 것이 지나치기도 했지만, 그렇단들 얼굴까지 뜨뜻해질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이들과 나는 사제 관계요, 또 내 나이 중로(中老)에 들어 있건만 역시 아직 인간으로서 탈피하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일까. 쓰겁게 웃으며 박군을 돌아다보니 박군은 들고 있던 맥주병을 내밀며,
“선생님 맥주라도 드시죠.”
역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다.
나는 맥주잔을 받으며,
“여자는 모두 이뿐인가?”
누구에게라고 상대도 없이 물었다.
“다섯밖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한데 몰아버린 거예요.”
박군의 대답이다. 그래도 명분으로서 충분하진 못하지만 그만치라도 까닭 있는 일이라면, 하고 나도 좀 어색한 생각이 가셔지며,
“그래, 목적지는 어딘고?”
화제를 바꾸었다.
여자 학생들이 일제히 박군을 쳐다본다. 그녀들은 목적지도 모르는 모양들이 었다.
박군이 다시 곁에 선 장군을 돌아다보며,
“송추?”
하니까, 장군이 그냥 고개를 끄덕인다. 보셨지요 하는 듯이, 이번에는 박군의 시선이 다시 나에 게로 돌아온다.
“송추?”
나의 ‘송추’에는 약간 강한 악센트가 들어 있었지만 그것은 반드시 실망이라든지 반대 의사를 나타내련 것도 아니다.
“아무 데나 선생님 좋으신 대로 가시죠.”
“아냐, 아무 데나 마찬가지야…… 사실은 송추밖엔 가본 데도 없지만……”
“다른 데도 다 마찬가지예요.”
장군이 알아서 하는 모양이니까 이에 대해서 아무도 이의할 사람도 없었다.
“올봄에, 아니 봄이라고 해도 오월이었을 거야, 그때 내 송추 와서 시조 지은 거 있는데 한번 외워볼까?”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자작 시조 「송추에서」를 읊었다.
교외선 타고 돌다가
송추에 내려서 논다
유원지 있단 말 듣고
산협을 타고 드는데
신록에 쏟는 햇빛만: :
목을 타게 하누나
도봉 (道峯) 뒷산이래선지
사람들은 많기도 하다.
무어 볼 게 있다고
이리로들 쏠렸는고
고작이 소주나 마시고
소리 소리 지르네
“이거야. 괜히 송추 송추 하고 찾아들 가지만 아무것도 볼 것 없어. ……하기야 햇빛과 나뭇잎을 봤으니까 그 이상 걸 찾는 그 자체가 속된 생각일진 모르지만…….”
“선생님 그거 발표하신 거죠?”
명자(김양)가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묻는다.
“그렇던가?……무슨 시조 전문 잡지라든가 하는 데서 작품을 보내라기에 이건가 어느 걸 보낸 기억이 있어.”
“선생님 오늘도 시 지으시겠어요?”
경자(최 양)가 묻는다.
“이렇게 하루 그냥 보내기도 아깝고, 또 그냥 술이나 마시고 노는 것보다 그것이 더 즐겁잖아?”
“지금도 시를 생각하고 계세요?”
“아냐, 지금은 최양을 보고 있어.”
우리는 함께 웃었다.
“선생님, 경자(최양) 이쁘죠?”
김양(명자)이 물었다.
“물론.”
나는 사실 명자를 더 이쁘게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까르르 웃으니까 경자가 약이 오르는지,
“선생님 명자 이쁘죠?”
어디 보란 듯이 보복을 했다.
“물론.”
나는 역시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녀들을 그냥 제자로서가 아니고,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여자로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러한 자기 자신에 스스로 반발이라도 하려는 듯이 ,
“늬들, 아무리 사제 관계라 해도, 남자 선생이 여자 제자를 자꾸 이뻐한다는 거 반드시 좋다고 할 수는 없는 거야.”
했다.
이번에는 울같이 둘러서 있던 박군 장군 윤군 들이 더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러나 바로 윤군 옆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정군이 불쑥,
“선생님 그건 위선이에요.”
했다.
박군이 놀란 듯이, 그러나 웃음을 띤 채 정군을 돌아다본다.
나도 물론 정군의 말이 가장 정말이라고 속으로 인정은 하지만
그렇게 탐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나는 무어라도 대꾸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웃으며,
“정군은 소설 공부하는 사람다워. 소설은 사람을 그렇게 보는 편이라고, 소설 시간마다 내가 밤낮 그렇게 가르쳐왔으니까.”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 앞에서 내 자신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인간이 어떻다, 소설이 어떻다 하고 심각하게 파헤치는 척해도 역시 적당히 연막을 치고, 거짓말을 뿌리며 사는 것이 내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또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들어왔다.
‘송추?’ 하고, 내가 아까 가볍게 놀랐던 것도, 그것이 마침 내가 한 번 이미 왔던 덴데 공교롭게도 또 같은 데냐 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때의 동행이 바로 지희였고, 지희 역시 졸업생이라고는 하지만 사제 관계로서는 이네들과 다를 것이 없는 데다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마저 겹쳐진 공교로운 우연들이 ‘송추’에 울린 나의 ‘약간 강한 악센트’ 였던 것이다.
“그땐 선생님 재미있었어요?”
이양(일순)이 묻는다.
나는 이양의 묻는 뜻을 잘 알고 있지만 그때를 화제에 올리기가 거북해서 덤덤히 고개를 약간 끄덕인 채 창턱에 놓아두었던 맥주잔을 집어들었다. 이때 마침 장군이,
“송추는 지금이 나을 거예요.”
해주어서, 쉽사리 화제를 돌리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양이 다시,
“그땐 여러 분이 오셨어요?”
악착같이 파고든다.
“음, 셋이…….”
대수롭잖이 중얼거리며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나도 한 이십 년간이나 학생들을 다루어왔기 때문에 이만하면 나로서도 꽤 능숙한 연기라고 스스로 은근히 믿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좀 핀트가 어긋났던 모양이다. 내가 굳이 ‘그때’를 외면하려는 듯이 느껴졌던지 한참 동안 미묘한 침묵이 흐르더니, 눈치 빠른 김양이,
“여자 분들과 오셨어요?”
정면으로 심문을 펼친다. 김양은 비교적 나의 귀염을 더 많이 받는 아이라고 반우들이 은근히 인정하는 만큼, 이런 경우 나에게 좀더 기탄없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적임자로 암암리에 지적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역시 덤덤히 고개만 약간 끄덕해 보였다.
“둘 다 미인이죠?”
김양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기세다. 이런 경우엔 면저와 같이 고개를 끄덕할 수도 없고, 도리질을 할 수도 없고, 연기에 꽤 자신을 갖는 나로서도 고전을 면할 수 없다. 궁여지책이었겠지만 나는 그냥 히쭉 웃어버리고 말았다. 조작한 웃음도 아니었지만, 우습지도 않은데 어쩌다 그렇게 웃음이 히쭉 나왔는지 내 자신도 잘 모를 일이다. 그것이 그네들에게는 그냥 실소(失笑)로 받아들여진 모양이 었다.
“제가 누군지 알아맞힐게요.”
맞은편에 앉은 최양이 입을 열었다.
일동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최양은 의기양양해서,
“한 분은 선생님 사모님이시고요, 한 분은 거 누구더라……따님이시죠? 그렇죠?
딴은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려는 갸륵한 심정이다.
“늬들은 왜 그런 얘길 하면 그렇게 신이 나 할까?”
나도 이쯤 해서 꽁무니를 빼기 위한 최후의 반격을 가해보는 것이다.
박군이 다시 맥주병을 디밀며 나의 잔에 맥주를 따라주었다.
“자네들도 무얼 좀 마시지?”
나는 얘기 상대를 남자 쪽으로 바꿀 작정이었다.
‘도봉 뒷산이래선지’ ‘교외선 타고’ 도는 소풍객 가운데는 송추를 찾는 이들이 으뜸으로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볼 거라고는 없다. 고적(古蹟)이랄 게 통 없다. 유서 있는 절 하나도 없다. 여러 사람이 앉아 쉴 만한 잔디도 없다. 이렇다 할 만한 수풀도 없다. 적어도 송추역에서 골짜기로 꽤 깊이 파고들어갈 때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봄에서 여름까지는 그렇다. 그래서 나도 오월에 왔을 때는 ‘무어 볼 게 있다고 이리로들 쏠렸는지’ 했을 정도다.
그러나 가을에, 그것도 늦은 가을에 골짜길 깊숙이 파고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꽃보다 더 고운 단풍과 풀들이 있다. 바위도 깊이 들어갈수록 더욱 웅장하교, 물도 해맑아 모래알을 셀 듯이 환히 들여다뵈지만 꽤 깊이 고인 데가 많다. 자꾸 올라가면 폭포도 있다고 해서 이날 나는 우리 학생들을 따라 먼젓번보다는 훨씬 더 들어갔는데 양쪽 산기슭에 어우러진 붉고 누른 풀과 꽃들에 취하여 넓적한 바위 위에 그냥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본디 풀을 좋아하여 이름도 기회 있는 대로 외우려고 힘써왔지만 산기슭이나 강물 가의 풀밭 속에 들어서면 내가 부를 수 있는 이름은 거의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다. 이날 내가 송추 산협에서 만난 풀들도 우선 이름을 댈 수가 없다. 가을풀이 대개 아름답다는 것은 아는 이도 많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그냥 가을풀이어서 아름다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지금 난초(蘭草)란 말을 쓰고자 하지만, 사실 난초의 종류는 몇이나 될까. 사보텐이란 식물은 가꾸는 이가 많아, 칠친에서 얼마를 헤아린다던가, 일천에서 그렇다던가 하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 난초야말로, 사보텐처럼 아끼는 이가 있어 각각 그 이름을 따로 붙일 수 있다면 아마 이에 견줄 나위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이날 내가 본 송추 산협의 풀들은 대부분이 우선 난초같이 느껴졌다. 그 너울너울한 줄기와, 줌고 도타운 잎새와, 그 푸르고 희고 신비한 꽃과, 그 아련한 향기와, 이러한 풀들을 ‘우선 난초’라고밖에 무어라고 부르겠는가.
나무의 이름은 풀보다 쉼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소나무, 밤나무, 감나무, 상수리나무, 단풍나무, 그것들이 새빨갛게 불그스름하게 샛노랗게 누르스름하게 푸르스름하게 검푸르게 엉겨 있고, 그 밑도리엔 갈대를 곁들인 칡과 맹감²이 휘감겨 있었다.
물론 이러한 풀과 나무들은 어느 산에나 있을지 모른다. 같은 풀 같은 나무라도, 여기 것이 특히 맑고 아름답지 않을까, 이것은 우선 흙만 봐도 짐작이 될 일이다. 여기 흙은 특히 붉은 편인 것이다. 흙빛도 검은빛 잿빛 여러 가지일 테지만, 근교의 흙은 대체로 희거나 불그스름한 편이다. 그래서 이 나무에 물이 들 때도, 유난히 새빨갛게, 샛노랗게, 거기다 빛깔이 얼기설기 무늬를 놓는 겐지 모른다.
하기야, 우리가 교외선에 대해 까닭 모를 명랑한 기대를 가지게 되는 것부터가 이러한 연유에서 오는 겐지 모르지만……
나는 그 허여스름하고 불그스름한 흙에 손가락을 깊이 넣어서 ‘우선 난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신비한 풀을 뿌리 짬에서 한 포기 캐내었다. 집에 가져와 분에 심어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또 한 포기 역시 ‘우선 난초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다른 신기한 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그 곁에 있는, 아주 핏빛같이 새빨간 단풍잎도 두어 가지 꺾었다.
“선생님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요.”
돌아다보니 내가 가장 유망하게 보는(소설로) 유군이다.
“그래.”
나는 대답을 하고도 유군 아닌 산기슭을 향해 멍하니 서 있었다. 그 붉고 누르고 푸른 나무와 풀들을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그것을 한두 가지 꺾어 들고, 또한 몇 포기를 캐어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한 것과 같이. 그러나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그렇게 해서 나는 그것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어리석은 짓이다. 그러나 그냥 보고 돌아서면 나는 어디로 가나. 이보다 더 엄청난 세계가 나에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을 두고 돌아서도 좋을 만큼 아름답고 귀하고 값있는 일이 나에게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저 아래서는 박군들의 술자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있으면 지희와 약속한 S다방이 또한 나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박군들의 술자리나, 지희가 기다릴 s다방이 이 이름 모를 풀들과 나뭇잎보다 나에게 더 아름답고 귀중하고 값있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그동안 구름마저 걷힌 하늘에선 느닷없는 햇빛이 제법 가혹한 심판관처럼 풀잎 위를 비친다.
“유군, 나를 좀 붙잡아줘.”
나는 풀 위에 풀썩 주저앉으며 유군을 불렀다.
유군이 뛰어 올라왔다.
“선생님.”
유군이 나의 왼쪽 팔을 잡으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사뭇 휘청거리는 아랫도리를 겨우 가누며 ,
“차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봐.”
유군에겐 그것이 술 탓인 양했다.
“선생님 염려마세요.”
유군은 나를 위로해주는 것이다.
“유군!”
나는 유군의 부액(扶腋)³을 받은 채 계곡을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유군은 내 아들만치 젊으니까 내가 먼저 죽을 거야, 그게 자연의 이치거든……”
“아녜요, 선생님!”
“아냐, 내 말 들어, 그때 만약 유군이 내 이웃에 살거든, 나를 이 근처 어디에다 묻도록 힘써주게.”
“선생님은 아직 젊으셔요.”
유군은 나를 달래듯이 내 옆구리를 꽉 껴안았다.
나는 풀과 단풍잎을 협직 (峽直)이에게 돌려준 뒤, 송추역에서 겨우 다섯시 삼십분 차를 탔다. 내가 청량리역에 내렸을 때는 여섯시에서 불과 이삼 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역전에서 다행히 택시를 잡긴 했으나 종로까진 아무래도 이십분 이상을 보아야 했다. 지희도 어쩌면 이십 분 정도는 대개 기다려주리라 믿어졌다. 본디 내 자신의 성격으로는 약속 시간에서 십오 분 이상이 지나면 더 견디지를 못한다. 더구나 상대자가 여자일 때는 그랬다. 따라서 상대자에게도 준엄하게 그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희와는 예외였다. 그녀는 나의 그러한 습관을 돌려놓았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삼십 분 정도 기다려주는 것은 보통이며, 그만치도 서로 이해해주지 못하면 어쩌겠느냐고, 그녀는 나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을 주장하듯이 반문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경우엔 왠지 실감이 났다.
지희는 어느 회사의 사무원이라고 했다. 이부(야간부) 학생들이 대개 그렇거니와, 직장에서 퇴근을 한 뒤에야 등교를 하기 때문에 매일같이 이삼십 분씩 지각을 했다. 그런대로 거의 빠지는 날도 없이 꾸준히 나왔다. 공부도 착실한 편이었다. 게다가 그 새하얀 네모난 얼굴에 지성 (知性)이 빛나는 두 눈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가슴이 뜨끔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지희의 경우뿐 아니라 어느 여자 학생에 대해서든지 그녀가 아무리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생각되더라도, 아름다운 여자니까 가까이 해보겠다는 생각을 내 쪽에서 일으킨 적은 결단코 없다. 학교에 나올 때부터 그렇게 아주 마음을 굳히고 있었던 겐지 모른다.
지희에 대해서도 물론 그랬다. 그녀의 특이한 성격적인 미모는 야릇하게 내 마음을 끌었지만 나는 오랫동안의 습성대로,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른다거나 얼굴을 한 번 더 훔쳐본다거나 하지를 않는 데 거의 성공적이었다. 그만한 학생이라면 약혼자나 애인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따르는 청년들이, 혹은 같은 반 학생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내마저 무슨 주책을 떨랴 하고 스스로 내 자신을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번은 수업을 마치고 나오려니까 마침 비가 뿌리고 있었다. 밤늦게 우비를 구할 수도 없고 해서 그냥 학교를 내력오고 있는데, 바로 앞에 가던 지희가 자기의 우산을 펴든 채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받으세요.”
“괜찮아.”
“그럼 같이 받으세요, 괜찮죠?”
“나야 뭐 괜찮고 어쩌고가 없지만…….”
“저두 그래요.”
행길에 나오자 택시를 잡아놓고, 가는 데까지 같이 타자고 했더니, 지희는 생긋 웃으며,
“전 얘하고 같이 가겠어요.”
하고 곁에 서 있는 다른 여학생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올봄에 졸업을 했다. 사은회 때, 지희는 내 곁에 오더니,
“선생님 저 약주 한잔 올리겠어요.”
했다.
나는 이미 술이 얼근히 돌아 있었기 때문인지 갑자기 슬픈 생각이 가슴을 콱 메웠다.
“지희, 인제 보기 어렵겠군?”
했더니,
“왜요? 제가 어디 가나요?”
반문을 했다.
“가게도 되겠지만…….”
하는 내 말을 가로막듯이,
“저 아무 데도 안 가요.”
잘라 말하고,
“어서 약주나 드세요.”
했다.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녀의 말을 더 캐물을 수는 없었다.
“지희, 소설 말야, 결심하고 나가면 되겠지만…….”
“저 그렇게 할 거 예요.”
지희는 내 곁을 떠났다. 그것이 이월 초순이었다. 그러고는 석 달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오월 초에 돌연히 전화가 걸려와서, 그녀의 다른 친구와 함께 나를 하루 모시겠으니 시간을 내줄 수 없겠냐는 것이다. 그날은 마침 다른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사양을 했더니, 한 열흘 지난 뒤 다시 같은 용건의 전화가 결려왔던 것이다. 그것이 나의 송추 초행 (初行)이었던 것이다.
함께 나온 여자도 지희와 같은 회사의 사무원으로 문학을 좋아한다고 했다. 영숙이란 이름이었다.
“문학 많이 읽었어요?”
나는 지희보다 영숙에게 처음은 주로 말을 건넸다.
“취미는 있지만…….”
영숙이 말끝을 흐리는데 지희가 가로맡아,
“독서 젤 많이 해요.”
대신 대답을 했다.
차가 창동인지 어디를 돌고 있을 때,
“난, 지희, 언젠가 한번 결혼 청첩장이나 한 장 날아오는 것이 고작이거니 하고 있었어.”
했더니,
“그때는 선생님 주례 서주시겠죠?”
생글거리며 쳐다본다.
“섭섭하지만 하는 수 없지.”
나의 ‘섭섭하지만’에 실감이 나는지 영숙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나 지희는 별로 웃지도 않은 채,
“제가 내년 이맘때쯤 선생님께 뵙겠다고 연락을 드렸으면 어떻겠어요?”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글쎄.”
“그래도 전 마찬가지예요. 제가 그때…….”
지희는 무슨 말을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어버렸다.
“……?”
“선생님, 사은회 때 일 기억하세요?”
“지희가 술을 따라주었지?”
“그리고 제가 한 말을…….”
“……”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기억에 없었던 것이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누구나가 흔히 하는 말같이 했으니깐요.”
“무슨 말이더라?”
“잘 생각하심 기억나실 거예요.”
나도 그럴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여두었다. 그러고는 아아, 아무 데도 안 간다고 했지, 나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점심을 마친 뒤, 영숙이 그릇을 씻으러 갔을 때, 지희는 나에게 조그만 종잇조각 하나를 주며,
“이거 제 전화번호예요.”
했다.
“위의 건 회사 거고, 아래 건 제가 자취하는 집, 주인집 전화예요. 그 둘 중에 한 군데 제가 반드시 있을 거예요. 만약 없으면, 회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일 거예요.”
“알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쪽지를 접어서 양복 윗주머니에 넣었다.
“그렇지만 내가 전활 걸어도 될까, 지희를 만나자고?·…….”
지희는 그 빛나는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쏘아보고 있더니,
“제가 걸어도 괜찮아요?”
이렇게 되물었다.
“물론이지 .”
“그렇지만 선생님은 늘 바쁘시고 저는 근무 시간 이외엔 언제든지 시간이 있으니까…….”
“그럼 알았어.”
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뒤, 우리는 일여덟 차례나 만난 셈이다. 지난여름에는 같이 뚝섬에 나가 어둡도록 벤치에 앉아 있다가 결국 껴안고 키스에까지 발전을 했고, 그뒤에도 기회 있는 대로 이것을 거듭해왔지만, 거기서 한 발짝도 더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은, 내 자신의 자제력을 내세우기보다 그녀의 굳은 결의가 나를 달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이거 밤낮 괴롭고 슬픈 짓만 되풀이해오면 어떡해?”
내가 볼멘소리로 항의를 하면 지희는 분명히 슬픈 미소를 지으며,
“선생님은 괴로우실 거예요. 그렇지만 전 슬프긴 해도 괴롭진 않아요, 오히 려 행복한결요.”
밝고 가는 소리로 나직이 속삭이는 것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그럴 거야,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또 나이 관계도 너무나 다르니까…….”
혼잣말같이 중얼거렸다.
“제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선생님을 괴롭혀선 안 되죠?”
“……”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나에게 무엇을 물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대로 하면, 자기는 어머니와 동생을 부양할 처지에 있으므로, (식구래야 그렇게 셋뿐이었다) 누구와도 결혼을 할 수 없으며, 그 대신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의지할 사람 하나만 있으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그 ‘마음으로만 그리워하고 의지할 사람’으로 그녀에 의하여 뽑힌 셈인 것이다.
“지희만치 아름답고 훌륭한 처녀라면 그런 거 문제없어. 어머니 동생 부양 때문―이란 건 공연한 소리야. 그만 조건 문제없이 받아들일, 성실하고 착한 신랑감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원한다면…….”
“선생님은 진정으로 제가 결혼하길 원하세요?”
“그런 거, 나로선 말할 자격도 없지만, 계제도 아니잖아?”
나는 성난 소리로 호통을 치다시피 꽥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선생님한테는 어떠한 부담도 안 끼쳐드리겠다고 하잖아요? 제 혼자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도 안 되나요? 만나시는 게 괴로우시면 언제든지 선생님이 괴롭지 않으실 때,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좋아요, 그것도 안 되나요?”
지희도 화딱지가 치미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지난 구월이었다. 그러고는 어저께 갑자기 전화가 결려와서, 오늘 S다방에서 여섯시까지 나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도어를 밀고 들어서니, 저쪽 구석 자리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지희가 일어서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건너편 자리에는 같은 나이 또래나 되어 보이는 청년이 앉아 있었다.
내가 곁에 가자 지희는 그 청년을 일으켜 세우고 나에게 인사를 시켰다.
“정준섭입니다.”
청년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정중히 절을 했다.
나는 청년의 손을 잡으며, 지희를 건너다보았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 지희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저의 미래의…….”
그 사람이라고 할까, 남편이라고 할까 망설이는 눈치더니 말끝을 맺지 않고 말았다.
“아아!”
나는 덮어놓고 소리부터 지르고 나서,
“축하하오.”
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당황한 꼴을 그네들에게 보이기 싫어서,
“나 오늘 소풍 갔다 오늘 길야. 그래서 이렇게 늦잖았어? 학생들이 놓아주지 않으니까. 그 대신 술을 많이 마셨지. 빨리 일어나려고…… 덕분에 술에 너무 취했나봐. 어때? 시뻘건가?”
이렇게 술 취한 사람 시늉을 내며 아무렇게나 주워섬겼다.
“별로 붉지 않아요. 그렇죠?”
지희는 저의 약혼자라고 소개한 정군에 게도 동의를 구했다.
정군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이런 데가 조금 붉을 뿐입니다.”
자기의 눈가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거 모처럼 만나서 좀 재미나게 놀아얄 텐데 내가 이렇게 취해서 어떡하지?”
내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려고 하자, 지희가 곧,
“미스터 정이 선생님 모시고 저녁 대접이라도 하려고 나왔는데 어떡해요?”
이렇게 받았지만 정군은 그다지 안타까워하는 빛도 없이 그냥 덤덤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거 정말 미스터 정에게는 미안하기 짝이 없지만 이렇게 취해서야 남의 정중한 대접을 받을 수도 없고 오늘은 이만 양해해 줘요, 다음에 또 만나지…….”
나는 정군의 손을 가볍게 잡아준 뒤, 다시 지희를 돌아다보며,
“그럼 두 분이 천천히 얘기나 하다 나오오.”
한마디 던지고는 카운터로 나와 찻값을 치르려니까, 지희가 따라나와 그것을 가로막으며, 잠긴 목소리로,
“선생님 저…….”
했으나 나는 그녀를 돌아다보지도 않고 다방 문을 밀치고 뛰어나와버렸다.
어둠이 내리는 종로 네거리라고,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다짐한 뒤, 광교 쪽으로 나가, 청계천(메운) 길로 빠졌다. 될 수 있는 대로 남이 보지 않는 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손수건으로 몇 번이나 얼굴을 닦으며 사뭇 후들거리는 아랫도리를 간신히 가누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바로 서재로 들어가자 어느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내는 내가 무슨 대단한 작품이라도 구상하는 줄 아는지,
“저녁을 어쩌겠어요?”
하더니, 내가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진한 커피를 끓여 와서 권한다.
나는 커피를 훌훌 마신 뒤, 또 한 잔 더 타달래서 그것도 비우자, 이번에는 또 먼저와 같이 깊은 명상에나 잠기듯 눈을 감으며 머리를 떨어뜨렸다.
나는 눈을 뜨고 서재 안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다. 착잡하게 꽂히고 쌓인 책들, 탁자 위에 포개어진 고자기(古瓷器)와 골동품들. 언제나 내 마음을 푸근히 즐겁게 해주던 이 책과 골동품들도 이날 밤의 내 쓰린 가슴을 달래는 데는 거의 아무런 힘도 되지 않았다.
열두시나 되어 나는 서재에서 침실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다. 그러나 한시, 두시, 세시, 아무리 몸을 뒤척여도 잠은 오지 않았다. 아무리 만나고 또 만나야 어떻게 할 수도 없었으면서, 내 입으로 너와 만나는 건 괴로운 일이다 슬픈 일이다 했으면서, 어서 결혼이나 하라고 퉁명스레 권고도 했으면서, 어쩌면 이렇게도 주체할 수 없는 흐느낌이 나를 사로잡는 것일까. 지희, 너와 나는 무엇일까. 너는 나에게 있어, 나는 너에게 있어, 서로 아무것도 아닌 귓전을 스쳐가는 바람결에 지나지 않았던가.
새벽녘이 되어갈수록 나의 머릿속은 샛별같이 맑아지는 반면 의식의 한 부분은 흐렁흐렁 잠결 속에 휩쓸리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잠결 속의 의식과 맑아지는 머리로, 나와 지희의 인연이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와 지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그렇다고 그냥 귓전을 스쳐가는 바람결 같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없는 그 무엇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무 그늘 얼룩진
가파른 길 위로
그대는 올라오고
나는 내려가고 있네.
나는 처음 지희와 나의 관계가 영원히 이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정신은 어느덧 지희와 나의 관계에서 시의 세계로 비약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물론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나의 표현의식(表現意識)은 그것을 어느덧 밭 가는 사람으로 변조(變造)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밭 가는 사람’이란 곧 ‘글 쓰는 사람’과 같은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밭 가는’ 일과 ‘글 쓰는’ 일이 마찬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가 뿌리는 밀씨나 보리씨는 소설도 되고 시도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또 다시 나의 표현의식이 비약을 가져왔다. 이 ‘사람’이 뿌리는 밀씨나 보리씨가 시도 되고 소설도 될 수 있다면, (이왕이면) 하늘에 가득 찬 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승 저승 어느 승에고
내 밭 갈고 살제
밀씨 보리씨
뿌리는 대로
총총한
별.
여기서 글 쓰는 사람, 밭 가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어느덧. 에 별을 뿌리는 조물주나 신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본래 나와 동격으로 출발한 그대(지희)가 나와 함께 비약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대’도 ‘나’와 같이 신이나 조물주가 되든지, 적어도 또 다른 내 자신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윤회설(輪廻說)에는 차생(此生) 이외에도 전생(前生)과 내섕(來生)이 있어, 차생의 나는, 전생의 그 무엇이 전생(轉生) 또는 환생 (還生)된 것이며 차생에서 내가 삶을 다하면 또한 내생의 그 무엇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대’를 전생 또는 내생의: ‘나’라고 하자. 이렇게 되면 ‘나’는 곧 ‘그대’요, ‘그대’는 곧 ‘나’지만 ‘그대’와 ‘나’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그대 내 밭에
밀씨를 뿌리 면
내 그대 밭에
별을 흩고
아아, 그대와 나는 누구뇨,
이제 여기서
그대 나를 찾으면
내사 차라리 외로운
연꽃일 세 .
나무 그늘 얼룩진!
가파른 길 위로
그대는 내 려오고
나는 올라가고 있네.
내가 시와 편지를 다 썼을 때는 이튿날 정오도 지난 뒤였다.
나는 지희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오늘 여섯시, S다방으로 나와. 정군과 함께 만나는 건 다음으로 하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지희 혼자 나와.”
나는 말을 마치자 수화기를 놓아버렸다. 그러자 이내 다시 전화벨이 울었다. 지희였다.
“선생님 노했어요?”
“아니.”
“그럼 왜 전활 끊었어요?”
“용건 다 말했으니까.”
“선생님 목소리 이상해요.”
“잠을 못 자서 그래.”
“여섯 시에 뵙겠어요.”
이번에는 지희가 먼저 수화기를 놓는 모양이었다.
여섯시, S다방에서 지희를 만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봉투를 먼저 그녀에게 전했다.
“이거 제가 뜯어봐요?”
지희는 나의 승인을 받은 뒤 봉투를 뜯었다.
천천히 두 번을 되풀이해 읽고 나서도 지희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눈물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벽 쪽을 향해 외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수건으로 몇 번이나 눈물을 닦아낸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들더니,
“어저께 그 미스터 정, 제 이종사촌 동생이에요.”
했다.
“뭐, 동생이라구?”
“걘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걸요.”
“그럼 뭣 땜에 그런 연극을?”
“선생님에게 아무런 정신적 부담도 끼치지 않으려고 한 거죠. 제가 결혼한다면 선생님도 안심하실 거 아녜요? 저 혼자 생각하는 건 제 자유니깐요.”
“그렇지만 그렇게 연극까지 꾸밀 필요는 없잖아?”
“그것이 선생님에게 충격이 될 줄은 몰랐어요.”
나는 그러나 이미 지희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좀더 담담히 그녀와 헤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자신이 그 순간 왈칵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인제 알았어. 어저께 나를 울린 건 풀이야. 나는 송추 골짜기에서 풀과 나뭇잎들을 보자 정신이 좀 이상해졌던가 봐. 바위 위에고 풀 위에고 자꾸 주저앉고 쓰러지고 했거든. 나중에 나를 끼고 가는 사람한테 내가 죽거든 그 근처 산기슭에 묻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야. 그때부터 나는 속으로 형편없이 울고 있었던가 봐. 그러고 나서 지희를 만났거든.”
지희는 내 말뜻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지희가 연극을 놀아서 나를 울린 거만은 아니겠지. 그보다 먼저 송추 골짜기에서 가을풀에 몹시 얻어맞았던 거야. 이제 내 인생도 단풍이 들 나이거든. 늙은이답지 않게 무슨 느닷없는 감상(感想)이냐고 지희는 속으로 웃을지 모르지만, 난 젊을 때부터 낙엽이 쌓인 산골짜기나 곱게 물든 가을풀을 보면 곧잘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지곤 했어. 이건 아무도 모르는 내 체질상의 약점이야. 그건 지희에게 준 그 시만 봐도 알 거야. 지희와 가을풀이 그 시를 낳게 했으니까. 지희가 나를 울린 거라면 내 자신을 가루 내어 하늘의 별로 뿌릴 수 있을까. 풀이 나를 그렇게 한 거야. 앞으론 지희를 괴롭히지 않을게.”
나는 아무래도 설명이 되지 않을 듯한 심정을, 생각나는 대로 우선 이렇게 말해보았다.
“……”
지희는 내 말뜻을 알아들을 듯 말 듯한지, 입을 다문 채 그 빛나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건너다보고만 있었다.
“풀 한 포기에도 못 견뎌 쓰러지고 한 내가 밤낯 지희더러 괴롭힌다고 투정을 부려온 건, 내 나이에, 생각할 문제야. 지희에게 힘이 되어주었어야 할 내가 도리어 무슨 꼴이람.”
“선생님 제가 저녁 대접해도 돼요?”
지희는 내 말에 자기의 의견을 붙이는 대신 이렇게 나왔다. 모든 것을 다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지희의 두 눈을 이제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
정중히 고개를 수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
2016년 5월 18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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