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사회 이길상
이슬람 세계는 대셀주크왕조의 말리크 샤가 죽은 후(1092)더욱 분열, 이들의 침략을 조직적으로 방어할 만한 결집력은 고사하고 셀주크왕조의통일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조직적으로 전 이슬람세계가 이에 대항한 것은 한번도 없었으며,직접 십자군의 침략을 받은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집트등지의 개별적인 전투력에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슬람세계의 분열을 틈타 침입한 십자군은 쉽게예루살렘을 함락하고, 시리아의 트리폴리 백령, 안티오크 후령, 에뎃사 백령, 예루살렘왕국 등을 건설, 유럽의 봉건제도를 이곳으로 옮겨와 지배하면서 주변의 아랍 족들과간헐적인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십자군에 맞서 처음 공격에 나선 것은 잔기(장기)왕조(Zangiddynasty : 1127 ~ 1222), 이 왕조의 창건자인 잔기는 셀주크왕조의 말리크 샤를 섬기던투르크계의 노예출신 아크손코르(Aksonkor)의 아들로서 1127년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아타벡의 칭호와 함께 모슬의 통치를 위임받는 데서부터 이 왕조는 시작됩니다. 잔기는 모슬을 중심으로 자지라, 하란, 알레포, 하마등 메소포타미아일대에 세력을 확장, 그러나 현재의 터키 공화국 동남부 우르파(Urfa)주에있는 에뎃사(Edessa)에는 십자군이 세운 에뎃사 백령(伯領)이 눈에 가시처럼 버티고있어서, 드디어 잔기는 이 유서 깊은 도시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1144년 12월, 그의 군대를 바람처럼 휘몰아 에뎃사를점령, 십자가를 쓰러뜨리고, 성직자들을 도륙하는 등 도시 전체를 철저히 파괴하고,승전 보를 전 이슬람 세계에 알리는 쾌거를 이루었으나 2년 후 그는 어이없게도 자신이부리든 노예의 칼을 맞고 62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잔기가 피살된 것은 취중에버릇없는 노예를 꾸중한 것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이슬람의 교리에서 술은 돼지고기와마찬가지로 금물, 그러나 이것은 더위가 심한 남쪽지방 사막에서나 지켜진 일이고, 중앙아시아를비롯한 스텝지대의 이슬람 세계에서 술에 관한 이야기는 이 당시만 하여도 자주 등장하고있습니다. 혹한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술이 빠질 수는 없겠지요. 잔기의 뒤를 이어 이 왕조를 이끈 것은 그의 아들누레딘(누르 우딘 : Nureddin 1146 ~ 1173)), 그는 부친 잔기로부터 시리아의 알레포를맡아 다스리고 있다가, 모슬을 통치하던 형이 죽고 나서는 모슬까지 통치하면서 이일대의 이슬람세력을 모아 유럽의 십자군에 조직적으로 대항하였습니다. 에뎃사가 이슬람에게 빼앗기고 성직자들이 도륙 당했다는소식은 삽시간에 유럽에 전파되었고, 이에 화가난 유럽에서는 독일 황제 콘라드 3세(ConradⅢ) 프랑스왕 루이 7세(Louis Ⅶ)가 이끄는 제 2회 십자군이 파견되어 다마스쿠스근교까지 이르렀으나, 이슬람 군에게 패배하고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1147) (4) 아이유브왕조와 명군 사라딘 누레딘의 막료 중 시르쿠(Shirquh)라는 자가 심복부하로있었는데, 시르쿠의 형 아이유브는 이 동생의 덕분에 누레딘에게 추천되어 다마스쿠스지사로 임명되었고, 아이유브의 어린 아들 살라딘도 아버지를 따라서 25세의 청년이되기까지 근 10년을 이 다마스쿠스에서 보냈습니다. 이집트의 파티마왕조가 힘을 잃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있을 때, 내분이 일어나 잔기왕조에 구원을 요청, 이에 사라딘의 삼촌 시르쿠가 군대를이끌고 이집트로 건너갔을 때 살라딘도 군대의 부장(副長)자격으로 이 삼촌을 따라이집트로 건너가 내분을 다스리고 계속 이집트에 머물렀고 사실상 파티마왕조의 실권은이 시르쿠가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1169년 식중독으로 살라딘의 삼촌이 죽고나서, 사흘후 그가 제상의 자리에 오르자, 이 기회에 칼리프는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서 반란을주도, 그러나 사전에 이를 감지한 살라딘은 칼리프의 흑인 병사 1천명을 처 부수고,1171년 9월 10일 금요일, 모스크에서는 수니파 의식의 장엄한 예식을 올림으로써,시어파 파티마왕조는 운명을 다하고, 수니파 아이유브왕조(1171 ~ 1250)가 세워졌습니다. 살라딘의 원래 이름은 살라흐 앗 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ad-Din Yusuf ibn Ayyub)로서 인도, 유럽어계에 속하는 쿠르드(Kurd)족의 후예라고합니다. 반유목과 농경을 주업으로 했던 쿠르족은 중동지방의 영토분할에 따라 이라크,이란, 터키 등에 분산되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데, 19세기이래 각국의 국가주의에밀려 영토 잃은 유랑족 신세가 되었고, 자치권 내지는 독립에 관한 이들의 투쟁이가끔 외신의 머리기사로 장식하기도 하나, 이스라엘처럼 독립된 영토를 확보할 수있을련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살라딘은 시아파 이슬람의 이집트를 수니파로 통일하고,1174년 알레포의 누레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단지 기병 7백을 이끌고 예루살렘탈환 길에 올랐습니다. 그해 11월 다마스쿠스에 입성하고,...이후 모든 정력을예루살렘 탈환에 집중, 불철주야 노력을 거듭하여 1187년 7월 히탄 전투에서 십자군의주력 군을 격파했을 때, 포로로 잡혀온 십자군의 왕(기 드 뤼시냥)을 다마스쿠스로보내어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런 살라딘의 관용정책이 그의 포고문 하나로쉽게 예루살렘 성문을 열게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두에서 밝힌 데로 예루살렘은살라딘에 의해서 점령되었습니다(1187)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다시 제 3회 십자군이 편성되었고, 항구도시 아키타(아콘 : Akita)에서 영국왕 리처드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의 힘겨운 싸움에서 살라딘은 아키타(아콘)를 포기하고십자군과 화의,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1193년 3월 55세를 일기로 병들어 죽었습니다.그리고 살라딘의 관용과 기사도 정신은 오히려 유럽에서 높이 칭송되었다고 합니다. 라. 오스만 투르크 제국 (1)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성립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북서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아무 강이 아랄 해로 흘러 들어가는 유역에 자리잡은 기름진 델타지역으로서, 이란계주민들이 사막이나 초원지대와는 전혀 다른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그러다가 11세기에 이르러 말리크 샤 밑에서 주방장으로 지내다가 이곳 총독으로부임되어 온 투르크계 노예인 아누시 티킨이 셀주크왕조의 분열에 편승, 샤를 자칭하였고,그 후손들도 샤를 칭하면서 세력을 팽창, 13세기 초에는 바그다드와 어깨를 견줄정도의 강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호레즘 정복으로 시작된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의 서아시아 정복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되었고(칼럼 제 26호. 칭기즈칸의 등장과몽골제국의 성립), 칭기즈칸은 샤머니즘을 신봉했을 뿐, 이슬람교도는 아니였기에,그 참혹한 약탈과 침략을 피하는 최선의 길은 삼십육계 줄 행낭, 이래서 서 아시아일대에서는 부족 전원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 다니는 기이한 현상들이 속출하고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투르크계 오구즈족의 일파인 카유족의 족장에르투룰 베이(Ertugrul Bey)도 몽골의 침입을 피해 부족원 4백 여명을 이끌고 코니아에있는 룸 셀주크왕조에 의지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건넜을 때, 일단의 무리들이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한쪽이 기울자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발휘, 싸움에 끼어들어 강한 쪽을 쫓아 버리자, 구세주처럼 나타나 은혜를 입은 것은 그가 의지하기위해서 찾아가던 룸 셀주크왕조의 술탄 알라딘(Aladdin). 이런 인연으로 에르투룰베이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소유토(Syut, Asyut) 일대 영주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오스만 1세(Osman I : Ottoman I / 1299∼1326)는1288년 족장으로 선출되어 이웃의 빌레지크·이네괼·예니셰힐 등 비잔탄제국에 속하는그리스도교 제후의 영지를 병합하였고, 예니셰힐을 본거지로 하여 오스만제국의 기초를확립, 룸 셀주크왕조의 멸망(1308) 이후 급속히 영토를 확장하여 제국의 기초를 닦았고,그의 아들 오르칸(Or khan)은 비잔틴 제국 여러 곳을 점령해서 제국의 기초를 튼튼히하였습니다. (2)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발전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
이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티무르의 포로가 되어 따뜻한대접을 받았으나 이듬해 홧병으로 죽고 오스만 제국은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는데,전쟁터를 간신히 빠져 나왔던 바야지드의 아들 무하마드 1세(1413 ~ 1421)는 다른3형제를 제거, 제국을 수습 재건하고, 그의 아들 무라드 2세(1421 ~ 1451)에게 물려주었고, 1451년 무라드 2세의 아들 무하마드(메호메드 혹은 메메드라고도 함) 2세(145 ~ 1481)가 22살의 나이로 7대술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의 꿈은 조상 대대로 염원했던 콘스탄티노플 점령,이를 위해서 먼저 국가 재정을 튼튼히 다진 후 드디어 1453년 4월 육군과 해군을동시에 동원하여 보스포로스 해협을 건넜습니다. 5월 21일, 무하마드(메호메드) 2세는비잔틴황제 콘스탄티누스 12세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 "...황제는 펠로폰네소스왕으로 삼고, 떠날 사람은 자유롭게 떠나도록 신변을 보호해 주며,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겠다...." 그러나 이 조건은 거부되었고,
한 낮이 되어 시가지로 들어선 투르크 병사들은 미친듯이 시내를 누비고 다녔는데, 성 소피아 성당에서는 이때까지 수 천명이 모여 문을굳게 잠그고 최후의 순간에 천사가 내려와 그리스도의 적들을 물리칠 것을 믿고 열심히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문을 부수고 나타난 것은 천사가 아니라 피 묻은 도끼를든 투르크 병사들, 이들은 서슴없이 성당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살육하자, 조금 늦게이곳에 도착한 무하마드 2세는 대경 실색, 큰 소리로 이들의 만행을 나무라고, 사제들에게정중히 사과한 후, 이슬람 학자 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 코란을 낭독하자 술탄도 대리석제단에 무릎을 꿇고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기원전 7세기 그리스의 식민 폴리스 비잔티움으로건설되었던 이 도시는,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바뀌었고(330),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395)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되어 천년이상을 지탱하다가, 다시 투르크인들의 수중으로 넘어가(1453) 이름도 이스탄불로바뀌고 오스만투르크의 수도가 되었으며, 동방정교회의 사원은 이슬람의 모스크로개조되는 등 로마적인 요소는 사라지고, 이슬람적인 요소가 자리잡았고, 이 과정에서많은 학자들은 이탈리아로 망명하여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로마적인 요소는다시 러시아로 건너가 전통의 맥을 잇게 되었습니다. (3)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역사의 순환은 참으로 묘한 것으로 동쪽에서는 기독교세계의 한 축을 이루었던 비잔틴제국이 무너졌으나 서쪽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간신히명맥을 유지하던 이슬람의 나스르왕조가 멸망하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서는기독교를 상징하는 은십자가 세워졌으며, 콜럼버스는 부와 명예를 찾아 아메리카대륙으로건너 갔습니다(1492) 1498년 5월에는 바스코 다 가마가 이끄는 포르투갈선단이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 캘리컷에 도작, 인도 항로의 길을 열었으며, 이로써지중해 무역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동시에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빛을잃은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오스만 투르크의 중요 재원이었던 중계무역도 더 이상제국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1517년 독일에서는 루터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막이올랐을 때,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 1세는 이란, 시리아, 아라비아, 이집트를 정복하고아바스왕조의 칼리프를 물려 받아 술탄-칼리프제도를 확립하여 이슬람세계의 새로운주인이 되었고, 스텝 기마전술에 의존하여 발칸반도 일대와 헝가리까지 지배하는위력을 과시, 10대 술탄 쉴레이만 1세(1520 ~ 66)때 전성기를 마지하였으나, 이를고비로 레판토해전(1571)의 패배로 많은 영토를 잃고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은 투르크가, 키포로스섬을빼앗자, 로마 교황을 주축으로 베네치아, 제노바, 이스파냐 등이 신성동맹을 결성하고1571년 10월 코린트만에 위치한 레판토 앞 바다에서 투르크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는데,갤리선을 축으로 한 육탄전에서 쌍방이 3만명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일개병사로 참전했던 세르반테스가 왼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것도 이때였습니다. 에스파냐가 동원한 범선 여섯 척이 큰 위력을 발휘하여결과는 오스만 투르크의 참패, 다시 17세기 말에는 헝가리의 대부분을 오스트리아에게,18세기 후반에는 러시아와 싸워 패배하고 흑해 연안 크림반도 북부 일대를 잃었으며,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이집트가 분리되었고 그리스가 독립하는 등 영토가 계속 축소되어대국으로서의 위력을 상실한 체, 1차 세계대전(1914 ~ 18)에서는 독일의 동맹국측에가담했다가 패배, 세브르조약(1920)을 받아들여 영토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한정되고,지금은 군사적인 프레이드로 관광수입이나 올리면서 선진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쇠퇴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되고있으나, 1차적인 원인은 총포의 등장으로 기마전술이 더 이상 전술로서의 가치를잃었고, 교육과 산업을 등한시하여 새로운 산업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길을 열지못했으며, 제도 및 관습의 개혁 없이 서구의 기술문명만을 모방한 탄지마트라고 부르는개혁의 실패등을 꼽고 있는데, 유전의 발견으로 서구 열강의 침입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진출도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라고 합니다. 다음 이야기 -절대왕정-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