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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경기글쓰기교육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한재경
방기정 선생님 말씀을 다 듣고 | 푸짐한 뒷풀이 자리 |
<사는 이야기>
#주한경
- 학기말 성적처리 일 하는 가운데에 있다. 일곱 번째 문집을 준비하고 있다. 처음의 계획대로라면 열 한 두 번째 정도까지 나와야하는데 아쉽다. 한 달에 두 권씩 내던 흐름이 있었는데 한 달 전쯤부터 주춤하게 되었다
이번 여름 회보를 만들며, 선생님들이 보내준 원고의 쪽수가 부족해서 아이들 시를 뒤에 넣었다.
-회보 나오는 때와 다모임하는 때를 맞추면 좋겠다.
-배움터는 학기마다 강의를 선배님들이 한 번, 후배들이 한 번씩 번갈아 가며 하면 좋겠다. 또 배움터와 다모임을 같은 날 하면 어떨까? 그러면 한해에 열두번 다모임을 하면, 그 가운데 네번은 배움터와 같이 열게 되는 것이다.
#김성재
-어머니 1930년 생, 작년 12월에 임길택 선생님 문학기행으로 사북에 다녀온 다음. 허리가 아프시다고 하셨다.
-올 해, 1월에 글쓰기 연수에 다녀온 뒤, 어머니 무릎에 멍이 들어 있었다. 병원에 가보니 등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등뼈도 등뼈지만, 심장이 안 좋다고 한다. 병원에서 모시기 보다는 집에서 모시기로 했다. 지난 여섯 달은 엄마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자존심 강한 어머니, 치매덕분에 기저귀를 참.
-점점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마지막을 예상했지만, 하필 어머니가 세상 떠나실 때 난 집에 없었다.
-”너 때문에 살았다.“는 어머니의 말씀. 삶의 이유는 한 사람 때문이기도 하다. 살아야하는 이유는 그 이유가 떠나고 나서야 분명히 알게 된다.
-집에서 모신 의미? 요양병원에 맡기지 않은 뜻 / 원래부터 돈의 목표는 분명하다 “뺏을 수 없는 것을 빼앗는 것.”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것은 큰 고난이지만, 그 고난을 통해서 가족사이에 연대가 만들어지게 된다-책 만드는 이야기 : 이호철 선생님 책 “어른들은 모르는 어린이 이야기”, 박선미 선생님 어린이 시집, 서정오 선생님이 쓰는 우리 말 이야기. 그리고 그림책
#조유진 (여기서 부터 1분씩 나누었음)
-힘들게 하는 어린이와 상담을 하고 있다. 아이 마음이 많이 닫혀 있다.
#한재경
-세상에 가득 찬 슬픔. 담임 교사를 맡으며 알게 되는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 학부모가 겪는 슬픔, 동료 교사가 겪는 슬픔.
-고난이 갖는 특징 첫번째 고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한다. 둘째, 고난은 피할 수 없다. 셋째. 고난은 영혼을 해체한다. 무너뜨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난만이 사람을 정화시킨다. 고난만이 사람 사이를 연결시켜준다.
-교사로서 하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는 고난을 잘 풀어낼 수 있도록 도움말을 주는것, 힘을 보태주는것이지 않을까? 지혜롭고 싶다.
#반솔희
-너무 즐겁다. 아이들에게 나를 드러낸다. 내 감정을 나눈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 즐겁게 해준다. 오늘도 너무 힘들다고 했더니, 어린이가 “원래 선생님은 힘든거에요.”라 한다.
#이선구
-남양주에서 양평으로 옮겼다. 모임 다 정리하고 양평에 들어갔는데, 양평에서 새로운 모임이 생겼다.
#최관의
-면목동에 있는 중목 초등학교에서 4학년 아이들과 산다. 여행을 많이 못 다니는 아이들이라, 서울 여행을 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가고 싶은 곳 다 모아보고 그 가운데 한 곳을 뽑아서 여행을 갔다. 이런 일을 통해 아이들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묘한 작용이 일어난다. 부모도 아이를 알고, 아이도 서로를 잘 알게 된다던지.
#이주영
-조희연 교육감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 선거로 많이 바빴다.
-선거 준비로 강의요청을 다 뒤로 미뤘는데 그 미룬 일들이 몰려와서 또 바쁜 가운데에 있다.
-혁신학교에 대한 비판 : 이오덕 성래운을 이어받지 않은 혁신이라. 얼마나 갈까? 외국의 교육철학이니 사상 다 좋다만 제소리로 만들어내지 못한 것들은 그저 홍역같이 앓고 사라질 것이다. 이오덕 성래운이 한 일들을 이어받아서 지금 이 시대에서 다시 소화해 내야 옳을 것이다.
우리옷이 멋진 이선구 선생님 | 아주 젊어보이시는 방기정 선생님 |
<방기정 선생님 이야기>
#오는 길 : 두 시간 반이면 올 줄 알았는데, 더 걸리더라.
#두창초등학교 이야기
-열 두해나 있었다. 어린이가 물으면 “너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어.”
-교장 명패가 없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별 볼 일 없는 학교, 만만한 교장.”
-28명이 전교생이던 학교, 우연한 일들로 100명이 넘게 되었다.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두창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긴다.‘ 교실이 부족해 도서실 과학실을 교실로 썼다. 문의 전화는 빗발치고, 전학 오고 싶다는 면담 요청으로 학부모들이 줄을 섰다.
-경기도 교육청에 전화를 하여 실무사 지원을 요구했으나, ”분교는 학교가 아닙니다.“ ’아 내가 학교도 아닌 곳에 있구나.‘ 했다.
-학부모들도 화나가 민원을 요구하러 교육청에 갔다. ”100명이 넘는 분교도 있냐?“ 얼마 뒤 김상곤 교육감이 왔다 갔다. 분교가 본교가 됐다.
-학교 문집을 내기 시작했다. 전교생의 글을 보아서 문집을 냈다. 처음엔 허술했으나 지금은 이렇게 멋지게 바뀌었다.
-한 번은 장학사가 와서 내게 물었다. ”언제가 가장 보람 있었나요?“ ”본교 되기 앞서 분교 일 때요. 그때가 행복했던 것 같아요.“
-두창에 오기 앞서, 큰 학교에 있었다. 그곳에 온 도교육청 장학사 출신 교감선생님. 그 분이 만든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공부는 못가르쳐도 공문을 틀리면 안 된다.‘는 말이 유행으로 돌았다. 승진을 위해 경쟁하는 분위기. 그곳이 싫어서 두창으로 왔다.
-두창에 왔을 때, 나는 사십대 후반, 삼십대 여선생 한 분(지금의 부인), 젊은 남교사 한 분이었다. 젊은 남교사는 음악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밴드부를 만들었다. 전교생이 밴드부에 들었다. 처음엔 허술했던 것이 뒤엔 소리가 좋아졌다. 용인 시내에 공연장을 빌려서 공연을 올렸다. 본교에서 버스를 대절했다. 아이들이 마음이 자라는 것을 느꼈다. 소문이 났다. ”두창에 가면 무언가가 있다.”
-재미가 들었다. 교사로서 너무 행복했다. 이제 내가 선생이 된 것 같았다. 물고기 잡으러 가고 돌 던지기 대회를 하고, 산에 올라가 백일장도 했다.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하면 내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줄까?‘ 이 고민만 했다. 아이들 줄 선물을 할 때도, 행정실에 맡기면 물건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직접 용인에서 가장 큰 가게에 찾아갔다. 선생 셋이서 그런 일을 하며 돌아다녔다. 집에 오면 밤 열시가 되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아이들이 27명에서 34명으로 늘었다. 이것은 시골에서는 큰 변화다. 2009년 그해 칠월부터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두창리 아이들>이라는 블로그에 올렸다. 알래스카, 캐나다, 뉴질랜드 사람들도 들어와 글을 봤다. 캐나다에 있는 한 분이 ”아이에게 고국 체험시켜주고 싶다. 그 학교에 가도 되냐?“고 말을 했다.
-그럼에도 6학년 9명이 졸업을 앞두고 있다. 아홉명이 졸업하면 두창초는 크게 줄어든다. 새로 입학할 아이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먼 지역에서도 두창초 이야기를 듣고 두창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의 이사로 인해 두창초 근처에 빈집이 다 나가게 되었다. 집이 없어 더 들어오고 싶은 학부모들이 조합을 만들어 농지를 사고 그곳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학교로 인해 조성된 가구가 70가구 정도가 된다. ’두창초 까지 걸어서 10분‘ 이런 집광고가 붙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성공이었다. 하나는 학부모의 문제다. 학부모가 너무 훌륭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한 사람은 한진 그룹 때려잡고 있는 중심 인물로,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출신이었다, 또 한분은 EBS 교육방송 편집국장을 하는 사람이다. 굳이 두창초에 전학오겠다는 사람들 가운데엔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거나 지도층에 오른 사람들이 많다. 이 사람들은 자기 주장이 강해 학부모 공동체 안에서 화학적 결합이 어려워졌다. 또 하나는 그렇게 전학 오는 아이들은 사회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꽤 있다는 점이다. 원래 가지고 있던 ’욕 안하는 문화‘ , ’스스로 청소하는 문화‘를 비롯한 좋은 문화가 좋아서 전학을 왔으나, 많은 수가 전학오는 가운데 그 문화가 없어졌다. 봄에 27명이었는데 어느새 40명이되고, 여름방학이 끝나니 80명이 되고, 겨울방학이 되니 100명이 넘었다.
-또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온다. 먼 거리를 이사 오는 댓가를 치른 사람들이라 자연히 본전생각을 한다. 두창에 오면 말 안하는 아이도 말하게 될 줄 알았는데, 주먹질하는 아이들이 주먹질 안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건강해지고, 아토피까지 낫게 되길 바라며 온다. 그러나 그건 무리한 기대이다. 그런 분들께 이렇게 말을한다. ”두창은 대안학교 아니다. 그냥 보통의 학굔데, 좀 덜떨어진 선생들이, 시류에 합류하지 못하고, 조금만 더 아이들 삶과 가까이 살 뿐이다.“ 이렇게 말을 했더니 ”그 말을 들으니 더 들어오고싶다.“고 한다.
-건강이 나빠졌다. 두창에 들어오고 싶다고 학교에 면담을 와서 줄 서 있는 사람들... 아이들과 수업도 해야 하고, 수업 준비도 해야하는데, 학교 건물이 부족하고 낙후되어 시나, 교육청에 건의도 해야 하는데, 거기에 학부모들이 면담 신청으로 줄을 서있는 거다. 내 쉴 시간이 없기를 몇 달이 이어졌다. 그것도 오는 학부모들 가운데 많은 이가 상처가 많았다. 한 학부모마다 한 두시간씩 자기 속상한 이야기를 꺼내면, 난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그 가운데 그들의 상처, 감정이 내게 그대로 들어왔다. 너무 힘들어 한때는 ’다음날 아침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을 정도다.
-실패한 것들이 많다. 사실 실패의 연속이었다. 한반이 열명 정도 되고, 차를 봉고로 바꾸었다. 애들 태우면 딱 된다. 태우고 에버랜드도 다니고 어디도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전학을 와서 소용 없어졌다. 다시 봉고 팔고 승용차로 바꿨다. 돈 많이 버렸다.
-혁신학교가 되었다. 해보니, 분교 하던 거와 다르지 않더라. 혁신학교 심사하시는 분이. ”분교가 본교 된 것도 어딘데, 혁신학교 까지 욕심 내려고 하냐?“ 이에 ”내가 바라는 건 혁신학교가 아니다, 다만 지원을 받고 싶다. 내가 바라는 건 상식적인 학교다. 아이들이 즐겁게 다닐 수 있는 학교, 학부모는 안심하고 학교를 보낼 수 있는 학교다.“
-이런 운동은 어려움이 있다. 운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가게가 망해가는 느낌이다. 지금의 두창이 그렇다. 내가 그래서 두창 이야기를 꺼내는 게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앞서서는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한 주에 두 번씩 모여서 공부를 해왔다. 자발적으로. 둘 가운데 한 번은 교실이야기. 다른 한 번은 그 밖의 공부. 살아있는 공부가 되었다. 하지만 학교가 더 커지고, 지원도 받으며 ’전문적 학습 공동체‘라는 틀 속에 들어가고 난 뒤 공부가 안되는 것 같다. 이런 저런 문서만 형식적으로 해서 내게 된 것 같다.
-그러다 이번 내부형 공모제에 떨어졌다. 그래서 부끄럽다. 학부모 동의율이 매우 낮았다. 그러더니 교육청 심사에서 떨어졌다. 새로 온 교장선생님께 미안하다. 교장실이 거의 체육관처럼 이용되게 해놓았다. 교장실에 온 아이들에게 마이쮸를 주었더니 아이들이 ”그러면 구월되면 마이쮸는 누가 줘요?“ 한다.
-두창초등학교는 ’본교 아닌 분교같은 대안학교 같은 너.’같다.
-두창에서 꾸었던 꿈은 실패다. 마음이 아프지만 실패다. 공동체는 사람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