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문 즉답 우문현답 남매
보름 전쯤에 명랑한 셋째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스피커폰을 통해 내용이
들려왔다.
“언니~밥 사줄게 한번 만납시다용~”
“무슨 밥을 사주러 전주서 광주까지 와요?”
“기냥~”
말해서 뭐하랴 기냥 동생부부가 점심시간에 맞춰 도착을 했다. 밥 먹고 좋은데
드라이브를 시켜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열어주는 보온 보 냉 보따리 안에서
밥과 반찬들이 찬찬찬 쏟아져 나왔다.
“헐~사 주는 게 아니었어?”
오늘은 사주가 좋은 날인가 보다. 밥을 사주러 온 것이 아니라 소풍을 왔다며
꺼낸네모난 용기에는 노란 밥이 콩과 밤 다시마가루 등을 품고 있었다.
강황 밥은 고슬고슬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동생 남편이 말했다.
“나는 그냥 사먹자고 하는데 기어이 언니 오빠 해주고 싶다고 만들었다 네요.”
“뭘 이렇게 해와~ 몸도 아픈데 엄청 고생하게....”
두어 달 전. 친구차를 탄 여동생은 도로를 벗어나 키다리 아저씨 전봇대를 들이
받는사고로 갈비뼈에 금이 가고 여기저기 아픈데 고생을 하며 온갖 음식을
장만하였다.오빠언니를 생각하는 정성이 하늘에 닿아 하루 빨리 완쾌를 했으면
좋겠다는 기도가 마음속으로부터 울컥 올라왔다.
특별히 겨울 ‘시래기 된장 무침’은 아내가 가장 좋아 하는데 이 별미를 한 뼘도
넘는 동그란 새 용기를 사서 입구까지 꽉 채워 담고, 고추와 마늘 멸치를 쫄여
둥그런 찬합에 꾹꾹 눌러 담고, 하나 살 때는 몰랐는데 스무 개를 샀다가
어깨허리고개 아파서 죽을 똥 살 똥 들고 왔다는 ‘오이피클’도 가져왔다.
또 내가 예식장피로연에서 단골로 먹는 최애 음식은 당면인데 바라보는 눈과
집으러 가는 젓가락까지 착각한 음식은 버섯등 양념과 함께한 ‘미역 줄기’였다.
자박자박 졸인 깻잎은 양념간장에 절인 생 깻잎과 그 맛이 깻잎 한 장 차이인데
특유의 졸인 맛을 보여 주었다. 특별히 아내가 만들어 둔 ‘식초 무 쌈’이 굳이
비틀어 짜지 않아도 스스로 보라색을 내는 비트가 찬의 화합에 여보아란 듯이
올라앉았다.
상차림 후에. 조 씨라서 조크라면 생각이 필요 없는 남매는 즉 문 즉답 우문현답
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오빠 건강생각해서 고기는 없고 다 풀이야~”
“그러게 다 언니 좋아하는 쓰레기(시래기) 반찬이네?”
“쓰레기는 여기저기 많아~ 널린 게 다 쓰레기여 하하하.”
“그건 그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다.”
“근데 언니가 너무 요리를 잘해서 바짝 쫄았는데 맛이 있는 지나 모르겠어.”
“그래? 바짝 쫄아선지 정말 잘 쫄여 맛있다.”
“하하하. 오빠 얼마나 맛있어?”
“응 완전히 시골 밥상?”
“시골 할매 밥상?”
“아니 그보다 더 맛있어. 시골 욕쟁이 할머니 밥상?”
“그려? 하하하 야 이 썩을 x들아 x먹고 맛없으면 돈 안 받아 @@ &&& ***....."
맛이라면 대장금보다 욕쟁이 할머니 솜씨가 최고인데 그와 동급이라는 우문현답
즉문즉답에 동생은 육두문자 아니 칠두문자를 찰진 개그로 풀어냈다. 화술의 대가
동생과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그렇게 끝났다.
식후 드라이브는 동생 남편의 고향 화순탐방으로 이어졌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
등장하고 그에 버금가는 ‘화순 적 벽’은 수몰지구라 못 가고 광주시민 식수를 담은
동복 땜을 보며 주변숲길을 돌았다.
석탄 산업 하양으로 사라진 화순 탄광을 지나 무등산을 뒤로 돌아 나오는 숲길,
그 코스들은 치톤피즈인지 솔 향인지 알 수 없는 상큼한 공기를 바람과 함께
내뿜었다. 우리는 그 공기를 무성한 칙 넝쿨처럼 온몸으로 칭칭 감아 담고 나왔다.
그가 다녔다는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저기 그의 추억이 담긴 이야기들을
여행 가이드의 말처럼 들으며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데 언제나 화술의 대가
동생에게 밀리는 가이드는 말을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청소를 하다가 돌 맹이를 걷어 찾는데 하필 잘못 날아가 유리창을 깼는데 교장
선생님한테 들켜 귀싸대기를 얻어맞았어.”
“그니까 그때 그 버릇 지금도 못 고쳤네~ 왜 길 가다가 괜히 돌 맹이를 걷어차~”
“뭔 소리여 지금은 안차 이 사람아.”
“안차긴 뭘~ 안차. 이리 뻥 저리 뻥 차 더만.”
사실 그랬다. 동생은 말이 거창하지 뻥을 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학교를 빠져
나왔는데 가이드는 아직 성이 안찼는지 패키지여행처럼 우리들을 또 끌고 다녔다.
그때 물가에 자리 잡은 마을 입구에 커다란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보고 가자고했다.
1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
가까이서는 도저히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은행나무의 수령을 살펴보니 조선조
성종1469년 이후 조성된 마을에 ‘야사리 은행나무’는 1천년 가까운 세월을
수호신처럼지켜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족보에 유명인물이 우리 조상이라고 끼워 넣듯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도있을 법하여 살펴보니, 전란이나 좋지 않은 일이나면 은행나무가
울었다는데 너무 비통하여 은행 알 눈물 뚝뚝 흘리며 울었을까나?
여하튼. 대여섯 명의 팔을 대여해야 감쌀 수 있는 은행나무는 여러 갈래가 함께 모여
거대한 기둥을 만들어 곧게 뻗어 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나보다 조금 연배가 높은
부부가 딸과 함께 우리남매 뒤를 따라왔다. 앞선 우리 남매는 어른 팔뚝 굵기만 하고
동굴종유석처럼 달렸지만 끝이 뭉툭한 신기한 나무줄기를 두개를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크의 달인 남매의 대화가 즉문즉답 우문현답으로 튀어나왔다.
“오빠 저거 만지면 아들 난데~ 우리 딸 아들 낳으라고 만져야겠어. 사진 찍어 빨리.”
“그럴까? 나는 저걸 안 만져봐서 손자가 없나 보다 좀 더 일찍 올걸.”
“긍게 말이여 아~나 참.”
남매의 즉문즉답 유언비어 조크에 뒤 따라 오시던 할머니가 급하게 할아버지를 불렀다.
“영감 빨리 와 봐 이거 만지면 손자를 낳는데 애기도 없는데 빨리 사진 찍어 보여주게.”
“허 참.....”
할아버지는 빙그레 아이스크림 녹이는 미소를 머금고, 할머니는 키를 높여 ‘거시기’
를 만지려는 애타는 손짓을 했다. 손자를 낳으라고 활짝 웃는 웃음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조금 더 돌자 이번에는 그보다 훨씬 더 커다란 ‘거시기’가 나타났다.
“와~ 크다.”
“저걸 만지면 장군이나 대통령 감을 낳는데. 하하하.”
웃으며 나누는 대화를 들은 할머니가 깜짝 놀라 달려왔다. 할머니는 이미 저‘거시기’
를만지면 정말 손자가 태어난다고 믿었지만 이‘거시기’를 만지면 정말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는 아직 세뇌되지 않았는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저걸 만지면 정말 그런 아들을 난데요?”
“예~ 그쵸~하하하......”
남매는 우문현답 즉문즉답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손자가 없는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시고 남매는 흡족하게 해 주었다는 웃음을 한껏 웃었다.
남매가 지어낸 명랑 맹랑한 은행나무 이야기 단편에 은행나무 주변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웃음꽃이었다.
무더위 중에 3시간여의 오후 여행이 끝날 무렵에 피로가 몰려와 슬슬 잠이 왔다.
이때 피로를 몰아내는 청량제 동생의 입술이 열리고 남편이 화답했다.
“나는 기도를 하라면 잘하는데 왜 방언기도는 못하지?”
“이 사람아 그건 성령 충만해야 하고 기도원에서 몇 날 살던지 부흥회에서
은사를 받아야하지.”
“아니여. 그것도 그렇지만 방언을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는데 내가 잘 알어.”
“뭔데.”
“너는 말을 너~무 잘하니까 방언이 필요 없고 한국말로만 해도 충분히 알아
듣는다. 그 대신 이사람 저사람 흉내 잘 내는 방언으로 만족해라 하셨어.”
“말 되네.”
그렇게 가이드가 유도하자 동생은 유명한 기도원과 여러 목사 집사들의
방언을유창하게 들려주었다.
“@#$^*#@#$%^%^.....근디 말이여 그중에 우리교회 목사님 방언이 최고여
@#$%&!@*%&()$......그리고 제일 쉬운 방언은ㅎㅇㅅ기도원 목사님이지
@#*%&$!$*%@#^*.....”
어찌나 웃었던지 방언을 듣는 사이에 잠은 달아나고 식당에서 도착하여 아귀찜
꽃게무침 볶음밥으로 배터지는 만찬을 즐겼다. 그중에 소식하는 아내가 전보다
많이 먹었다고 하자 남매는 더욱 배부르게 칭찬을 해 주었다.
“외식을 하면 늘 손해 보는데 오늘은 아주 잘했어.”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내는 성가대를 은퇴한지 한참이나 되었는데 아귀
찜에 가득 들어 있는 콩나물 대가리만 잔뜩 먹었고, 지휘자가 한음한음 콕콕
집어 주듯이 아귀의 맛깔 나는 살들을 하나하나 집어 우리 세 사람 악보에
쉼표도 없이 계속 올려주기에 바빴다.
동생부부가 돌아가고 배부르면 잠이 오고 아내는 일찍 잠이 들었다.
나는 행복한 여행의 여운이 남아 늦은 잠을 잤다가 새벽에 꿈을 꾸었다.
고향에 사는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온 꿈이었다. 오늘 오빠 언니를 사랑해서
소풍 온 동생과의 대화 중에 오지 못한 가족 이야기도 많았으니 꿈에서도 가족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꿈속에서 울었다. 근데 꿈을 깨었는데도 울고 있었다. 형님이 많이 아파서
빨리 나았으면 하는 기도문을 적어 왔다는데 들어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형님이 많이 아프다는 말에 기도문도 들어보지 않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어찌나 슬펐던지그 눈물이 현실로 이어져 흐르고 낮에 본 은행 알보단 못해
손가락으로 지우며일어났다. 꿈이라서 참 다행이었다.
“형님 형수님 건강하세요.”
새벽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 우리가족 모두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기도와 함께 ‘현문우답’으로 행복하고 재미있게 웃었던 여행 후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2024년7월15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