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2-3학년 때의 담임선생님은 같은 분이 연속으로 맡으셨는데 성함이‘안홍근’이라는 분이셨다.
축산을 전공을 하신 분이므로 축산과인 우리반을 맡으신 것 같은데 1, 2, 3학년 모두 축산과가 있는데 어찌 거듭 담임을 하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도 내게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내가 담임 하고 있는 아이들을 이분과 같은 방침으로 지도는 못하고 있지만 영향은 많이 받았다.
내가 본받을 점이 많다고 생각한 이분도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하셨다.
요즘도 복장이라든가 두발의 길이 등 학교 규정에 대하여 고교생들이 반발을 많이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도 규정을 정확히 지키지 않는 아이들이 많아서 늘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신경전이 많았다.
가끔은 선생님 3분이 한 교실로 들이 닥쳐서 두분은 앞 뒤 문을 막고 한분은 바리깡을 가지고 두발이 박박 머리인 규정보다 훨씬 긴 아이들을 잡아 머리 한 가운데를 밀어붙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일명 고속도로 내기-
탈출로를 차단 당한 아이들은 1층의 경우 창문 너머로 도망을 치는 활극을 벌이는 일도 있었다.
우리 안홍근 선생님은 과히 엄격하신 분은 아니다.
그러나 계속 타일러도 듣지 않아서 벌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피할 길이 없다.
한번은 담배 피우는 아이가 있어서 몇 번 주의를 주고 안 그러겠다고 하고선 계속 걸려서 최후통첩을 받고도 또 걸려서 교무실로 끌려가다가 뺑소니를 쳤다.
선생님은 지체 없이 아이를 따라 달렸다.
아이는 운동장을 뺑뺑 돌다가, 실내화조차 벗어던지고 맨발로 쫓아오는 선생님이 포기를 하지 않자 실습지인 물을 가두어 둔 논으로 도망을 쳤다.
설마 양복을 입으신 선생님이 여기까진 못 따라오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러나 어림없다.
물논조차 망설임 없이 '철벅철벅' 흙탕물을 튀기며 추격을 하셨다.
결국 아이는 선생님이 끝까지 포기를 않으실 것으로 판단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저런 이유에선지 대부분의 말썽꾸러기 거친 아이들도 부드럽게 말씀 하시는 우리 선생님의 말씀은 잘 따랐다.
특히 선생님에 대하여 인상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학년 때의 봄 소풍과 가을 수학여행이다.
봄 소풍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자전거 하이킹’을 제안하셨다.
해본 적이 없는 일이므로 찬반이 크게 엇갈렸다.
좋다는 아이들은 책상을 마구 두드리며 환호를 했고, 싫다는 아이들은 자전거가 없다거나 탈 줄을 몰라서이다.
결국 학급 회의에 붙여져 열띤 찬반 토론 끝에 학창시절에 경험하기 어려운 좋은 추억이 될 것이라는 논리가 우세하여 ‘자전거 하이킹’을 실시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몇 명의 아이에게도 지도를 책임질 아이가 짝 지어지고, 자전거가 없는 아이도 능력 있는 아이가 빌려 주기로 하고 계획을 세웠다.
생각만 해도 멋진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준비를 해가는 과정에서 이것이 만만치 않은 행사임을 알았다.
우선 목적지는 우리의 전공 ‘축산’에 걸 맞는 성환 국립종축장-옛날에는 ‘성환목장’으로 널리 불렸고, 그 안 수목이 울창한 곳에 이승만 대통령 별장도 있었으며 일종의 관광지였음-이며 돌아오는 길에는 직산읍 수헐리에 사는 우리반 아이의 집인 ‘덕령농장’에도 경유하기로 하였다.
50명 정도의 고교생들이 찻길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줄지어 가는 것도 매우 조심을 해야하고 교차로나 급정거 시 문제가 발생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며칠을 두고 선생님으로부터 수신호법, ‘앞으로 전달’, ‘뒤로 전달’ 등 단체 의사 소통법을 배워 연습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막상 자전거 점검 단계에 들어가 보니 라이트는 대부분 없고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는 것, 종이 소리가 나지 않는 것 등 안전장치가 소홀한 것이 꽤 많아서 손을 보아야 했다.
나도 자전거가 없어서 외사촌 형님이 동네에서 쓸만한 자전거를 하나 빌려다 주었다.
그리고 나서도 몇 명은 공기펌프, 간단한 공구, 빵꾸 수리도구 등을 나누어 맡아서 지참을 하도록 했다.
그까짓 하루 행사에 번거롭게 왜 준비를 시키나 했는데 여러명이 움직이다 보니 결국은 유용하게 사용을 하였다.
가고 오면서 신나게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쳐가며 즐기긴 했지만, 체인이 벗어지는 경우는 매우 많았고, 바람이 빠지거나 가로수를 들이 받고 바퀴가 휘어지거나 고장이 나는 경우도 꽤 있었다.
당시의 자전거 형편이 새 것은 매우 드물고 2/3 이상이 일제시대 때부터 20년 이상을 사용해 오던 것이었으니 오죽하랴!
뜻밖에 학생 중에도 자전거 전문가가 몇 명 있어서(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자전거 통학생들이다) 능력을 발휘했다.
선생님께서는 가급적 우리의 일은 학급회의를 통해서 스스로 결정을 하도록 해주셨다.
2학기 때는 학급 단위의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학급회의에서 장소 결정에 의견의 일치를 못보고 다투면서 시간을 끌자 선생님께서 속리산을 제안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경비 거출, 전세버스 예약 등이 자치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몇 가지 안중에서 회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비는 가장 작은 안으로 결정이 되었다.
오래되어 가물가물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속리산을 갈 때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는 말티고개가 매우 인상적이었고 정이품 송, 오리숲, 법주사의 불상, 팔상전, 석연지 등이 생각난다.
다음날 전원 문장대를 올라갔는데 단풍이 절정에 오른 때여서 정말 평생에 처음 보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마침 국어선생님과도 동행을 하였는데 즉석에서 그 풍경을 선경(仙境)에 비유하여 시조를 읊으셨는데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선생님이 된다면 저런 멋진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찌 하다보니 늦게 출발을 하게 되었고, 관광 시즌이어서 차가 밀려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저녁이 늦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아우성을 쳐서 밥을 사먹고 가자는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경비 집행을 선생님께서 하시는 게 아니라 학급회 총무가 거출로부터 지출까지 하는 체계였는데 총무 왈 ‘전세버스비’를 주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시 식사비를 내라고 하니 내겠다는 사람 하나 없이 비난만 쏟아져 들어온다.
상황 파악을 하신 선생님,
“야, 차 식당 앞에 대라고 해라.”
“돈이 없어요, 선생님!”
“아, 글쎄 걱정 말고 차나 대라고 해.”
그러시고는 우리 50명의 저녁식사비를 모두 내셨다.
하루를 쉬고 학교에 나와서 또 반장이 나서서 아이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돈을 걷어서 선생님께 드리자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그 방법에 대하여는 돈만 걷어서 드리자, 돈 대신 선물로 사 드리자, 등등 이론이 분분하다.
결국 돈만 드리면 안 받으실지 모르니 분위기 조성을 위해서 빵집으로 모셔서 감사의 인사말도 전하고 돈도 드리자고 합의를 보았다.
그당시 우리반의 반장도 한 인물 하였다.
아산 신창 출신으로 우리보다 나이가 3살 많은 몇 년 꿇은 ‘맹치영’이라는 학생이지만 우리에게 형님으로서 손색이 없는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토론 중 아무리 의견이 분분해도 가만히 듣다가 교통정리를 하여 결론을 내리면 아무도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을 만큼 판단이 정확하고 논리가 정연했다.
고 3때는 전교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지금의 우체국 골목을 한참 올라가 한전 위쯤에 ‘황금당’이라는 좁아터진 빵집에 50명 가까운 우리반 아이들이 모여서 빵을 먹으며 선생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도착하시고, 반장이 준비된 하얀 봉투와 인사말을 하고 아이들은 박수를 치고 포도주를 한잔 따라 드렸다.
“야, 너희들 나 술 못 먹는 거 알고 남은 것 너희들끼리 모두 나누어 마시려고 그러지?”
“예!”
선생님의 농담에 우리도 다 같이 농담으로 합창을 하였다.
한잔을 드시더니 바빠서 먼저 가신다고 하시더니 진짜로 포도주를 몇병 더 시켜놓으시고 포도주값과 빵값을 모두 계산하고 가셨다.
이런, 드린 돈 또 거의 다 쓰셨다.
우리는 감격에 겨워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며-사실 학생 신분에 술을 마시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그 당시는 고교생 정도면 진학하지 않은 친구는 이미 농사를 짓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술을 마시는 것이 지금처럼 엄격히 금기시 된 것은 아니었다.- 훈훈한 선생님의 이야기로 꽃을 피우다 헤어졌다.
이분은 6-25전쟁 시 참전을 하여 총알이 몸 몇 군데를 뚫고 지나간 상이군인이라고 한다.
또 몸집은 작은 편인데 대학생 때는 검은 가죽 장갑의 주먹으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는 ‘카더라’통신도 있었다.
졸업 후도 늘 존경심을 가지고 근황이 궁금하긴 했지만 뵙지 못하다가, 나중에 내가 교사가 되고 얼마 지나서 스승의 날을 맞아 같은 교직에 있는 친구들을 모아 당시의 고3때 담임 선생님을 모두 모셔서 몇 번 약주 대접을 하는 것으로 약간의 죄송함을 메꾸었다.
지금은 또 어떻게 지내시는지?
대부분의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들은 교장 교감 등 관리자로 승진을 하지 않으신 분이 많고, 한결 같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 못되신다.
대신 건강하게라도 사시면 얼마나 좋으랴!
<끝>
첫댓글 학창시절생각이 어렴풋이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