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포이 박물관(Delphi Archaeological Museum) = 그리스
유적지에 있는 기념물이나 동상을 보고 감탄하면 안된다. 대부분 복제품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델포이 유적도 마찬가지다. 극장, 운동장 등 옮길 수 없는 유적 외에는 모두 델포이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유적지를 보고 내려 오면 바로 앞에 나타나는 건물이 델포이 박물관이다. 14개의 전시실에는 스핑크스, 델포이의 기수, 안티누스의 동상 등 델포이와 다른 유적지에서 발굴한 유적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어머어마한 유적들이다. 박물관은 1903년 문을 열었으며 몇 번의 개수 공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중요한 전시물로는 낙소스의 스핑크스(Sphinx of Naxos)가 있다. 델포이 신전의 위상을 대변해 주는 위대한 기념물 중 하나다. 그리스 신화의 스핑크스는 날개 달린 사자의 몸에 얼굴은 여성의 모습이다. 에게해의 낙소스인들이 기원전 570 년경에 제작해 신전에 바친 기념물이다. 스핑크스는 박물관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높은 기둥 위에 세워져 있었다. 델포이의 마부(Charioteer of Delphi)도 이곳의 중요한 전시물이다. 겔라(Gela)의 군주 폴리잘로스(Polyzalos)가 피티안 제전 전차경기에서 우승한 기념으로 바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이야기다. 원래는 네 마리의 말과 두 명 이상의 마부가 있던 큰 조각상이었다. 그러나 다른 마부들은 발굴하지 못했고, 네 마리 말은 현재 베네치아 산 마르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청동상의 속눈섭과 입술은 구리, 머리띠는 은, 눈은 오닉스로 만들었다.
황소발 모양 삼각대에 놓인 청동 가마솥은 기원전 7세기경에 만든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가마솥에 음식을 넣고 팔팔 끓여 서로 나누어 먹었을 것이다. 옆으로는 기원전 8세기에 만든 청동 방패(Bronze votive shield)와 기원전 7세기에 만든 청동 헬멧(Bronze helmets)도 보인다. 아폴론과 까마귀 그림이 있는 흰색 킬릭스(Kylix)는 기원전 480-470년에 만든 것이다. 킬릭스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큰 접시를 말한다. 그런데 악기를 든 아폴론이 앉아 있는 의자가 접이식이다. 2500년 전에 누군가 접이식 의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아폴론이 포도주를 땅에 붓는 것은 대지의 여신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다. 아기아스의 대리석 상은 BC 5세기 판크라티온에서 우승한 테살리아 청년을 조각한 것이다.
판크라티온은 레슬링과 복싱을 합친 것 같은 매우 격렬한 격투기다. 경기는 한쪽이 기권하거나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선수가 죽으면 그 때는 죽은 선수가 승자가 됐다. 은으로 만든 실물 크기의 소는 기원전 6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어부들이 제우스에게 바친 기념물은 나무로 소를 만들고 그 위에 1500개의 은못을 고정한 것이다. 안티누스(Antinoos)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총애한 비티니아(소아시아 북서부에 있던 고대 왕국) 출신의 소년이다. 19살 때 나일강에서 익사해 죽었다. 이후 황제는 여러개의 안티누스 동상을 제작해 모든 성역과 도시로 보냈다. 그 중 하나가 델포이에 보내진 것이다. 그의 동상은 1894년에 발굴됐으며, 원래 머리에는 청동 월계관이 씌어져 있었다.
델포이 박물관에서 가장 중요한 전시관은 제11전시관이다. 대지의 배꼽인 옴파로스(Omphalos)와 옴파로스를 바치던 델포이의 댄서(Dancers of Delphi)가 전시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옴파로스도 로마시대 때 만든 모조품이다. 진품은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며 파괴시켰다. 옴파로스는 델포이의 댄서 머리 위에 있었을 것이라고 고고학자들은 추측한다. 또한 델포이의 댄서 기둥도 또 다른 하단 기둥 위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옴파로스도 땅에 있던 것이 아니라 스핑크스처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던 바위였다. 델포이의 댄서 아랫부분과 하단 기둥에는 아칸토스(Akanthos) 입사귀가 활짝 피었다. 아폴론 입상에 황금 치장을 한 크리스엘레팬타인(Chryselephantine)은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가 봉헌한 것이다. 크라이스엘레팬타인은 금과 상아로 만든 조각상을 말한다. 바로 옆에는 아르테미스 여신과 이들의 어머니인 레토의 모습도 보인다. 황금으로 만든 아폴론의 머리띠와 아르테미스 의상에서 나오는 광채가 찬란하다. 기원전 198년 델포이를 정복한 로마의 장군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우스(Titus Quinctius Flamininus)의 두상도 보인다. 그 옆에는 턱수염 기른 헤라클레스의 두상이 있다. 그 외에도 전시관에는 칼리돈의 멧돼지 사냥 조각, 소 떼를 훔쳐오는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 형제 조각, 아폴론 신전의 지붕을 장식했던 조각, 청동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 등의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델포이 박물관에서 가장 극적인 전시물은 클레오비스와 비톤(Kleobis and Biton) 형제 조각상이다. 두 사람은 기원전 580년경 아르고스 최고의 효자로 소문이 자자했던 형제다. 조각상은 아르고스 출신의 조각가 폴리메데스(Polymedes)가 기원전 6세기에 제작한 것이다. 형제의 이야기는 헤로도토스(Herodotos)가 쓴 인류 최초의 역사서 <역사> 에 등장한다. 철학자 솔론은 그리스의 일곱 현인 가운 데 한 명이다. 그가 어느날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방문한다. 이때 왕은 자신의 막대한 부를 보여주며 새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크로이소스는 솔론이 자신을 지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달랐다. 아테네의 텔로스(Tellos)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답한 것이다.
텔로스는 훌륭한 아들들을 두었으며 그들 또한 모두 자식들을 잘 낳았고 전쟁에서는 적들을 쳐부셨고 또 장렬한 죽음을 맞이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아테네인들은 국비로 텔로스를 매장해 주었고 그의 명예가 크게 드높여 졌다는 것이다. 왕은 기분이 나빴지만, 다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물었다. 이때 솔론이 답한 사람이 클레오비스와 비톤 형제다. 두 형제는 뛰어난 체력으로 많은 경기에서 우승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머니가 달구지를 타고 서둘러 헤라 축제에 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들판에 나가있던 소들이 제때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이에 두 형제가 소 대신 멍에를 짊어졌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달구지에 태운 채 헤라 신전까지 달렸다. 신전은 5마일 정도 되는 먼거리에 있었다. 형제는 축제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일을 완수한 후 숨을 고르다가 신전에서 깜박 잠이 든다. 어머니는 헤라 여신에게 우리 두 아들에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베풀어 달라고 기도했다. 헤라 여신은 그 기도를 들었고 형제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전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세상에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은 죽음인가?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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