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는 그의 농담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두 시간으로 예정됐던 인터뷰는 어느새 세 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는 작심한 듯 많은 얘기들을 풀어 놓았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을 기록으로남겨 놓고 싶은 마음이었는 지도 모른다. 작곡가 길옥윤 씨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그로서는 피해가고 싶은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점의 여운도 없이 많은 것을 털어 놓았다. 자신의음악 인생의 시작이었던 작곡가 박춘석 씨의 투병 사실을 얘기할 때는 그의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50주년 기념 공연 준비는 잘 돼가나.
“공연 구상은 2년전부터 했다. 4월 30일~5월2일까지 사흘간 세종문화회관공연을 시작으로 전국 투어를 할 계획이다.”
-30주년,40주년 때도 세종문화회관이었는데, 인연이 깊은 것 같다.
“사실 대관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대중음악은 뒷전으로 밀리는 게 현실이다. 나훈아도 얼마전 기자회견에서 언급하지 않았나. 내 노래 스타일도 그렇지만 조용필 처럼 밖에서 공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는가. 어려웠지만 힘들게 잡았다.”
-30주년은 89년,40주년은 99년에 각각 기념공연을 했다. 왜 이번엔 1년 앞당겼나.
“정식 데뷔는 59년 3월이지만 노래시작은 58년이다. 그런데 88년 30주년 때는 올림픽 때문에 89년에 했고, 98년 40주년 때도 대관문제로 99년 3월에 했다. 45주년인 2003년에도 세종문화회관 대관문제가 걸렸다. 그래서 그해 9월부터 지방순회를 한 뒤 2004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마무리했다.”
-30주년 때 40주년 공연이 가능할 까 했었다. 그런데 50주년을 맞았다.
“30주년 때는 40주년 공연에 굉장히 자신 있었다. 하지만 40주년 때는 내가 50주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걱정하기 시작했다. 건강과 성량이 받쳐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강관리와 함께, 내 보물인 음성관리를 철저히 했다. 수영, 걷기를 꾸준히 했고, 5년전부터 요가도 시작했다. 식사조절도 한다.”
-아직도 70세로는 보이지 않는데 그 것만으로 가능한가.
“목소리 관리를 위해 술과 담배는 애초부터 안했다. 그리고 꾸준히 연습했다. 63년 미국에 가보니 쇼비지니스에서는 술, 담배는 물론 마리화나까지 공공연히 하더라. 20대 초반이었는데, 그런 것 보고 놀랐다.”
-정말 독하다.
“옆에서 하도 권해 한 두번 술과 담배를 해보기는 했다. 그런데 체질적으로 맞지 않더라. 큰 꿈을 갖고 미국에 갔기 때문에 노래에 조금이라도 지장있는 것은 금했다. 술,담배외에 도박도 마찬가지다. 거기 살면서 도박 안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집념이다. 그런 것들을 멀리 한 것은 내가 나를 잘 지켜왔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다. 이성관계 역시 그렇다. 복잡했다면 여기까지 못왔다.”
-가수들이 늘 똑 같은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흥이 안나니까 몰입하려고 마약 하는 것 아닌가.
“같은 노래를 1,2년은 신나서 하지만 똑 같은 걸 10년 하다보면 지루하고 짜증난다. 거기서 벗어나려고 마약을 한다. 나도 무대에 서는 가수이기 때문에 그런 것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금물이다. 이건 나를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약에 손대고 남자와 데이트 많이 하면 내 삶의 목표도 흐트러진다고 생각했다. 난 내 삶의 목표인 노래를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공연 끝나고 호텔방에 혼자 있을 때면 고독과 허무가 밀려온다. 많이 울었다. 그럴 때마다 ‘난 살아남아야 해(I have to be survived!). 그러기 위해서 모든 걸 물리쳐야 한다. 오직 노래만 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결혼 전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술 한잔 하자는 유혹, 식사 하자는 유혹을 다 뿌리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다. ”
-큰 병은 없었나.
“지금까지 없었다. 출산 때 빼고는 입원한 적도 없다. 부모님께 늘 감사한다. 지금도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항상 돌봐주신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신체와 훌륭한 목소리를 물려주셔서 감사하다.”
-50주년 기념앨범에 신곡도 포함되나.
“한두곡 들어갈 것 같다. 김희갑 선생께 곡을 부탁했는데, 아직 못받았다. 50주년 앨범이라서 너무 어렵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내가 작곡가랑 살아봐서 알지만, 어떤 건 몇 달 걸려도 안나오는 게 있고, 또 어떤 건 30분 만에도 나온다. 신곡 한두 곡에 리메이크 대여섯곡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나온 노래는 얼마나 되나.
“앨범 70여장에 노래는 한 1000곡쯤 된다. 내 오리지널 곡은 500~600곡이다. 사실 다 기억 못한다. 저게 내 노래인가 할 때도 있다. 이미자씨 경우에는 2500곡 이상이라고 하는데 대단한 것이다.”
-이미자와 나이차는.
“세살 차이다. 나는 38년 2월 28일생이다. 노래는 58년부터 시작했고, 정식 데뷔는 59년 3월이다. 이미자도 59년 데뷔했다. 노래 시작한 것은 이미자가 나보다 먼저였다. 이미자는 열두세살부터 아버지를 쫓아다니며 천막치고 노래했다. 하춘화도 (어려서부터 노래해 경력이 많기는) 마찬가지다.”
“‘9월의 노래’‘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사랑은 영원히’‘사랑은 생명의 꽃’‘빛과 그림자’‘가시나무새’‘연인의 길’‘1990년(딸 정아를 위해 길옥윤 씨가 작곡한 노래)’‘살짜기 옵서예’‘4월이 가면’등이다. 특히‘4월이 가면’은 멜로디, 가사도 좋지만 의미도 있다. 길옥윤 선생이 이 노래를 통해 내게 프로포즈했다.”
-‘초우’‘못잊어’,남과 북의 주제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는 들어갈 줄 알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게 그렇다는 얘기다. 팬들의 선호로 치면 그렇다.”
-시간 제한없이 자신의 노래를 마음껏 불러보고 싶다고 했는데.
“꼭 한번 하고 싶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된다. 2,3년까지는 자신 있고, 잘하면 5년까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공연 때는 한번에 30곡 정도 부른다. ”
-스태미너 유지비결은.
“평소 말을 적게 하고, 많이 쉰다. 지금까지 영양제나 보약을 먹은 적도 없다. 약을 좀처럼 안 믿는다. 그런데 이번 감기엔 아주 혼이 났다. 지금까지 내 건강을 너무 믿었다.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난 내 나이를 생각 안하고 사는 사람이다. 이번에 감기를 아주 오래 앓고 나니 나이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나 보다. 그래도 그것을 부인하며 살고 싶다.”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않나.
“이제는 나이를 인정하고, 몸이 안 좋으면 영양주사도 맞고 그래야겠다. 이번 감기는 내 몸이 내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귀하에게 노래는 어떤 의미인가.
“내 삶의 전부다. 가족도 나의 전부지만, 난 노래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천직이다. 다시 태어나도 패티김이 되고 싶다.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한국을 떠나고 싶고, 실의에 빠진 적은 있다. 하지만 노래를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빛깔과 향기로 표현한다면.
“불꽃이 이글이글거리는 빨간 색이다. 향기로 치면 은은히 오래가는 라일락,자스민향이라고나 할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자스민이다. 해질 무렵부터 향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남편이 샌프란시스코에 집 지었을 때 부엌 창문 밑에 자스민 심어줬다.”
-경쾌한 곡보다는 쫙 깔리는 폼잡는 노래가 많다. 계절로 치면 가을의 여인이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올라가며 커피향처럼 피어오르다가, 감아치는 부분이 팬들을 미치게 한다. 그게 독특한 매력이다.
“글쎄…,커피향도 좋지만 자스민, 라일락에 비유하고 싶다. 은은하면서도 강렬하다.”
-옥타브는 어느정도 까지 가능한가.
“투 옥타브까지는 안되지만 거의 비슷하게 올라간다. 젊었을 때는 투 앤 어 하프, 높은 D까지 무난하게 올라갔다. ‘파드레’같은 노래에서. ”
-스탠더드 팝, 재즈 등 두루두루 다 소화해내는데 예전에 국악을 한 덕분이 아닌가.
“그 영향을 대단히 많이 받았다. 중3에서 고1 올라가는 사이에 했는데 국악으로 발성 연습의 바탕을 닦았다. 국립 국악원에 다녔다. 심청가도 6개월만에 완창했다. 국악콩쿠르에서 1등도 했다. 조용필도 쉬다가 나왔을 때 국악을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조용필의 음색이 특이하다. 그는 아끼는 후배다. 항상 발전하려고 노력하는 후배다. 난 그런 후배를 예뻐한다. 사실 그런 가수 몇 안된다.”
-국민가수라고 하면 패티김, 이미자를 꼽는다. 또 누가 있나.
“우리와 스타일은 달라도 트로트가수로 미자씨는 당연하다. 또 조용필은 항상 노력한다. 나훈아도 국민가수 자격이 있다. 요즘 태진아, 송대관, 설운도, 주현미 등이 활동하며 트로트가 대중화되고 대우받지만, 그 전에는 안그랬다. 트로트계가 이만큼 대우 받는 것은 나훈아 덕분이다.”
-나훈아의 경우 고가전략, 신비주의, 철저한 자기관리 등에서 비슷하다.
“그래서 나훈아를 존경하고 싶다. 자기 일 열심히 하고 관리도 철저하다. 그런 가수 몇 안된다. 나훈아 조용필, 이미자는 타고난 가수니까 늘 정상이고…. 그 외에 누가 있을까.”
-대중과 어느정도 떨어져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자주 호흡하는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각자의 성격 다르듯이 각자 관리도 다르다. 나를 예쁘게 안 봐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것에 대해 조금도 후회 안한다. 돌아봤을 때 나는 내자리 지키며 참 잘 이끌어왔다고 자부한다. 직업적으로 90점을 주고 싶다. 음식솜씨는 50점? 부인으로서는 최선 다했지만, 직업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가족에게는 아주 잘 해주지는 못했다. ”
-선생의 노래가 노래방에서 흥깨는 데 최고다.
“(웃음). 그래서 내 노래가 밤업소에서 먹히지 않는다. ‘초우’를 노래방에서 부르니까 54점 나왔다. 내 품격 올리기 위해 밤업소에 안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열광하지 않는데 어떻게 노래하겠는가. 술마시고 떠들고 담배연기 자욱한 곳에서 노래하는 게 너무 싫었다. 유혹 뿌리치는 것 정말 힘들었다. 그런 곳에 딱 세 번 가봤다. 나이트클럽 오프닝 하는 곳에서 출연교섭 와서 가본 적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역시 내가 설 자리는 아니었다. 돈 싸들고 와서 출연해달라고 하는데 정말 난감했다.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의 부탁으로 사적인 자리에 나간 것도 다섯 번이 안된다. 광고도 딱 한번 했다. 80년대 중반 네스카페 광고였다. 당시로서는 광고모델로는 최고의 모델료를 받았다. 1년 하고 6개월 더 연장했다. 이탈리아와 파리에서 촬영했는데, 광고 역사상 외국 로케이션, 특히 유럽 로케이션은 처음이었다. 남편이 이탈리아 사람이어서 이탈리아 갔을 때 무척 즐거웠다. ”
-가수가 된 동기는
“내가 하려고 해서 된 게 아니다. 큰오빠 친구 곽준영씨가 기타를 쳤는데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와서 노래했다. 그가 가수를 권유했다. 가족 전체가 노래 다 잘한다. 어머니가 노래 워낙 좋아해서 저녁 먹고나서 다함께 합창했다. 집안에 노래와 음악이 그칠 때가 없었다.”
-부모가 어떤 분들이었길래….
“아버지는 메이지대 졸업하고, 어머니는 숙명여고 나왔다. 오빠 한분이 서울신문 사회부 기자였는데 우리 집안 뿌리를 잘 알고 있어서 이번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 연재를 위해 기록을 보내왔다. 나보다 5,6세 많다. 이번 50주년 콘서트에 42년 만에 8남매 형제자매(3남5녀)가 다 모이기로 했다. 큰 오빠가 가장 먼저 이민 떠난 뒤 줄줄 다 떠났다.”
-끼가 있으니 공부는 젬병 아니었나.
“중앙여고 다닐 때 노래 잘했다. 공부는 중간쯤이었다. 그래서 대학 가라고 해도 안갔다. 그 때 집안이 가난해 고등학교 졸업도 힘들었다. 월사금도 제대로 못내는 형편에 왜 대학을 가야하느냐고 말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따로 나가셔서 어려웠다. 6.25 사변도 나고 더 어려웠다. 평택까지 산 11개를 넘어 피난갔다. 어머니와 나, 동생 둘이 대구에 피난가서 피난온 학생들이 배우는 연합학교 다녔다. 초등학교 거기서 졸업하고 중앙여고 입학했다. 큰 오빠가 일제때 징용 갔다 살아왔고, 둘째 오빠는 6.25때 의용군에 끌려갔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피난가면서 큰 오빠가 공군 입대하고 줄줄이 삼형제가 다 공군에 입대했다. 은행다니던 큰 언니는 당시에 결혼해서 부산가서 살고 있었고, 꼬마 셋하고 어머니는 대구에서 살았다. 전쟁 후 8남매가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좋은 가족이다.”
-가수가 된 것도 행운인가.
“학교 다닐 때 끼가 상당했다. 큰오빠친구가 가수를 권했지만, 오빠가 말렸다. 노래하다 중단했고, 국악 콩쿠르 나간 게 알려져서 집에서 난리가 났다. ‘창 배워서 기생 밖에 더 되는가’라는 것이었다. 나도 국악을 더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린 나이에 창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더라. 그야말로 끼가 있어서 학교에서 ‘누가 해볼래’ 하길래 손들고 노래했는데 선생님이 ‘너 가능성 있다’고 해서 국악원에 나오라고 했다. 월사금 내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니냐 했더니 무료로 가르쳐줬다. 선생님은 가능성을 봤던 것이다. 남산에 올라가 소리지르고 했다. 국악은 호흡이 길어야 하는데, 가수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어려서 국악한 것이 가수가 되기 위한 기초가 된 것 같다. 그것도 팔자였다.”
-어릴 적 꿈은.
“원래 꿈은 스튜어디스였다. 음성이 예쁘다고 아나운서하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데 어게 가수가 됐나.
“앞에서 말한대로 반대가 있었지만 가족 몰래 시작햇다. 58년 미군상대 공연을 위주로 하는 화양주식회사의 전무로 있던 ‘베니 김’을 소개받아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여름에 시작했는데 다음해 초봄에 정식 오디션 봤다. 첫 월급은 3월에 받았다. 그 전에 용돈 조금 주더라. 정식월급은 5만원이었다. 나는 5와 인연이 깊다. 미국 갈 때도 주급 500불이었다.”
-그때 프로덕션이 요즘 연예기획사와 비슷한가.
“비슷하지 않다. 아주 체계적이었고 여러 단체를 운영하는 큰 회사였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훈련해야 했다. 베니 김이 살아계시면 85세 쯤 됐을 텐데…. 여러 단체들이 프로덕션에 소속돼 있었다. 단체들은 A,B,C로 급이 매겨져 있었다. 나는 당연히 A급이었다. 김영순 씨(베니 김의 본명)가 트럼펫 연주자로 단장이었고, 남자가수 여자가수 무용수도 있었다. 남자가수 중에 김성원으로 기억하는데 정말 노래 잘하는 가수가 있었다. 최희준은 다른 단체 가수였다. 그 때 윤복희, 현미, 유주영, 위키리도 다 다른 단체 가수 였다.”
-맨처음엔 ‘린다 김’이었다며?
“맞다. 하지만 마음에 안들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들, 리타 헤이워즈, 에바 가드너 등의 이름을 따려 했다. 그 중 에바를 좋아했다. 에바 킴. 당시 패티 페이지 노래도 좋아했는데, 패티 김 해보니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패티 김이 됐다.”
-60년 국내 가수론 첫 일본 초청 받았는데.
“당시 조선호텔 사교클럽이 있었다. 장성급만 가는 클럽이었는데 전속가수 오퍼가 왔다. 당시 8군 무대를 상대로 지방 곳곳을 다녔다. 트럭 타고 다녔다. 1년반 하다보니, 싫어졌다. 나는 도도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도도했다. 그래서 트럭타고 다니는 공연이 싫증 났다. 뭔가 한 계단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도 어렸고 아무것도 몰랐는데, 오퍼가 오니까 마음이 끌렸다. 물론 베니 김은 무척 아쉬워했다. ‘배니 김 쇼’의 스타였으니까. 전속은 아니었으니까 베니 김 쇼를 떠나 조선호텔에 나갔다. 관객이 수준급이었다. 대부분장성급인데다 여자들도 하이클래스였다. 노래할 때 반응도 조용했다.‘오케이. 이게 나의 스테이지다’라고 생각했다. 미스터 마스터스라는 분이 NHK, AFKN에서 국장급이었다. 그 분에게서 면회요청이 왔다. 그 전까지 여기저기서 미국, 독일에 가자는 오퍼가 왔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실망도 했었는데, 이분은 방송국 직원이라는 확실한 명함이 있으니까, 신뢰가 갔다. 그 분은 일본에서 자신이 담당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두번째 신뢰감을 가진 이유는 그가 반신불구자라는 것이었다. 그는 차 사고로 반신불구가 돼 목발을 짚고 다녔다. 남자들이 미국 데려가자고 하는 것은 다 흑심 품고 유혹하는 거지만, 이 사람은 불구자니까 그런 흑심이 없다고 믿었다.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일본에 데려가고 싶어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일본에 갔다. 그 때는 개인으로는 일본 가서 활동할 수 없으니까 NHK 초청으로 갔다. 6개월 정도 활동했다. 60년 12월에 처음 비행기 타고 일본 갔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
“그렇다. 거기에다 은인들도 많다. 첫번째 은인은 곽준영 씨다. 그 분이 나에게 가수의 문을 열어줬다. 국제 무대를 열어주신 분은 미스터 마스터스다. 이 분이 미국 가는 것까지도 다 도와줬다. 잊을 수 없는 은인이다.”
-마스터스는 살아있나.
“그분이 거의 거동 못할 정도였던 80년초 정아와 함께 방문했다. 몇 개월 뒤 돌아가셨다.”
-일본서 활동은.
“61년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동남아 순회공연을 했다. 2개월 이상 워킹 비자를 안줬기 때문이다. 2개월하다가 어디로든 나가야 했다. 그래서 미스터 마스터스가 주선해서 홍콩, 오키나와 미군기지, 필리핀 미군기지 등을 다니며 3,4일씩 공연했다. 그 사이에 비자 만들어서 다시 일본에 들어오고 그런 식이었다.”
-우리 최초의 뮤지컬인 ‘살짜기옵서예’는 66년 했다. 63년 미국에 갔는데 라스베이거스에서 뮤지컬을 했나.
“뮤지컬 했다. 나는 라스베이거스 가서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했다.‘플라워 드럼송’이란 작품이었다. 당시 동양인이 주인공인 뮤지컬은 ‘왕과 나’‘플라워 드럼송’ ‘남태평양’ 정도였다. 주연 배우는 다 외국인이 했다. 거기 나오는 하인, 무용수 들만 중국 일본 사람 썼다. 플라워 드럼송의 주인공이 중국사람이지만, 주연배우는 다 외국인이 했다. 조연은 다 중국사람이었다. 거기서 나는 재봉사 역의 조연을 했다.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송을 했다. 그러면서 뮤지컬의 매력 느꼈다. 1년 반 되니까 미국생활도 알겠고 영어도 좀 하 게됐고, 쇼비지니스는 뉴욕이 본거지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뉴욕 보내달라고 해서 어렵게 뉴욕에 갔다. ”
-미국생활은 행복했나.
“노(No)! 내 자신이 길을 개척해가면서 고생 많이 했다. 63년 미국에 간 이후 뉴욕생활 포함해 66까지 무척 힘들었다. 한국 일본에서 스타 맛을 보고 미국 갔는데 인종차별이 너무 심했고, 동양인이 설 무대도 없었다. 그 때 미국인들은 한국인은 알지도 못했다. 인종차별에 당황한게 한두번이 아니었고 황인종은 어디에 속하는가 아이덴티티 문제도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기대에 어긋나고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한국에 돌아올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큰 물에서 놀아야 뭐가 되도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 귀국했나.
“어머니 병환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동맥 막혀서 대수술 받았다. 99프로 돌아가신다고 생각했다. 동남아 공연 다니면서부터 가족과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생각해 2개월 휴가 내서 66년 2월 귀국했다. ”
-모시고 가려고?
“당시 미국에는 호텔마다 사교 클럽이 있었다. 이 도시 저 도시 다니면서 공연했다. 주 거주지는 뉴욕이었다. 뉴욕에 이왕 힘들게 왔으니까 죽기 살기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 절약하는 타입인데, 어머니 모셔오려고 돈을 악착같이 모아 방 두개 짜리 아파트를 얻었다. 그 때는 형제들이 다 이민 가있는 상태였다. 스페인, 독일, 영국 등. 모셔 오려고 한국에 왔는데 수술은 성공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는데.
“뮤지컬 조연배우 등을 전전하다가 드디어 새로 생긴 호텔 무대에 단독으로 오를 기회가 생겼다. 거기서 스탠다드 팝송을 부르고, 우리 노래 ‘아리랑’을 불렀다. 관객들은 아리랑을 처음 들어 별 반응은 없었지만, 나는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첫 무대를 가졌다는 기쁨과 그 동안의 설움이 교차해서일까. 나중에 관객들이 ‘그 좋은 노래를 부르면서 왜 눈물을 흘리냐’고 하더라. 그리고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국 가수가 라스베이거스에서 노래한다며, 낡은 차를 렌트해서 라스베이거스까지 와서 내 공연을 봐줬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김치까지 건네주는 데 정말 눈물이 나더라.”
-일본 가서 스타더스트 밴드 순회공연 하고, 62년 귀국해서 피카디리(나중에 반도극장)에서 최초의 리사이틀했는데 반응은 어땠나.
“리사이틀이라는 타이틀을 건 게 내가 최초다. 그 전에는 다 쇼였다. 쇼 소리가 싫어서 리사이틀이라는 말을 썼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아는 단어였다. 그 타이틀이 사람들에게 어필했다. 처음으로 일반팬을 만났다. 당시 키(168㎝)도 컸고, 노래 성량도 대단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노래의 대부분이 길옥윤과 박춘석 곡이다. 길 씨는 어떻게 만났나.
“일본에 처음 갔을 때 ‘쿨 캐츠’란 캄보의 리더였던 길옥윤 씨를 몇 번 만났다. 그는 미소라 히바리가 엔카 가수 자리를 갖고 있지만 팝 싱어는 없다며 일본에 나 같은 스타일의 가수가 없으니까 일본에서 활동했으면 좋겠다고 몇번이나 말했다. 그러다 나는 미국엘 갔고,어머니 때문에 귀국했는데 그도 역시 어머니 때문에 일본에서 와 함께 방송에 출연하고 하다 보니 친해졌다.”
-당시 길 씨는 가까운 일본에 있으면서도 18년 만에 귀국한 거라는데.
“길 씨는 일본에 오래 살면서 한국에 안왔던 것은 가족 문제때문였다. 길 선생이 5살 때 큰 삼촌 댁에 양자로 갔다. 등에 업혀 가면서 엄마 형제들이 우는 걸 보면서 갔다. 그게 한이 맺혔다. 가까이 살면서 몇 리 걸어서 집에 가면 또 데려가고…, 그래서 양아버지는 더 멀리 이사가곤 했다고 한다. 정말 잔인한 일이었다. 그렇게 자라면서 내성적이 됐고, 친부모 양부모 모두 미워했다.”
-66년 귀국해서 길 선생 만나 그해 ‘4월의 노래’ 받고 결혼(12월)하고,‘패티와 이밤을’이란 방송프로그램도 함께 했다. 딸(정아)도 낳고 사이가 좋다가 왜 갈라졌나.
“66년 12월 워커힐에서 결혼했다. 70년 별거 시작해서 72년 봄 이혼했다. 이혼발표 기자회견도 했다. ‘이별’은 별거중에 받은 노래다. 그 사람은 하와이에 있었다. 원래 제목은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였다. 제목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며칠 생각하다 길씨에게 전화해서 ‘이별’이란 곡목이 어떨까요 했다. 그때까지도 재결합하려고 노력했었다. 이혼까지 갈 지는 몰랐다. ‘이별’이 이혼송으로 알려졌다.”
-이혼 후는.
“이혼 후 74년 그가 작곡한 ‘사랑은 영원히’로 제4회 동경국제가요제에 나갔다. 우리 얘기는 당시 주간지에 매일 나왔다. 누구 때문에 이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속사정이 있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는 음악인으로서는 정말 잘 맞는 콤비인데, 부부로서는 영 아니었다. 이혼하니까 내가 길씨를 찼다고들 그러더라. 나는 강자였고 길씨는 약자로 보였기 때문에 이혼하면서 그런 얘기 나왔다. 성격적으로는 솔직히 그랬다. 솔직히 이혼 원한 것은 나였다. ‘이러지 말고 결혼합시다’ 한 것도 나였다. ‘4월이 가면’은 가사 자체가 프로포즈였다. 부부생활 해보니 착하다고 모두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 곡을 잘 쓴다고 좋은 남편도 아니었다.”
-불행했겠다.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 옛날에 이혼을 생각했다. 그 모든 어려움과 비난을 받아들이면서 결심했다. 사실 이혼하면서 손해 많이 봤다. 별거를 오래 했다. 한번 합쳤다가 또 별거하고 그랬다.나는 계속 한국에 있었고, 길씨는 계속 외국에 있었다.”
-당시 스캔들때문이란 얘기도 있던데.
“별거 중에 지금의 남편(아르만도 게디니)을 만났다. 가수와 팬으로서 만났다. 결혼은 76년 했다. 당시는 내가 게디니를 만나서 길씨를 찼다고 비난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비난이 싫어서 동경가요제 끝나고 미국으로 사실상 도망갔다.
길씨와 헤어진 뒤 앞으로 5년간 결혼도 안하고 그동안 못해본 연애 실컷 해보자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동안은 어떻게 살아남아서 스타가 되는가 오로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 와서 길씨랑 결혼하고 그러다 30대 초반이 됐다. 제대로 연애도 해보고, 내 생활 가져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게디니가 나타났다. 정아는 미국갈 때 데려갔다. 길씨는 가정을 가질 수 없는 남자였다. 그는 정말 예술가다. 그는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고 나는 몇십년 계획을 짜는 사람이었다.”
“그때 미국가서 활동 전혀 안했다. 가장 힘든 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때 한국을 떠난 것이었다. 따가운 눈총과 억울한 비난이 싫어서였다. 10년 뒤 미국에 갔더니 미국 많이 변했더라. 동양인도 많아졌고. 다시 여기서 시작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처음으로 받아보는 비난과 매도에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가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왜 나혼자 비난 받아야하는가 이해를 못하겠더라. 왜 이혼하면 여자만 나쁜 사람 되는가… 그때는 이혼이 거의 없었다.. 신성일 엄앵란 부부 다음에 우리 부부가 가장 많이 화제에 올랐었다. 이혼하니까 100프로가 아니라 200프로 여자 잘못이더라. 미국 가서 전혀 활동안하고 76년 결혼했다. 78년 귀국해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했다. 74년에서 76년은 많이 방황하던 때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형제도 보고 런던에 가서 형제도 보고 스페인의 동생집 가서 있기도 했다. 정아를 데리고.
-박춘석 씨와는.
“데뷔 음반을 박 선생이 내줬다. 미국 가기 전인 62년 첫 음반이 나왔다. 박선생은 내가 미국가는 걸 아쉽게 생각했다. ‘초우’라는 곡 을 받아 데모 녹음 했는데, 미국 간다고 하니 아쉽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 고집 꺾지 못했다. 가기 전에 레코드 하나 내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틸’ ‘파드레’ ‘서머타임’ 등 외국곡만 있는 8인치 엘피음반을 냈다.
이 노래들이 패티김을 세상에 알렸다. 내가 국내에 없는 동안에 노래가 히트했으니, 나는 얼굴없는 가수였다. 도대체 패티김이 누구냐고 난리가 났다. 피카디리에서 이틀간 공연했지만, 내 얼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그 때 본 사람들도 필리핀 사람이냐, 교포냐 고 의아해했다. 키도 크고 생김새도 이국적이니까 나를 한국인으로 안본 사람들이 많았다.”
-박춘석 씨가 요즘 투병중인데
“가끔 찾아뵙는데, 사람을 잘 못 알아 보시고, 말씀도 못하신다. 지난 연말 찾아뵈었는데, 여전히 잘 못 알아보시더라. 말을 못하시니까 알아보시는지 못알아보시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박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선생님이 만들어 주신 히트곡들을 불러 드렸다. 그랬더니 눈물을 흘리시면서 내 손을 꽉 잡으시더라. 눈물이 나서 정말 혼이 났다. 박 선생님은 패티김 노래의 시작이신 분이다.”
-66년 시민회관에서 공연하고 78년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하자는 게 내 조건이었다. 컴백무대인데 크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 프라이드가 있으니까. 3일간 공연했다.”
-당시 돈 떨어지면 한국 와서 공연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건 너무 불쾌한 일이다. 내가 내 나라 찾아와서 내 팬을 위해 공연하는데 그런 불명예스러운 말을 하는게 너무 싫었다. 너무 불쾌하고 싫다.”
-완전 귀국은 언제했나.
“80년 서초동에 식당도 냈었고, 나중에 휘트니스 클럽도 했었다. 88년 후반에 완전히 귀국했다.”
-최근에는 도도하다는 소리 많이 들어간 게 소규모 투어도 하고 그래서 그런 것 아닌가. 옛날 패티김 같으면 상상도 못할 공연이다.
“옛날에는 그런 공연장이 없었으니까 그런 소규모 공연을 할래야 할 수도 없었다. 2004년부터 소규모 공연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녀보니 재미있고 좋았다. 팬들이 소박하고 열광적이다. 큰 도시의 팬들보다 더 반가워해준다. 내가 공연을 온 걸 고마워한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노래하게 된다. 기립박수도 나오고.
50세가 넘으면서 내 태도나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사람이 젊었을 때는 아무리 건방지게 굴어도 다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이들고도 그렇게 하면 그것은 욕을 먹는다. 그 정도 모르는 바보는 아니다. 내 태도나 언사, 화장 등을 조금씩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타고난 성격도 강했지만, 동남아, 일본가서 조센징이란 말 들어가며 거기서 느낀 게 ‘강해야겠다.내 무기는 노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국 가니까 인종차별이 심해서 ‘살아남으려면 강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원래 강한 성격에 주위환경 때문에 더 강해졌다. 내 자신이 갱년기 맞으면서 이제는 겸손해져야 겠다고 느꼈다. 40주년 공연 후 맘먹었는데 태도 바꾸고, 억양 바꾸고, 화장 바꾸는데 10년 걸렸다. 아다시피 원래는 굉장히 화려하게 옷 입고 헤어스타일, 화장도 그랬다. 특히 무대매너도 달라졌다. 어느 무대에서는 신발까지 벗었다. 그랬더니 관객들이 좋아했다. 예전에 기분 나쁜 말 들으면 마이크 놓고 들어갔던 나였다. 30년간 ‘강하자. 도도하자’ 그랬는데 그걸 벗어나는데 10년 걸렸다. 나 혼자의 노력이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부드러워 지고 팬들 만나는 것도 그렇게 되고… 노래부르는 태도도 부드러워졌다. ”
-또 달라진 건 없나.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열정적으로 보일까 연구한다. 예전에는 긴 드레스가 발에 걸리면, 발로 탁 찼는데 이제는 드레스를 손으로 살짝 든다. 그리고 손 제스처도 부드럽게 취한다. 마이크대에서 마이크를 뽑아 좌우로 왔다갔다하며 노래한 것도 내가 처음이었다. 이미 나는 그 쪽 서양 세계를 듣고 보고 좋은 걸 배워왔으니까, 여기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앞서 갔었다. 그걸 멋지게 본 사람은 멋지게 보는 것이고 나쁘게 본 사람은 나쁘게 본다. 난 신경 안썼다.”
-현역 최고령 가수다.
“아직도 팬과 교감하는 게 현역이다. 일년에 공연 15∼20회 한다. 올해는 더 많을 것이다. 다른 젊은 가수에 비하면 너무 안하는 것이다.”
-공연 준비는 얼마나 걸리나.
“이번 공연은 2년전부터 준비했다. 운동하고, 노래 연습하고…. 매일 최소한 한 두시간은 크게 노래한다. 큰 공연을 앞두고는 3,4주전부터 그렇게 한다. 그래야 공연할 때 목이 쉬지 않는다. 이번에는 더 부담이 크다.”
-대중음악의 위상이 예전보다 올라갔다.
“아직도 대중가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문제도 있고, 우리가수들 자체의 문제도 있다. 자기관리 못하고, 손가락질 받는 일도 하고 그러니까. 대우 못받게끔 하는 연예인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게 상업성과 관계가 있다.“
-후배에게 한말씀 해준다면
“요새 후배라는 어린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권리 주장을 할 기회도, 형편도 안된다. 기획사에 소속돼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기획사가 1,2,3년 애들을 키워서 상품으로 만들어놓고 그러니까, 너무 어려서들 시작하니까, 스타 되는 것, 돈버는 것 갖고 시작하니까 경박하고 자기관리가 안되는 것 같다. 그런 게 안타깝다. 4,50대 후배중에 정말 기대했던 가수들 몇 명 있지만 지금은 자기 실력 발휘를 못하고 있다. 자기관리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아끼는 후배는
“없다. 가끔 열린 음악회에서 후배들과 노래하지만, 가수들은 영화나 연극인들처럼 뭉쳐있지 않다. 가수들은 다 개인사업가다. 합치지 못한다. 그래서 가수협회가 작년에야 생겼다. 15년 전에 가수협회 만들려 굉장히 애썼는데….”
-은퇴는 언제쯤 생각하나.
“은퇴란 말은 쓰고 싶지 않다. 40주년 때 목표는 50주년이었다. 미지수였지만 결국 여기에 왔다. 노래 없는 내 삶은 상상도 하고 싶지 않고, 할 수도 없다. 내가 노래할 수 있는 날까지는 노래하고 싶다. 내 욕심이고 희망이다. 정상에 있을 때 내 자신이 알아서 무대를 떠나야 한다. 관객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때가 늦는다. 그것은 나 자신 밖에 모른다. 내 동생, 남편에게 부탁해놨다. 혹시 내 자신이 음정이 불안해질 때 내 자신은 한번 실수 였다고 넘길 수 있다. 혹시 그러면 나에게‘패티, 이츠 타임(It’s time).’이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해놨다. 내 남편과 동생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냉정하게 평가해줄 수 있기 때문에. 이미 10년전에 부탁해놨다. 남편은 그런 능력이 있다.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 노래를 사랑하는 팬이다.”
-남편 동갑이고 건강하게 사업 잘하고 있다고 들었다. 가족근황은.
“정아는 유엔 직원으로 10년 이상 있다가 출산하며 그만뒀다. 남편도 유엔에서 근무한다. 방콕으로 발령나서 거기서 살고 있다. 남편은 영국인이다. 외손주 이름은 킴이다. 정아가 처녀때 읽었던 책에서 인상적인 이름이 킴벌리였다. 그래서 아들 낳으면 킴으로 하겠다고 했다. 거기다 할머니 이름 킴도 있고 해서 이럭저럭 그렇게 됐다. 외손주 본게 2005년 1월이다. 병원까지 가서 미역국 끓이는 것도 배웠다.”
-지금 남편과 사이에 난 둘째딸은.
“카밀라는 한국서 가수 하다 미국에 돌아갔다. 연예계의 생리를 너무 싫어했다. 지금은 웨딩플래너 하고 있다.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카밀라는 10살 되면서부터 웨딩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잡지에서 웨딩관련 사진 자료 모은 게 많았다. 여기 와서 가수 경험한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안했으면 평생 후회했을 테니까.”
-이번에 가족이 다 오나.
“이번 공연에 정아는 못 온다. 그때 둘째를 낳는다. 정아는 35살에 결혼했다. 독립성 강해서 결혼 안하나 했는데 때가 되니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 신통하다.”
-가수외에 사회활동은.
“여성연합회 후원회장을 7년 했다. 작년에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사표를 안받더라. 에이즈 재단(정광모 회장) 등에서도 활동했다.”
-지금 누구와 어디서 살고 있나.
“작년부터 한남동 빌라에서 막내 동생과 단 둘이 살고있다. 가정부도 없다.한남동 아파트에서 8년, 이태원에서 10년 넘게 살았다.”
-가족은 언제 만나나.
“일년에 한번 정도 휴가를 내 만난다. 연말 디너 쇼를 끝내고 대개 20~30일 휴가한다.
예전에는 미국에 가서 남편(마이애미), 카밀라(엘에이), 정아(뉴욕과 엘에이) 등 가족들을 엘에이에서 만났다. 그런데 정아가 3년째 방콕에 거주하면서 요즘은 가족들이 방콕에서 모인다.”
만난 사람 = 이만훈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