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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장을 맡아 활동
증언자 : 박옥재(남)
생년월일 : 1940. 12. 15(당시 나이 40세)
직 업 : 기자(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20일 밤 9시경에 대우병원 뒤쪽 골목에서 공수부대들에게 구타를 당했다.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서 시위현장을 목격하고 군중들을 시위 선동하기도 했다.
현재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장이다. 5·18 이후 부상자회 회장을 맡아온 과정과 '민화위' 참여, 그리고 부상자회의 분열과정에 대해 증언했다.
야당활동으로 일관된 생활
나는 1940년 12월 15일 전라남도 보성군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는 연로해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또 우리 형제들의 교육문제도 있고 하여 부모님께서는 전재산을 처분하여 광주로 이사를 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을 보성에서 보냈지만 그때부터 광주사람이 되었다. 1966년 전남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을 때도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당시 나는 제1야당이었던 민중당의 전남도당 선전부 차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11월 전남매일신문에서 실시하는 신문기자 공채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근무지는 서울본실로서 중앙청, 국회 출입기자였다. 그때 마침 보성에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있어 취재기자로 내려갔다. 그 보궐선거란 민중당 후보인 이중재 씨와 공화당 후보인 양달승(청와대 비서관) 씨와의 경합으로서 벌교지역만의 보궐선거였다.
그러나 공화당 후보가 청와대 비서관이니만큼 전국적인 한판 싸움이었다. 공화당에서 막대한 자금을 살포하고 정치깡패를 동원해서 야당의 선거운동을 방해하는가 하면 각종 테러를 자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그러한 부정장면을 촬영 또는 기사화하여 신문지상에 공개하거나 야당에 제공하였다. 그러나 공화당 선거 사무장이었던 정래정 씨가 전남매일신문 사장이었던 박철 씨에게 압력을 넣어 나를 파면시키도록 하였다. 결국 나는 소환당해서 서울본실로 갈 것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서울로 가지 않고 다시 취재기자인양 꾸며서 벌교현지로 내려가 전과 똑같이 생활하였다.
그러나 1969년 12월 파면을 당해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71년 5월 25일 선거에 국민당 공천을 받아 보성지구에서 공화당 황성수, 신민당 이중재 씨 등과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국회의원에 입후보
선거운동을 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하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5·16으로 정권을 강탈한 박정희 정권을 총살로 고할 것을 역설했던 것 같다. 공화당 후보였던 황성수 씨로부터는 후보를 사퇴할 것을 압력받기도 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낙선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사업을 하시던 큰형님께서도 완전히 파산을 해버려 나는 무직상태에서 결혼을 해야 했고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연탄 100장과 쌀 2말 뿐이었다.
결혼 축의금으로 들어온 7만 8천 원으로 금동에 사글세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벌어들이는 것이 없었으므로 쌀 한 되 연탄 한 장으로 그야말로 호구지책을 하면서 살았다. 나의 신세를 딱하게 여겼던 고향의 선배가 서울에 집을 샀는데 방 한 칸을 그냥 내줄 테니까 가서 살라고 해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큰딸 서진이를 낳았다. 어려운 생활은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서진이가 폐렴에 걸려 어린것이 쌕쌕거리는데 병원은커녕 약도 사다 먹일 수가 없었다. 나는 밤새워 부둥켜안고 가냘픈 목숨이 가버릴까봐 울기도 하였다.
아침이 되자 나는 목숨처럼 아끼던 카메라를 전당포에 잡히고 서진이의 약과 쌀을 사다가 며칠 동안 연명했다. 맡겨놓은 카메라는 끝내 찾지 못하고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서울생활이 별 뾰족한 수가 없자 다시 광주로 내려왔다. 처남들이 자취하는 상하방에서 기거하면서 나는 할 수 없이 월부책 장사를 시작했다.
전라남도는 물론 전라북도 산간벽지 해안도서 전경초소에까지 안 돌아다닌 곳 없이 책을 팔고 다녔다. 1년 지나자 학동에 13평짜리 아파트를 세내어 살 수가 있었고, 그로부터 얼마 후는 방림동에 집을 한 칸 장만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한가족이 오붓하게 둘러앉을 방 한 칸 없다가 비록 월부책 장사를 했지만 내 집을 마련한 것이 얼마나 벅찬 일이었는지.
다시 기자로...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오랜만에 가져보는 여유를 흑백 텔레비전과 함께 하고 있는데 문화방송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광고가 나왔다. 나는 집사람 몰래 응시원서를 제출하였다. 응시자격은 만 35세까지였다. 나는 만 36세였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속이고 시험을 보았다. 전남여고 강당에서 시험을 보았고 단 한 명을 뽑는데 응시자는 47명이나 되었다. 나는 자격에서부터 걸린 데다가 시험에도 자신이 없어서 시험을 치른 다음에도 계속 월부책 장사를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 처남이 '매형 합격했대요.' 하는 것이 아닌가. 신문사에 전화를 해보았다. 신문사에서는 확실하다고 하면서 서울로 내일까지 집결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곧 야간열차를 타고 올라갔다. 직장이 없는 동안 겪은 온갖 설움. 그렇게 어렵게 잡은 직장을 또 전두환에게 쫓겨나게 될 줄이야.
그 오월에
1980년 나는 직업이 기자였기 때문에 시위현장에는 많이 다닌 편이었다.
5월 16일 박관현 열사가 '휴전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부 군대와 교전을 해서 접촉을 하였다고 했는데 그것은 전두환이 시킨 일이다' 하고 폭로했다. 전남대생들이 횃불시위를 평화적으로 한 뒤 17일에는 쉬고, 18일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18일은 무등산엘 갔다.
산을 오르고 있는데 시내에 난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다. 산에서 급히 내려왔다. 노동청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지나쳐 광주세무서 부근으로 갔다. 시위대는 파출소를 부수고 있었다. 그때가 11시쯤이었는데 그때부터 공수부대들이 투입된 것 같았다. 대학생들을 붙잡고 '어떻게 됐느냐'고 하니까 공수부대들이 여학생 가슴까지 쑤셔버렸다고 했다. 나는 등산복 차림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시위대들이 공수부대들이 쫓아오자 무서워서 어느 2층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공수부대원들이 그 집에까지 들어가 주인을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도로에 서 있던 구경꾼들이 우리들도 일어서야겠다고 했다. 공수부대 놈들은 분명히 술을 마셨고 흥분제를 복용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의 만행을 지켜보면서 '김일성이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내가 저놈들을 단 한 명이라도 죽일 수만 있다면 영광이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직장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는 나를 용기 없는 놈이라고 자책했다.
그렇게 18일이 지나고 19일이 되었는데 TV, 라디오, 신문 등에서는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가 없었다. 나는 교육위원회 출입기자였는데 기자들을 모아 놓고 '우리 모두 사퇴하자. 이 상황에 신문기자해서 뭐 하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금남로 도로공사를 하고 있는데 돌아다니면서 군중들을 시위 선동하기도 하며 19일에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때 본사 사회부장이 내려와서 숙소를 정하려고 저녁 8시쯤 관광호텔에 갔는데 거기까지 최루탄 가스가 가득했다. 나는 광주 MBC 방송국이 불탈 때도 군중들 속에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부상을 당해 전남대병원으로 같이 달려가기도 했다. 뒤에 신원을 확인해 보니 가톨릭센터 화원의 임정하 씨였다.
부 상
내가 부상을 당한 것은 20일 저녁 아홉시경이다. 그때 남광주역 쪽에 시위대가 있었다. 나는 대우병원과 그 시위대의 중간에 있었다. 인도에서 시위대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의 전차가 나를 앞질러버렸다.
나는 취재기자였으므로 오른쪽 팔에는 보도라고 적혀진 완장을 차고 손전등을 들고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무수히 맞아터지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나는 도망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도망을 가다 보니까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렀는데 마침 연탄창고가 보여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쫓아오던 공수부대 놈들은 그 곳까지 쫓아와 고개만 처박고 있는 나를 휙 나꿔채 곤봉으로 정수리를 때렸다.
나는 놈들의 군화발과 몽둥이에 맞아 기절해 버렸다. 얼마나 지났는지 깨어나 보니 내 몸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 가로등 불빛에 훤히 보였다. '그동안 내가 돌아다니면서 수없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아왔는데 사람이 이렇게 간단히 죽는 것이구나. 나도 이렇게 죽어가는구나. 죽는 것이 순식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 생각하고 일어서는데 저고리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남의 집으로 좀 들어가려는데 빗장이 질러져 문이 열리지 않았다. 사람 살려라고 외쳤다. 서너 명의 사람들이 나와 대문을 밀자 빗장이 벗겨졌다.
그 집은 여인숙이었다. 나는 그 여인숙에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저 사람 그대로 놔두면 죽는다'고 하면서도 누구 하나 병원으로 옮기자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전남대 병원으로
나는 다시 기어나와 전남대 병원으로 갔다. 기를 쓰고 응급실로 기어들어갔을 때는 실내가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 살려"라고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저쪽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더니 나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서 어딘가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의사들이 와서 내 머리칼을 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정신을 잃었다.
이튿날 정신이 깨어나자 집으로 전화를 하려 했으나 병원에서 못 하게 했다. 연락도 못 하고 있는데 전남대병원에서 보이는 옆 동산에 시위대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계엄군은 퇴각했지만 곧 다시 들어온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진압군들이 들어오면 그들은 잘 훈련되어 있으므로 시위대들은 전남대병원 환자 방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했다. 병원에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공포에 떨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피묻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진압군들이 들어오면 데모한 놈이라고 끄집어다 즉결총살을 시켜버릴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사에게 집으로 좀 가 있다가 다시 치료하러 오겠다고 했다. 절대 못 나가게 해서 치료를 거부하고 '지금은 전시다. 병원 규칙이 중요하냐. 사람 생명이 중요하냐'고 의사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의사는 끝내 승낙해 주지 않았다.
26일 나는 환자복을 입은 그대로 몰래 병원을 빠져나와버렸다. 방림동 집 부근에도 사이사이 시위대들이 있어서 가까이 살고 있는 동서집으로 갔다. 그곳도 마찬가지인데다 막다른 골목집이라 27일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공수들은 병원에도 총을 쏘아 내가 있는 7층 정형외과 간호원이 복도에서 총에 맞아 발목을 다치기도 했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열심히 싸웠을 텐데
나는 지금도 생각해 보면 아쉽다. 일찍 부상을 당해 버렸기 때문에 5·18에 대해서 잘 모른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선봉에 서서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을 텐데...... 5·18의 주역으로 뛰었더라면 더 떳떳할 텐데......
전남대 병원에 입원하여 한 달 가량 치료를 받다가 퇴원하여 직장으로 돌아갔으나 감원1호로 낙인찍혔다. 나는 고향 후배인 이육래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했다. 그 친구는 안기부의 문화방송 기자출입 조정관이던 손일근 준위를 만나 내 문제를 부탁했다. 그 후배의 도움으로 해직기자명단에서는 빠졌지만 교정부에서 내근을 하고 문제기자로 취급되어 프레스카드를 주지 않았다.
1981년 11월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친구들이 하는 건축사업을 도우면서 생활하다가 아파트 분양업으로 재산을 꽤 모았다. 먹을 것 없이 떨던 그 배고프고 추운 시절에 비하면 백배 부자가 된 셈이다.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장으로
나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에 늦게 들어오게 되었다. 그동안 암흑 속에서 입이 있어도 5월에 대해 쉬쉬하고 말을 못 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사업에 열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985년 5월 추도시를 낭송하게 되었다. 문병란 시인과 부상자회 대표로 내가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홍남순 변호사님께서 나를 눈여겨 보았던가 보다. 실은 시를 잘 쓸 줄도 모르는데 감정을 넣어서 낭송을 한 게 감동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님들의 소리를 듣노라
핏빛 두견의 울음만이 들리는
여기 망월동 골짜기
5월의 님들이 토하는 소리를 듣노라.
철쭉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같이 죽지 못한 이 비겁자들은
엎드려 그 의로운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간 마지막 말을...
나는 죽었노라 민주제단 앞에
낮도깨비의 총칼에...
실성한 군화발에...
조국의 민주를 지키다가
서럽게 한스럽게 숨지었노라.
내 핏속엔 자유를 사랑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강한 혼이 흐르고 평화를 사랑하는 배달민족의 맥이 소리쳐
피가 명하는 대로 그렇게 달리었노라.
금남로를, 충장로를
어찌 꿈엔들 알았으랴!
미친개같은 살인자의 총칼을...
나는 달려서 달려서 폭풍우같이
파도같이 쳐들어가고 싶었노라.
그 살인 원흉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싶었노라.
내게는 어머니 아버지 귀여운 형제도 있었노라.
가난하나마 늙어죽을 때까지
이마부비며 살고 싶은 사랑하는
처자식도 있었노라.
가난과 질곡에서 벗어나
이 땅에 민주를 되찾아 오손도손 살고 싶었나니.
저 무등산을 오가는 자유스런 새들처럼
여기 이 아늑한 내 광주에서
오붓이 노래하고 살고 싶었노라.
가슴 졸이며 비겁한 목숨을 사는
살아 있는 형제들이여
그렇게 군화발이 무서워
의로운 짓 다 못 하는 내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원혼되어 여기 망월동 모롱이
이름모를 골짜기에
낮이면 두견이 넋되어 목놓아 울고
밤이면 달 보고 떠도나니
의로운 피 같이 노놔가졌거든
그대 산자들이여
여기 내 누운 골짜기를 스치는
바람이라도 실컷 마시어라.
그리하여 비겁하고 연약한 새가슴에
광주의 피를 돌게 하라.
산자여! 비겁한 자여!
내 진혼제를 지내지 말라
위령탑은 세우지 않아도 된다.
그대들 가슴 어느 구석 뜻이 있거든
부끄럼없이 뛰어라.
자유란 자격자가 누리는 것
민주란 용자만이 하는 것
그것은 지난 역사가 말하지 않는가.
역사 앞에 한줌 부끄럼을 쓰지 말라.
진혼제를 올린다고 위령탑을 쌓는다고
웃고 뛰는 네 얼굴에서 나는 읽는다.
생색내는 너의 다른 비악까지를...
아무것도 모르는 지아비 정의로움의 죄(?)로
그렇게 반죽음 돼 끌려간 후
그 5월이 다섯 번 와도
돌아오지 않는데 그 젊은 지어미는
어린 자식 손목 잡고 이제 배마저 고픈데, 어쩌란 말인가?
그대 산자들이여 증인이라도 되어라
위증은 죄악이다.
증거하며 뛰어라 그리운 광주의 충장로를
피, 피 흐르던 도청 앞 금남로를...
핏빛같은 두견의 울음만이 들리는
여기
망월동 골짜기
5월의 님들이 토하는 소리를 듣노라.
이 시를 낭송한 1985년 5월 이후 홍남순 변호사님은 꼭 나를 곁에 불러 어느 행사든 참석하시곤 하였다.
1986년에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회장 노릇을 하면서 나는 덫에 걸려버렸다. 우리 부장자회 회원들은 하나같이 생활이 어렵다. 그나마 불구가 된 사람,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는 사람 등의 구호문제, 약, 생활문제 등의 해결에 선봉자여야하는 회장, 그들의 생활 하나하나 까지 봐줘야 하는 대부가 되어야 하는 회장, 그러면서도 가두에도 서야 했다. 부상자회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데모만 하고 악만 쓰다가 교도소에 가라고 하지만 쓰레기통을 뒤져서 호구지책을 하는 회원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울면서 사정하는 회원들을 위해 나는 시청, 도청, 안기부, 경찰서 등도 출입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어용, 사꾸라라고 규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김대중 씨에게도 변명하지 않고 지낸다. 심지어 운동권인 한 교수에게는 '니가 5·18을 말아 먹었냐. 나같은 상황을 겪어보았냐'는 심정으로 이젠 미워해 버린다.
민화위를 다녀온 뒤 부상자회가 둘로 갈라졌지만 나는 민화위 다녀온 것을 백 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부상자회 결성 후 한결같이 투쟁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민화위를 다녀온 뒤의 성명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각종 성명서, 추도사, 환영사 등등을 낭독했다. 6·29 선언 이후 9월 김대중 선생이 광주에 오신다고 했을 때 우리 부상자회에서도 환영을 하자고 했다. 그런데 지금 5·18 광주민중혁명부상자회 회장인 이지현 씨를 비롯한 소수 강경회원들은 '5·18은 사조직이 아니다. 김대중이 오든지 말든지 환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5·18의 주축이시고 우리 민주의 투사, 민족의 지도자이신 김대중 선생이 오시는 걸음걸음 꽃가루를 뿌립시다'는 내용의 환영사를 만들어 1만부 정도 시내에 뿌렸다.
김대중 선생이 광주에 오시고 망월묘지에 갔을 때였다. 그렇게 환영할 필요가 없다고 하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을 보았을 때 인간의 양면성에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란 사람은 운동권에서 활동하기가 힘들겠구나 생각하면서 망월동에서 시내로 들어오는데 김대중 씨가 '부상자회 회장님이 왜 오픈카에 안 탔느냐'고 했다.
오픈카에는 김대중 선생, 이희호 여사, 명노근 교수, 전계량 유족회 회장 등이 타고 있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오픈카에 옮겨타려고 하니까 한 교수가 일부러 비꼬아 말했다.
"차 복잡한데 뭐 하러 타려고 하시오."
"박회장이 안 타시면 어떻게 하느냐?"
김대중 씨의 청년국장이던 김연광 씨가 대꾸했다. 그래서 나는 오픈카에 타고 임동성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경상자지만 부상자회 회장인데 나를 발디딜 틈도 없이 만들어버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어느 누구도 5·18을 제대로 말할 사람은 없다. 전계량 씨는 당시 직업이 군인이었고, 아들이 죽었을 뿐 구경도 못 했을 것이다. 다만 유족으로서 느끼고 겪은 것만 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 부상자회에서는 각계각층에 여러 가지 형태로 호소도 하고 서한도 보냈다. 전두환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청와대를 갔으나 문 밖에서 쫓겨났고, 성명서나 서한을 보냈지만 회신 한 장 없었다.
우리 5·18 광주의거부상자회는 1982년 봄 부상자회가 발족될 당시부터 광주지역 피해보상하라, 5·18 진상규명하라 등 학생들이나 남들이 광주문제에 대해서 데모 못 할 때 늘 앞장을 섰다. 각종 유인물이나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표단을 구성해서 청와대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그러나 휠체어에 탄 채 청와대 앞 파출소에서 잡혀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그들이 직접 광주까지 실어다 내팽개쳐버렸다.
조그만 시위 때도 앞장서고 학생들이 뒤따르는 상태에서 연행되고 유치장 신세를 허다하게 졌지만 우리들에게 돌아오는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1987년 5·18 행사를 마치고 망월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상자들이 탄 대절버스에서 "전두환 물러가라. 5·18 진상을 규명하라. 보상하라" 등등의 구호를 외쳤다. 버스 밖으로 마이크시설을 하고 우리가 전원 머리와 어깨에 띠를 두르고 청옥동 파출소 앞을 지날 때였다. 전경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행진을 못 하게 하여 육박전이 벌어졌다. 부상자들 중 행동이 가능한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와 인근 농가에 가서 삽이나 몽둥이 등을 들고 나와 대치했는데 그들은 차 안에까지 최루탄을 쏘아댔다. 정재희 부회장은 가슴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두 눈이 실명된 강해중 씨와 반벙어리가 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해버려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산발적인 시위를 하면서 시내로 들어왔다. 금남로에서 이기홍 변호사와 신순범 의원, 정재희 부회장과 김후식 씨와 나는 끝내 연행되고 말았다. 이기홍 변호사와 신순범 의원은 곧 풀려났지만 정재희, 김후식 씨와 나는 집시법 위반, 기물파손죄 등을 적용시켜 이틀 동안이나 가둬두었다.
또 5월말쯤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되어 있는데 전경 3명과 정보과 형사 1명이 봉고차를 가지고 집으로 와서는 백양사에 데리고 가서 감금시켜 버렸다.
그리고 6·10 대회 때는 중앙로에서 데모하다 잡혀 나주경찰서로 끌려갔는데 그들은 행사 있을 때마다 연행, 감금하여 탄압을 했고 분산, 격리시켰다.
민화위 참여
그러던 차에 6·29 선언을 거치고 선거 후 노태우가 당선이 되어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만든다고 했다. 민주화합추진위는 광주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범국민적 기구라고 표방하고 구성원의 이름이 발표되었으나 우리 부상자회의 대표는 빠져 있었다. 5·18의 주역이요 당사자인 우리를 왜 부르지 않는가를 놓고 임원들은 흥분했다. 나는 5·18 광주의거부상자회 대표로서 안기부 정보과장 곽광훈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들이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지금이라도 감옥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를 빼고 어떻게 광주문제를 말할 수 있느냐? 극악적인 투쟁이라도 감행하겠다."
우리 부상자회에서는 재차 임원회를 거쳐 참여 여부를 놓고 논의를 하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민화위에 참여하되 우리가 바라는 바와 반대로 흘러가면 사퇴한다는 조건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48명의 각계 인사로 구성되어 있는 그 자리에서 나는 광주의 재야, 운동권에서 주장하는 그대로를 주장하였다.
민화위 증언내용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5·18의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그 책임자는 반드시 색출되어 처벌되어야 한다. 직접 책임자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전두환 현대통령이다. 그 사람은 수백 사람을 학살하고 수천 명을 불구, 병신으로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퇴임 전에 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고 그에 따르는 모든 조치를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결자해지다. 만약 그러지 않고 물러났을 때는 전두환 대통령은 역사 속의 연산군이나 광해군보다 더 나쁜 폭군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47대 1의 외로운 투쟁이었다.
특히 서정주 위원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내가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이 제 3공화국 이후 일부 정치군인들의 편견과 정권유지를 위해서 경제면이나 인사등용에 있어서 푸대접을 했기 때문에 동토의 지대로 변하고 말았으며, 그러한 것들이 5·18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다."
"호남은 예로부터 양반계급이 적고 상놈들이 많았던 지방이었다는 역사적 상황을 외면할 수는 없다."
"서위원께서는 어떠한 역사적 기록이나 확증이 있어서 그런 얘기를 감히 하는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 나온 나로서는 사실상 치가 떨리는 표현이요, 이런 식의 표현이 과연 이 나라의 민주화합을 이루자고 모인 사람들의 올바른 자세인가."
내가 반박했다. 이렇게 옥신각신하게 되어 마이크가 날가는 등 언쟁이 거듭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5·18을 위한 여러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첫째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문제와 진상을 알기 위해 미국 CBS 방송국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를 구해서 여기에 참여한 모두가 관람할 것. 둘째는 망월묘지를 성역화할 것, 셋째는 5·18 학살현장인 전남도청을 기념관으로 꾸며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하라. 넷째는 도청 앞 분수대에 위령탑을 건립하여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을 위로해야 한다. 다섯째 5·18을 민주의 날로 제정, 선포토록 하라. 여섯째 5·18 피해자를 돕고자 하는 각계의 성금 52억으로 만들어진 광주 어린이대공원의 운영권을 유가족, 부상자회에 넘겨라. 일곱째는 억울한 피해자인 유가족, 부상자들에게 시급히 충분한 보상을 하라 등이었다.
민화위 결정사항
19일 동안 계속된 증언을 통해 민화위위원들도 5·18의 진상, 참모습을 새삼스럽게 알았다고 동정어린 말들을 했다.
미국 CBS에 있는 비디오 테이프는 민화위 차원에서 구입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다른 곳에서 제작된 6개의 테이프를 상영했는데 거의 내용이 비슷비슷했다. 비디오 상영 후 특히 독립투사인 이광훈 씨와 KBS 사장인 서영훈 씨, 장덕진 씨 등은 광주의 편에 서서 호의적인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됨으로써 내가 주장한 것 중 진상규명은 꼭 해야 한다. 그러나 책임자 처벌문제는 일대 회오리가 돌고 여러가지 역작용이 돌기 때문에 책임자는 용서, 화해라는 차원으로 결말을 보았다. 그리고 망월묘지는 공원화하고 위령탑과 기념관은 건립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또 어린이대공원 관리권은 넘겨주고 유가족, 부상자들은 시급하고 충분히, 파격적인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국민화합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5·18을 민주의 날로 정하는 문제와 책임자 처벌문제만이 소수의 의견으로 되었다.
민화위는 비단 광주문제뿐만 아니라 6공화국의 행정, 정치 지침서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화위에서 결정한 건의서는 하나의 참고서로 쓰는 것이 아니라 6공화국의 완전무결한 정치 지침서로 쓰겠다고 했다.
우리 위원들은 안기부나 보안대의 고유업무인 대공업무에 국한시키고 정치사찰, 정치행정의 조정기능을 삭제시키며 모든 기관의 출입은 금지시켜야 한다. 지방자치제를 실시해야 한다. 교육자치를 실시해야 한다. 언론자유를 위한 검열제도와 조정업무 없는 민주언론을 창달시켜야 한다. 등등 국민의 기본권, 생활권적 자유권까지 언급한 모든 민주국가의 지침서를 마련했다고 본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광주의 어느 누가 민화위에 참여했어도 비록 내가 서툴기는 했지만 내용상 심도 있고 강도 있는 주장을 펴지는 못했으리라고 자부한다.
5·18에 대한 대참극에 대해서 광주, 전남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타지방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민화위를 통해 각 매스컴에 보도되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5·18의 진상규명에 보다 접근시키는 하나의 계기, 방법을 제시했다는 차원에서 민화위는 분명 공헌을 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민화위가 6공화국의 들러리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고, 요즘 열리고 있는 청문회에도 조그만 방향타를 제시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부상자회의 모임
물론 구성 자체에 너무 친여적인 인사가 대부분이어서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각종 매스컴이 평했던 대로 박옥재 한 사람의 악전고투, 고군분투의 장이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민화위에 갔다 온 뒤로 한결같이 뭉쳐 있던 부상자회가 분열되었다.
정상용 씨를 위시해서 행동대원, 조직 운운하면서 민중선봉을 자처하고 12명이 나갔는데, 이는 정상용 씨가 충동질한 결과였다. 정상용 씨는 공천 안 주면 젓어 버리겠다고도 했다. 그 후 부상자회는 두 개로 분열되어 국회에 가서 자기들만 외치면서도 우리에겐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민화위에 갔던 일은 백번 생각해 보아도 잘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5·18을 위해서 말이다.
민화위에 다녀온 것만으로 어용이고 관제라고 몰아붙이는데, 공산당이 아닌데도 관제 공산당, 관제 공산당 하면 정말로 공산당이 되어버리는 법이다. 광주사회는 굉장히 좁다. 나는 일거수 일투족을 조심하고 산다. 허튼 수작을 했으면 벌써 우리 집에 화염병을 던지고 멱살을 잡아버렸을 것이다.
민화위 증언이 끝나고 민정당에서는 실제로 내게 공천을 준다고까지 했지만 거절했다. 개인을 위해서라면 그랬겠는가? 부상자회 회장직을 맡아오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려운 부상자들의 치료와 연명을 위해 활동을 펴다 보니까 일부 부상자회의 특수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은 퍽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그러나 성격상 이러한 상황을 한마디 해명도 못 하고 있지만 진실을 알아주는 회원들의 따뜻한 정 속에서 그런대로 위안을 느끼고 있다. 광주운동권의 아집 때문에 투쟁대열에서 떨어져나가는 상황은 안타깝고 대동단결을 위해서는 버려야 할 태도라고 본다.
5·18 당시 상황을 쓴 황석영 씨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에 보면 부상자 명단이 소개 없이 많이 있는데 이는 그때 당시 상당한 주역들이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생각하고 얼굴 내기, 감투싸움 등을 하고 있는 때문일 것이다. 김중배 민주당 의원만 해도 목소리 크고 아집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자리 뺏기고 다른 차원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내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부상자회는 미성년자에서부터 80 노인에 이르기까지 성원들이 천차만별인 데다가 출신이나 학력, 성장과정 등도 각양각색이어서 통솔하기가 어렵고 9년여의 통한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어서 주의주장이 강하다. 그래서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란 어렵지만 5·18에 직접 참가한 주역들로서 진상규명과 이에 따른 책임자 처리문제 등이 끝난 다음에는 민주화를 외친 영령들의 뜻에 따라 민주화, 조국통일에 노력하는 회원이 되고, 또 참다운 국민화합 위한 민주국민으로서 대동단결해서 활동해야 할 것이다. (조사.정리 장옥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