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어가 일으키는 잔잔한 파문
문학은 언어로 미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인간은 언어와 더불어 사유하는 존재이다. 시인도 사유하는 존재로서 자신의 체험과 정서와 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언어를 선택하고 배열한다. 그러나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적인 언어처럼 그리 쉽게 규정될 성질이 아니다.
시에서 언어의 배열은 일상어나 학술논문에서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작품에서 형상화를 위해 선택하는 언어는 단순한 효율적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기술상의 언어가 아니고, 심미적이고 사유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시의 세계는 언어로 시작해서 언어로 끝난다. 시인의 체험, 사상, 정서는 언어로 표현되며, 한 편의 시는 언어의 통합체이고, 시의 의미 또한 언어에 의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언어가 지닌 기능상의 특징이며 사용방법상의 차이가 있다.
시어라고 별개의 언어체계가 있는 게 아니다. 시어는 시인의 의도와 심미적 효과를 위해 비유적이거나 상장적인 언어로 바꾸어 사용하는 ‘비유적 언어’, 감성을 표출하는 ‘정서적 언어’, 특별한 음성장치를 이용하는 ‘운율적 언어’이다. 일상 언어나 과학언어는 객관적으로 진술하여 상대에게 같은 생각을 갖도록 전달하는 사용한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전달동기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시인의 주관적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한 언어이다. 따라서 일상에서의 언어는 전달매체이며, 시에서 언어는 표현의 매체다. 일상어와 비교하여 시어가 지니고 있는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내포적 언어: 각각의 언어는 기능적으로 외연(denotation)과 내포(connotation)의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외연은 사전적 의미이고 개념의 정확성을 요구하며 언어와 지시하는 대상사이에는 1:1의 정확한 대응관계가 성립한다.
그러나 문학, 특히 시에 사용되는 언어는 일반적인 외연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시의 언어는 시인이 자기의 감정과 체험을 담기 위해 선택하는 하나의 기호로서 특수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언어다. 따라서 그만큼 주관적이고 함축적이며 언어와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1대 多의 관계가 성립한다. 외연으로서 일상어가 公的이라면, 내포로서 시어는 개인적 언어다. 달을 예로 들면 초오서는 꽃피는 이미지로, 바이런은 황금그릇으로, 엘리어트는 잔인한 달, 임의 얼굴 등으로 표현된다.
비평가 A. Tate는 시적 緊張tension은 외연extension과 내포intension 양자의 조화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그만큼 외연과 내포가 양극에서 모두 의미를 포괄하고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시어의 진정한 모습이다.
시 중에 일상의 언어나 과학의 언어로 분명 잘못된 진술을 儗似陳述pseudo-statement라 한다. 코스모스 꽃을 불길이라 했다면 불길을 기본적 의미(fundamental meaning)라 하고. 불길 같이 피어오르는 꽃들이 내포하는 정서적 의미를 문맥적 의미(contextual meaning)라 한다.
시는 언어로 시작하고 언어로 끝남으로 다른 언어 표현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는 근본적으로 개성적인 언어, 세미오시스semiosis다. 세미오시스는 모방적 의ㅣ미인 미메시스mimesis를 위협한다. 미메시스는 대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기술적 묘사를 의미한다면, 세미오시스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표현, 즉 주관에 의한 구성적 재현을 의미한다. 시의 언어는 표현함으로써 일상어임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이러한 부정과 창조의 교차에서 시어는 그 의미가 확장된다.
②개성적, 구체적 언어
사전적 의미의 바다는 바다라는 약속된 기호를 놓고 바다를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말이다.
그러나 관념적 기호가 아닌 사물 자체,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바다를 체감할 때면 그 의미는 아주 다양해진다. 여름휴가 간 바다, 고기 잡는 바다, 거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등 개인의 체험과 느낌에 따라 다양하다. 관념적 언어인 ‘바다’와 실재의 구체적인 받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자의적이고 추상적인 단순한 기호일 뿐이다.
인류문명은 언어에 의해 가능해졌다. 인간의 일상 언어생활은 약속된 기호에 의한 추상적인 인식으로 이루어지므로, 그만큼 구체적인 대상 그 자체와는 무관한 세계에서 생활한다고 할 수 있다. 언어화한다는 것은 개념화, 추상화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추상화는 한 존재 자체가 포괄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들 중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로 축소를 뜻한다. 이러한 개념화와 추상화가 인간 문화 속에서 거듭됨으로써, 구체적 사물로서의 실재성은 점점 희미해지거나 왜곡된다. 종국에는 구체적 대상을 생각하지 않고 기호(상징) 자체만으로도 思考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의 발달은 인간을 추상화된 관념의 세계에서 살아가도록 하고 있으며, 자연의 문맥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시의 언어는 대상의 추상화를 거부하고, 언어의 사물성과 구체성을 통해서 자연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다. 시의 이러한 노력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로부터 벗어나려는 역설적인 노력이다.
따라서 시의 언어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일상의 언어와는 달리 구체적이고 개성적인, 인간이 또는 시인이 체험한 실재 그 자체이고자 하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시의 언어가 지니는 내포적 의미는 바로 외연의 의미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주관적아고 구채적인 실체험의 의미를 함축한 의미다.
③애매성의 언어
일상어나 과학의 언어는 의사전달이 목적이기 때문에 더 정확한 개념지시를 의도하여 언어와 지시대상과의 관계는 엄격히 규정된다. 그러나 시어의 경우에는 시인의 주관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명시적으로 의미의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 작업은 ‘초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효과’를 노리는 언어의 경제원칙이 적용된다. 독일어로 시를 Dichtung이라 하는데 응축이란 뜻이다.
시는 작가와 독자 간의 의사소통을 위한 매개물일 뿐 거기에는 확인과정이 없다. 시는 고도로 응축된 표현이기 때문에 독자는 나름대로 해석해야 하며, 그 확인과정은 간접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애매성과 모호성이 발생한다.
模糊性obscurity은 과학언어에서 요구되는 明瞭性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기호분해가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이해 불가능성이다. 만일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 불가능할 정도로 숨기고 왜곡되거나 모호하게 표현했다면, 독자는 그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 따라서 모호성은 시의 특성에서 排除되어야 할 성질이다.
이에 비해 曖昧性ambiguity은 기호분해가 두 가지 이상으로 가능하여 다양성의 혼란으로 일어나는 난해성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님’은 조국, 불타, 연인 등으로 多意味成
plurisignificans으로 의미의 重層性 또는 豊饒性richness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애매성은 현대시에서 의미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오히려 중시하는 경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