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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도권 강단사학계 주장
청뚜(성도)의 영릉로에 있는 5대 10국의 혼란기의 전촉(前蜀) 왕(847년∼918년)을 지낸 영릉 왕건묘(王建墓) 묘의 규모는 높이 15m, 직경이 약 80m이고 묘실은 약 23m이다. 왕건은 전촉을 세운 후 성도를 도읍으로 정하였었다. 능묘의 문에 들어서면 3m 높이의 적인상과 중앙 관좌측면에 각각 표정이 다른 24명의 주자(奏者)로 이루어진 궁전 악대와 골격이 우람한 12인의 역사상의 석조가 있다. 촉한시대의 음악 예술적 귀중한 자료 중 하나.영릉에 있는 영릉 박물관에 소장된 왕건이 찼던 옥대와 왕건이 사용한 옥쇄함.
현재 학계에서는 사천성의 전촉왕 왕건과 반도 고려왕건을 동명이인으로 보고 있으나,
2.재야 민족사학계 주장(잃어버린역사 발굴단체들)
율곤 이중재를 위시한 재야 민족사학계에서는 개성은 고려의 허도이며 고려는 대륙까지 근거가 있었음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단재 신채호 선생, 백암 박은식 선생을 비롯, 해방 이후 한암당 이유립, 문정창, 복초 최인 등의 민족사학자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방촌 임균택(대전대 설립자, 철학박사. 대전대 부총장 역임) 선생은 사천성 성도 영릉의 왕건묘가 바로 우리의 고려왕조 왕건묘라 한마디로 잘라 일축하고 고려는 한반도에 없었고 그 수도는 쓰촨의 청뚜(성도)였으며, 섬서성 서안으로 옮겼다가 지금의 산서성 임분(요,순의 수도)인 평양으로 천도했다가 북경인 연경으로 다시 옮겼으며 다시 선양(심양:25대 충렬왕때 천도)으로 가서 고려말 주원장에게 반도로 쫓겨들어가 마침내 이성계에게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후일 자세히 소개한다-위화도는 섬도 아니며 압록강 가운데에는 그렇게 많은 군사를 주둔할 섬이 없으며 중원대륙 한복판에 있으며 그 지명이 있다)) 방촌은 공양왕때 부터 고려왕조의 주력세력이 약화되어 고려말에 중심세력이 반도 개경으로 쫓겨가 정몽주 역시 반도 개경의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죽은 것이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지나) 중심의 손문이 동이 중심의 왕조(청,명,원,고려,금,요,발해,통일신라,당,송,고구려,백제,기자조선) 멸망이후, 국민당의 국민정부를 세웠으나,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공산당의 모택동에게 쫓겨 그 정통성을 빼앗긴것과 같이 천자국 고려왕조도 홍건적을 이끈 주원장에 의한 "명(조선)"에 의해 수도 선양(심양)에서 멸망하니 고려왕실과 중신은 반도 개경(개성;따라서 허도)으로 망명하여 마침내 이성계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천자국의 정통성을 가진 고려가 망하고 마침내 주원장 세력휘하로 자진해 들어간 이성계 조선에 의해 정통성이 왜곡되었다는 얘기다. 이성계는 여진족이었지만 대륙사관으로 보면 같은 동이 한 민족이라 문제될 것 없으며 주원장 역시 우리 한겨레 핏줄로 아예 명나라를 유명조선이라 칭호하는 방촌은 종교적인 금산사가 아닌 정치사적으로 견훤이 신검에 의해 유폐된 금산사는 감숙성 고란현 서북쪽 백탑 산중에 있다 하고(금산사는 남경 위 양자강가에도 있음),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이 있었던곳은 사천성 부능현 동쪽이라 하고(강동6주도 사천성, 산서성 등 대륙소재), 고려의 강화 천도는 반도내 강화도가 아닌 호남성 맨아래 왼쪽에 있는 강화현으로 당시 서경은 반도내 평양이 아닌 섬서성 서안으로 개경 역시 반도의 개경(현재(개성)이 아닌 산서성 평양 분주(현재의 임분)라 하고 당시의 한양성은 반도내 지금의 서울 한양이 아닌 복건성 포성현이라 말한다.
삼별초가 도망 간 제주는 산동성 거야현인데 우리의 제주도와 한문이 똑같은 제주 제북군이라 했다 하며(방촌의 사관으로 상고사를 보면 서긍의 고려도경에서 송의 사신이 임안(항주)의 전단강을 배타고 지나며 풍광좋은 고려의 땅을 지나고 있다는 서술이 곧바로 이해된다), 고려의 정사인 정인지 고려사는 왕건이 당나라 숙종의 혈통임을 기록하고 있으며 세종의 학우이자 신료로 세종의 명을 받아 극비리에 사서를 대대적으로 소각한 김문기 가문의 유훈은 개성이 허도임을 밝히고 있고 북벌파 최영을 친 이신벌군의 역적 이성계부자가 주원장의 유교를 들여와 존주사대를 통해 지나를 천자로 모시는 대신 제후로서의 통치적 명분을 얻고(민족 사학자 복초 최인은 이신벌군의 역적이자 북벌파 최영을 친 사대주의자 이성계가 북벌파를 치고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세운 조선왕조의 통치명분을 얻기 위해 주원장에게 넙죽 엎드려 조아리고 천자국의 지위를 내팽개치고 중화 사대주의의 썩은 망건을 받아써 중화의 노예가 되었노라 말하고 있다)동이족 혈통인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저지른 것 처럼 여진족인 이성계 가문을 숨기기 위해 대대적인 분서갱유를 저질렀다고 한다. 정용석은 이성계의 출생지 및 성장지에 대해 이성계는 타타르인이라는 제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학도는 역사의 사설(史實)들을 연구 발굴함에 있어 지금껏 조명(照明)되앉던 쪽에 중점을 물 필요가 있다. 특히 국가나 민족의 기원(起源) 및 왕조(王朝)의 시원 문제에 대해서는 각별한 살핌이 있어야한다고 보여진다.역사에 있어 국가와 민족의 기원에 대한 사화(史話)나 왕조의 시말(始末)에 대한 기록들에는 다른 분야에서 보다 심각한 조작(造作)이 자의 타의로 수반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가(史家)들이 나름대로의 의미 있는 사관(史觀)을 보고자 한다면 역사 속의 긍정과 부정을 모두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기록에 있어 곡필(曲筆)이 필요에 의해 어떻게 생기었으며 해설 속의 에고이즘 존재 이유도 알게된다. 어쩌면 사가(史家)들이 선행할 의무는 역사서라는 기록물들의 실체를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닌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어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필자는 여기서 14C말 이성계(李成桂)란 군벌(軍關)에 의해 시작되는 조선왕조(朝蘇:李民)에 대한 시원(始原)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근세(近世)에 해당하는 왕조의 사건이자 인물들이기 때문에 왕조의 개국성격과 인물들에 대한 긍정과부정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많은 개진(開陳)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밝혀져 있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자 한다. 단지 이성계란 폭력 군벌이 창건했다는 조선국지(朝解國地)의 시원지와 창국장소에 중점을 두어 14C말 조선의 개국을 말하고 싶고, 이성계(李成桂)일족의 고향 땅과 출향지(出椰地)을 기준으로 14C말 이후의 조선역사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역사의 성격은 연속성을 논하고 싶어하지 토막 토막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않다. 토막이라는 부분(部分)은 결국 전체(全體)속에 녹아있기 때문에 역사에 있어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와 의문을 해소하는데 주안점으로 작용한다.
[1] 개국 태조 이성계(李成桂)에 대한 내용올 보면, 그를 '3척검두안사직(三尺劍頭安社樓)이라고 쓰고 있다. 안사(安社)는 이성계의 고조부로써 (元)의 다루하치(達種花亦)였으며 고려의 화주(和州)이자 원(元)의 쌍성(홈총관부의 총독(집정관)을 했던 인물이라고 쓰여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성계는 삼척검(三尺劍)올 휘두르는 무관집안 이안사(李安社)후손으로, 조를 세운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성계의 부친 환조 이자춘(李子春)까지 몽고인(고려인이 아님)으로써 원(元)나라에서 부여한 관직(삭방도병마사)을 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몽고식 이름은 오노사불화(吾暑思不花)였다.
이성계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몽고인으로써 몽고(원)에서 고전지역에 파견한 72명의 달로화적(다루하치)의 한사람이었다. 그가 집정관(점령지 총독)으로 부임한 곳이 쌍성(雙城)이였고 고려의 화주(和州)였던 것이다.이성계에 이르기까지 5대(五代)가 쌍성의 군벌 및 호족(豪族)으로 군립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외가(外家)는 쌍성부 소속의 영홍진(永興鎭)에 있었다.
이성계의 출생지는 영홍(永興)이고 집안의 거점지는 쌍성(雙城)이란 두말할 펼요가 없으며 이성계 직계 선조들의(고부모까지)묘소도 모두 쌍성과 영홍에 있다고 세종실록지리지는 쓰고 있는 것이다.기존의 이성계 씨족사도 여기까지는 다른 씨족사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현격한 차이를 두고서 용의 눈물 이성계 집안의 웅지의 날개와 광대한 스케일은 해설자(20C 식민통치 정부의 사학자 및 그들의 후예 관변사학자)들의 고약한 편견과 편집으로 반도로 곤두박질 치면서 일개의 역성혁명(易姓草命)정부 정도로 전락시킨다.고려의 웅대한 영혼과 1만리의 광대한 영역을 역사해설가들에 의해 반도에 입력된 이상 고려정부를 이양 받은 14C말의 역성혁명정부 성격의 조선국이도를 떠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이성계 집안의 주 활동지역과 거점지 쌍성(雙城)과 영홍(永興)은 길도(成吉道)가 된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반도 함경남도(成鏡南道)지방이어 버렸고, 이성계 출생지를 포함하여 조선 범위를 축소하면서 함경남도 후과 영홍으로 축소 되여 반도 동해안 함홍만(成興體)지역에 자리 매김 하도록 만들었다.이말은 곧 이성계의 고조부(高祖父)는 몽고가 고려를 점령한 후 72지역에 둔 72명의 달로화적(직업통치 섭정관, 점령지 총독) 중 한사람이 되어 반도의 함흥에서 쌍성총관부 총독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군벌과 호족의 위치로 있을 권력을 쟁취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다.
이성계의 출생과 활동 고조부 이안사에서 출발하는 이성계벌들의 주점기지가 쌍성(화주)과 영홍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영흥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이성계를 비롯한 선대(先代)가 역사곳의 동북면(東北面) 또는 삭방동(朔方道)의 만호(萬戶)와 병마사를 역임한 사실은 분명히 있지만 그 장소는 한반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모두 대륙의 고려땅과 조선 땅에서 있었던 주연배우의 교체 과정중의 한 내용들이었다.
이성계 고조부의 쌍성(雙城:고려의 화주)의 중심은 지금의 중국대륙의 호화호특시(呼和浩特서j:화림지역)가 되고 주 활동지역은 찰합이(察合爾) 지방이 된다. 이성계의 출생지 영홍(永興) 도호부이자 진(鎭)의 지역은 현서성 우림(械林: 연안, 횡산이 포함되는 보안주(保安州)지역에 되고, 내부와 산서성 북서부(보덕 하곡)섭서성 북부가 포함된다.바로 이 지역에서 이성계의 선조들은 기반을 닦았고 이성계의 출생도 이루어져 남벌(南佳)과 북정(北任)을 거듭하여 성공함으로써 고려의 막강한 군벌이자 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고조부모의 능(隆)인 덕릉(德陸)과 안롱(安陸)은 타타르인이 주 활동 거점지 달단동(鍵輯洞)에 있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쓰고있고 이성계의 출생지이자 성장지였던 영홍에는 성(萬里長城)이 통과하고 있었으며 부(府)의 북쪽에는 만리장성의 관문(關門)이 있었다고 정사서가 쓰고 있다는 것도 새롭게 알아두자.
태조 이성계는27세(1362년, 공민왕11년)때 사병(私兵:군벌의 개인군대)2천명으로 홍건적(紅巾賊)이 점령한 고려의 도성(都城)올 회복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28세(1363년)가 되는 해에 동북면(東北面)병마사가 된다. 35세(1370년)가 되던 해에는 원(元)나라의 동녕부(東寧府:고구려의 명양지역 현재의 섬서성 서안지역)를 평정해 버리는 전공도 세운다. 그 후 왜(優)의 침략을 방어하는 공도 세우다가 53세가 되는 해(1388) 4월(음력)에 요동(遭東)정벌, 즉 북벌(北파)군 우군(右軍)도통사가 되어 5월에 회군한 후 최영(崔瑩)과의 권력싸움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장악한다. 그 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總制使)와 문하시중(門下待中)을 거쳐 선위(輝位)의 형식을 벌려 14C말의 조선국의 태조로 등극하는 인물이 이성계다. 영웅주의 사관에서는 늘 영웅을 배출하기 때문에 역사의 사건이 있을 때마다 영웅이 출현한다. 이성계가 홍건적을 평정 퇴치하고 28세 때 대장군이 되어 동북면(東北面)을 총관하는 병마사(兵,馬使)가 된다는 것은 28세 때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된다는 남이(南펌)의 등장과 다를것이 없다. 또한 전한의 위청(衛춤)과 곽거병(뚫去病)이 흉노(예娘)를 정별한 공로로 20대 초반과 중반에 표기대장군(종2품)이 되었다는 내용의 성격과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성계가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고 권력을 장악하여 역성혁명(易姓草命:왕조의 성씨를 바꾸는 무력 쿠데타)을 이루는데 기초 발판이 되었던 홍건적의 고려도성 전투에서의 승리와 회복, 사병(私兵)을 이용한 혁혁한 공로에 있다는 것이다.
이성계의 아버지 자춘(子春:환조)은 공민왕 4년(13$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동북면의 쌍성(雙城) 천호 자격으로 고려조정에 인사(來朝)를 차리러 온다. 고려정부에 이때 처음 래조 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공민왕4년 이전에는 쌍성지역이 고려의 통치가 미쳤던 지역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려시대에 있어 이성계의 출세 발판은 홍건적의 평정에 있고 권력쟁취는 요동(遭東)정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공민왕과 최영 홍건적과 요동 때문에 14C말 이씨(李民)의 조선국 정부가 출현할 수 있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이다.
14C중반 원(元)나라 말기(末期)역사서에 등장하는 홍건적(紅巾城:홍건군)봉기의 시작과 활극의 무대는 고려(高麗)의 강역과는 관련이 있어도 한반도와는 관련이 없다. 역사에 있어 강역이라 하는 지리(地理)는 연극배우로 말하면 무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리의 판정은 중요하다. 역사서(배우들과 연극 무대의 각본)에 쓰여진 지리(기후 및 토질 등 땅의 구조)를 모르고서 역사를 논할수 없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에 대한 정보와 확인도 없이 농부가 농사를 지어 품질 좋은 농산물을 미리 생각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홍건적들의 봉기 원인은 몽고인올 비롯한 서역과 북방의 색목인(色目人:눈에 색깔이 있는 종족)우대 정책에 따라 격하 소외된 종족들에 대한 억압 및 차별 정책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원(元)나라에 의해 가장 멸시를 받고 소외되었던 지역과 종족들은 양자강(楊子江)지대의 남북(南北)지역과 남송(南宋:절강성 항주, 소홍)의 민족을 비롯한 남만{南蠻)인들이었다.
몽고(원)정부는 중앙과 지방주요 정부의 중추요직올 몽고인과 섹목인이 차지하여 정치와 군사력올 통한 지배권 확립올 도모했기 때문에 그 밖의 종족과 민족들에게는 돌아갈 요직이 없을 정도로 전횡의 시대를 구축했다.
물도 고여있어 오래되면 부패하듯이 정권을 장악한지 150년이 지나자 원나라 내부로부터 부패하여 권력싸웅이 벌어지고 외부(外部)에 신경올 쓰지 않는때가 되자 드디어 차별과 억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이 홍건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홍건적의 봉기는 처음부터 고려에 목표를 두지도 않았으며 반도와는 더욱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반도는 홍건적의 반란 시원지와 지리적으로 까마득한 거리에 있고 반도에 있던 모종의 권력부가 원(元)나라 중심부가 아닌 이상, 홍건적이 목표와 어긋나게 반도애 들어와 반도의 고려 백성들올 도륙해야 할 이유와 근거는 없었던 것이다. 홍건적들의 봉기 진원지는 양자강 유역이며 시작은 원의 순제(1342년)가 재위에 있을 때이고 본격적인 활거는 지정 11년(至正, 1351)부터다.
하남(河南)에서 환산동(韓ll|童)과 한교아(韓映兒), 유복통(劉復通)등이 일어나고,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뼈灌), 사류(沙劉), 장사성(張土誠)동은 산동에서 봉기하여 중원(中原)을 몽략하기에 이른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지정15년(1355년)에 한림아(한교아, 한산동의 아들)가 박주( 州:안휘성)부양(옐陽)에서 송(宋)나라의 황제(皇帝)로 동극하는 둥 정부조직 형태를 갖추어 하남(河南)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쓰고 있다. 홍건적은 남송정부의 부흥을 목표로 했고 남(南)쪽올 상징하는 오행의 화덕(火德:붉은생)이 곧 남송 정부를 부홍하는 것이 되었다. 홍건적 무리들은 식별을 단순화하기 위해 머리에 남방화(南方火:붉은색)를 상징하는 붉은색 수건을 머리에 둘러 홍건적(군)의 표시로 했던 것이다.
이들은 봉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수휘(徐秀輝), 곽자홍(郭子興)동의 호웅을 받았고, 백련교(白運敎:마니교에서 파생한 천태<大台>의 명교<明敎>)도의 적극적인 호용으로 10만의 대군(大軍)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의 홍건군은 하남의 전지역과 회수(推水)와 산동(山東)지역올 장악하는 등 그 기새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고 역사서는 쓰고 있다.
그러나 홍건적이 안휘성 부양(車陽)에 송왕조를 세운 지 얼마 안되어 자리분배에 따른 내분이 일어나 결속이 약화된 틈을 타 원(元)의 정부는 토벌군을 파견하여 홍건적올 고립시킨다.
이때의 원사(元史)와 고려새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지정 15년(1355년) 홍건적 토벌군 사령관은 원(元)의 숭상 탈탈{脫脫)이였고 고려에서도 유탁(柳灌), 염제신(薦懷臣)등 2천명 규모의 홍건적 토벌군을 안휘성 부양(박주)에 보냈다고 쓰여져 있다. 홍건적 토벌에 참전했다 돌아온 고려의 만호(萬戶) 권겸(權議), 원호(元顯), 인당(印瓚)등이 고려조정에 보고하기를 고려의 군사들이 회안로(堆安路:안휘성 회남시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쓰여져있는 것이다.
내부 분열과 원(元)의 다국적 토벌군에 의해 고립된 홍건적은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홍건적올 분산시켜 포위망올 벗어날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 성공적으로 분산이동올 개시한다.
홍건적은 군대를 3군으로 나누어,
‘1군은 관선생(關先生), 파두반(破頭播)등을 장군으로 하여 기주(寶州:낙양과 산서성 하동지역)로 진출하고,
2군은 백불신(白不信)을 대장으로 하여 섬서성 동관(違關)을 지나 관중(關中)지방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넓히고,
3군은 모귀(毛貴)의 지휘하에 익도(益都:산동성 교주)방향으로 진출하여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라고 원사는 쓰고 있고 고려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이중에 홍건적의 1군에 해당하는 관선생과 파두반의 지휘하에 있던 반란군은 황하를 건너 북으로 진군하여 산서성(山西省)올 유련한 후 원의 상도(上都) 개평부(開平府:내몽고 남부 찰합시)를 함락 점령해 버린다. 개평부(開平府)는 원의 정동행성으로써 하절기의 수도이며 지금의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양성포함)에 해당한다. 이들은 다시 요양(遺陽:遺東)으로 진출했다고 원사와 명사(明史)에서는 쓰고 있다.
이렇게 내몽고와 산서성올 공략하고 섬서성 중북부의 요동(還東:요양)올 공략했던 관선생과 파두반, 사류(沙聲) 휘하의 홍건적 제1군은 고려 공민왕 11년(1361년) 10월에 10여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삭주(期州)를 침략하는 것으로 고려사에 쓰여진다.
이때가 홍건적이 홍기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 이전에 야미 홍건적 3천명이 압록강(觸綠江)올 건너와 약탈한 적이 있었고(1359년 11월),이해 12월에는 4만의 홍건적 군대가 고려의 의주(義州), 정주(靜州), 연주(購州)를 함락하여 고려는 인심이 흉흉해졌다. 고려의 도성은 피난할 계획을 세우고 곡식 값이 폭락을 하는 불안한 정세 속에 있었다고 고려사는 쓰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1359년 12월에는 고려(高麗)의 서경이 홍건적에 의해 힘없이 함락되어 버린다. 이듬해(1360년) 1월에 홍건적은 고려백성 포로 수만 명올 삼해하여 죽음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게 했고, 풍주(豊州), 봉주(鳳州), 안악(安많), 황주(黃州)도 홍건적의 수중에 띨어진다. 더하여 가뭄과 전쟁으로 고려백성들이 수없이 굶어 죽는 사회현상이 고려에서 발생하고, 이러한 현상은 이듬해(1361년) 봄으로 계속 이어진다.
삭주(期州)를 점령한 홍건적은 니성(파城)과 무주(無州)를 점령하고 개주(까州), 인주(延州), 안주(安州)를 유린해 버린다.
이때는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와 고려의 안주(安州)를 점령하기까지 만 2년이 지난 1361년 11월에 해당한다. 홍건적에 의해 원(元)의 대도(太都)가 위험에 처했을 때 원(元)의 마지막 순제(順帝)가 천도를 계획했었던 내용도 고려에 와서는 고려의 왕의 피난으로 결정된다. 말이 좋아 몽진이지 조정과 도성올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것이다. 이것은 16C말 임진년 왜침(慶優)시 선조(宣祖)가 한 행위와 다를 바가 없는 선형(先行)의 사례다. 고려에 있어서의 왕의 도망은 헌종(顯宗)시대의 키타이(찢판)의 침략에서 이미 있었던 일이었기도 하다.공민왕 일행이 홍건적의 첨략에 따른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화급한 나머지 수레(輩:가마)조차 버리고 말을 타고 이천현(利川縣)에 이르러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고려의 도성(京城)은 저항 없이 홍건적의 소유가 되어버리고 소굴이 되어 버린다.이때 고려 공민왕(公民王)이 피신한 이천(利)||)은 물론 반도가 아닌 대륙의 호북성 은시현(恩施縣:利川市)이다.
왕을 비롯한 중앙정부의 대신들이 도망가고 없는 경성(京城:都城), 적(城)의 점령지이자 소굴로 변한 고려의 도성이란 곳의 형편과 상황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전쟁에 있어서의 목표가 영토확장에 따른 채물 약탈과 노예확보에 있는 것이지만 승자에 의해 목표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서로간에 상대(相對)가 있는 것이니 만큼 선행되어야 할 전쟁에서의 행위는‘인간사냥 인 것이다.-
다음은 율곤 이중재 홈피에 게재된 이씨 뿌리에 대한 글이다. 참고로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전주이씨(全州李氏) 대종보(大宗譜)에는 新羅의 35대 경덕왕(景德王)때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라의 35대 경덕왕(景德王 AD. 739~761년)때 사공(司空) 벼슬을 하였던 이한(李翰)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에 실려있다.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은 1958년 장여화(藏勵 )가 편저한 중국지명대사전과 맥을 같이 하는 책이다.
이한(李翰)은 신라(新羅)인 으로 신라가 대륙에 있을 때 사관(史官)으로서 사공(司空)의 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러기에 중국인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사실은 신라(新羅)가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볼 수 있다.
주요내용을 요약하면 중국인명대사전(中國人名大辭典) 447쪽에는 이한(李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한(李翰)의 아버지는 이화종(李華宗)이다. 李翰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사공(司空)의 직급을 받았다. 당(唐)나라 천보(天寶 AD. 742~756년)말 때 방관(房琯)의 벼슬을 했다고 적고 있다. 태어난 곳은 휴양( 陽)이라 했다.
*방관(房琯)은 방관(房官)으로써 동방관(同房官)과 같은 직책으로 향시동고관(鄕試同考官)이다. 향시동고관과 합시동고관(合試同考官)을 겸임하여 시험관의 직급이다.
*사관(史官)은 나라에서 귀중한 자료를 왕명을 받아 기록하고 저술하는 직책을 뜻한다. 죽기 전에는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휴양은 하남성(河南省) 상구현(商丘縣)남쪽이다.(중국고금지명대사전)
이한(李翰)의 22세손이 이성계(李成桂)이고 이성계의 父母는 여진(女眞) 사람이다.
그러면 신라 사람의 후손이 여진국에서 태어나는 이유를 설명 하겠다.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난 곳과 동기는 다음과 같다.
太祖 이성계는 함주(咸州)에서 태어났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603쪽에는 함주(咸州)를 요(遼)나라가 두었는데 그곳은 함평(咸平)이라고 적고 있다.
함평현(咸平縣)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통허현(通許縣)이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금(金)나라 때 地名을 함평로(咸平路)라고 적고있다. 함주(咸州)인 함평(咸平)은 하남성(河南省) 의주(義州)가 있던 급현(汲縣)땅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는 이인인(李仁人)이며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이인인(李仁人)이 환조(桓祖)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혈통의 계보로는 태조의 아버지가 환조(桓祖)로 되어있다. 환조의 아버지는 도조(度祖)이며 도조의 아버지는 익조(翼祖)이며 익조의 아버지는 목조(穆祖)라고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양왕(恭讓王)편과 고려도경(高麗圖經)편에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李成桂)의 혈통은 여진족(女眞族)이며 여진국(女眞國)은 글란(契丹)과 요(遼)나라때 제후국이었으므로 女眞國의 역사년대표는 누락되어 보이지 않는다.
女眞國이 있었던 곳은 지금의 하남성(河南省)동북부에 있었다. 본시 여진국(女眞國)에서 부장으로 있던 아골타(阿骨打)는 高麗의 스님과 女眞의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여진국(女眞國)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金)나라를 세워 이름을 완안민(完顔旻)이라 하였다.
여기서 글란(契丹)의 뿌리에 대하여 기록해본다.
진(秦)나라가 망한 후 일부 군신(君臣)의 무리는 진한(秦韓)에서 진한(辰韓)으로 갈라져 나가고 일부 군신(君臣)은 말갈(靺鞨)로 떨어져 갔다.
말갈(靺鞨)은 발해(渤海)를 패망시킨 후 글란(契丹)국이 되었다. 글란국은 다시 요(遼)나라가 되어 女眞國을 제후국으로 두었다. 그후 金나라 아골타(阿骨打)는 金나라를 세워 완안민(完顔旻)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니깐 新羅와 말갈(靺鞨)은 같은 혈통이기에 新羅 사공(司空)이었던 이한(李翰)의 후손은 女眞國에서 남게 되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같은 뿌리의 혈통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성계(李成桂)의 부모가 女眞國의 사람이라 하여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歷史的인 사실이다.
오늘날의 족보는 상업화의 바람을 타고 많이 변질 되어 가짜 족보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는데 원래 왕족만 가지던 족보가 명문세가를 거쳐 조선후기 평민들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명예를 소중히 하던 서민들도 점차 족보를 만들게 되었고 이로부터 많은 성씨 들이 생겨났다. 가짜 족보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족보의 상징성은 점차 퇴색해 갔다. 들리는 말로는 조선후기에 너무 많은 족보가 만들어져서 지금 남아있는 대다수의 족보는 거짓이 반정도 ??여 있다고 한다.
요즘은 출세를 하고도 족보가 형편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자녀의 장래를 위해서 일부러 옛날 유명한 집안의 족보에 자신의 조상 이름을 끼워넣는 수법으로 가짜 족보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 1억명, 우리나라에 약 300만명 정도가 있을것으로 추산되는 이씨는 단일 성씨로는 세계최고 이지만 성씨의 뿌리라는 사실이 어쩌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끝으로 율곤 이중재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성씨와 본관에 대한 짧은 한마디를 싣고 이 글을 맺는다.
"한국의 경우 족보가 생긴 이래 혈족(血族) 간의 격차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씨(李氏)나 김씨(金氏) 박씨(朴氏) 장씨(張氏), 조씨(趙氏)등 할 것 없이 모두가 환인씨(桓因氏)에 의해 한일(一)자의 성씨에서 유래된 단일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로 굳이 같은 본관(本貫) 같은 성씨(姓氏)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씨족(氏族)간의 李氏니 金氏니 朴氏니 하여 혈족 간에 지나친 경쟁심리를 유발하여 급기야는 상쟁(相爭)의 불씨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말하는 전주(全州)의 위치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287쪽에 全州를 찾아보았다.
全州는 全縣을 참고하라 했으므로 全縣을 살펴보니 漢나라때 영릉현(零陵縣)이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영릉현(零陵縣)을 찾으니 漢나라때 호남성(湖南省) 영주부(永州府)라고 되어있다.
영주부를 중화인민공화국의 분성지도집(分省地圖集)에서 찾아보니 호남성(湖南省) 남쪽에 있었다.
다시 말해 광서성(廣西省)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있었는데/
현대 지도에는 광서성(廣西省) 북쪽 계림(桂林) 위에 全州가 있다.
위 글은 "이씨의 뿌리역사" 에서 도움 받은 글 입니다.-
*충녕 세종의 학우 김문기 가문의 후손 김*태 비전 가훈Click here!
실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은 수없이 고려사 개찬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고기록의 이성계 고향 함주를 함흥이라 한 것 까지는 좋은데 개경으로 풀이한 개주는 원문에 함주의 서북에 있다 한 모순은 합리화 할 아무런 명분이 없다. 바로 대륙이라는 뜻이다.
이름:박달 ( 남 )
2003/1/27(월) 17:41 (MSIE5.01,Windows98) 61.248.28.60 1024x768
(펀글)明太祖 朱元璋은 과연 고려인인가?(대명일통지의 원문을 찾아주세요!)
운영자님~ 대명일통지에서 주원장이 한 말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 정말 사실인지 궁금합니다. 대명일통지의 기록에서 원문을 찾아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민족의 뿌리와 미래(cafe.daum.net/hanfuture)에서 퍼온 글입니다.
역사의문: 주원장은 과연 고려인인가?
번호:1200 글쓴이: 도경당 조회:222 날짜:2003/01/2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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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부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설이 있었는데,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에 있는 주원장에 관한 전설이다.
우리나라에는 주원장에 관련된 전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주원장과 동시대인물이자 주원장보다 6세 적은 조선태조 이성계와 연관된 전설이 많다.
주원장이 등장하는 전설에는 거의 어김없이 이성계 또한 등장한다.
대체 왜 그런 것일까?
과연 정말 주원장은 고려사람인 걸까?
일설에 의하면 주원장은 원래 도적출신으로 고려에서 죄를 짓다가 중원대륙으로 도망을 가서 홍건적을 일으켜 명나라를 건국했다고 한다.
주원장의 고향이 사전에는 안휘성이라고는 되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때 그가 고려인이었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명나라의 통지 [대명일통지]에는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며 그는 朱씨로서 주자의 후손, 신안주씨일 가능성도 많다.
그러니 주원장을 여러정황으로 살펴보았을때 중화족[漢族:한족]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다음은 주원장과 관련된 전설이다.
천자봉 전설
경상남도 진해시 자은동과 웅천 1동에 걸쳐 있는 산.
위치 : 경남 진해시 자은동, 웅천 1동
높이 : 502m
높이 502m로, 시루봉(웅산:693.8m) 능선이 남쪽으로 벋어내리며 솟은 산이다. 산기슭이 가파르고 자갈이 많아 성채나 돌산처럼 보인다. 웅장한 산세 때문에 조선 태조(이성계), 명나라 태조(주원장), 주(朱)씨, 이(李)씨, 천자(天子) 등과 관련된 전설이 여럿 전한다.
옛날 천자봉 연못의 이무기가 용이 못 되자 마을 사람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염라대왕이 이무기에게 용대신 천자가 되라고 권하여 연못 아래 백일마을의 주(朱)씨 가문 아기로 태어났다. 이 아기가 뒷날 중국으로 건너가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전설도 전한다. 함경도 사람 이씨가 하인인 주씨를 데리고 명당을 찾으러 천자봉에 올랐더니 바다에서 반인반어(半人半漁)의 괴물이 나타나 바닷속에 굴이 둘 있는데 오른쪽 굴이 천자가 태어날 명당이라고 점지해 주었다. 하인 주씨가 욕심이 나서 자기 선친은 오른쪽에 묻고 주인 이씨의 유골은 왼쪽에 묻었다. 그래서 주씨 가문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태어났고, 이씨 가문에서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태어났다고 한다.
명나라황제가 등장하는 무협드라마 신용문객잔이 방영될 시간을
기다리며.....도경당 서함.
[한민족 고대사] 고대사 X파일 2부 [ 신라와 고려의 후예 조선과 청 ]
번호:14 글쓴이: 가리온 조회:1647 날짜:2002/08/2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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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X파일 2부 명나라 건국의 비밀
중세때를 살펴보자 고려말에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와 이지란이 고려를 뒤엎고 조선을 세웠다. 중국에는 그와 동시대 인물인 주원장이 명(明)나라를 세우게 된다.그런데 이 주원장이 출생지가 어디인지는 중국에서는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놀라운 것은 주원장의 출생지라고 회자되는곳이 우리나라의 전라남도 해남 마을로 전해 내려온다.
주원장은 털복숭이 바다수달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하 명당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다가 전라남도 해남에서 바닷가 어딘가에 천하제일의 명당이 있음을 알아 냈다. 그곳에다 조상의 묘를 쓰게 되면 자신의 아들이 천자가 되는 천고제일의 명당이었다. 그러나 정작 관을 안착시킬 묘터는 찾지를 못하고 한달을 내리 보내다가 마침 해남 마을의 털복숭이 소년이 헤엄을 잘치고 해남 이곳저곳 안가본데 없이 지리에 환하다 해서 그에게 길안내를 부탁했다. 물론 명당을 찾는다는 목적은 숨기고 길안내를 부탁했다. 그렇게 또다시 한달을 명당을 찾아헤멘 끝에 마침내 천하제일 명당의 위치를 발견해냈다. 그곳은 해남의 육지가 아닌 바다 한가운데의 바위섬에 위치해 있었다.
위치를 확인한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묘를 쓴뒤에 혹시나 털복숭이 소년이 그묘자리를 훔칠까봐 죽이려 했다. 그러나 길안내를 해준뒤 그 털복숭이 소년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묘터를 쓰고 난뒤 털복숭이 소년을 죽여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 며칠간을 그 소년을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하늘에 벼락이 치고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드디어 자신이 쓴 천하제일의 명당의 기운이 움직였다고 생각하고 크게 기뻐 했으나 그순간 저멀리 털복숭이 소년이 나타나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 나는 당신이 천하 명당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을 알고 있다. 나역시 오랫동안 이곳 어딘가에 천하제일 명당을 찾아 헤메고 있었는데 묘를 쓰는 정확한 위치와 시간을 몰랐던 것 뿐이다. 그런데 그대가 와서 마침내 묘의 위치와 방향 그리고 시간을 알 게 되어 그 묘터에 나의 조상님의 묘를 썼다 그대는 묘의 위치를 알 게 해주었으므로 그 옆에 그보다는 못하지만 작은 나라의 왕이 되는 혈자리가 있기에 그곳에 당신 조상의 묘를 썼으니 그리알라. 이제 나는 중원 대륙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나라를 세울 것이다." 하고 떠났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천고의 명당은 그 주인이 있기 마련이니 복연이 없는걸 어찌 하겠나? " 이미 발동된 명당의 혈자리를 건들였다가는 오히려 화를 당하기 때문에 이성계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천고의 명당에 묘를 제대로 써더라면 어쩌면 역사의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명태조가 이성계로 조선왕조가 주씨왕조로 바뀌는 해괴한(?) 경우가 생겼을지도... 해남 어딘가에 주원장의 출생지라고 전해지는 곳은 이 전설 말고도 다른 이야기가 또 전해진다. 주원장의 출생지가 중국 어디에도 없고 출생지가 밝혀지지 않음은 주목할 만한 처사이다. 대개 천자가 태어난 땅이라면 중국내의 어딘가라면 그 마을 사람들은 난리가 난다. 천자가 출생한 곳이라 하여 자손대대로 자랑을 하기 마련인데 주원장의 출생지는 중국대륙내에는 없다. 전해내려오는 설화대로 주원장은 전라남도 해남 출신이 아닐까?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복희, 염제, 신농씨, 黃帝, 소호금천씨, 전욱고양씨, 제곡고신씨, 요, 순, 하, 은, 주, 진(秦), 한(漢), 서한(西漢), 동한(東漢), 후한(後漢), 삼국(三國), 위(魏), 촉(蜀), 오(吳), 진(晋), 서진(西晋), 동진(東晋), 남조(南趙)는 송(宋), 제(齊), 양(梁), 진(秦), 후양(後粱), 북조(北趙)는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그리고 수(隋), 당(唐), 무주(武周), 오대시(五代時), 북송(北宋), 남송(南宋), 거란(契丹), 요(遼), 서요(西遼), 금(金), 몽고(蒙古), 원(元), 명(明), 후금(後金), 청(淸) 등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이 뿌리라고 밝히고 있다.
첫댓글 본문에 나타나는 김문기에 대해 굳이 설명하지 않을 수 없음을 밝힙니다. 저는 경주 김씨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피를 이어받은 김녕(金寧) 김가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김문기 역시 김녕 김가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입니다. 전 대통령 김영삼도,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역시 김녕인입니다.... 문제는 김녕인의 장손은 지금의 전남 고흥에 자리잡은 김자 준자를 쓰는 분으로 저의 중시조이며 김녕 김가의 진정한 장손입니다. 저희 가기에 의하면 저희 중시조를 고흥으로 낙향하게 한 분이 바로 김문기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김재규는 김문기의 후손으로 알고 있으며...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자 준자
즉 저와 가깝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친척임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김문기와 김준이라는 분은 당숙과 조카관계였지만 연세가 비슷했던지라 김문기 당신께서 단종 복위 운동에 투신할 당시 영돈녕 부사를 지낸 집안의 장조카인 준자 할아버지께 고흥으로 피신하여 혈통을 보존하라는 지시를 합니다.... 이게 저희 가기에 전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근자 올라온 글에 의하면 김문기가 마치 신선이 된 듯한 글이 올라옵니다. 참고로 백촌 김문기 선생은 무인으로 요즘 직위로 수도방위 사령관 쯤에 해당하는 벼슬을 산 분입니다. 그 분이 세종과 관계가 그처럼 돈독하였다면 감히 수양대군이 그분을 장살(매를 쳐서 죽임)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분은 감히 수양대군과 척을 질 수 있었겠습니까?
... 역사는 모르는 것이 죄입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막 쓰는 타 카페의 글을 생각없이 올리는 일은 자제하기를 바랍니다.^^
님의 염려를 잘 알고 있어용^^ 다만, 위 글도 잃어버린 역사를 찾자고 하는 소리니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주세요~ 축소 패배주의적 절망사관보다는 보기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