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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공학적 개념: 정범모
먼저 정범모 교수의 『교육과 교육학』이라는 책 [각주 1: 정범모, 『교육과 교육학』, 배영사, 1976.] 에 제시된 교육의 개념을 고찰해 보겠다. 이것을 어째서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라고 부르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이하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공학’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의 공학만 아니라 농학, 의학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며, 이들 여러 분야에 걸쳐서 구안, 시행되는 ‘기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구안하고 시행하는 데에 관련되는 ‘사고방식’을 가리킨다. 최근에 널리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말하자면, 여기서 공학이라는 것은 ‘하드웨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를 뜻한다. 또한, 여기서 공학이라고 하는 것은 근래 교육학의 한 분야로서 부각되고 있는 ‘교육공학’과 특별히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범모 교수의 견해를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라고 부르면 그것을 당장 교육공학과 관련지어 생각하려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고, 또 그 사람은 이하 이 장에서 설명해 놓은 내용을 교육공학의 원리에 비추어 해석하면서 정범모 교수의 견해와 교육공학 사이에 면밀한 개념적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정범모 교수의 견해를 이해하는 데에 특별히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의심스럽다. 적어도, 이 책에서 정범모 교수의 견해를 ‘공학적 개념’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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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공학과의 관련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정범모 교수의 정의를 소개함에 있어서, 외람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소개하는 이 저자의 느낌을 몇 마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이 책에서 논의하려고 하는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정범모 교수만큼 선명하게 드러낸 것은 세계에서도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어떤 다른 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범모 교수의 경우에도 그 학문적 계보를 추적할 수는 있고, 또한 그와 유사한 교육관을 표방하는 사람들을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교육에 관한 ‘공학적 관점’은 교육의 ‘방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정범모 교수는 그 공학적 관점을 하나의 ‘교육의 개념’으로 정립하였다.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라는 이 방면에 관한 한, 국내, 국외를 통틀어서 어느 누구도 정범모 교수의 『교육과 교육학』이라는 책에 제시된 것만큼 그 생각을 명백하고 강력하게 개진하지는 못하였다. 『교육과 교육학』이라는 책은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제시한 대표적인 저작으로서 전 세계에 내어놓을 만하다. 그리고 이 저작이 한국 학자의 손으로 집필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에 표명된 견해를 교육의 개념에 관한 한 가지 대표적 견해로 소개할 수 있게 된 데 대하여, 본 저자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 교육의 정의
『교육과 교육학』의 첫머리에서 정범모 교수는 교육을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라고 정의하고, 이 정의는 ‘조작적 견지, 즉 실제에 포함되는 요인과 활동의 견지에서의 정의’, 또는 간단하게 ‘조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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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operational definition: 정범모 교수는 ‘기술적 정의’와 ‘조작적 정의’를 섞바꾸어 쓸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술적 정의’는 셰플러의 경우에서처럼 ‘약정적’ 정의나 ‘강령적’ 정의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 정의, ‘목적론적’ 또는 ‘규범적’ 정의와 구분되며, 이 점에서 그것은 조작적 정의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p. 16). 조작적 정의라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교육의 정의가 어째서 조작적 정의인가를 말하기에 앞서서 정범모 교수이 정의 그 자체에 관하여 약간의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정범모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정의는 ‘인간행동’, ‘변화’, ‘계획적’이라는 세 개의 요소, 또는 세 개의 ‘중핵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이 세 요소에 관한 정범모 교수의 설명을 요약해 보겠다.
먼저, 교육은 인간을 다룬다. 교육이 정치나 경제나 문화 등 사회의 여러 기능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교육은 그런 사회적 기능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을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둔다. 교육은 ‘농작물을 기르는 것이 아니라 농작물을 기를 줄 알고 기르려 하는 인간을 기르는 것’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교육은 인간을 기른다고만 말해서는 너무 막연하다. 교육의 정의에 포함되는 요소로서의 ‘인간’이라는 용어는 교육이 하는 일을 정확하게 지시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행동’이라는 용어는 교육이 대상으로 하는 인간의 의미, 다시 말하면 교육이 기르고자 하는 인간의 측면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데에 유용하다. ‘교육은 인간을 기른다’는 말에서 ‘인간’은, 사실은, ‘인간의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행동’이라는 것은 일상적인 용어라기보다는 과학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어이다. 일상적인 용어로서의 행동은 신체적인 조작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데 비하여,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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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동작이라는 형태의 외현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지식, 사고, 가치관, 동기체제, 성격특성, 자아개념 등’ 인간의 모든 심리적 특성을 포함한다. 일상적인 용어로서의 행동은, ‘지식과 행동’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지식과는 구분되지만,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행동은 지식뿐만 아니라 위에 열거된 여러 가지 특성, 즉 이른바 내면적인 행동도 포함한다. 다만, 그러한 내면적 행동 또는 심리적 특성을 ‘행동’이라는 용어로 지칭하는 데에는 그것을 과학적으로 (또는, 이하에서 설명할 용어를 미리 사용하자면, ‘조작적으로’) 의미 있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 정범모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아무리 내면 깊숙이 가정되는 [인간특성]이라도 심리학은 그것을 궁극적으로는 과학적으로 의미 있게 파악할 수 있는 행동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아무리 그럴듯하고 아름다운 인간특성이라도 그것이 과학적으로는 의미, 의의 있게 규정하고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허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진취적 정신자세’라는 특성을 과학적으로 의미, 의의 있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에 관한 교육이론과 교육실제는 결국 허구와 구호일 뿐, 그저 오리무중에서 떠들썩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사과’라고 떠들썩하기만 하지, 사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어떤 상태에서 자라는 것인지 모르고 사과 농사를 한다고 떠드는 것과 같다(p. 19).
사과 농사에 비유해서 말한 이 교육학적 오류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교육에서는 ‘인간을 기른다’는 말에서의 ‘인간’을 ‘인간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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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로, 교육은 인간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관심이 있다. 여기서 변화라는 것은 ‘육성, 조성, 함양, 계발, 교정, 개선, 성숙, 발달, 증대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인간의 활동 중에서 인간 행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육만이 아니요, 정치나 경제도 마찬가지로 인간 행동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교육 이외의 활동들이 반드시 인간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니며, 그런 활동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는 한, 그것은 성격상 교육이라는 활동에 접근해 간다. 학문으로 따져 보더라도 행동과학 또는 사회과학으로 불리는 학문들은 모두 인간 행동에 관심을 두지만, 교육을 다루는 교육학은 인간행동의 ‘변화’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일을 그 고유의 관심사로 한다. 다시, 여러 행동과학이나 사회과학이 인간 행동의 ‘변화’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한, 그것은 성격상 교육학의 영역 속에, 비록 주변적인 위치나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교육이 인간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활동이므로, 교육이나 교육학은 인간 행동의 변화 가능성 ─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 행동이 의도적인 노력에 의하여 변화될 수 있다는 것 ─ 을 논리적으로 가정한다. 인간 행동이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교육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 행동의 의도적 변화 가능성은 교육이라는 활동과 교육학이라는 학문의 성립 기반임과 동시에 그 존재 이유가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육은, 참으로 교육으로서 의미를 가지려고 하면, 인간행동의 변화를 실지로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교육력’이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교육은 뜻하는 바가 무엇이건, 게릴라건, 성자건, 창의적 성격이건, 민주적 자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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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하고 강력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p. 21). 강력한 교육은 그것이 목적으로 하는 변화를 비교적 단시일에 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일단 일으킨 변화가 일반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인간행동의 변화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일어날 수 있지만, 그것이 교육의 경우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 변화가 ‘계획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일체의 인간 행동의 변화를 ‘학습’이라는 용어로 규정할 수 있다면, 교육은 학습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교육의 정의에 포함되는 요소로서의 ‘계획’은 간단하게 말하면 ‘교육 프로그램’을 뜻한다. 교육 프로그램에는 최소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간 행동에 관한 명확한 설정과 의식(즉, ‘교육목적’)과 인간 행동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이론(즉, ‘교육이론’), 그리고 그 이론에 터한 구체적 프로그램(즉, ‘교육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계획’은 인간행동, 변화, 계획이라는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머지 두 요소는, 말하자면 교육 프로그램으로서의 계획에 종합되며, 그 두 요소가 중요성을 가지는 것도 교육 프로그램에서의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을 정의할 때의 정범모 교수의 문제의식이 이 ‘계획’이라는 요소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교육 프로그램(교육계획 또는 교육과정)이라는 것은 뜻하는 인간행동을 이런 이론, 이런 원칙에 터하여, 이런 자료, 이런 상황, 이런 방법,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육성할 수 있다는 계획 내지 과정(課程)을 말한다. 마치 농사 프로그램이 이런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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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자, 이런 토질, 이런 비료, 이런 작업,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서 기를 수 있다는 계획 내지 과정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교육 프로그램은 무엇보다 첫째, 실증된 이론과 원칙의 뒷받침을 가지고 있을 것이 요망된다. 이 점에서 종래 교육은 극히 약했다는 것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사 프로그램이나 의료 프로그램에 비하면 흔히 교육은 이론적 배경에 퍽 빈약하다. 현황에서 뇌수술 프로그램과 사고력 프로그램을 비교할 때, 의학자가 갖는 이론적 자신(自信)과 교육자가 갖는 이론적 자신과는 상당한 차(差)가 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p. 25).
이상, 정범모 교수의 설명에 따라 그 정의에 들어 있는 세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정의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위의 설명만으로도 독자는 그 정의의 의미를 이해하고 거기에 대하여 공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참으로 공감과 감동을 느끼려 한다면, 『교육과 교육학』에서 위의 설명에 이어지는 ‘교육의 힘’에 관한 설명을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정범모 교수에 의하면, 교육이 제 본래의 임무를 다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면 교육이 실지로 ‘인간 행동을 계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때, 교육은 실로 ‘가공(可恐)할 힘’을 가지게 된다. 교육이 그것에 맡겨진 일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확실한 이론에 터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어떤 인간 행동이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설명하는 동안에, 정범모 교수는 교육의 힘을 보여 주는 한 가지 가상적인 보기를 든다. 즉,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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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내가 관찰해 보니, 이번 오는 선거에서 입후보자들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오. 이것을 어떻게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나는 교육의 전문가, 즉 인간행동의 계획적인 변화의 전문가인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부정을 안저지를 정신(인간행동)을 이러이러한 절차와 방법과 과정으로 10일 내에(계획) 길러 놓을 테니(변화), 모든 입후보자들에게 나의 이 교육을 받게 하시오. 그러면 이 나라에서 부정선거는 없어질 것이 아니오?(p. 26)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제안은 교육이 그 정의에 합당한 모습을 갖추게 될 때 교육의 전문가가 응당 할 수 있어야 할 제안이다. 현재 교육의 전문가가 그런 제안을 할 수 없는 것은 주로 ‘선거의 부정을 안 저지르는 행동’을 명확하게, 과학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런 행동이 어떻게 길러지는지에 관한 이론적 설명과 방법적 고안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범모 교수가 예시한 다음의 제안은 이것과 경우가 다르다.
국가발전에는 경제발전이 중요하오. 경제발전에는 모든 제도적, 물질적인 정비와 더불어, 정신자세의 정비가 중요하오. 그런 정신자세 중에서도 국민 전부가, 그 중에서 기업가들이 높은 성취동기 내지 의욕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소. 이 성취동기(인간행동)를 당신 회사 간부진에게 이러이러한 10일 훈련과정을 통해서(계획) 높게 길러 줄 터이니(변화) 교육받게 하시오. 그 결과는 당신 회사의 수익을 적어도 3배는 올리게 될 것이오(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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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부정선거 근절의 경우와는 달리, 이 성취동기 육성은 순전히 가상적인 예가 아니다. 정범모 교수가 그 증거로서 인용하고 있는 책 [각주 2: 정범모·박용헌, 『성취동기』, 배영사, 1969. 또한, 성취동기 육성과정에 관한 상세한 설명은 박용헌, 『성취동기육성의 교수방안』, 교육출판사, 1975.] 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이 경우에는 성취동기라는 ‘인간행동’이 명확한 과학적 용어로 규정되어 있으며, 동기 및 그 육성에 관한 이론과 실증적 연구가 상당한 정도로 축적되어 있고 그 이론과 연구를 토대로 하여 성취동기 육성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있다. 이 점에서 성취동기 육성과정은 정범모 교수의 정의에 들어 있는 요소들을 아마도 가장 잘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전형적으로 예시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조작적 정의
위의 정의가 어떤 뜻에서 ‘조작적 정의’인가 하는 것은 조작적 정의의 의미에 비추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약간 형식을 갖추어서 말하자면, 조작적 정의는 ‘한 개념이 관찰되는 사태를 정의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는 정의’를 뜻한다. 예컨대 기압을 ‘공기가 누르는 힘’이라고 정의할 때, 이 정의는 조작적 정의가 아니다. [각주 3: 이하 기압의 보기는 Carl G. Hempel, Philosophy of Natural Science, Prentice-Hall, 1966, p. 9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정의에는 기압이 관찰되도록 하려면 어떤 사태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관한 언급이 들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하면, 기압이라는 개념이 관찰되도록 사태를 만드는 일, 즉 ‘조작’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비하여, ‘기압이라는 것은 수은을 가득 채운 유리관을 수은이 담긴 그릇에 거꾸로 세웠을 때 수은 면에서부터 수은 기둥의 높이(또는, 그 높이를 수은의 비중에 비추어 환산한 것)를 뜻한다’고 하는 정의를 생각해 보자. 이 정의에서 ‘유리관에 수은을 가득 채우고 그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꼭 막아 수은이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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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거꾸로 세우는 일‘은 기압이라는 개념이 관찰되는 사태를 만들기 위한 조작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 조작은 갈릴레오의 시사에 따라 토리첼리가 처음으로 한 것이다. 토리첼리의 이 조작으로 말미암아 기압은 ‘과학적인’ 개념이 되었고, 기압에 관한 과학적 법칙의 발견도 이 조작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조작적 정의는 과학이라는 활동에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압이 어떤 사태에서 관찰되는지를 알지 못하면, 그것에 관한 법칙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기압은 자연과학의 개념이지만, 인간과 사회에 관한 개념도 그것이 ‘과학적 연구’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조작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지능의 정의로서 ‘머리 좋은 정도’와 ‘지능검사의 결과를 규준표(規準表)에 비추어 판단한 것’이라는 두 가지 정의를 비교해 볼 때, 상식적인 사람에게는 전자가 더 의미 있는 정의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지능이 과학적 연구에 유용한 개념이 되기 위해서는 후자와 같은 조작적 방식으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의 기압의 경우에서와 같이, 지능검사를 제작하고 실시하는 것은 지능이라는 개념을 관찰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조작이다.
이상의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교육의 정의가 어째서 조작적 정의인가 하는 것은 단도직입적으로 명백하다. 이 정의에서 조작은, 물론, ‘계획’ 또는 교육 프로그램이다. 앞의 설명과 관련지어 말하면, 이 계획 또는 교육 프로그램은 교육이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변화’, 즉 ‘인간행동의 변화’가 관찰되도록 사태를 마련하는 일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이 정의에 의하면 하나의 활동이 교육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그 활동(즉, 교육 프로그램 또는 조작)이 의도하는 인간 행동의 변화가 실지로 관찰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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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에 달려 있다. 그 변화가 실지로 관찰되면 그것은 교육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람들 중에는 변화가 결과적으로 일어나는가 않는가 보다는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도의 유무가 교육을 정의하는 기준으로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위와 같은 조작적 정의의 논지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우선, 실지 사태에서 변화라는 것은 완전히 일어나든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든가의 양분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도에 의하여 구분되는 연속적인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의도만 있었고 결과적인 변화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경우는 실지 사태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계획으로서의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난 뒤에 행동의 변화가 덜 일어나고 따라서 덜 관찰되면 그만큼 그것은 교육이 아닌 것, 또는 오직 명목상으로만 교육인 것에 가까워진다. 뿐만 아니라, 앞에 요약된 정범모 교수의 설명에 이미 시사되어 있는 바와 같이, 결과보다는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은 이때까지 그러한 명목상의 교육을 불가피하거나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그것이 불가피한 것도, 정상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 교육은, 참으로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되려고 하면, 인간행동의 변화를 실지로 일으켜야 하고 또 일으킨 변화를 명백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점은 또한 그 정의에서 ‘행동’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말해 준다. 정범모 교수의 설명에 직접 나와 있듯이, ‘행동’이라는 개념은 교육이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간특성을 ‘과학적으로 의미, 의의 있게 규정하고 포착하기’ 위하여 필요불가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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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특성을 행동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교육에서 의도하는 변화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물론, 그 변화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에 따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일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그것은 ‘허구와 구호일 뿐, 그저 오리무중에서 떠들썩하고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하다.’
예컨대 앞의 기압의 경우에서와 같은, 과학 연구에서의 조작적 정의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두 경우에 조작적 정의가 가지고 있는 의미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 기압의 경우에는 수은 기둥으로 하는 조작이 그 자체로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과학이라는 전체적인 활동의 한 부분으로서 그것에 대하여 부차적인 지위를 가진다. 수은 기둥을 거꾸로 세워서 그 높이를 재는 활동은 기압이라는 개념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수단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기압과 관련된 과학적 법칙을 발견하는 수단으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개념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것과 개념에 관련된 과학적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각각, 정범모 교수의 용어로, 개념의 ‘의미’와 ‘의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4: 정범모, 『교육과 교육학』, 배영사, 1976, p. 252.] 그러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 있어서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이 경우에는 인간행동의 변화라는 결과를 얻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며, 따라서 그 변화를 얻기 위한 조작, 즉 계획적 교육 프로그램 그 자체가 직접 관심의 대상이 된다. 아마, 이것은 과학이라는 활동과 교육이라는 활동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라는 것은 1차적으로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적 활동이며, 여기에 비하여 교육은 모종의 결과(즉, 이 경우에는 ‘인간행동의 변화’)를 얻기 위한 실제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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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학과 교육에 있어서의 조작적 정의라는 말에 이상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해서 교육의 정의에 ‘조작적 정의’라는 용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는 과학에서의 조작적 정의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건들이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으로서, 위에서 말한 두 경우 사이의 차이가 위에 진술된 정도로 확연하지는 않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교육의 정의에서 핵심적 관심은 그 정의를 기초로 하여 과학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변화를 일으키는 것 자체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상 과학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 그것도 위의 정의에서 결코 부차적이 중요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조작적 정의는 또한 그 정의에 의하여 확인되는 개념(즉, 교육)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고 이론을 정립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압의 조작적 정의가 기압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고 이론을 정립하는 기초가 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하다. 물론, 이렇게 하여 발견되고 정립된 법칙과 이론은 다시 계획적인 교육 프로그램(조작)을 마련하는 기초가 된다.
여기에 교육과 교육학 사이의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인간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실제적 관심은 교육의 영역이며, 인간 행동의 변화에 관한 법칙을 발견하는 이론적 관심은 교육학의 영역이다. 이론과 실제는 그 관심의 종류에 있어서 명백히 구분된다. [각주 5: 정범모, 『교육과 교육학』, 배영사, 1976, pp. 270-3.] (그와 마찬가지로, 각각의 관심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의 교육학자와 교육자의 역할도 명백히 구분된다.) [각주 6: 정범모, 『교육과 교육학』, 배영사, 1976, pp. 332-5.] 그러나 이 양자의 관심은 서로서로를 필요로 한다. 인간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실제적 활동으로서의 교육은 교육학의 이론적 활동을 위한 자료를 제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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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의 이론은 교육의 실제적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각주 7: 이 ‘기초를 제공한다’는 말은 교육학의 교육에 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서는 분명히 애매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간은 이 문제에 관한 정범모 교수의 견해 자체에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정범모 교수에 의하면, 교육학은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현실적인 사상세계(事象世界)를 기술하고 설명하고 예언하는 (따라서 어떤 바람직한 방향으로 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개념, 법칙, 이론의 체계적인 집합’이며, 따라서 그것은 ‘경험과학으로 그 중심을 잡아야 한다’(p. 265). 그러나 정범모 교수는, 교육학은 ‘정직하게는’, 교육의 실제적 처방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p. 272). 실제적 처방은 ‘응용’이며, 응용은, 『교육과 교육학』의 첫 부분(p. 28)에 나오는 ‘예술’과 마찬가지로 공학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응용 또는 예술로서의 공학은 교육학의 관심사가 아닌 교육의 관심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교육학자와 교육자 사이의 역할도 그에 따라 구분되어야 하는 것으로 된다. 그렇기는 해도, 교육학의 핵심적 성격을 ‘과학’으로 규정할 때 정범모 교수의 의도가 과학과 공학을 대비시키는 데 있었다기보다는 과학과 이른바 ‘정표적(情表的) 발언들’(즉, 문학과 설교조의 철학)을 대비시키는 데 있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쨌든, 교육학과 공학은 동일하지 않다는 정범모 교수의 주장은 그의 교육의 개념을 ‘공학적 개념’이라고 부르는 데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위의 설명에 비추어 볼 때,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말하자면 이중의 의미에서 ‘조작적 정의’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인간 행동 그 자체가 조작적으로 정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그 변화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그것을 위한 실제적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데에 필요하다. 그리고 실제적 프로그램 그 자체가 하나의 조작이며, 교육이라는 활동의 의미가 바로 이 조작에 의하여 파악된다.
앞에서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의 전형적 예시라고 말한 성취동기 교육과정에 비추어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여 보겠다. 한 동기이론에 의하면, 동기는 전문적인 용어로 ‘정서적 색조를 띤 연상의 망조직’으로 정의된다. 이 전문적인 용어를 상식적인 용어로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물체나 사태에 직면할 때 우리는 그것을 단서로 하여 연상을 하게 된다. 이 연상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그물처럼 얽혀 있다. 또한, 이 연상은 우리에게 그 물체나 그것이 일으키는 연상에 대하여 가까이하고 싶다든가 멀리하고 싶다든가 하는 정서적 반응을 일으킨다. ‘성취동기’라는 것은 그 연상이 ‘성취’, 즉 모종의 탁월한 업적을 이루는 것 ─ 그 업적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 과 관련된 동기를 말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은 거의 모든 물체나 사태를 당할 때 그것을 단서로 하여 성취와 관련된 상념을 일으킨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람은 장차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그려보며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계획을 세우며 그 결과가 달성될 때의 기쁨과 좌절될 때의 절망감 같은 것을 예견한다. 여기에 성취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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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적으로 정의할 가능성이 열린다. 즉, 사태가 애매한 그림이나 사진을 보여 주고 그 사태에 관하여 이야기를 꾸며 내도록 했을 때 그 이야기 속에 성취와 관련된 상념이 많이 포함될수록 그 개인의 성취동기가 강하다는 것이다.
성취동기 육성 프로그램은, 물론, 한 개인의 성취동기의 수준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조작이다. 이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보면 개인으로 하여금 위의 조작적 정의에 지시된 인간 행동(즉, 성취와 관련된 상념)을 나타내어 보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프로그램은 이른바 12개의 성취동기 육성의 원리에 의거하여 제작된다. [각주 8: 박용헌, 『성취동기육성의 교수방안』, 교육출판사, 1975, pp. 93-100.] 이들 원리는 동기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이나 법칙 그 자체는 아니지만, 거기에 이론적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만큼 그것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원리 중의 몇 가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즉, ‘동기를 육성할 수 있다는 자신과 육성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동기육성 과정에 임할 때, 그 개인에게 동기육성 과정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원리 1), ‘동기를 정의하는 연상적 망조직을 분명히 개념화할 때, 그 개인에게 동기육성 과정은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원리 3), ‘동기육성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조회집단의 일원이 될 때, 그 개인에게 동기변화의 가능성과 지속성은 증가한다’(원리 12)는 것들이다.
여기에 인용된 세 가지의 원리를 포함하여 그 12개의 원리들은 한 개인의 성취동기를 육성하기 위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조치를 나타낸다. 예컨대, 위의 원리 1에 의하여 그 프로그램에서는 실지로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들을 사례로 하여, 그들의 업적은 결국 강한 동기가 뒷받침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리 12에 의해서는 동기육성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수료증을 수여하고 일종의 ‘동창회’를 조직하도록 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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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내내 서로 격려하면서 성취동기 집단으로서 유대를 돈독히 하도록 한다. 또한, 그 밖의 다른 원리에 의하여, 강한 성취동기를 가지는 것은 각 개인의 자아개념이나 사회문화적 풍토와 일관된다는 것을 믿도록 한다. 그러나 아마도 그 프로그램의 핵심 부분은 위의 원리 3에 의하여 제시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지 프로그램상으로 보면 이 원리는 성취동기 육성과정에 참여하는 개인들에게 성취동기의 ‘조작적 정의’를 정확하게 알려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곧 ‘동기를 정의하는 연상적 망조직을 분명히 개념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과정 참여자들은 성취동기의 측정 방법 ─ 앞에서 말한, 꾸며낸 이야기의 어떤 대목이 성취상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채점되며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면 성취동기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있는가 ─ 을 배우며, 실지로 성취동기 점수를 높게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연습을 한다. 결국, 성취동기가 높아졌다는 ‘인간행동의 변화’는, 조작적으로 말하면, 과정에 참여하기 전에 비하여 과정에 참여하고 난 뒤에, 성취동기 점수가 더 높게 채점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나면 독자 중에는 성취동기 육성과정의 효과에 대하여 한 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품게 될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한 개인에게 성취동기 채점방법을 가르쳐 주고 난 뒤에, 그 채점방법에 따라 높은 성취동기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그 개인이 지어내었다고 해서 과연 그것으로 동기가 육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동기의 육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의문의 타당성 여부를 자세하게 따져 보는 것은 당장의 논의와 별로 관계가 없다. 다만,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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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의문은, 결과적으로 보면, 정범모 교수의 교육의 정의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앞의 설명에서 몇 차례 강조한 바와 같이, 성취동기라는 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바람직한 인간특성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조작적 정의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필경 과학적으로 의미 있게 ─ 다시 말하면 그것이 길러졌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 규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성취동기의 경우에 그것은 결국 성취동기의 채점방법으로밖에 달리 파악될 도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성취동기 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순전히 ‘점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태에 관한 ‘지각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각방식의 변화를 일으킨 개인들은 적절하게 어려운 과업을 선택하며 그 수행과정을 세밀히 계획하는 등, 이른바 ‘성취인의 행동 특성’을 나타내며, 성취동기 육성과정을 이수하지 않았으면 분명히 할 수 없었을 법한 업적을 실지로 성취한다.
그러나 정범모 교수의 입장에서 볼 때 위의 의문에 대해서는 보다 중요하고 결정적인 답변이 한 가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즉, 비록 성취동기 육성과정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의 전형적인, 또 어떤 면에서는 편리한 예시이기는 하지만, 이 정의는 성취동기 육성과정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육활동에, 또 특히 학교 교과를 가르치는 사태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교과를 가르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교사는 앞의 의문에서 문제시되는 바로 그런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수학을 가르칠 때 교사는 ‘수학적 사고방식을 가르친다’는 식의 그럴듯한 용어로 자신이 하는 일을 규정할지 모르지만, 그 교사가 실지로 하는 일은 특정한 수학 문제를 풀 수 없는 상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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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수 있는 상태로의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며, 이것을 위하여 교사는 바로 학생으로 하여금 수학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수학시험의 채점방법을 가르쳐 주고 그 채점방법에 따라 높은 점수를 받도록 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만약 앞의 성취동기 육성과정이 의문의 대상이 된다면 이것도 마땅히 의문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앞의 그 프로그램이 ‘땅 짚고 헤엄치기’라면 이것도 마땅히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수학을 가르치는 경우에 앞의 의문을 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오늘날 수학성적으로 안타까워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그토록 많은 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을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생각할 사람은 더욱 없을 것이다.
정범모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수학 교육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안타까운 사태는 ‘수학을 안다’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행동을 나타내는가에 관심의 초점을 집중시키지 못한 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 관련되는 이론과 그 이론에 뒷받침된 ‘공학적 예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 대신 이때까지 교육 또는 교육학에서는, 반문학(半文學), 반철학(半哲學)인 수사학을 나열하는 데에 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것은 분명히 ‘사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어떤 상태에서 자라는 것인지 모르고 사과 농사를 한다고 떠드는 것’에 비유될 만하다.
3. 공학적 개념으로 파악되는 교육
누구든지 정범모 교수와 같은 사고의 틀로 교육을 보는 사람들은 의료, 농업, 토목, 건축, 전자 등 여러 공학 분야의 눈부신 성과에 감명을 받을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장미 전시회에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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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흔히 보는 장미에 비해서는 도저히 장미라고 보기 어려운 진귀한 품종이 출품된다. 이러한 장미들을 보면서 아마 그들은 다음과 같이 감탄과 비애가 뒤섞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저런 종류의 장미를 만들기 위하여 원예가들은 무슨 짓을 하였을까? 아니, 무슨 짓을 하지 않았을까? 이 나무를 꺾어 저 나무에 붙이고, 갖가지 호르몬제를 만들어서 바르고 주사하고…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론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행한 일체의 조작에서 그 이론의 지원과 안내를 받았을 것이다. 예컨대 깨알 같은 장미가 닥지닥지 붙어 한 송이의 장미를 이루는 그런 종자를 만들고자 할 때, 그들은 어떤 이론에 의하여 어떤 처방을 하면 그런 장미를 만들 수 있는가를 알았을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계획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어떠한가? 온갖 고상한 구호는 넘치고 있지만, 과연 그 구호에 표현되어 있는 인간특성을 길러낼 수 있는가? 원예사들이 이러이러한 장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호가 교육하리라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참으로 교육을 하려면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특성을 실지로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을 하는 사람은 앞의 원예사를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길러내어야 할 인간특성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 어떻게 된 상태가 그것이 길러진 상태인지 명확히 알아야 하며 그 상태를 만드는 데에 동원될 수 있는 이론과 처방이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물론, 교육이 다루는 대상은 식물의 세포나 시멘트 가루와는 달리 이른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교육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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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사나 토목기사와는 달리 그 대상의 저항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인간에 관한 이론은 자연에 관한 이론과 동일한 정도의 엄격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제약이 있다고 해서 교육이 여러 공학의 이상(理想)을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상의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다. 한 마디로 말하여, 교육이 참으로 교육으로서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의 모든 함의를 명백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마 위의 느낌과 제안은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널리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확실히, 교육에는 여러 공학들과 공통된 요소, 즉 공학적 측면이 있는 것이다. 공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 또는 임무는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일으키는 데에 있으며, 이 점에서 공학의 핵심적 개념은 ‘의도적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각주 9: 앞 장의 주 5에서 언급한 Oakeshoot의 견해에 비추어서 말하자면, 공학은 ‘실제적 경험’(practical experience)의 한 경우이며, 실제적 경험은 총체로서의 경험을 ‘의도의 양상’ 또는 ‘변화의 양상’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M. Oakeshott, Experience and Its Mod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33, ch. 5.] 교육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교육을 어떻게 규정하든지 간에,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이룩하기 위한 실제적 활동이다. 교육이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서나 반드시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결과를 이루기 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변화 중에는 의도되지 않은 변화도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른바 ‘무의도적 교육’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의식적으로 교육적 의도를 행사하는 특정한 개인을 지적할 수 없는 경우를 가리킬 뿐이며, 그야말로 어떤 종류의 의도도 확인될 수 없는 경우에, 그 활동을 과연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설사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의도적 교육’이라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의도적 교육’이라는 교육의 표준적 사례에 비추어 해석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육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이른바 “무의도적 교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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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개념에서 제외되어야 한다’(p. 23)는 정범모 교수의 입장은 이 점에서 정당성을 가진다.
교육에는 반드시 공학적 측면이 있다는 사실, 교육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모종의 ‘의도적 변화’를 위한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곧 일체의 교육은 공학적인 안목 또는 시각에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범모 교수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는 그러한 공학적인 시각에서 파악되는 교육, 즉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나타낸다. 사실상, 이 장의 첫 부분에 인용된 『교육과 교육학』의 구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정범모 교수는 다소간 명시적으로 교육을 농학이나 의학과 같은 공학에 비유하고, 양자 사이에 상당히 직접적인 병렬관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의 공학적 개념은 교육학의 역사에서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인류가 ‘교육방법’에 의식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다는 것은 곧 교육에 공학적 측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각주 10: 교육방법의 간략한 역사에 관해서는 Harry S. Broudy, ‘Historics Exemplars of Teaching Method’, N. L. Gage(ed.), Handbook of Research on Teaching, Rand McNally, 1963, pp. 1-43 참조.] ‘교육방법’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비록 그다지 엄밀하게 규정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며, 교육에는 반드시 ‘방법’이 있어야 하는 한, 교육방법의 역사는 교육의 개념을 공학적 시각에서 파악해온 자취를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코메니우스(Johann Amos Comenius: 1592-1670)는 ‘모든 아동에게 모든 지식’을 가르쳐야 하고 또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하여 의미상 한 치의 애매성이나 불확실성도 용납하지 않는 ‘인공언어’를 고안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각주 11: Kingsley Price, Education and Philosophical Thought(2nd Ed.), Allyn and Bacon, 1967, p. 228; J. S. Brubacher, A History of the Problems of Education(2nd Ed.), McGraw-Hill, 1966, p. 201.]
이런 주장과 제안을 할 때, 분명히 코메니우스는 교육의 공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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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코메니우스의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후 많은 사람들의 생각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교육학의 한 가지 뚜렷한 전통을 이루어 왔다. 그 많은 사람들에 있어서도 대체로 마찬가지이지만, 코메니우스에 있어서 공학적 관심은 그의 종교적, 형이상학적 관심과 뒤섞여서 그것에 의하여 뒷받침되어 있었다(예컨대, ‘신(神)의 귀한 아들 딸’). 여기에 비하여, 정범모 교수는 교육의 공학적 개념을 교육학의 논의에서 따로 분리해 내어서 그것을 가장 선명하게 체계적으로 부각시켰다.
앞의 1장의 마지막 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범모 교수의 정의는 교육의 ‘총체’를 규정하는 ‘총체적 정의’이다. 다시 말하면, 교육치고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가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는 공학적 개념은 교육의 판도 전체를 덮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가 아닌 교육은 없다고 해서, 이것이 교육의 유일한 정의라든지 그 이외의 다른 개념으로 교육을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시각적으로 표현하자면, 공학적 개념은 교육이라는 판도 전체를 덮고 있되, 예컨대 씨줄로 덮고 있으며, 이것과는 달리 날줄로, 또는 빗금으로 교육이라는 판도 전체를 덮는 그런 정의나 개념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까지 이 장에서는 정범모 교수의 설명에 나타난 바에 따라 그 씨줄이라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설명이 다소간 완전한 것이 되려고 하면 한 가지 점을 더 말해야 할 것이다.
교육이 ‘의도적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 다른 공학들과 동일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일단 교육을 공학적 개념으로 파악할 경우에는 그 다른 공학들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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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공학의 일반적 특징이 교육을 보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공학의 일반적 특징으로서 특히 중요한 것은, 공학은 ‘목적’이 이미 주어진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의사가 병을 치료하거나 토목기사가 다리를 놓을 경우에, 어떤 상태가 건강한 상태이며 어떤 다리가 좋은 다리인가 하는 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만약 이것이 결정되어 있지 않으면 의사나 토목기사는 아무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학자나 공학자들이 건강한 상태가 어떤 상태이며 좋은 다리가 어떤 다리인가 하는 문제로 논문과 저서를 낸다든지, 의과대학이나 공과대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강의를 개설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 의사나 토목기사들이 ‘목적’이라는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그것은 오직 건강한 상태, 좋은 다리라는, 이미 결정된 목적을 전문적으로 상세화하는 정도일 것이다.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에 나타난 정범모 교수의 견해는 이 점에서도 공학적 개념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좋은 교육과 나쁜 교육’ 문제에 관하여 정범모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변화라는 견지에서 볼 때… 좋은 변화를 일으키는 좋은 교육과 나쁜 변화를 일으키는 나쁜 교육을 생각할 수 있다. 이 때 ‘좋고’ 또는 ‘나쁘고’는 가치관의 문제다. 공산주의 교육은 여기에서는 나쁘고 저기에서는 좋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과학적 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을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사회비판력을 기르는 것을 나쁘다고 한다. 가치관에 따라 좋은 행동, 나쁜 행동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길러내는 교육은 따라서 좋은 교육, 나쁜 교육이 된다. 이 문제는 변화 자체의 과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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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라기보다는 변화시켜야 할 것의 가치관의 문제다(p. 21).
이 마지막, ‘가치관의 문제다’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만, 그 중의 한 가지는 ‘어떤 방향으로 행동을 변화시켜야 하는가는 교육에서 이미 주어져 있으며, 교육은 이 이미 주어져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정범모 교수는 교육학의 한 부분인 ‘교육목적 이론’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여기에 교육목적 이론이라는 것은 교육에 관한 이념적, 철학적, 가치관적인 고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을 배제한 과학적인 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교육이론에 관한 한, 교육의 이념이나 방향의 결정은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과학적인 교육이론 외에 속하는 규범적, 표의적(表意的), 정표적(情表的)인 진술에 의한 사고가 결정해 주는 것이다’(p. 287)라고 말한다. ‘과학적인 이론’으로서의 교육목적 이론은 주어진 이념이나 방향에 따라 변화시켜야 할 인간특성을 상세하게 규정하는 데에 그 임무가 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 기타에 관한 이념적, 당위적, 규범적인 고찰에서 교육의 특정한 방향이 결정되어 주어졌다면, 그것이 인간행동 특성으로서는 무엇을 뜻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다(p. 288).
그러나 한 가지 명백한 사실로서, 의학이나 공학의 경우와는 달리, 허다한 학자들이 교육의 ‘목적’에 관한 논문과 저서를 내고 대학의 교육학과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강의를 개설하고 있다. 교육의 목적에 관한 논란은 거의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계속되어 왔으며 이것으로 미루어 앞으로도 종식될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이때까지 인류는 교육의 목적에 관하여 만족할 만한 정도의 합의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교육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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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고 또 앞으로도 변동이 없으리라는 것을 뜻한다. 만약 공학은 목적이 주어진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앞에서 말한 공학의 일반적 특징을 받아들인다면, 위의 사실에 대해서는 응당 모종의 설명이나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공학적 개념에서는 이 사실에 대하여 어떤 방식의 설명 또는 해명을 할 수 있는가? 그 설명을 하려고 하면 공학적 개념은 필경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만약 교육의 목적에 관한 이때까지의 논란이 의미 있는 것이라면, 목적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해 온 이때까지의 교육은 포인트가 없는 일로 되고 만다. 그러나 만약 교육의 목적에 관한 논란이 계속되어 오는 중에도 실지로 교육을 하는 데 필요한 수준, 즉 ‘실제적인’ 수준에서는 목적에 관한 합의가 있었다고 본다면, 이때까지 해 왔고 또 앞으로도 해 나갈 교육의 목적에 관한 논란은 포인트가 없는 것으로 되고 만다.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공학의 일반적 특징을 약간 더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공학의 경우에, 공학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 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그 목적과 활동이 개념상 별개의 것임을 의미한다. ‘개념상 별개의 것’이라고 할 때의 ‘개념상’이라는 말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목적과 활동이 개념상 별개의 것이라는 말은 목적과 활동 사이에 하등의 관계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만약 그 사이에 하등의 관계도 없다면 애당초 ‘목적’이라든가 ‘활동’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무슨 활동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까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목적을 결정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활동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고 하는 말도 마찬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흔히 ‘수단과 목적의 관계’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수단과 목적이라는 용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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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칭되는 두 개의 사항(이 경우에는 활동과 목적)이 개념상 별개인 경우에만 적용된다. 그러므로 공학은 이런 엄밀한 의미에서의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비추어 파악되는 활동이다. 공학에 있어서의 목적과 활동이 별개의 것이라든지, 활동이 목적에 대하여 ‘중립적’이라든지, ‘수단-목적의 관계’가 의미 있게 적용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표현은, 결국 공학에 있어서는 동일한 목적이 다양한 수단(즉, 공학 또는 ‘공학적 예술’)에 의하여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수단은 어김없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 점에서 강력하고 효율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어떤 수단을 동원하는가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달성되는 목적에 달려 있으며, 그 목적이 어떤 것인가에 수단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이 공학의 일반적 특징이다.
목적과 활동이 개념상 별개의 것이라든지 그것이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든지 하는 말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활동에 적용되는 만큼, 그것을 특별히 드러내어 말하는 데에 대하여 의아심을 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교육도 생활이며(‘교육활동’), 따라서 교육에도 다른 활동에 적용되는 것과 동일한 공학의 일반적 특징이 적용될 수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 측면에서 파악되는 교육의 모습을 고찰하였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보면, 교육이라는 활동은 다른 활동과는 구별되는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교육의 경우에는 교육의 목적과 교육활동이 개념상 별개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면이 있는 것이다. 교육의 경우에는 교육을 하기 전에 목적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편인가 하면, 교육활동 그 자체가 교육의 목적을 정립해 나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 무수한 환자를 치료한 의사와 무사한 다리를 놓은 토목기사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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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적’을 모르고 일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가 의심되는 반면에, 교육의 ‘목적’에 관한 이론(異論)이 분분한 오늘날에도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아마 공학과 교육 사이의 그러한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교육의 공학적 개념이 그릇되다든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교육을 보는 그 밖의 관점들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그 밖의 관점들’은 공학적 개념을 ‘수정’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이라든가 보완이라는 말을 쓰기 위해서는 공학적 개념에 무엇인가 미비점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공학적 개념에는 그런 미비점이 없는 것이다. 공학적 개념은 교육을 공학적 관점으로 규정하는 것이며 공학적 관점은 다른 관점에 의한 보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사고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공학적 개념이 나타내고 있는 ‘근본적 애매성’에 관하여 고찰하게 되겠지만, 이것이 공학적 개념의 ‘미비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학적 개념에 대안적인 개념이 요청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두 관점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학자들 중에는 교육이 ‘바람직한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 앞에 ‘바람직한’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다. 명백하게, 이 정의는 정범모 교수의 정의를 수정 또는 보완하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것이 그 정의의 어떤 면을 수정, 보완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거의 틀림없이, 그것은 공학적 개념이 교육활동을 그 이전에, 그것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목적을 달성하는 일로 규정한다는 점, 또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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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지만, 교육활동과 목적을 개념상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대한 보완일 것이다. 그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것은 명백히 공학적 개념의 ‘미비점’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공학적 개념의 미비점이 아니라 특징이며, 오히려 장점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바람직한’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인간행동의 계획적 변화’라는 정의가 어떤 면에서든지 더 개선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직 그 정의가 나타내고 있는 예리한 문제의식을 무디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개선’일 뿐이다. 이것을 개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교육은 게릴라건 성자건 간에 의도하는 바를 달성하는 데에 유효하고 강력해야 한다’는 말에 나타나 있는 정범모 교수의 이론적 통증을 공유하지 못한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