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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사이펀문학토크
부산의 시인을 만나다
강은교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 가게』
신 진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정훈 - 두 분 선생님,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독자님들도 반갑습니다. 사이펀의 이번 토크는 부산의 시인을 만납니다. 여러분들이 익히 잘 아시는 강은교 시인과 신진 시인을 모시고 두 분이 최근에 펴내신 시집을 대상으로 토크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토크는 두 분에게 공통의 질문부터 드리고 이후에 개인적 질문을 하는 것으로 구분해 토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공통질문입니다. 그럼 먼저 두 분의 근황부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은교 선생님 먼저 부탁드립니다.
강은교 - 네, 반갑습니다. 많이들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먼저 ‘근황’에 대한 답을 말하기 전에, 한마디 하고 싶습니다. 이 귀한 기회를 통해 젊은 평론가와 젊은 여러분의 ‘기氣’로 내 시를 정리함과 동시에, 반성의 기회로 삼겠습니다. 의견도 주세요, 아무튼 보다 진화하겠습니다.
그러면 질문 주신 ‘근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시골집(남지) 마당에 개나리가 화관처럼 울타리를 둘러싸고 피었어요. 수선화는 이미 져버린 것도 있지만 지금 꽃잎을 너울거리는 것도 있구요. 작은 벚꽃 같은 앵도꽃도 소담하게 피었고요. 그런 걸 보면서, 또 빨래를 햇빛과 바람에 탁탁 털어 널면서--- 그냥 살죠. 그냥 쓰면서--- .
신 진 - 네, 반갑습니다. 저는 오래 묵은 혈관질환에 7년 전 구불결장암 수술을 한 후에는 술자리며 농사일을 대폭 줄이고 삽니다. 잠시 열었던 「현대서정」이란 출판사도 문을 닫았고, 가지고 있던 책들은 거의 다 후학들과 헌책방 트럭에 딸려 보냈습니다. 글 쓰는 시간은 오히려 늘어서 동화책, 에세이집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좋은 친구들과 함께 지내자는 생각에 ‘부산문학인길벗모임’의 길잡이를 떠맡아, 매월 지역 시인들과 함께 걷고 얘기 나누며 ⟪시삶⟫ 등 무크지를 발간하기도 했습니다만 지금은 중단 상태에 있습니다.
삼십여 년의 읍면리 시골 거주를 접고 현재는 부산 시역(市域) 내 대단지 아파트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하지만 소농가로서, 대동농협 하나로마트 유기농 로컬푸드 코너엔 제가 공급하는 농작물이 올해도 판매를 개시하였습니다.
작년 8월까지 ⟪월간시인⟫지에 ‘시창작론 특강’이란 원고를 13차례 연재하였는데 이들을 지금 퇴고 중에 있습니다. 올해 말쯤 단행본으로 발간할 경우, 제목은 『실천시론』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또 한 가지, 요즘 몸이 부실해진 탓인지, 바로 요 며칠 전에는 혼자 산길을 걷다가 갈비뼈가 골절되었습니다. 의사는 입원을 권하였으나 보호대를 차고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 반가우시더라도 저를 심하게 껴안지 마시기 바랍니다.(일동 웃음)
정 훈 - 네, 두 분의 근황을 먼저 들어봤습니다. 그럼 이번 시집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된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부분인지요?
강은교 - 글쎄요---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백만인이 읽으면 백만 가지의 메시지가 던져져야 한다고, 그전엔 열심히 생각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저는 ‘그냥 쓴다, 시를---’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메시지는 자칫 잘못하면 의도가 될 수도 있고--- 그런 것은 비평가에게 맡기죠. 또는 강단에 맡기거나--- ㅎㅎㅎ
신 진 - 저의 경우 시를 쓸 때마다 메시지를 의식하고, 그를 기준으로 해서 집필과 퇴고의 과정에 더 심화 확장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롭고 절실하며 근원적인 인식, 사상, 감정, 미감 같은 것을 효과적인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표현을 위해서는 산문적 진술은 물론 온갖 어조적 장치와 비유, 상상, 환상, 해체 등등의 기법까지 동원되겠습니다만.
이번 시집의 중심 메시지라면 개인적 사회적 생명회복의 문제에 관한 모색이 보다 현실화, 구체화 되었고 그것이 현실적 일상에서 실천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있지 않은가 합니다. 물질적 계량적 수치로 계산되기만 하는 오늘의 우리네 삶은 극심한 갈등과 소외, 파편화로 불안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 생태의 실현을 향한 소망은 현대적 삶의 근본적인 결핍과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식적 지향이자, 최근 우리 시단에서도 붐을 타는 듯한 이른바 생태주의 시, 기후 위기의 시가 그 현란한 언어와 수사기법에 의해 자칫 본연의 생태를 더욱 훼손하고 문명에 오히려 부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데 대한 반성의 결과이기도 하고, 5년 전 시집 『석기시대』의 정서를 이어받으면서 그 관념성을 보다 현실화하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할 것입니다.
사회구조의 생명성 회복, 삶의 정상화는 모든 개인의 동시적인 각성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지만 그 세계는 인간 본연의 진실이 깃든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여서, 우리는 지향하고 시도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 속에 있음을 말한 것이 이번 시집의 중심 메시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정 훈 - 네, 두 분 선생님의 시집에 대한 메시지에 대하여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아마 시인이라면 본인의 시집에 명료한 메시지를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강은교 선생님과 신진 선생님은 그런 부분에서 이번 시집의 분명한 메시지를 남겨주셔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질문 하나 더 드립니다. 등단 이후 지금까지 작품활동을 하시면서 시인으로서 견지하려고 했던 자세나 정신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은교 - 네, 특별히 어떤 각오를 한 건 아니고요, 나의 언어와 시의 언어, 그리고 사회의 언어가 합일되기를. 70, 80년대는 아마도 많은 문학이 특히 그랬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시대를 통과해 오면서 이제 나는 진정한 문학은 거대한 수동태(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이지만)가 아닐까, 다시 생각하곤 해요. 하긴 휘트먼 같은 시인도 있지만요.
가끔 나 자신에게 던져보는 질문 중에는 이런 것이 있어요. ‘어떨 때 시는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그건 ‘수동태적’인 문학이 아닐까. 능동태적인 것이 구호라든가 성명서, 또는 진술서라면(그런 뜻에서 바리연가집의 시중엔 ‘당신은 시 같은 성명서를 쓰고/나는 성명서 같은 시를 쓰고, 하는 구절이 있는게 생각나는군요.) 문학 그중에서도 시는 수동태적인 것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메시지는 의도한 그 어떤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런 ’수동‘에서 나올 때 가장 강력해지고 은유가 더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의도된 메시지라든가 그런 것 없이 시의 몸에 새겨진 언어의 무늬가 읽는 이의 가슴에 말없이 던져지는 것, 침묵하면서--- 그러나 그 침묵 밑자리엔 수동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시, 그것이 읽는 모든 이에게 그이의 메시지가 되는 시, 그런 정신으로 시 앞에 맨몸으로 서고 싶습니다. 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쓰여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듭니다.
신 진 - 음--- 장황한 답이 될 수도 있겠는데요. 등단 후에 저는 등단한 잡지사를 4년이 지나서야 처음 들렀던, 뻔뻔이였습니다. 에즈라 파운드와 엘리엇의 황무지에 얽힌 일화를 스스로 들먹이면서 자기들이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자기들이 나를 알아 보아야되지 내가 출판사나 인맥에 굽실거릴 필요는 없다고 하는, 부질없는 망상 같은 것으로 자기변명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사는 습관이 되었고, 오래지 않아 그것이 주제넘고 부질없는 생각임을 알게 되긴 했지만 까짓거, 하고 버텨 왔습니다.
시를 쓸 때의 자세 같은 걸 말하자면, 시를 쓸 때는 하나 마나 한 소리에 장식을 달아 보내지는 말자, 머리로 손끝으로 속이려 들지 말고 심장에서 우러나거들랑 끄적거려 보자. 시를 잘 쓰기보다는 시를 살아가는 한때가 더 실하고 아름다우리라 하는 다짐을 확인하곤 한다고 하겠습니다. 실제의 현실에서는 그러지 못할 때가 있을지라도 시의 시간, 문학의 시간에서만은 명리에 휘둘리지 않고 순수한 진성성 어린 자세를 견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젊은 날부터 품어온 시 정신을 든다면 절대 자유와 절대 평등이 공존하는 시공, 신화적 원래적 삶을 향한 공동주체성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세계는 인간과 자연, 지구와 우주, 현상과 사건과 존재 그리고 나로 얽혀있습니다. 시인의 진정 어린 창의는 자아와 세계, 만물만상과 시인의 내적 결핍이 연동하는 공동체 속에서 주체적 가치를 발휘하는 데서 생성되고 강화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서정시의 ‘자기동일성’이 흔들리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기준으로 세계를 굴절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라면, 공동주체성은 일방의 가치 실현을 넘어 주객 상호 간의 연동, 자아가 세계에, 세계가 자아에 스스로를 드러내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며, 저 나름의 위치와 기능을 하는, 상호연동의 지경입니다. 시란 자기 정체성에서 이탈하는 시간의, 주체와 세계의 공동주체적 지평 실현을 향한 정서요 의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류가 만물의 영장으로 존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요, 인간적 삶의 근본윤리이며 사회 구축의 기반원리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정 훈 - 네, 역시 관록의 두 분 시인이 견지하는 시 쓰는 자세는 남다른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자리의 독자분들에게는 요긴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 쓰고 싶은 시 세계는 어떠한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강은교 - 『가집歌集』과 『여항집閭巷集』 두 권의 시집을 더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많아요.
『가집』은 옛날 어느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고 싶다고 계약서를 쓰자고 해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시집 제목이었어요. 하긴 아마 그전부터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이 그날 튀어나왔을 거예요. 그런데 아직 못 썼죠. 2014년에 시집 『바리연가집』을 내긴 했지만, 바흐처럼 『가歌』만을 한 1,000편쯤 쓴 가집을 내고 싶어요. 하지만 1,000편은 불가능할 것 같죠? 시간이 없군요. 100편이라도 쓴다면--- ㅎㅎㅎ.
이번 시집에 『가집』이라고 하려다가 너무 재미없기도 하고 이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고집하지 않았죠.
그리고 『여항집』은 「비리데기의 여행 노래」(내 첫 번째 시집 『허무집虛無集』에 있음)라든가, 이번 시집 2부의 「당고마기고모의 여행 노래」 같은 것이 그것이에요. 거기엔 사회의 무늬가 묻어있어요. 그러려다 보니 산문시의 형태를 띠게 됐고. 보다 설명하자면 한때 나는 시설詩說이라는 장르를 만들려고 계획한 적이 있었죠. 나중에 보니 김지하가 대설이라는 장르를 만들었더군요. 의도가 다르긴 하지만, 얼른 집어치웠어요. ㅎㅎㅎ. 시와 소설을 한데 합친 그런 어떤 것을--- 경계시라고 할 수 있죠. 나중에 사이펀에 게재한 「범어에서 쓰는 강은교의 문학편지 1부」에 경계시를 시의 이상으로 삼고 쓰기도 했어요.
그래도 지금 어느 정도 그게 실천되고 있는 것 같아요. 「당고마기고모의 여행 노래」가 그런 ‘여항의 노래’가 되길 바라면서 쓰고 있으니까---.
신 진 - 현실의 반생태 시스템을 비판하고 생태 환경을 복원하고자 하는 주제와 소재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요긴한 일이고, ‘생태’ 자체 인간의 궁극적 가치인 진선미眞善美의 융합지경이라, 시 양식의 본성적 영역이기도 하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표층적 생태의 문제는 언론과 정치와 경제 등 관련 전문 영역에서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날 시적 상상력을 더욱 요하는 지점은 물리적 환경문제를 넘어 인간 사회에 누적되어온 생태 파괴의 뿌리, 구조적 독점과 위계적 권력의 횡포에 저항하면서 모든 생명의 공동주체적 가치를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그것을 일상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 하는 데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심층 생태의식의 원천은 대개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불교, 기독교의 영성주의, 근대적 생명사상 등에서 찾고들 있습니다만 이 과제의 실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비전을 저는 이른바 원시주의적 삶의 전통, 공동주체성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원시주의는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서양의 진보사상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나타나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 인위적인 것보다 자발적인 것, 문명이나 이성보다 미개한 원시생활이나 본능적 활동이 더 바람직하다고 한 신념입니다. D. H. 로렌스처럼 본능적이고 과격한 이념과 실천을 앞세울 수도 있지만, 현대문명의 갈등과 불안과 공포로부터 탈출하여 원초적이고 단순 소박한 삶으로 실천하고자 한, 20세기 후반 미국의 히피(hippie)의 핵심가치관이기도 합니다. 제가 소환하는 원시적 삶의 전통에 대한 상상이란 벌거벗은 짐승의 삶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유와 사랑이 연동하는 아름답고 정의로운 삶의 전통을 발굴하고 조명함에 있습니다, 원시의 삶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일상의 삶에서 회복하고자 하는 시적 소망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의 생명이고 생명의 삶으로 가는 길이고 만물과 함께 이루는 연대의 품에서 그 행복한 일원이 되는 길이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이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시도 여러 가지 어조를 이용하거나 해체적 망상, 무의식적 환상 같은 것을 표현 방법으로 동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정 훈 - 네, 오늘 저희는 아주 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또 질문을 던집니다. 한평생 시인으로서 발견하고 자각하게 된 선생님들만의 인생 철학이 있다면 궁금합니다?
강은교 - 인생 철학까지야--- ㅎㅎㅎ. 그냥 쓰자. 쓰고 보자--- 그리고 살자. 그냥(참 좋은 우리말이에요. 애매할 땐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아무튼 많이 쓰자,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이 많은 사람들, 이미지를 매일 건져 올리자. 그것뿐이에요. 시를 쓰느라 밤을 새우고 나면 이것저것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어디론가 다 가버리곤 하죠. 다행히 아직도 시는 나를 몰두하게 해요.
신 진 - 감히 시인으로서 다다른 인생 철학이 있다면 한마디로, 이미 언급한 ‘공동주체’의 실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아실현의 목표는 ‘나’라는 자기가 없는 삶,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너를 만나면 너와 나와 상황이 있고 그를 만나면 그와 나와 상황이 연동하는 공동주체의, 개방적인 삶에 있습니다. 그것은 현실과 이상, 개체와 공동체 간의 연대적 접점에서 자유와 평등의 진정성을 획득하는 가치 영역이고, 시 양식을 넘어 모든 인간문화의 책임 윤리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온갖 꽃이 만발한 야생 꽃동네의 한 떨기 꽃과도 같은, 공동체 속 주체로서의 삶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토양과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거지요. 그런데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인식과 판단과 표현 능력이 고도로 발달한 존재이고, 그 고도의 능력에 의해 탐욕에 절고 어두운 함정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고도의 지혜는 끊임없이 공동주체의 삶, 민주적 삶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그러지 않으면 끝내는 파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공동주체의 일원이 되어, 노력하고 선택해가는 삶, 이것을 나는 시보다 소중한 삶, 시 같이 순수하고 양심적인 삶, ‘시삶’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에 이른 데에는 그것이 대학생 시절부터 소망했던, 기성 권력과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절망과 소외를 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이요, 절대 자유와 절대 질서가 통합된 시공을 찾았던 타협점이요, 신화 또는 자연의 세계와도 같은 이상적인 삶을 현실에서 이루는 길이라 여겨왔던 까닭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의 저변에는 대학생 때 심취했던, 실존주의와 행동주의와 공산주의, 초현실주의와 신화주의 그리고, 불교, 노장老莊의 공空, 무위無爲 등등의 영향도 있을 터이고 그런 데에 심취할 수밖에 없었던 기질과 환경의 결과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무튼 공동주체성의 의지는 비인간적 불공평과 부조리를 해소하고, 전쟁, 핵물질, 인공지능 등등 문명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아니, 문명적 도구들, 이른바 휴머노이드와도 공존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라도 구현하고 실천해야 할 생활의 조건이기도 하리라 믿습니다.
정 훈 - 네, 지금까지 두 분에게 공통의 질의를 해보았습니다. 두 분의 철학을 새겨들을 수 있어 이 자리가 아주 뜻 깊은 토크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럼 개별질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강은교 선생님께 질의드립니다. 이번의 시집 제목이 특이합니다. 특히 제2부 소제목은 ‘당고마기고모의 여행노래’입니다. ‘당고마기고모’에 대해 설명을 부탁합니다.
강은교 - 네, 우선 명칭에 대해 말해야겠죠. ‘당고마기’는 다 알다시피 우리의 전국분포신화 중 ‘당금아기’의, 강릉지역에서 쓰는 이름입니다. 여기에 나는 고모를 붙여 나의 육화肉化된 ‘시 식구’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모’도 아닌 ‘고모’를 붙인 데는 이유가 있어요. 나는 유독 고모 있는 아이가 늘 부러웠어요. 실향민인 우리 가족은 친척이 한 분도 없었거든요. 휴전선 이남엔 우리집뿐이었어요. 그렇다 보니 초등학교 무렵엔 이모, 고모, 삼촌, 숙모 등 촌수 시험문제는 다 틀리곤 했어요--- 지금도 촌수엔 영 익숙하질 못해서 잘못 말하기도 해요---. ㅎㅎㅎㅎㅎ.
아무튼 당고마기고모는 나의 고모일 뿐 아니라, 나의 첫시집 『허무집』에 나오는 ‘비리데기’의 고모이기도 해요. ‘비리데기’ 이후에 나는 「유화」 시도 몇 번 썼고 허난설헌 시도 시도했고--- 몇 년간 「신규방가사」라는 이름을 붙여 우리의 역사에서 버려진 인물들을 시로 데려오곤 했어요. 그러다 내 시에서 여러 번 쓰게 된 비리데기와 한 식구를 이루는 인물로 당고마기고모를 낳게 되었어요. 나는 언젠가 나의 시 인물들-시 식구들이 한데 모여 사는 한 마을을 만들고 싶어요. 모더니즘으로 출발한 나의 시는 70, 80년대를 거치면서 리얼-모더니즘을 꿈꾸게 되었고, 비리데기나 당고마기나 모두(나의 시를 여자에 국한하려는 시도들이 싫어요. 나의 성性이 여자일 뿐이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보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에서, 역사에서 버려진 사람들이죠. 그들을 현대의 거리로 데려와 내 옆을 걷게 하고, 우체국도 가게하고 시위대와도, 노동자와도 만나게 하고 찻집, 미용실에도 가게 하고--- ‘리얼 모더니즘’ 적으로, 내가 만든 인물인 운조가 그들 사이를 연결하구 있구요--- 이번 시집 1부의 제목인 ‘운조의 현을 위한 파르티타’의 <운조>에게는 그런 연속성의 의미를 실으려 했어요. 그리고 ‘당고마기고모의 여행노래’라는 2부의 제목은 우리의 삶이 여행인 것처럼 여행의 무늬를 내 시들에 주려고 한 것이기도 하고, 첫 시집에 쓴, 「비리데기의 여행노래」와 운을 맞춘 것이기도 하죠. 이야기하려니 끝이 없네요. 시에는 비밀이 필요한데---?
혹시 누구인가 시집을 읽는다면 이해를 돕기 위해서 ‘어떤 문학기사’ 하나를 인용해 볼게요. 참 잘 요약했다 싶어서요, 위에 쓴 것이기도 하지만---
‘---강은교의 시 세계를 톺아본 적이 있는 이라면 그의 첫 시집 『허무집』에 실린 「비리데기의 여행노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다. 비리데기는 바리데기의 다른 말이다. 바리데기와 당금애기는 한국 무속에서 떠받드는 신적 존재다. 부모에게 버려진 --- 그래도 잘 풀리지 않는 당고마기고모란 도대체 누구인지 시인에게 문자메시지로 물어봤다. 시인은 이런 대답을 보내왔다. “첫 시집에서부터 늘 현대의 거리를 걸어가는 누군가, 내 옆을 걸어가는 과거의 누군가를 그리워했어요. 그때 나타난 인물이 비리데기였죠. 그외에도 유화, 희명(삼국유사) 등 많은 인물이 내 옆에서 걸어가거나 ‘나’가 되곤 했어요. 최근엔 당고마기가 내 고모가 되어 내 옆에서 걸어요. 나의 시적 식구들인 그녀들과 내가 한데 사는 마을 하나를 만드는 게 꿈이 됐어요. 어떤 비평가는 이를 ‘포에틱 유니버스’ 라고 이름 붙였더군요. [서울신문 오경진 기자]
정 훈 - 오랫동안 지역 시단의 원로요 든든한 어른의 한 분으로서 선생님의 모습을 뵈니 반갑습니다. 이번 시집 또한 그간 선생님이 즐겨 표현하시는 직설어법이 여럿 나와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념에 반기를 드는 시(「나는 나쁜 인간이 좋다」, 「개 같은 시」 등)들도 보이는데, 이러한 반어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세월만 보낸 듯합니다만, 선배로 우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적하시다시피 그 두 편은 오늘의 기계적 기능주의와 맹목적 상업주의에 대한 경고이고, 양심 상실, 신뢰 상실의 세태에 대한 풍자이고 이번 시집이 담고 있는 정신적 골격의 일단이 드러난 시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정상적이고 진정 어린 태도가 오히려 따돌림당하거나 폐습으로 취급받는 현실 고발의 시라고도 하겠고.
졸시 두 편이 공통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바는 ‘본능적 솔직함’이라 할 수 있겠지요. 솔직함을 잃은 세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적 연대를 상실하고 공유할 진실도 아름다움도 포기하게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본연의 인간 사회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자연재해와 맹수들의 공격을 극복할 수 있고, 오늘의 문명을 이룰 수 있었다는 본래적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하겠습니다.
어법적인 측면에서도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진행자께서는 「나는 나쁜 인간이 좋다」 「개 같은 시」 같은 시가 ‘직설적이면서 반어적’이라고, 일견 모순된 맥락으로 질문하시기도 하셨는데 물론 저간의 시론상 그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데 저는 이런 어법을 은유와 함께 근본 비유의 양 축을 이루는 또 하나의 비유로 보고 있습니다. 왜 비유냐? 「나는 나쁜 인간이 좋다」 「개 같은 시」라고 하는 제목 자체가 매재(보조관념)로서 나름의 주지(원관념)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현실에서의 삶이든 시든 진실을 감추고 자신을 감추어야 성공하는 비현실적인 현실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 그 주지, 원관념일 것입니다. 이 같은 비유를 저는 주지와 매재 간에 유사성보다 차이성이 중심이 되는 비유란 의미에서, 차유(差喩)라는 말로 부르고 있습니다. 은유가 유사성 중심의 근본 비유이고요. 차유는 제 시의 중심 표현법이기도 하고, 이미 논문으로도 발표된 바 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나중에 「실천시론」이란 책을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 훈 - 네, 두 분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강은교 선생님은 지난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셨는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축하 인사를 올립니다. 수상을 하고 여러 생각이 드셨을 텐데, 혹시 수상소감 때 미처 다하지 못했던 말씀이나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합니다.
강은교 - 말은 적을수록 좋은 것 같네요. 시나, 시인에게는 비밀이 있어야 하는 건데--- 어디엔가 언젠가 썼던 게 생각나는군요.
시를 읽는다는 건 한 비밀에 또 한 비밀이 기대는 거 아닐는지, 라구요--- 아무튼 그전에는 분명 침묵이 나의 무기인지 모르는 무기였는데--- .지금은 말이 너무 많아졌어요. 시에서도, 현실에서도, 나이 먹는다는 건 말이 많아지는 것인지--- .하긴 거기엔 장단점이 있긴 해요, 특히 시에서 ‘시적 긴장’이라는 측면에서, 너무 설명이 많으면 시적 긴장이 사라지기 쉽죠, 그러나 너무 ‘침묵하면’, 또 그것대로, 메시지의 ’확장성‘은 성공적이 되지만--- 아, 그만하죠. 또 생각하게 되네요. 그냥 시를 써야 하는데--- .ㅎㅎㅎㅎ.
정 훈 -이번에는 신진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등단 후 다양한 동인 활동으로 꾸준히 지역 시단을 일구고 계십니다. 시인으로서, 그리고 지역 시단의 대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합니다.
신 진 - 감히 후배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읽기부터 하자, 내 시를 쓰기 전에 자연을 읽고 인간을 읽고 나를 읽으며 남을 읽고 남의 시를 읽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상에 널린 것이 시입니다. 모든 상품, 모든 자연, 모든 인물들에 시가 철철 넘치고 있고, 절실함과 진정창의와 발견의 언어가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을 읽기부터 해야 온갖 존재와 현상의 숨은 냄새, 낌새를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읽기도 전에 써대기만 하면 시가 아니라 편협한 망상 강요, 펄프 과소비 행위를 범하기 쉽지 않을까 합니다. 그와 함께 간절한 바 있거든 쓰시라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세계 최초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호메로스는 소경이었고 단테의 『신곡』은 그가 왕국에서 추방되어 유랑생활을 할 때 쓰여졌다고 합니다. 참된 언어는 타성에 절지 않은 성찰과 고독에 의해 생장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얘기들입니다.
그래서 시의 시간에서만이라도 숱한 선입견들과 현실적 명리에서 해방되어서 내면의 삿됨 없는 진실로 출렁이시라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 시 한 편 쓰지 않더라도 개방적이면서 긴장된, 공동주체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그는 시를 쓰지 않고 시를 읽지 않아도, 시적 발견과 미학을 체험하고 실천하는 인간, 시의 여유와 안심과 엑스터시를 품고 사는 행복한 시인이 아닐까 합니다.
시의 비판의 정신, 부정의 정신이란 말이나 시의 자율성, 미적 자율성이란 말이 시시때때 유행을 합니다만 이들도 무작정 현실적 삶에 눈을 감는 개인적 일탈과 맹목을 용인하는 말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타자성과 폐쇄적 독선을 함께 부정하고 자율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보다 확장적인 정체성 지향에 있는 것이지, 표피적이고 기회주의적인 변명을 미화하기 위한 수작은 아니라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
정 훈 - 네, 후배들의 정신을 톡 깨우쳐주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강은교 선생님의 시는 참 다가가기가 쉬운 듯하면서도 뜻을 헤아리기가 묘연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시도 여백의 미를 창출하는 장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듯합니다. 사실 시는 의미를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일종으로 볼 수 없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선생님의 시를 감상할 때 독자들이 이 점만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강은교 - 내가 ‘이 점에 유념하라든가--- 그런 말’을 한다면 일종의 협박이 되겠죠?
그냥 읽으세요. 저는 그냥 쓸게요.(모두 웃음)
정 훈 - 네, 그냥 일겠습니다. 신진 선생님은 현실과 인간을 비틀면서 풍자하는 시편을 주로 써왔습니다. 이번 시집이 기존의 시집과 색다르고 특별한 의미가 있다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먼저 사회자님의 질문에 부분적으로 꼬투리를 잡고 싶습니다.(웃음) 저는 현실과 인간을 비틀면서 풍자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비틀어진 현실을 비틀어진 그대로 포착하고 적시하고자 했는데 그것이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비튼다고 느껴질 뿐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현상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풍자나 비판이 될 만큼 세상은 생태적 측면서 왜곡되고 부조리하다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번 시집의 내용 면에서의 의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본래적 연대성을 해치는 위계적 권위와 모순을 성찰하는, 이른바 사회생태 문제에 대한 대응이 구체화된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개인적 사회적 혁명을 아예 거부하거나 포기하고, 지향적 삶의 불가의 안일과 편의주의 가치관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면서, 그러나 한시도 혁명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인간적 운명 사이의 고뇌가 이번 시집, 특히 장시 「혁명본색」의 의미적 의의라면 의의이겠습니다.
형태적 측면에서 덧붙일 말씀은 사회자께서 말씀하신 ‘비틀면서 풍자하는’ 언어현상 역시 아까 말씀드린 ‘차유’가 이번 시집에서 보다 일상적이고 적극적으로 구사되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라는 점입니다. 정 선생님의 ‘비틀면서 풍자하는’이란 말은 긴장도가 큰 비유, 기상(conceit), 아이러니 등 차유의 개념과 성격을 공유하신 것이고, 차유는 차이성, 모순성, 부정성 등 비틀린 듯한 인식과 어법의 시적 언술의 주요 특징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정 훈- 네, 선생님. 비틀어진 현실을 풍자하신다는 말씀, 잘 기억하겠습니다. 강은교 선생님의 이번 시집에 실린 시편 중에서 선생님이 오랫동안 퇴고를 하셨다거나 특별히 애착이 가는 시가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강은교 - 시집에 실린 시는 다 나의 '자식'들입니다. 그중엔 나이가 아주 많은--- 즉 오래된 자식도 있고--- 몇 년 된 이미지가 한 구절로 흘러나오면서 불현듯 써진 자식, 어느 때는 10년 전의 자식을 만나 그때 이미지가 튀어나오기도 하죠. 그런가 하면 순식간에 써진 시들도 있고, 길을 걸으면서 나온 시적 자식들도 있고--- 아마 터미널을 나와 논두렁 길을 걸으면서 거의 몇 년여 동안 주무르고만 있던 「환상가게」라는 시가 순식간에 쓰여진 시의 대표 격일 거에요--- 여기 모인 시 쓰는 분들 대개 그렇겠지요.
정 훈 네, 말씀 고맙습니다. 신진 선생님께서는 시를 쓰시면서 오랫동안 남아 있는 아쉬움 같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신 진 저는 시만이 최고의 가치 구현 대상이라 여기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콩밭 메는 아낙네의 들판, 어판장의 경매장터, 결근을 각오하고 마셔대는 방황의 술자리 같은 경력도 시에 못지않게 소중한 삶의 영역이니까요. 따라서 부족한 대로 자작시들에 대한 큰 아쉬움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도 아쉬움 같은 게 남는다면 먼저 90년대 한때 시와 시단에 대한 회의에 사로잡혀서 퇴고 없는 시, 우러나오는 대로 토해내는 시를 시도했던 일을 들겠습니다. 기존의 시의 가치에 대한 기준 자체에 대한 회의였고, 결과적으로 한동안 작품성을 돌보지 않는 시 쓰기를 했던 것입니다. 그때의 낭만주의적 감상에 대한 반성을 할 때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움은 서울사람, 서울시단, 유명출판사를 좀 더 챙기고 살았으면 그랬으면 시도 더 열심히 쓰고 팔자가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주제 넘는 생각일 터이고 까짓거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비재菲才로서, 사람 만나면 마시고 떠들며 살다 보니 문학적 성과야 극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명리에 연연하여 잔머리를 굴리거나 편당을 짜거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돌아다니지는 않았다는 자기 명분감 같은 것을 자위 거리로 삼을 때가 없지는 않습니다. 내 시와 삶에 불만과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부족함이 역으로, 내가 돌아오지 못할 만큼 크게 이탈하지 않고 살게 하는 버팀목이기도 했으리라 하고 자위하는 때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 훈 - 강은교 선생님은 이곳 부산 생활도 이제는 오래되시고, 근래에는 교외에 집을 장만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등단하신 지도 반세기를 훌쩍 넘었습니다. 시인은 시로써 말하는 게 정답입니다만, 이쯤에서 선생님의 문학과 삶, 그리고 남은 계획을 간단히 들어보는 기회를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강은교 - 부유스러운 이미지가 묻어나는 ‘교외’가 아니라, 시골에 “가난한 마당” 하나가 있어요. 논두렁길이 아직 있는 곳, 하긴 요즈음엔 차도 많아지고 가로등도 많아지고--- 했지만--- 이번 시집의, 많은 시의 배경이 되고 있어요. 시 「당고마기 고모의 여행노래」 중 「환상가게」에 나오는 찻집도 터미널을 나와 걸어가다가 잠시 쉰 찻집이구요, 시에 나오는 할머니도 집으로 오는 논두렁길을 걷다 만난 할머니구요--- 시를 제대로 썼나 보려고 일주일쯤 후에 잠시 들러 보려니--- 임대 플래카드가 휘날리고 있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더군요. 그래서 순간 이상한 인연이다 싶었죠.. 그 시를 쓸 수 없을 뻔했으니까요. 그 찻집 때문에 1년 이상 주무르고만 있던 그 시가 일사천리로 쓰여졌거든요. 그런 행운이 또 오기를 바라는데--- 요즘은 잘 안 오는군요--- ㅎㅎㅎ 수상소감에 ‘현역이겠다’고 했는데--- 괜히 그 말을 했나 보다,라고 하며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때 어떤 젊은 시인이 어떻게 소식을 듣고, 메시지를 했더군요. ‘『가집』과 『여항집』을 쓰셔야지요’, 라구요. 하지만 아무래도 말을 잘못했어요. 그것도 두 권이나 써야 한다니, 역시 말이 많으면 안 돼요--- ㅎㅎㅎㅎ
또 이번 사이펀 여름호 ‘범어에서 보내는 강은교 시인의 편지’ 에 쓴 니체의 말도 잊지 않으며 살려고 하죠. 하긴 그 말을 신조처럼 ‘받들어 모신 것’도, 오래되었군요. 특히 그중 두 가지. 하긴 니체가 먼저인지 내가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ㅎㅎㅎㅎㅎ
저녁은 우유와 차로만 때우기.(나의 말 덧붙임-될 수 있는 대로 먹는 것은 간단히 하기)
매일 네 시간씩 외출하기(나로서는 ‘이미지 낚시’)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천천히 걷기’
요즘엔 어떤 <칸타타>에서 노래할 시를 청탁받아 쓰고 있는데--- 오래전부터 꿈꿔온 시뮤지칼 같기도 하고, 베토벤이나 말러, 시인 쉴러 같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앞에 말한 시설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런지 재미있고 힘이 나요.
아무튼 ‘사이펀’에 쓰고 있는 저의 연재물을 읽어 주셨으면--- 아무도 안 읽으시는 것 같아요--- 반성할 수 있도록 피드백 같은 것을 누군가 주셨으면--- ㅎㅎㅎ.
정 훈 - 네, 피드백이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긍정적입니다. 신진 선생님께 마지막 질문을 드립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과 아울러 앞으로 시작詩作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계시는 구상이나 계획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신 진 - 편의주의와 이기주의와 기능주의의 시대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속 뻔히 보이는 유아론적唯我論的 회고담이나 여행담을 억지권위로 포장해내거나, 유희, 환상, 혼성모방, 불확정성, 가상세계 등등 추상적 소비문화를 문화적 소명으로 왜곡하고, 이에 평론가와 출판업자가 합세하여 요령부득의 논리를 과시하면서 문학권력을 조성, 문단은 인맥과 돈과 처세가 문학에 앞서는 주객전도의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사회는 이들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전략상 내치지도 못하고 있고, 권력과 비리가 낳는 불평등과 인간 소외는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시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당부드리건대, 가능하면 시를 쓰지 마시라, 가급적 쓰지 마시라 하고 싶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요구하고 주문하곤 하는 말입니다. 시 쓰기는 돈을 버는 일도 아니고 명예 획득을 위한 전장도 아닙니다. 명리를 위해 시를 쓴다면 그는 시인이 아니라 다단계 장사꾼, 일하기 싫은 건달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돈을 벌자면 땀 흘려 일을 하고 명예를 얻자면 사람을 위해 헌신 봉사하여야 합니다. 그런 이들이라면 시를 쓰지 않아도 훨씬 더 인간적인 삶, 시를 살아가는 분들일 것입니다.
저 자신, 시를 쓰지 않으면 못 살 것 같아서 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저는 정들었던 개, 거위, 칠면조 같은 짐승들과 참빗나무, 사과나무, 월계수 같은 식물을 먼저 보낸 슬픔도 안고 살고 있는데, 그들과 서로 쓰다듬으며 지낸 추억들만 해도 시를 쓰고 읽을 때의 즐거움에 더한 것이었다고, 인간성적인 가르침과 울림을 주는, 순수한 시적 체험이었다고, 스스로 체감하며 살고 있다는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시를 쓰시겠다면 시 쓰는 시간이나마 숱한 선입견들과 현실적 명리에서 해방되시기 바랍니다. 시인은 자유롭게 순수하게 모든 존재의 본질을 마주할 때 시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가치관, 시적 이데올로기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시적 이데올로기란 지속적인 치우침, 정형화한 경향성傾向性과는 구별됩니다. 발견적이고 임시적이기에 ‘지금 여기’에서 더욱 진실한, 비상업적 순수 의식이라 하겠습니다.
본성적 인간으로서의 진선미가 통합된 삶의 훈기가 주는 감동이 그립습니다. 공동주체로서의 서정시, 아주 개인적이고 창의적인 까닭에 그 진정성으로 보편적 감성과 이성을 크게 울리는 삶의 서정시, 사실적 상상의 시를 읽고 싶습니다. 미약하나마 저도 물심으로 후배들을 응원하고 격려할 마음은 안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건강과 문운을 기원합니다.
정 훈 - 네, 두 분 선생님. 장시간 수고해주셔 감사드립니다. 오늘 강은교, 신진 두 분 선생님을 모시고 계간 사이펀 초청, ‘부산의 시인을 만나다’ 문학토크를 펼쳤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들께 소중한 기억이 되는 자리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강은교, 신진 두 분 선생님께 감사의 박수로 오늘 행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