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렸듯이 이 논의는 상당한 혼란 상황에 빠진 듯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질문 하나 드리죠.
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사회·경제적 기본권의 예를 들어 이를 보장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정의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 데요, 그렇다면, 로버트 달이 이야기하는 '조건의 평등', 그리고 '경제민주주의'의 주장은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실질적으로 보는 것일까요? --- 아마도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절차적이다'라고 들었을 것입니다(실질적으로 정의한다는 평가는 저도 한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사민주의자인 보비오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한다고 하는지요? --- 이 사람 또한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정의한다고 합니다. 그는 평등에 대한 주장은 좌파의 양보할 수 없는 이슈라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3순환 강의 중에 지나가는 말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공고화'에 대한 주장은 민주주의의 의미를 혼동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평가가 있다. 그것은 이행이 완료된 민주주의와 공고화된 민주주의가 과연 다른 민주주의인지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같은 사람이나, 수험생들이 처음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를 구분할 때, 그 전에 들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절차적 정의와 실질적 정의의 개념이 마구 섞이도록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정의할 것인지, 실질적으로 정의할 것인지'가 왜 중요한지 혹은 왜 이런 문제가 논쟁거리였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 혼란스러운 부분이기 때문에 설명이 길어질 수밖에 없겠네요. 이 점 양해해 주세요.
1) 민주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떤 체제가 민주주의인지를 가려낼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회과학은 개념의 조작적 정의에서 출발하잖아요. 쉽게 말해 립셋의 근대화론에서도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논할 때 어떤 게 민주주의인지 정의를 해야 연구가 가능하니까요. 그런데, 러시아 혁명 이후의 체제에 대한 아도르노와 켈젠의 논쟁은 민주주의를 그 형식(절차)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 내용(실질)으로 이야기해야 하는지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이 논쟁은 1차 헌법에서 한번 쯤은 들어 보셨지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치체제를 민주주의라고 하려면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준(최소강령)에 맞춘다거나, 민주주의의 실질을 지향하게 되면 비민주주의 체제로의 퇴행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전략적 관점에서 보려는 것, 그리고 어차피 지구상에 존재하는 국가 중에서 민주주의의 실질을 이룩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 관점에서 보려는 게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정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수험가에서 많이 인용되는 마샬의 정치적 시민권의 보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도 하구요.
반면에,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정의하는 경우에 과연 그것이 민주주의를 보장할 수 있는지, 나아가 민주주의의 어원을 따지고 들어갈 때 자기 지배(고대 폴리스 민주주의에서 의미하는 자유와 지배, 그리고 평등의 관념입니다)를 충족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이란 형식적인 의미의 절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게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정의하려는 이유입니다.
2) 그런데, 최근의 일부 학자들은 민주주의의 정의와 관련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의 관점이 아니라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민주적 절차가 헌법에 의해 만들어지고 또한 그 헌법에서 정한 절차에 의해 정부가 구성되었지만, 그리고 우려했던 퇴행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민주적 절차에 의해 공공문제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체제 시기에 나타났던 수혜자주의나 사인적 연줄망에 의존한 결정이 이루어진다거나, 오도넬이 말한 위임민주주의가 나타난다거나 배제적 민주주의가 나타나는 등의 문제를 보이자, 이러한 신생민주주의 국가의 민주화 전략이라는 견지에서 민주주의 과제를 최대강령적으로 정의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 공고화 과제는 수혜자주의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민주적 절차를 제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면, 종래의 연구자들은 왜 민주주의를 절차적으로 정의하고 말았을까요? 쉐보르스키를 포함한 민주화 이행론자들은 이행과정에서 만들어진 민주적 경쟁이 제도화되면서 공고화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로운 주장은 민주적 경쟁을 제도화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인 과제가 제시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시되는 과제의 대부분은 토크빌이 말한 '시민사회의 습속(이는 시민사회의 제도화와 관련되며, 따라서 사회의 민주화라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제도화', '선거라는 수직적 책임성 확보 기제 외에 수평적 책임성 확보 기제' 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실질적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권력'의 문제라고 답할 것 같네요. 즉,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최종 통제권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바로 공공선의 결정 혹은 집합적 의사결정은 주권자인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다수지배'라는 민주주의의 개념을 살리는 것이 아닐까요.
혹, 시간이 되시면, (지난 동차반 시험 때는 나눠드렸지만, 이번 시험 때는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글을 안드렸는데요) 강정인 교수님의 "대안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와 한국사회(창비사)를 읽어보세요(찾아 오시면 드릴께요).
그런데, 여기에서의 의문은 민주적 경쟁의 제도화는 사실 절차적으로 정의된 민주주의와 어떻게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세시민 7장의 내용을 보면서 시민사회의 민주화의 주장 내용에서 기존에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정의하는 논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의 그런 사회의 민주화 내용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시민적 덕성, 국가 조합주의적 공모구조의 혁파, 시민사회의 공공성 확보는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세시민 7장에서 경제사회의 제도화 파트에서는 전반부에서 경제체제와 민주주의의 상관관계의 논의를 소개하고 있고, 중반부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쟁적 시장경제로의 동시전환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고, 후반부에서 제도적 선택(정치적 민주주의)이 경제개혁에 선행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민주정부의 비교우위는 경제적 실적에 있다기보다는 경제위기, 경기변동, 경제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다... 순수한 시장경제도 공고화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고통을 나눌 '경제사회'의 제도화는 역시 국가를 필요로 한다. 민주화 이후 스페인인들은 광범위하게 확산된 높은 실업에 시달렸지만, 신생 민주주의가 그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에서 더 나아간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었습니다(행간을 읽는다면...?). 여기에서도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정의하는 입장에서 주장하는 혹은 절차적으로 주장하면서도 경제영역에 민주주의 원리를 도입하자는 주장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즉, 기존의 절차적 정의와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신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시장과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의 조건을 찾으시려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 10장에서는 피터 드러커를 인용하시면서(?) 결사체주의와 관련하여 사회적 기업을 말씀하시지만, 민주주의 이행과 공고화에 대한 부분에서 주장하시는 바를 일차적으로 찾는 게 원칙일 듯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바로는 ① 전통적인 분류는 (선진 민주주의 체제인지 신생민주주의 체제인지를 구별하지 않고)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아닌지, 그리고 전략적으로 최대강령을 추구하는 경우 오히려 민주주주의 체제에서 비민주주의 체제로의 후퇴가 나타났다는 역사적 경험에 기반해 있는 반면, ② 새로운 주장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소위 결손민주주의의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강의에서 어느 관점에서 분석할지는 수험생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고 했습니다.
3) 제가 요즘 자주 소개하는 텍스트인데요, Ruschemeyer, E.H.Stephens & J.D.Stephens(박명림·조찬수·권혁용 공역),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 민주주의의 비교역사연구』(나남, 1997)에 나온 문제의식을 마지막으로 살펴봅니다. 여기에서 소개한 글(밑줄은 인용자가 그은 것입니다)은 민주주의를 왜 그렇게 정의하려는 지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의 단면을 엿볼 수 있을 겁니다(물론, 국내 진보적 교수님들 사이에서는 이런 관점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⑴
민주주의란 정치적 평등의 증대로서 그 전제는 무엇보다 권력의 문제이다.
다수의 지배를 구성한다는 민주주의의 주장은 사실인가, 아니면 이러한 주장은 소수의 실질적 지배를 더욱 효과적이게 하고 형식적인 민주주의 제도라는 장막의 배면을 안정화시키기 위한 속임수인가? ...
실제로 존재하는 민주주의 체제 중에서 사실주의적 의미에서 다수의 지배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체제는 없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혹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정치적 결정과정과 그 과정의 결과에 대해 차이를 만들어 낸다(p.35).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의 선호에 철저하고 평등하게 반응하는 정부(Dahl) 또는 인류가 집합적 자치에 평등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통해 자기실현을 이루는 정체(Macpherson)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 개념은 오늘날의 복합적 사회에서 현실적인 가능성으로서 대의제 의회를 통한 통치행위에의 대중적 참여라는 좀더 온건한 형태를 지향한다. 우리의 민주주의 개념은 의회에 대한 국가의 책임성(행정부 수반의 직접선거로 보완될 수 있는),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표현과 결사의 자유, 그리고 투표권의 범위정도에 초점을 맞춘다(pp.35-36).
형식적 민주주의가 실제 다수의 지배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결함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왜 형식적 민주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발전의 모순의 결과였다는 점과, 자본가 계급의 이익이 직접적으로 위협받지 않았던 경우에만 민주주의가 공고화될 수 있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① 형식적 민주주의는 단지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경향이 있다. 즉, 집합적 결정에서 다수에게 실질적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권력의 배분과 다른 형태의 실질적 평등의 진보를 추구하는 데 가장 확실한 기반이 된다.
② 형식적 민주주의 수립과 공고화를 뒷받침했던 다른 요인들, 즉 시민사회의 강력함, 특히 하층계급의 힘의 성장 또한 정치참여에서의 더욱 많은 평등을 향한, 그리고 더욱 많은 사회적·경제적 평등을 향한 진보를 뒷받침한다(서구의 소위 사회권익국가를 생각해 볼 것 --- 인용자 주)(p.36).
⑵
정치적 불평등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는 부, 지위, 사회경제적 권력의 더욱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늘날 현존하는 민주주의는 실제로 집합적 의사결정에 대한 참여의 범위에서 매우 큰 편차를 보여준다. ... 몇몇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경제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정치과정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에 배치되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대중들은 정책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는 내용들을 놓고 치러지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기권의 형태로 반응한다.
다른 한편으로 또 다른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들에서는 선거뿐만 아니라 그 목표가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그리고 실제로 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입증된 다양한 조직들에 활발히 참여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 한 극단에서는 형식적 민주주의의 과정이 권력과 경제적 자원의 분배를 거의 변화시키지 않는 사례들이 있다(이에 해당하는 국가들의 대표적 예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 --- 특히, 아르헨티나 --- 들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 인용자 주). 스펙트럼의 또 다른 극단에는 다수의 실제적인 정치권력이 희소한 사회경제적 자원의 분배에 오랫동안 실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왔고 그럼으로써 정치적 평등의 기반을 개선하였다(서구의 사회권익국가를 생각해 볼 것 --- 인용자 주).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은 민주주의의 질적 진전과 실질적인 사회적 정의의 질적 진보 양자를 나타낸다.
⑵ - 1.
... 형식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진전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또한 민주주의를 더욱 실질적인 것으로 만든다.
계급세력 균형이 피지배계급의 이익에 더 유리할수록 그리고 조밀한 시민사회가 이러한 이익들이 조직적으로 표출될 수 있게 만들수록, 그리고 동시에 시민사회가 무제한적이며 자율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력을 구성할수록, 민주적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을 안정화시키는 기회뿐만 아니라 민주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비중이 커질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
따라서, 정치과정에서 증대된 피지배계급의 비중은 자원을 특권집단에서 비특권집단에게로 재분배하는 국가정책들에서 표출되어야 한다(pp.493-494).
계급불평등의 감소가 민주적 제도에서 자동적으로 파생되지는 않는다. ... 민주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의 관계는 현존하는 권력관계와 지속적인 투쟁에 의존하며, 그 과정은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먼저, 권력배열에서 지배계급의 이익이 강력한 정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보호되지 않는 경우 민주주의 제도들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 노동계급의 규모가 크고, 잘 조직화되어 있으며 통일되어 있는 경우에 구조화된 불평등이 실질적으로 감소되고 민주주의 제도들이 현실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 1930년대 스페인, 1970년대 칠레의 사례는 노동계급 정당이 주어진 시민사회의 세력균형에서 실현되기 불가능한 요구들을 추진했던 경우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장기적 전망은 불평등에 의해 더욱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 불평등은 부나 경제적 지위로부터 아니라 특정한 지식에서 비롯된다(Dahl, 1989, p.333)."
... 많은 연구자들의 관점에서 동유럽의 경험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정체로부터의 경제의 제도적 분리를 보장해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임을 보여준다.
이 주장은 우선 동유럽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동유럽의 체제들은 생산의 국가소유, 통제경제 그리고 권위주의적 정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원래 민주주의였던 것이 내적으로 산업을 국유화하자는 민주적 결정을 통해 권위주의화된 체제가 아니었다. 여기서 더욱 적절한 예로 노르웨이와 오스트리아를 들 수 있겠다. 두 나라에서는 우선 그러한 내적·민주적 동학이 몇몇 산업의 총체적인 국유화와 다른 산업의 주식지분의 대규모 구매를 유도하였다. 산업의 국유화와 국가가 주식을 소유하는 산업을 고려하면 공공소유 산업의 비율은 노르웨이에서는 50%에 도달하였고 오스트리아에서는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이 나라들은 형식적 민주주의 체제였고, 특히 노르웨이는 다른 선진 산업민주주의 체제와 비교해 볼 때 고도의 정치참여와 경제적 평등을 달성하였다(p.498).
우리는 논의의 출발점에서 정체가 사회 내의 불평등 구조로부터 구조적으로 분화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은 특히 정체와 경제의 제도적 분리를 수반한다. 양자의 미분리는 압도적인 권력집중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그러한 권력의 분리를 성취하고 유지하는 데 필연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장 사회주의의 다양한 형태 -- 협동조합 소유, 노동자 소유, 시유(市有)를 비롯한 여러 형태의 분산화된 공공소유, 스웨덴 노조연합에 의해 제시된 노선을 따르는 상호기금 사회주의 혹은 이러한 형태의 혼합형 -- 가 정체와 경제의 제도적 분리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정의를 심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주장한다(pp.498-499).
이러한 설명을 아래 그림을 통해 확인해 봅니다.
아래 스펙트럼 상에 세 국가가 있습니다. A는 아리헨티나라고 가정해 봅니다. 아르헨티나는 민주적 체제에서 비민주적 체제로 stop/go를 여러번 반복했습니다. 193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여전히 제자리입니다. 나아가 민주적 경쟁이 완전히 제도화되지 않았습니다. 국가C는 에컨대 노르웨이입니다. 노르웨이는 1930년대 상황에서 아르헨티나보다 후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C1 상황에까지 나아갔습니다. 양자의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절차의 제도화 정도가 아니라 계급지형, 그리고 국내외적 제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게 뤼쉬마이어와 스테픈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은 이들 스스로가 민주주의를 형식적으로 정의한다면서도 그 지향은 실질적인 민주주의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2. 그러면 이제 질문에 답할 준비는 된 듯 합니다.
【질문 내용】"제가, 일단 임혁백 선생님의 결사체 민주주의적 견해에 따른다고 입장을 정리하게 됐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게 된 것은, 바로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 논의였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그림(?)에 의하면, 절차적 민주주의의자들(이 경우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이 될텐데...)의 경제사회 제도화에 있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제도적 형태(적어도 이러한 차원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사회권익국가와 차별성이 거의 없는 것 같은데...)로 간주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과연 사회적 시장경제 내지 사회권익국가 등이 절차적 민주주의 수준에서 머무르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논문을 읽었을 때, 실질적 민주주의란 시장에 대항하는 정치로 설정하면서, 현시기 세계화시대 유럽은 실질적 민주주의에서 절차적 민주주의로 후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본 적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논문에 따르면, 사회권익국가 시절 유럽이 실질적 민주주의였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또한 이시기 유럽은, 티 에이치 마샬의 사회경제적 시민권을 어느정도 획득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듯 싶은데요).
따라서, 임혁백 선생님은, 이러한 측면에서, 어느정도(?)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답 변】저는 위 설명을 정치적 자유주의적 관점이라고 설명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정치경제학적 혹은 국가의 경제적 기능과 관련해서 세시민 3장에 나온 공공재 국가(p.125), 시민친화적 시장으로서 사회적 권리국가(p.126)을 예로 들었습니다(비록, 스페인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하지만, 제가 볼 때, 세시민 p.129에 대한 설명을 보면 보장되는 시민의 사회·경제적 기본권은 실상 미약한 수준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 문단에 대한 대답은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분류에 따른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뤼시마이어와 스테픈스 부부의 인용문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대답은 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3순환 2일째 강의에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면서 소개해드린 바 있듯이, 로버트 달에 의하면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차적 정의에 따르더라도 이 시기의 유럽국가는 기껏해야 폴리아키라 부를 수 있지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라고 한다면, 실질적 의미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겠네요.
역시 쉽지 않네요.
따라서, 이래저래 왔다 갔다 하지 마시고, 하나를 찍어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괜히 제가 헷갈리게 했다고는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끔 나오는 문제들은 세시민의 문제틀로 해결이 안되는 게 많으니까요.
3.
【질문 내용】"또한 예전에 선생님께서는, 임혁백 선생님께서 토크빌적인 의미에서의 시민문화, 즉 참여를 강조한다는 차원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자라고 자처하신다고 하셨는데(사실, 임 선생님 저작을 세시민만 본 저로서는, 이런 표현을 찾을 수 없었는데요...), 앞서 제가 진술한 바대로 이해해도 어느정도(?) 실질적 민주주의자가 되는 게 아닌지요?(물론, 임선생님의 린쯔와 스테판에 따른 민주주의 공고화 개념 정의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답변】제 머리 속에서 실질적으로 정의하신다는 의미가 무엇일까를 열심히 찾아보았습니다. 많이 읽는 텍스트이기 때문에 설명은 해야 하잖아요. 그때 세시민 7장과 8장의 내용을 읽고 또 읽어 보아도 제가 들었던 의미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세시민의 p.201을 펴보시면 우리가 공고화해야할 민주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고 하시면서 2절에서 민주주의 기본원리를 설명하고 계시거든요.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원리는 사실 절차적이잖아요. 나아가 뒤에 있는 4절의 공고화의 조건도 결국 2절의 내용의 연장선에 있구요). 하지만, 교수님이 실질적으로 정의해야 한다고 하시니까, 근거는 찾아야 하잖아요. 게다가 p.221에서 린쯔와 스테판의 주장을 인용하시는데, 그 내용과 사실 뒤에 적고 계시는 제도화, 습관화와 뭐가 다른지 저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더라구요.
그러면서 찾았던 내용은 공고화기의 연구는 정치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을 전제로 '이제는 민주화보다는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p.200)', '민주주의의 절차와 규범을 제도화, 내면화, 일상화, 습관화하느냐(p.199) ; 단순한 선거경쟁의 제도화를 넘어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영역에서 엘리트와 대중이 공히 민주적 절차와 규범을 안정화, 제도화, 일상화, 내면화, 습관화, 그리고 정당화하는 과정(p.222)', '절차적 최소에 덧붙여, ... 토크빌적인 사회 민주화(p.222)' 등입니다.
제가 토크빌적 시민문화를 이야기한 것은 세시민에서 '토크빌적인 사회 민주화'라고 표현하시지만, 그 앞에 있는 내면화 습관화는 사실 토크빌은 '시민사회의 습속'을 민주주의를 위해 요구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데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답니다. 그리고 세시민 4장의 신뢰와 민주주의도 그 연장선에 있구요.
4.
【질문 내용】"제가, 이런 고민을 하게 된 핵심배경은, 실질적 민주주의가 참여의 폭발로 쓰일 때, 또는 사회경제적 평등의 의미로 쓰일 때 등,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고 있음을 느끼게 때문입니다. 만약 참여가 아닌, 사회경제적 의미 차원에서의 평등이라면, 임 선생님도 실질적 민주주의의 범주로 포섭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해서요."
【답변】강의 중에 저는 임교수님 스스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정의한다고 하셨던 부분에 대해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비판이 가능하지만, 그 자체로 공고화론을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의 입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실질적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만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를 비판적으로 보느냐, 수용하는 입장에서 보느냐의 차이는 남지만...
다음으로, 민주주의를 어떻게 정의하든지 간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장과 공화주의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참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60년대까지의 다원주의나 자유주의 (특히, 헌팅턴) 와는 다른 경향입니다. 그런데, 참여를 강조하는 순간 민주주의를 소극적으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당과 선거, 이익집단에 대한 참여(제도화된)로 국한되지만 않는다면...
평등과 관련해서 '법 앞의 평등, 조건의 평등, 결과의 평등' 혹은 equity, equality, sameness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자유민주주의는 법 앞의 평등을 강조했습니다. 고대 폴리스 민주주의 이래, 참여민주주의자들은 조건의 평등을 강조합니다. 결과의 평등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사회주의는 절차적으로는 민주주의라고 하는 데는 비판이 많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로버트 달도 '조건의 평등'을 이야기합니다. 존 롤스는 원초적 상태에서 '동등한 참여'를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평등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 내용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의 평등인지가 중요합니다.
어쨌든 평등과 관련해서라면 '조건의 평등' 정도는 이야기되어야 겠지요.
5.
【질문 내용】"관련하여, 실질적 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계에 관한 선생님의 예시문을 보면, 선생님께서는 결국 절차적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그것도 롤즈나 홉하우스의 견해가 아닌, 사르토리의 견해를 원용하여 양자 간의 조화의 조건을 설정했는데요... 이는 선생님의 일관된 실질적 민주주의/참여민주주의의적 고민의 연장과는 배치가 되는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렇게 답안을 작성해주신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건, 사족인데... 사실은 롤즈나 홉하우스, 그린 등과 사르토리의 견해는 별 차이가 없는 것인지도...궁금합니다.)"
【답변】혹시 3순환 3회 문제(2001년 대학모의고사 문제이자, 외시기출 문제)에서 말씀하신 건가요?
문제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조화를 묻고 있구요, 이 경우 '자유와 평등의 관계'를 가지고 풀거나, 세시민에 익숙한 분들은 임교수님처럼 '민주적 절차의 제도화 및 민주적 가치의 내면화·습관화'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풀수 있다고 예시했는데요.
'자유와 평등의 관계'라는 표현은 사르토리의 견해를 원용한 건가요? 양자의 관계의 해결은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잖아요.
그린 이후, 홉하우스 등은 '공동선', '윤리', '덕성'의 관념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적극적 자유를 이야기할 때, 인격의 완성을 위한 사회적 맥락의 중요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린은 개인의 권리를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요소로 보는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사회적 관점에서 권리를 이해하는 것이 반드시 개인의 권리를 포기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홉하우스는 선거권 확대의 차원이나 사회경제적 권리의 보장 그리고 제국내 소수민족의 자율성 인정 등에서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시민권원리의 일관된 적용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국가는 시민권 원리에 기초한 결사체의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대의제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입법에의 참여와 명시적인 시민의 동의를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에 뒤이어 자유의 개념을 자율로 해석하는 폴리스적 전통 혹은 루소의 문제의식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길을 닦에 주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르토리의 자유민주주의에서의 자유가 권리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그린 이후의 신이상주의가 유기체 혹은 공동체 내에서의 참여와 자율을 강조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존 롤스와도 다르구요. 롤스는 공공선의 관념을 전제로 삼는데 반대하거든요. 나아가 국가는 중립적이어야 하지, 윤리적 목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에 반대하구요. 그래서 저는 그린, 홉하우스의 주장은 케인지언적 복지국가가 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하면서도, 이들의 주장을 신이상주의라고 소개했고(신이상주의라면 공동체주의와 친하겠지요), 바커에 영향을 주었고, 마냉과 하버마스의 주장과 상당히 유사한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고 말씀드렸답니다.
굳이 이들을 소개한 이유는 이들 주장이 갖는 현대정치에서의 함의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바라본 자유 개념이 적극적이라는 점에서 현대 정치적 자유주의의 토양이 되었다는 점, 두 번째, 이들의 자유 개념이 국가에로의 자유에 그치지 않고 '자율'로 해석된다면, 그것은 공화주의에 가까워진다는 점, 마지막으로 토론민주주의와 흡사한 주장을 한다는 점 등입니다.
6.
【질문 내용】"그리고 또 사실 제가 답안을 작성할 때, 자유주의자나 공동체주의자들의 견해를 가끔 혼합하여 사용하게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막상 답안을 작성하다 보면, 자유주의자, 특히 최장집 선생님 견해대로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처방을 해놓고선, 마지막에 가서 이상하게 하버마스나, 킨과 헬드를 꺼내는 버릇이 있습니다. 현재까진 채점자들이 별 생각없이 지나가고 있는데... 아무래도 스스로 너무나 찔리는 것 같습니다. 양자를 혼용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만약 1문에서 자유주의자의 견해를, 2문에서 공동체주의자의 견해를 취해 서술하는 경우, 선생님의 채점 경험상 어떤 느낌을 받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답변】민주주의와 관련해서는 저는 공동체주의보다는 공화주의라는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많은 교수님들도 그 표현을 선호하시더군요. 왜냐면 공동체주의하면 샌들, 맥킨타이어, 테일러, 왈쯔가 먼저 연상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의 주장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실제 문제 해결에는 보다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니까요).
음... 저는 논리적 일관성을 철저히 지키시는 교수님의 사용례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봅니다.
먼저, 혼용해도 크게 문제가 없는 주장을 찾아 보면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신다면 코헨과 아라토의 주장은 괜찮을 것 같네요. 스스로가 신좌파라고 하면서도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자라고 하니까요.
하버마스의 경우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관료적 조정'이라는 문제의식은 현대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경우 인용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헬드의 경우 '이중적 민주화 과제(즉, 국가의 민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는 다른 교수님들이 헬드의 문제의식은 따르지 않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한 전략의 방법적 차원에서 빌려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자유주의와 허스트, 바버는 거리가 큽니다. 그리고 같은 우파 학자이지만, 페이트먼, 맥퍼슨과 같은 우파적 참여민주주의자들과 로버트 달 등 신다원주의의 주장은 공화주의에 분류하는 경향이 있구요, 그 주장들은 자유주의 입장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리고, 전 채점할 때 문제마다 따로 분리해서 채점합니다. 아주 독특한 답안의 경우에는 앞선 문제에서의 주장이 남긴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앞선 답안의 논리 흐름과 잘 연관시켜지지는 않더군요.
- 강 제 명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