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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일본(倭)의 강역을 찾아서
1.
역사속의 조선(朝鮮)이라는 실체가 이 척박하고 왜소한 반도에서 오천년동안 비굴하게 강대국에 사대(事大)하며 초라한 삶을 이어왔다는 역사일반의 세뇌된 시각은 우리민족으로 하여금 어두운 역사의 족쇄(足鎖)에 일백년을 갇히게 하였고 미래에 대한 올바른 이정표(里程標)를 세울수 없게 끔 만들어 버렸다.
일백년동안 철저히 반도사관으로 세뇌된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웅대한 역사를 거부했으며 지금에 와서는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는 공자의 위대한 철학마저 부인한 채, 왜소하고 척박한 나라의 볼품없는 자화상(自畵像)으로 스스로를 규정짓기에 이르렀다.
이런 어리석고 초라한 시대를 맞이하여 이를 극복할 유일한 화두(話頭)를 간직한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2025년11월07일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일본 총리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입헌민주당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의원의 질의내용중 “대만에 중국이 해상봉쇄를 단행하면 존립위기사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를 염두에 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던 중 "전함을 사용하고 무력 행사가 수반된다면 (일본의) 존립위기 사태가 될 수 있다"고 발언하면서 “집단적 자위권을 포함해 대응 가능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다” 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답변을 내놓게 되었다.
이는 중국과 대만(臺灣)사이의 양안(兩岸)전쟁 발발시 일본의 군사적 개입가능성을 이야기한 것으로, 간교한 중국 공산당은 발끈하며 대응수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일본총리의 발언 다음날 주(駐) 오사카 중국 총영사 쉐젠(薛剑)이 자신의 SNS에 일본총리를 간접적으로 겨냥해 “더러운 목을 자르지 않을 수 없다”는 참수(斬首)발언을 올림으로써 여론은 일파만파로 들끓게 되었다.
12월06일 중국 전투기 J-15가 일본 항공자위대의 전투기를 레이저 조준하는 사건을 발생하며 군사적 대응수위가 고조되자, 12월16일 일본 총리는 반성(反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한 발 물러섬으로써 사태는 수습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위의 사태와 관련해 정밀히 고찰해보면, 왜 일본총리가 대만(臺灣)문제에 대해 광분(狂奔)할 정도로 대응하는지에 대해 일본정부와 국회의원들, 미국, 중국공산당, 러시아는 명확히 그 이유를 알고 있는데, 정작 1910년 이후 반도(半島)에 정착한 이주(移住)민족 대한민국과 북한만 이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이다.
물론 일본의 사과와 관련해 그 이면(裏面)의 페이지를 고찰해 본다면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조선민족이나 왜(倭)국 일본이나 원래의 강역터전에서 동쪽으로 강제이주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민족은 1917년경부터 반도이주가 시작되었고 일본은 1945년08월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맥아더에 의해 열도로 강제이주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반도의 두 나라인 대한민국과 북한은 그 역사의 맥락을 짚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일본의 집권세력은 그 비운의 역사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일제(日帝)의 식민교육은 철저했고 1945년이후 중국공산당과 결탁해 지명(地名)을 바꾸고 대륙 해안선의 간척사업과 지형변조를 통해 대륙조선의 숨결을 완벽히 차단했으며, 이리나 승냥이와 같은 친일파들에 권력을 주어 이 반도땅이 조선오천년의 터전인것처럼 끊임없는 세뇌를 강요해 그 조선(朝鮮)의 후손들을 선조(先祖)의 강역도, 웅대함도 모르고 스스로 비하(卑下)하는 천하 바보들로 만들어 버렸다. 북한도 정권유지에 급급한 나머지 때로는 러시아로 때로는 중국공산당에 구애(求愛)하며 비루한 목숨을 연장해 오고 있으니 그런자들에게 무슨 올바른 역사가 중요하기나 하겠는가? 정말 역사의 신(神)은 우리 조선민족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고 있다.
2.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는 조선후기 북학파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본관 전주)선생의 유고(遺稿)를 모아 편집한 33책71권의 방대한 저작으로,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정조(正祖)대왕의 명을 받아 아들 광규(李光葵)가 엮고, 이완수(李睕秀)가 교정,완성한 책이다.
이 책중 제64권 청령국지1(蜻蛉國志一)을 보면 일본 즉 왜국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제1편인 세계도(世系圖)에서 고전번역원은 청령국지(蜻蛉國志)에 대한 주(註)를 달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청령(蜻蛉)은 일본의 옛이름 중의 하나이니, 일본국에 관한 기록이란 뜻이다. 청령은 곧 잠자리의 뜻이며, 일본이 이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일본서기(日本書紀)》라는 일본 사적(史籍)의 신무(神武) 31년 조에 “나라의 형상을 두루 바라보고서 ‘훌륭한 나라를 얻었구나! …… 잠자리[蜻蛉 일본 고훈(古訓)은 ‘아끼즈’]가 교미(交尾) 한 듯하구나!’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끼즈시마[秋津洲]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 한 데에서 나왔다. 또 일본을 청정국(蜻蜓國)이라 하는 까닭은 ‘蜻蛉’을 ‘蜻蜓’으로도 쓰기 때문이다.
위 글을 보면 1800년경 일본국의 형상이 명확히 잠자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아끼즈시마(秋津洲)라는 말은 <잠자리섬>으로 번역되는 말이다.
또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65권 / 청령국지 2(蜻蛉國志二)의 여지(輿地)편 지형(地形)론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日本之地。北極出地三十五度。地形如人字。或曰如入字。陸奧。當入字尖嘴。江戶。當其屈折正中處。南海道。當其波。西海道。當其側。琵琶湖。當其中央。但波短而側長矣。其地。始于黑龍江之北。至于朝鮮濟州之南。居天下之東北
일본 땅은 북극성(北極星)이 지평선(地平線)에서 35도(度) 고각(高角)으로 관측(觀測)되는 곳에 있다. 지형은 인(人)자와 같다. 입(入)자와 같다고도 한다. 육오(陸奧 무쓰)는 ‘入’자의 꼭대기 부리에 해당하고, 강호(江湖 에도)는 그 굽은 한 가운데에 해당하고, 남해도(南海道)는 그 파임[波]에 해당하고, 서해도(西海道)는 그 삐침[側]에 해당하고, 비파호(琵琶湖)는 그 복판에 해당하는데, 다만 파임이 짧고 삐침이 길다. 그 땅은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서 비롯하여 조선 제주(濟州)의 남쪽에 이르며, 천하의 동북에 있다.
위 글은 철저히 현 일본열도에 맞게 설명이 되어있는 교열된 글들임을 우리는 한번에 분석해 낼 수 있는 부분들이나, 그 지형이 사람 人이나 들 入자의 형상이라는 기록은 단연코 현 일본열도의 모습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음은 삼척동자도 깨우칠 일들이다.
우리가 구글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나오는 잠자리 모양의 섬 그리고 人과 入의 형상은 명확히 현 필리핀의 지형과 정확히 부합되고 있다.
3.
일본에 대해 청령국(蜻蛉國)이라 말하는 기록은 여러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조선 통신사(通信使)들의 견문록(海行錄,質正錄 등)과 통신사 및 사절단으로 갔던 사람들이 남긴 사행록(使行錄)에도 청령국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으며,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의 청성잡기(靑城雜記)와 일본록(日本錄),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의 해유록(海游錄-1719), 원중거(元重舉, 1719~1790)의 화국지(和國志)등에도 일본을 청령국(蜻蛉國)이로 표현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익(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지고(輿地考), 교제고(交際考) 등에도 일본과의 교류사 및 지리설명 부분에서 일본의 국호로 청령국(蜻蛉國)이 기록되어 있다.
일본이 명확히 잠자리모양의 형상을 하고 있는 현재의 필리핀에 그 국가의 강역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4.
유대계 영국인인 마커스 사무엘(Marcus Samuel,1853-1927)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가 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은 아시아로 가는 배의 3등선실표 편도(片道) 한 장이었다.
18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혼자 배를 타고 인도, 태국, 싱카포르를 거쳐서 목적지인 일본 요코하마(横浜市)까지 갔고 그때가 1871년이었다.
그는 쇼난(湘南)이라는 지역의 해안에 정착했고 거기서 어부들이 매일 굉장히 아름다운 조개를 캐어가는 것을 보고 같이 주워 장난감을 만들고, 또 조개껍질 안쪽에 옻칠을 해 세공품을 비롯해 작은 자개 상자를 만들어 영국의 부친에게 보냈다. 동양의 이국적 정서가 담긴 그의 나전칠기(螺鈿漆器)는 잘 팔렸고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석유사업에 뛰어들어 경유(輕油)와 등유(燈油)를 일본과 중국에 팔아먹기 위해 세계최초로 유조선(油槽船)을 고안해 발주하여 1891년 세계최초의 유조선 선주(船主)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유전에 투자하여 양질(良質)의 기름을 개발한후 이 석유는 일본에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업은 대성공이었고, 8척의 유조선을 추가 발주하여 사업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그는 자기 소유의 유조선마다 요코하마의 쇼난(湘南)에서 캐냈던 가리비 조개의 모양을 상표로 붙였고, 현재 우리에게 잘 알려진 쉘(영국의 로열 더치 쉘Royal Dutch Shell)석유회사의 이미지였다.
여기서 정확히 짚어야 할 사실은 바로 마커스 사무엘이 최초 1871년 정착했던 요코하마가 현 열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기록을 보면 당시 요코하마는 가리비가 많이 수확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현 열도(列島)의 요코하마는 해수(海水)온도가 높아 가리비는 전혀 수확되지 않으며, 북해도(홋카이도)나 아오모리현, 미야기현 등 북쪽지방에서만 생산되고 있다.
필리핀의 가리비 최대 생산지인 일리올로주 칼레스(Carles) 히간테스 제도 주변 해역의 표면 해수온도는 연중 25°C~31°C 사이를 유지하며, 이 지역의 가리비는 열대성 가리비로 25도이상의 열대 해수온도에서 서식하고 있다. 전체적인 필리핀 가리비의 대량 수확지역은 세부(Cebu)의 위쪽으로, 커다란 섬으로 둘러싸인 현 필리핀의 중심부라 볼 수 있는데 세부는 바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일본 사무라이와 싸우다 죽은 막탄섬(Mactan Island)이 있는 지역이며, 따라서 1871년 요코하마의 위치는 바로 가리비가 엄청 많이 생산되던 이 지역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5.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일본 즉 왜(倭)의 강역이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현 필리핀에 존재했으므로 당연히 역사속의 실체인 대마도(對馬島)의 강역 또한 기존 시각에서 변경되어야 한다.
조선의 장군(將軍) 이종무(李從茂, 1360~1425)가 정벌(征伐)했던 대마도(對馬島)가 어찌 이 반도아래의 조그만 섬일 수 있을 것인가?
명치유신(明治維新)이라는 일본의 일대 사건은 필리핀지역에 웅거했던 일본의 정권주체들이 현 대만(臺灣)지역으로 북상하며 그들의 세력을 키우고, 현 열도와 반도를 그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며 대륙 동방(東邦)의 거대한 제국 조선(朝鮮)의 앞날에 풍운(風雲)을 몰고 오게 되었다.
6.
-이 상-
첫댓글 고맙습니다
* 안녕하세요. "송계"님!
무덥고 무더운 계절에 어떻게 지내고 게신지... ...건강이 우선이란 말은 백번 들어도 좋은 뜻입니다.
오죽하면 : 주치의들은, 자신의 환자들에게 말하기를 "올 여름 잘 지내시고 가을에 다시 뵙겠습니다"합니다.
그만큼 여름을 잘 지내야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겠지요.
* 이곳에서 댓글을 쓰는 것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송계"님의 위의 설명이 가슴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 그렇습니다.
'왜(倭), 일본(日本)'은, 필리핀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있으며, 이는 해국도지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1905년 비밀회담에서 확인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필리핀 대신 반도 땅을 미국으로부터 활양받고,
필리핀 지들의 고토는 미국에 양보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치 않다면 미국이 일본의 허락(양해)을 받을 필요가 없지요)
*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건강하시어 좋은 글, 자주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바쁘실텐데 이리 왕림하시어 격려의 글을 올려주심에 진심을 담아 감사함을 전하옵니다. 처음 공부 시작할때 선생님의 주옥같은 글들을 모아 공부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감을 느낍니다. 다행이 건강은 이상없음에 조상님이 부여한 사명감을 무겁게 느끼오며, 향후 이 역사를 알리고 홍보함에 답답함을 많이 느끼고 있을 따름입니다. 춘추의 변화가 어느새 역사에 입문한지 강산을 변화시켜 버렸습니다. 답답함이 가득하던 시점에 AI가 전면에 부상함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되었고 이제부터는 AI영상을 통한 홍보로 대중적인식확산에 주력하고자 합니다.카페에 올리고자 한 글들은 수십편을 준비해놓고도 게으름에 실행치 못하였습니다. 좀 더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이 필리핀지역이었으니 대마도는 당연히 현 대만이 될것입니다. 다음편 글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주옥같은 글들의 향연에 저 또한 동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건이 허락되신다면 가을에 한 번 뵈었으면 하옵니다.
송계님 감사합니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할 정도로 마약이 창궐했는데 그 옆에있는 조선은 왜 아편이 창궐했다는 말이 없을까요..
영국이 청나라에만 팔고 조선이나 일본에는 안팔았을 이유는 없었을것 같아서 말입니다. 문득 궁금해서 질문 한 번 해봅니다.
아편이 들어온 경로는 홍콩입니다. 그 홍공이 지금의 베트남 위쪽 하이퐁이고요..이땅이 청나라 영토였기에 등소평이 이걸 찾으려고 베트남을 쳐들어간 것은 이미 이전 글에 써놓았습니다. 대륙의 남쪽 조선과 청의 경계는 지금의 대파산이라는 거대한 산맥에 의해 경계지어졌습니다. 또한 조선은 군견까지 동원해 국방을 철저히 했음을 서양인들의 기록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아편이 넘어왔다 해도 반도조선을 기준으로 삼았던 조선사편수회에서 그런 기록은 모두 삭제했을 것은 불문가지 아닐런지요...여러 기록을 볼때 조선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상으로 철저했던 나라로 보여집니다.
@송계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