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산우회원 7명(김종국 나종만 박호영 양수랑 윤상윤 정재남 최문수)은 남해고속도로를 가다가 곡성으로 빠져 나갔다. 나는 아직도 감기 기운이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섬진강 가의 어느 그늘진 자리에서 막걸리와 차를 마시는데 나는 쑥차를 주문하였다. 그것을 한 잔 마시고 나니까 훨씬 기분이 상쾌한 느낌이었다. 머지 않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려 최참판택을 둘러보고 ‘토지문확관’도 본 다음 한옥체험관으로 올라갔다. 전에는 없었던 것 같아서 올라가 보았다. 전업 작가들이 와서 작품활동을 한다는 한옥으로 가 보았다. 한 젊은이가 책상이 있는 의자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서쪽에 있는 한옥 방에서는 한 여인이 노트북컴퓨터로 작품을 쓰고 있는지 조용히 방 한 구석에서 컴퓨터 책상을 앞으로 하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악양을 등지고 다시 왔던 길로 되짚어 오다가 화계장터의 ‘조양숯불구이’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박호영 친구가 칠순을 넘겼다고 점심을 낸다고 하였다. 돼지불고기를 주문하였다. 조금 부족한 듯이 먹어야 좋은데 친구가 그래도 배가 불러야 한다고 3인분을 추가 하였더니 배에서 이제 그만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모두 박호영 친구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돌아오다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운조루(雲鳥樓)로 들어갔다. 이지역은 금환락지(金環落地)의 길지로서 류이주(柳爾胄)라는 이가 일가를 조성하여 가옥의 규모가 한 때는 99칸일 정도다였는데 지금은 많이 퇴락하여 옛날을 추억으로 여기며 후손들이 가옥을 보존하는데에도 힘들어 보였다. 그래도 이 가옥이 우리 현대사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200여년을 지탱해 올 수 있었던 동인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온 쌀 2가마 반을 담아 대문 앞에 놓아 두었던 '타인능해(他人能解, 잠겨 있지 않으니 누구든지 쌀을 가져가도 된다.)' 쌀 두지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을 나와 마을 앞 들 가운데에 있는 곡전재(穀田齋)로 들어가 보았다. 본래 지은 사람은 박승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성주이씨 곡전(穀田) 이교신이라는 사람이 구입하여 살고 있다고 하였다. 사랑체의 동쪽에는 제법 큰 연못이 있었는데 가운데에 노두를 놓아 연못 안을 거닐 수도 있게 해 놓았으며 사랑체 앞에는 작은 물길을 파서 집 안으로 냇물을 끌여들여 집 안에서 차를 마시며 운치를 낄 수 있게 해 놓은 것이 특이하였다. 이 한옥은 높은 담장을 쳐서 꼭 작은 궁성처럼 보였는데 그 까닭은 금환낙지(金環落地) 즉 금가락지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전한다. 한 가지 더 하면 이곳 성주이씨의 조상이 려말 '두문동72현'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 자손들은 조상이 행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키려고 조선에 와서 과거도 보지 않았고 벼슬도 하지 않았으며 초야에 묻혀 살았다고 전해져, 요즘 같은 세태에 감동을 주는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