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과 오페라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Dialogues des Carmélites’>
이 오페라는 프랑스 혁명 당시 희생된 콩피엔 Compiègne 지역 가르멜 수도회 16명의 수녀들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극 중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이 동원되었다. 가톨릭 문인 죠르주 베르나노스 Georges Bernanos.가 각본을 쓰고 프란시스 풀랑크 Francis Poulenc가 작곡하였다. 1957년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La Scala에서 초연되었고, 같은 해 프랑스어 버전으로 파리에서도 공연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종교의 자유를 확립하는 것을 넘어 가톨릭을 타도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교회와 수도원 토지를 국유화하고 성직자들을 국가 공무원으로 만들고 수도원을 폐쇄토록 하였다. 그리고 많은 성직자들이 반혁명분자로 취급되어 희생되었다. 이 오페라는 혁명의 비극과 수녀들의 비감한 결단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1. 역사적 배경
앞의 프랑스 혁명 게시물에서 썼듯이(https://cafe.daum.net/epistle/IfQN/111?svc=cafeapi) 프랑스 가톨릭은 구 기득권체제의 일부로서 국가의 위기에 책임을 져야 했다. 사회는 세속화되어 갔고, 교회는 더 이상 신성한 권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시민들 사이에 계몽주의가 확산되었으며, 호사를 즐기는 고위 성직자들은 존경받지 못하였다. 교회의 막대한 토지는 국가 재정 문제에 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였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국민의회는 교회와 수도원 재산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교회의 십일조 과세 특권도 박탈하였다. 이제 성직자들은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공무원이 되어야 했다. 1790년 국민의회는 성직자 공민 헌장(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 성직자 민사기본법이라고도 한다)을 통과시켰다. 교황이 아니라 국민과 법에 충성할 것을 맹세해야 했다.
이러한 충성선서 요구는 성직자들을 분열시키고, 프랑스를 분열시켰다. 충성 선서파와 선서 거부파가 거의 반반으로 갈라졌다(김응종‧민유기 외, 프랑스 종교와 세속화의 역사,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13, 173쪽). 서로 정통성을 주장하며 사회악을 상대의 책임으로 돌렸다. 혁명정부의 가톨릭에 대한 공격은 심화되었다. 교회가 관리하던 호적업무를 정부로 이관하였다. 20명의 시민이 반공민적이라고(incivisme)이라고 고발하면 거부파 사제는 추방당할 수 있었다.
루이 16세의 탈출 실패로 혁명은 격화되었으며, 프랑스는 전 유럽의 군주국가들을 상대해야 했다. 초기 전쟁에서 프랑스는 패퇴하였으며, ‘조국의 위기’가 선언되었다. 프랑스 민중들은 격앙되었고, 왕궁으로 몰려가 새로운 국민군의 조직할 것과 선서거부파 사제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왕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민중들은 궐기하였다(1792년 8월 10일 봉기). 결국 군주제는 폐지되고, 공화제가 수립되었다. 파리 민중들이 혁명의 주체가 되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지도하였다.
혁명 정부는 아직 남아 있던 모든 수도원와 신도회에 폐쇄를 명하였으며, 선서거부파 사제들에게 2주 내로 프랑스를 떠날 것을 최후 통첩하였다. 3만 명 이상의 사제들이 망명하였다. 루이 16세가 처형되면서 혁명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던 왕의 죽음은 순교로 인식되었다. 근왕주의자들 선서거부파 중심으로 내란이 발발하였다. 선서 거부 성직자들은 반역자로 취급되었다. 두 명의 증인만 있으면 24시간 내에 처형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의 공포가 지배하면서 충성 선서한 성직자들도 온전치 못하였다. 프랑스 공화국에서 가톨릭을 아예 폐지하고자 하였다. 소위 ‘비기독교 운동 Déchristianisation’이다. 이혼이 허용되어 혼인 및 가족관계는 더 이상 성사(聖事)가 아니게 되었다. 많은 사제들이 사제직을 포기하였고, 사제들의 결혼도 이어졌다. 무엇보다 공포정치 시기 많은 성직자들이 반혁명분자로 처형되었다. 혁명재판소 등에서 처형된 인원 14000명 가운데 성직자는 920명에 달하였다(김응종‧민유기 외, 프랑스 종교와 세속화의 역사,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13, 180쪽).
2. 음악 설명
이 오페라는 파리 근교의 콩피엔 Compiègne 지역 가르멜 수도회 16명의 수녀들의 실화를 소재로 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에서 사제들을 국가공무원으로 변화시키는 성직자 공민헌장이 제정되었을 때 콩피엔느 가르멜 수녀들은 선서를 거부하였다. 위에서 보았듯이 1792년 8월 10일 봉기 이후 모든 잔존 수도원 및 수녀원들에 대한 폐쇄명령이 내려졌다. 수녀들은 민간 지역으로 이주하였으나 친지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공포정치가 심화되면서 수녀들은 반혁명분자로 간주되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1794년 7월 17일 사형 선고 받고 처형되었다. 수녀원장인 마더 데레사는 자신들의 반혁명주의를 인정했으나 종교적 열정은 무죄임을 주장하였다.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면서 공포정치가 끝나기 열흘 전이었다(영어 위키 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Martyrs_of_Compi%C3%A8gne).
오페라 각본은 위와 같은 프랑스 혁명과 수도원 폐쇄 및 수녀들 처형의 시간 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이야기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귀족들이 공격을 받으면서 드 라 포르스 후작 딸 블랑쉬는 수녀원에 은거하기로 결심한다. 수녀원장은 블랑쉬에게 수녀원은 도피처가 아니며 수도원이 수녀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수녀들이 수도원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수다쟁이 수녀 콩스탕스가 블랑쉬와 친해진다. 수도원 재산의 국유화가 선언되고 성직자 공민 헌장이 선포되었다. 경찰이 와서 수녀복장을 금지시킨다. 이제 사람들은 성직자의 성사가 필요없다고 말한다. 한 수녀가 성직자의 순교를 말한다. 경찰은 이런 시기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그러자 수녀는 이렇게 퇴락한 시대는 삶도 무의미하다고 답한다. 순교 맹세가 제안되고 비밀투표가 실시된다. 블랑쉬는 수녀원을 나온다. 콩스탕스는 반대하였다가 다시 순교 맹세에 동의한다. 수녀들이 모두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한 명 한 명 성모 찬송가(Salve Regina)를 부르며 단두대를 향한다. 기요틴 칼날 떨어지는 섬뜩한 소리 들린다. 마지막 순간에 블랑쉬가 나타난다. 수녀 콩스탕스에 이어 블랑쉬도 찬송가를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아래는 오페라 마지막 장면 수녀들이 성모 찬송가인 ‘여왕 만세(Salve Regina)’를 부르며 단두대로 향하는 영상 그리고 살베 레지나 노래 가사를 올린다.
https://youtu.be/mkOK3aXzMpc
Salve Regina 라틴어 가사 | 최호영 신부 번역 |
Salve, Regina, Mater misericordiæ, vita, dulcedo, et spes nostra, salve. Ad te clamamus exsules filii Hevæ, Ad te suspiramus, gementes et flentes in hac lacrimarum valle. Eia, ergo, advocata nostra, illos tuos misericordes oculos ad nos converte; Et Jesum, benedictum fructum ventris tui, nobis post hoc exsilium ostende. O clemens, O pia, O dulcis Virgo Maria. | 살베, 여왕이시여, 자비의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살베. 귀양살이하는 하와의 자손들이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울며 애원하며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당신께 간청하나이다. 그러니, 우리의 변호자시여, 당신의 그 자비의 눈을 우리에게 돌리소서. 당신 태중의 복되신 아들 예수님을 이 귀양살이 후에 우리에게 보이소서. 오 너그러우신 분, 오 자애로우신 분, 오 부드러우신 동정 마리아여 ! |
* 살베레지나(Salve Regina)는 성모 찬송가 중에 가장 유명한 성가이다. 성모 찬송가는 저녁기도 혹은 끝기도 후에 불려진다고 한다.(최호영, “성모 찬송가 Salve Regina”, 가톨릭 신문2013-06-16 [제2850호, 14면], 인터넷 페이지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article_view.php?aid=255846)
3. 이후의 전개과정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종식된 이후 총재정부 하에서도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성직자 공민 헌정마저 폐기되어 성직자에 대한 봉급 지원도 중단되었다.
그러나 전통 종교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애착을 강제로 소거할 수는 없었다. 1797년 총재 정부 선거에서 이미 종교 재생의 여론이 확인되었다. 국민들은 교회의 문이 다시 열리고 교회의 종이 다시 울리기를 원하였다. 나폴레옹 통령정부가 들어서면서 가톨릭은 급속도로 부흥하였다.
나폴레옹은 특권 폐지의 혁명을 정착시키면서 평화와 통합을 추진하였다. 나폴레옹은 혁명가들에게 증오감을 버리라고 주문하였다. 가톨릭 신도들에게 평화와 신앙을 보장토록 하였다. 혁명기 핍박당하고 추방되었던 이들에게는 복수심을 버릴 것을 주문하였다. 교회는 다시 열리고 망명자 명부는 사라질 것이라고 보장하였다(앙드레 모루아, 프랑스 사, 신용석 역, 김영사 제1판 3쇄, 2016, 502쪽). 나폴레옹은 1801년 이탈리아 교황령을 정복하고 교황 피우스 7세와 정교협약을 맺었다. 가톨릭은 프랑스 국민 대다수의 종교라는 점이 재확인되었다. 예배의 자유가 허용되었고, 가톨릭 교회가 재건되었다.
가톨릭은 예전과 같은 국교는 아니었지만, 다시 국민의 종교가 되었다. 나폴레옹 실각 후 프랑스 교회와 교황청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가톨릭 교회는 학생들의 교육에 전권을 가졌으며, 농촌에서의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교회, 군대, 고위 공직자의 인적 유대는 강고하였다. 프랑스 헌정사에서 정교분리는 1905년 법률 제정을 통해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