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공화국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 국회의원들의 간접선거에 의한 제1대 정·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52년 8월 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와 제3대 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제2대 대통령으로, 함태영 후보를 제3대 부통령으로 선출했다.
1956년 5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 및 제4대 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1960년 3월 15일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로 이승만 후보를 제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으나 부정선거로 밝혀져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무효 처리되었다
제2공화국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민의원과 참의원들의 간접 선거에 의한 제4대 대통령 선거로 윤보선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
1963년 10월 15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5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1967년 5월 3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6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군인에서 민간인으로 변신하여 4년간 집권한 박정희와 그에 강력히 도전해 온 윤보선과의 재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1971년 4월 27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제7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4 공화국
대한민국 제8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8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제9대 대통령 선거는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9대 대통령 선거로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선거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10대 대통령 선거로 최규하가 당선되었다.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11대 대통령 선거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제5 공화국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를 통한 간접선거에 의한 제12대 대통령 선거로 전두환이 당선되었다.
제6 공화국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三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87년 12월 16일에 실시 되어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민투표에 의한 직접 선거 부활)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四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 되어 김영삼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五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 되어 김대중후보가 당선되었다.
2002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 전까지 각축전을 벌인 유력한 후보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 나와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한 제1야당 한나라당의 대표 이회창과 당시 여당이던 새천년 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로 나서게 된 노무현이었다. 한나라당의 후보인 법관출신인 이회창 대표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점쳐져 왔었으나 이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로 대표되는 네티즌의 영향력과 월드컵 기간 동안 미군 장갑차에 숨진 두 여중생 사건으로 불거진 반미감정, 국민들의 감성을 파고드는 민주당 측의 선거전략, 정몽준 후보와 단일화 등의 영향으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다.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大韓民國 第十七代 大統領 選擧)는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7년 12월 19일에 실시 되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12시간 동안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3765만 3518명의 유권자 중 2369만 385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번 투표는 잠정 62.9%가 참여해 사상 최저치로 밝혀졌다.[1] 유권자들과 기업인 출신으로 경제회복을 앞세운 이명박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
제1대 대통령선거
1948년 5월 20일에 제1대 대통령·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접선거였다. 후보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이승만, 무소속의 김구 무소속의 안재홍이 출마하였으며 선거 결과는 이승만이 92.3%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으며, 기권이 2표였다.
제2대 대통령선거
1952년 8월 5일 대통령과 부통령 직접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고 선거를 실시하였다. 처음으로 실시한 제2대 대선에서는 이승만이 유효투표 수의 74.6%얻어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선거
1956년 5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도 제2대 국민이 직접 선거였다. 투표율 94.4%였으며 이승만 후보가 득표율 70.0%를 얻어 당선되었다. 특이한 것은 무효표와 기권표가 많았던 것인데 이는 선거 중 사망한 신익희 후보의 추모 투표 때문으로 보인다.
제4대 대통령선거
1960년 3월 15일의 대통령선거는 자유당과 이승만정권의 3·15부정선거 그리고 4·19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야하고 같은 해 8월 12일에 치러진 간접선거를 아우른다. 이에 따라 국회는 내각책임제로 바뀌고, 대통령선거 역시 양원합동회의에 의한 간접선거로 바뀌어 같은 해 8월 12일 간접선거를 실시하였다. 후보는 윤보선·김창숙·변영태·백낙준·허정·김도연 등 무려 12명이 출마하였다. 투표 결과는 윤보선이 208표를 얻어 이승만정권의 하야 이후 제4대 대통령이 되었다.
제5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85% 득표율 박정희 46.6%, 윤보선 45.1%)
19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처음 실시한 대통령선거로,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출마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민정당의 윤보선, 신흥당의 장이석, 추풍회의 오재영, 정민회의 변영태, 국민의당의 허정, 자유민주당의 송요찬 등 7명이 등록하였으나, 허정과 송요찬은 중도에 사퇴하였다. 이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46.6%를 얻어 45.1%를 얻은 윤보선 후보를 근소한 차로 이기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제6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83.60% 득표율 박정희 51.4%, 윤보선 40.9%)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대통령선거는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민간인으로 변신해 4년간 집권한 뒤 치른 선거로, 한일협정 처리와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인한 학생과 재야세력의 거센 저항이 선거의 쟁점이었다.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윤보선, 정의당의 이세진, 한국독립당의 전진한, 민중당의 김준연, 통한당의 오재영, 대중당의 서민호 등 7명이 등록하였으나, 서민호는 중도에 사퇴하였다.
투표 결과는 투표율 83.6%에 박정희 후보가 득표율 51.4%를 얻어 득표율 40.9%를 얻은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6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재집권에 성공하였다.
제7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79.80% 득표율 박정희 53.2%, 김대중 45.2%)
1969년 6월 대통령 박정희의 3선출마을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시작되고, 7월 17일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개헌안은 9월 14일 새벽 민주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날치기 통과되어 박정희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가 실시하였다. 후보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 등 5명이 출마하였다.
제7대 대선의 최대 이슈는 3선 개헌을 통해 출마한 박정희후보와 당내 경선을 통해 40대 기수 론을 으로 세대교체 바람을 몰고 온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선거 결과 득표율 53.2%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득표율 45.2%를 얻은 김대중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 되었으며 이는 유신체제의 시작과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제8대 대통령선거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고 정치체제를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초헌법적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도 해산하고 정치활동도 금지하였다. 동시에 전국적인 선포하였다. 이어 유신헌법을 서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치하였다. 이는 모두 단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해 12월 23일 박정희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국민주권을 무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도록 하는 간접선로 단독 입후보해 전체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무효 2표)라는 절대적인 찬성으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12월 27일 4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또 이때부터 이전까지의 역대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났다.
제9대 대통령선거
제9대 대통령선거도 간접선거로 단일 후보로 출마한 박정희는 1978년 7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재적대의원 2,583명 중 2,578명이 출석한 가운데 2,577표(기권 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제10대 대통령선거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정희는 야당의 개헌투쟁과 부마항쟁 등 국민들의 저항이 거듭되자 비상계엄을 발동하고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던 중 1979년 10월 26일 저녁 중앙정보부의 부장 김재규에 의해 사망한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에 정한 국무위원의 순위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는 유신헌법 제48조의 규정에 따라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 권한대행인 국무총리 최규하가 1979년 12월 6일 장충체육관에서 진행된 제10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그해 12월 27일 취임하였다. 그러나 8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 특별성명을 내고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임한다.
제11대 대통령선거
1980년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7차 통일주체국민회의 회의를 열고 제11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다. 선거 방식은 제8∼10대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유신헌법에 의거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선거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 출신의 전두환이 형식적인 요식행위를 통해 그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제12대 대통령선거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全斗煥)과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제도를 모방해 대통령선거인단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이는 박정희 정권과 같이 국민을 기만하는 꼼수에 불과했다.
1981년 2월 25일 국회의원 선거구 단위별로 투개표를 실시하였으며, 후보로는 민주정의당의 전두환, 한국국민당의 김종철, 민권당의 김의택, 민주한국당의 유치송 등 4명이였으며 선거 결과 전두환 후보가 유효투표수의 90.2%를 얻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 그해 3월 3일 임기 7년의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13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89.20% 득표율 노태우 36.6%, 김영삼 28%, 김대중 27%, 김종필 8%)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의 대표 노태우가 국민들의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요구(6.10항쟁)의 항복 선언인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한 뒤 치러진 대통령선거이다. 특히 이 선거는 군부의 권위주의 정권이 민중항쟁에 굴복해 여야가 합의한 경쟁규칙에 따라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민주화요구와는 반하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분열과 김종필의 출마로 사상 유례 없는 지역대결로 선거가 흘러갔으며 이때부터 3김 시대가 시작 되였다.
선거 방식은 1987년 11월 17일 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여해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선거일은 같은 해 12월 16일이며, 후보자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통일한국당의 신정일 등 6명이였으며, 노태우 후보가 36.6%로 1위, 김영삼 후보가 28%로 2위, 김대중 후보가 27%로 3위, 김종필 후보가 8%로 4위, 신정일 후보가 0.2%로 5위를 차지하였다. 이에 따라 노태우가 임기 5년의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이듬해 2월 25일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을 출범하였다
제14대 대통령선거
(평균투표율 81.90% 득표율 김영삼 42.0%, 김대중 33.8%, 정주영 16%, 박찬종 6%)
1992년 12월 18일 후보는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3당 야합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과 민주당의 김대중, 통일국민당의 정주영, 신정당의 박찬종, 정의당의 이병호, 무소속의 백기완 무소속의 김옥선 등 이며,
선거결과는 김영삼 후보가 42%로 1위, 김대중 후보가 33.8%로 2위, 정주영 후보가 16%로 3위, 박찬종 후보가 6%로 4위를 차지하였고, 백기완 ·김옥선· 이병호 후보 순으로 그 뒤를 이었으며 이에 따라 김영삼이 1993년 2월 25일 5년 단임제의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2년 간 지속된 군부 출신 대통령들의 권위주의적 통치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를 출범하였다.
제15대 대통령선거
(평균투표율 80.70% 득표율 김대중 40.3%, 이회창 38.7%, 이인제 19.2%, 권영길 1.2%)
1997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과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국민신당의 이인제, 국민승리21의 권영길, 공화당의 허경영, 바른정치연합의 김한식, 한국당의 신정일 등 이다.
15대 대선의 쟁점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제1야당 총재로 복귀한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간의 경쟁으로 모아졌다.
또 이 둘의 경쟁 속에서 한나라당의 공천과정에서 탈락한 이인제 후보가 변수로 작용하였고, 특히 민주노총 후보가 가세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노동단체가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그밖에 옥내연설회로 바뀌고, 횟수 역시 대폭 축소되었으며, 처음으로 방송연설회가 실시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투표결과는 김대중 후보가 40.3%로 1위, 이회창 후보가 38.7%로 2위, 이인제 후보가 19.2%)로 3위, 권영길 후보가 1.2%로 4위를 차지하였고, 신정일·김한식·허경영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선거로 김대중 후보가 임기 5년의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 취임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실현하였고, 이로써 군부와 관계없는 최초의 정부가 탄생하였다.
제16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70.80% 득표율 노무현 48.9%, 이회창 46.6%, 권영길 3.9%)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의 후보는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한나라당의 이회창,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하나로국민연합의 이한동, 국태민안호국당의 김길수, 사회당의 김영규 등 6명이 출마하였다.
선거의 최대 쟁점은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건 여당의 노무현 후보와 '부패정권 심판, 정권 교체' 등을 내세운 거대 야당 이회창 후보 사이의 치열한 접전이 국민들의 집중시켰다.
선거 결과는 노무현 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48.9%인 얻어 46.6%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2.3%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밖에 권영길 후보가 3.9%, 김길수 후보가 0.2%, 김영규 후보가 0.1%를 차지하였다.
이번 선거의 특징은 선거 사상 처음으로 세대간 대결 양상이 빚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20~30대 등 젊은 세대는 개혁 성향의 노무현 후보를, 50~60대 등 중장년 세대는 보수 성향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비 보수당 후보인 노무현 후보가 전통적으로 한나라당의 강세지역인 부산광역시와 경상남북도에서 일정한 지지율을 획득했다는 것이며 특히 주목할 점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비록 유효투표총수의 3.9%를 얻는 데 그쳤지만, 피부 토론 등을 통해 급진적인 이미지를 씻고 진보정당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할 수있다.
제17대 대통령선거
(전국평균투표율 63.00% 득표율 이명박 48.7%, 정동영 26.1%, 이회창 15.1%, 문국현 5.8%, 권영길 3.0%, 이인제 0.7%, 허경영 0.4%, 금민 0.1%, 정근모 0.1%, 전관 0.0%)
2007년 12월 19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의 후보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한나라당의 이명박,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민주당의 이인제,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참주인연합의 정근모, 경제공화당의 허경영, 새시대참사람연합의 전관(, 한국사회당의 금민, 무소속의 이회창 등 10명이었다.
투표 결과는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48.7%로 당선되었고, 정동영이 26.1%로 2위를, 이회창이 15.1%로 3위를 기록하였다. 그 뒤로 문국현이 5.8%, 권영길이 3.0%, 이인제가 0.7%, 허경영이 0.4%, 금민이 0.1%, 정근모가 0.1%, 전관이 0.0%를 얻었다.
이명박은 도중에 이회창이 탈퇴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일과 이른바 'BBK사건'의 연루 의혹으로도 끝까지 '대세론'을 유지함으로써 호남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최다득표를 하여 2위를 500만 표 이상 누르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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