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만현스님의염불선 이야기(2)
부사의한 빛, 무량광 그리고 무량수
현대불교신문(2004년1월21일,18면)
무량광은 지혜이자 자비
‘이 마음의 곧 부처’라는 가르침이 보편화되어 있는 이 시대에 부처님들이 ‘무아 속 절대계’에 계시다면, 우리는 결정코 팔정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붓다의 자비, 원력을 믿고 열심히 염불해야 합니다.
죽어서 가져가지 못할 재물, 명예만을 좇는 범부짓일랑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선근공덕을 쌓고 보살도를 행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 나라와 세계평화를 생각해야 합니다. 외도(外道)를 멀리 하고 계율은 목숨같이 받들어 지켜야만 합니다.
독자 여러분, 붓다의 대해로 드는 관문이 무량광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붓다의 경계입니다. 이제 무량광을 보아야만 붓다의 진신(報身)을 친견하게 됩니다.
이 부사의한 빛덩이를 봄이 없이 ‘나도 붓다를 본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부처님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이기에 삼세의 여래가 하나입니다.
무량광으로 이뤄진 불신에서 백천만억의 화신을 냅니다. 이 무량광은 지혜 자체요 자비 자체가 됩니다. 청정 자체여서 부처님의 8만4천 신통과 삼매의 원인이 됩니다.
외도를 항복받는 힘이기도 합니다. 무량광의 기능은 실로 불가사의 합니다. 중생의 눈앞에 있지만 그 천문학적인 광도를 지닌 무량광을 우리는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들은 중생을 교화하실 때 화신(응화신, 변화신)으로, 그것도 비몽사몽, 꿈에 나투시어 이끄십니다.
무량광은 ‘무아 속 절대계’의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즉 진불에 근거합니다. <금광명최승왕경> 제2권에 “화신과 응신은 이름을 붙여 그냥 있다 하는 것이요, 법신은 참으로 진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법신은 앞의 두 몸(화신과 응신)을 위하여 근본이 되는 것이다”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경에서 말하는 800 눈(眼)의 공덕을 지은 수행자도 무량광만은 볼 수가 없습니다. 당대에 붓다 이룰 부처님 아들만이 봅니다.
억겁의 업장과 습기가 녹아 없어져야 하고, 탐진치 삼독 등 번뇌가 녹아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부처님 위신력을 입어야 가능합니다.
<화엄경>에서 발바닥, 발가락, 양 무릎, 눈썹 사이 등 네 곳에서 부처님의 방광을 볼 수 있습니다. 무량광으로 이뤄진 불신이 필요에 따라 방광하는 것입니다.
<대반야경>에선 무려 41군데 몸 부분 부분에서 방광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열반경>에선 “부처님 입으로부터 가지가지 광명을 내어, 삼천대천 세계를 비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대승경전에서 많은 붓다들이 계심을 볼 수 있는데도, ‘마음의 부처’요 ‘마음 밖에 부처를 구하는 것은 사마외도’라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空)엔 안팎이 따로 없습니다.
<열반경>의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에 나오는 불성(佛性)이라는 말은 부처될 수 있는 가능성, 종자(種子)를 뜻합니다.
생각 이전의 마음, 본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마음자리가 드러나는 견성(見性)이 바로 성불(成佛)이 아니라, 붓다를 이루어 가는 기나 긴 여정의 첫 관문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마음 속에 보물창고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품자리, 내 주인공을 찾아 마음 속에 잠복해 있는 보물들을 개발해 낼 수만 있다면 누구나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생은 견성해서 자유와 지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윤회의 속박을 벗어나 해탈 오계(悟界)에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