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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려고 했지, 빼앗으려던 게 아니었다.”고? | ||||||||||||||||||
[정중규 칼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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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9일 저녁 ‘용산참사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생명평화미사’에 함께 하려고 방문했던 용산참사 현장은 전쟁터 같았다. 그날의 참혹했던 상황을 말하는 듯이 화염에 그을린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우뚝 서 있는 몰골 사나운 건물과 주변은 스산하기만 했다. 하지만 무슨 전위예술 작품 같게 변해버린 건물을 버팀목 삼아 그 아래에서 펼쳐지는 삶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역동적이었다. 거기엔 죽음의 힘으로도 누를 수 없는 생명력이, 문화가, 휴머니티가, 가난한 삶의 연대가, 생명의 촛불이, 이웃사랑이,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저항의 예언적 외침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마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한복판에 위치한 해방구 같았던 그곳, 저녁미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서 활기조차 느껴졌던 그곳에서 나는 불의한 거대 권력의 횡포에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는 지극히 희망스럽고 아주 단단한 힘, 골리앗과 다윗의 대치선을 보았다. 이 사회의 구조악이 집약된 용산문제를 껴안은 현장교회와 길 위의 사제들의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 위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아우라가 순간 겹쳐 보이는 듯해서였는지, 교회와 사제직의 참된 의미가 온전히 구현되는 이 곳은 진정 이 시대의 살아있는 성소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미사가 시작되자 내 눈시울은 상복을 입고 앞자리에 앉아 있는 유가족 다섯 여인들의 뒷모습을 보며 바로 젖어들었다. 왜 비극의 현장에는 언제나 여인들이 있는 것일까. 젖은 눈시울 너머로 2천년 전 골고타 십자가 아래 서 있었던 갈릴래아 여인들이 오버랩 되며 어찌하여 과부들에 대한 야훼 하느님의 사랑이 각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마음이 헤아려졌다. 무엇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그분의 무조건적 옹호는 그들의 구원이 공동체 구원의 요체가 되는 까닭이었으리라. 지금 우리 사회엔 황금의 바벨탑을 거대한 축으로 하여 소용돌이치는 처절한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에서 상처 입어 죽어가는 갈대들이 얼마나 많은가. 무자비한 물질주의의 불야성, 그 휘황한 불빛에 가려 그들의 신음소리와 몸부림이 잘 보이진 않겠지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참된 정의에 대한 요구이며 강요된 그들의 아픔이 현실 속에 상존하는 한 우리 사회의 인간화는 헛된 꿈일 따름이다. 용산참사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이야말로 삽질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자비한 MB정권, 아니 아파트나 땅 값의 오르내림에 따라 넋 나간 듯 웃고 우는 우리 사회의 천박한 유물론적 가치관의 희생자이다. 그런 가치관이 만들어낸 MB정권이 오직 삽질에만 몰두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지은 <파우스트>에서, 삶의 쾌락과 만족을 찾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박사는 갖가지 향락에 몰두하다 어찌 찾아간 황제의 궁정에서 권력에 맛들이며 영주가 된다. 그의 봉토에 길이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 위해 간척사업에 손을 대지만 그의 야망은 매번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의해 엉뚱한 결과를 낳고, 특히 순박하게 살아가는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치스를 불태워 죽이고 땅을 빼앗는 참혹한 만행까지 저지르게 된다. “눈앞의 내 영토는 무한히 넓은데, 등 뒤에선 불쾌감이 나를 우롱하고, 시샘하는 종소리가 이런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내 훌륭한 소유물도 완전치가 못하다. 저 보리수 언덕, 갈색의 오두막, 무너져 가는 교회당은 내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쉬고자 해도 낯선 그림자들 때문에 오싹 소름이 끼친다. 저것은 눈에 가시요, 발바닥의 가시로다.” 이 독백에서 보듯 자기 영토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치스의 조그만 오두막과 교회를 손에 넣지 못해 안달하던 파우스트는 그들에게 매립지와 맞교환하자고 제안해보지만 “매립지 따위를 믿어선 안돼요. 우리의 이 언덕을 고수하세요!”라며 자신들이 살던 곳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들에 의해 일언지하 거절당한다. 분노한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그들을 매립지로 강제 이주시키도록 명령한다. 그러나 메피스토펠레스는 집에서 나오지 않으려 저항하는 그들을 집과 함께 불태워 죽임으로써 사건을 해결해버린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보고를 받은 파우스트는 “바꾸려고 했지, 빼앗으려던 게 아니었다.”라고 짐짓 원망하듯 탄식하지만 결국 빼앗은 땅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운다. 이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행동에서 목적달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개발지상주의로 치닫다 끝내 용산참사 같은 비극을 초래한 MB정권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이야말로 <파우스트>에 나오는 선량한 노부부 팔레몬과 바우치스 바로 그들이 아닌가! 용산참사 사건을 우리 사회를 거듭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연유가 거기에 있다. 아파트나 땅 값을 부추길 부동산정책을 펼칠 것이 불 보듯 뻔하기에 그 떡고물을 은근히 기대하며 MB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지역구의 지가를 올린다는 뉴타운개발정책의 깃발을 흔드는 후보에겐 무조건 표를 몰아주었던, 지극히 몰가치적인 천민자본주의사회에서 용산참사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비극적 사건이었다. 직접적인 책임이야 개발사업주체와 MB정권에 있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 역시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범인 것이다.
아마 용산사건 해결은 그가 실세총리냐 식물총리냐를 판단할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책임자의 사과, 수사자료 3천 쪽 공개, 타당한 보상대책의 수립을 통해 하루빨리 억울하게 죽임당한 다섯 분의 영혼이 영원한 안식에 들 수 있게 되기를, 한 맺힌 유가족들의 가슴의 응어리가 풀어질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무리하게 추진한 간척사업으로 이룩한 자신의 업적을 살펴보기 위해 선량한 노부부를 불태워 죽이면서까지 땅을 빼앗아 전망대를 만들었던 파우스트는 하필이면 그 순간 바로 시력을 잃게 되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이는 삽질의 환상에 젖어 있는 MB정권과 우리 사회의 앞날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을 좇아 개발을 하는가. 사람을 살리는 개발이 아닌 집이 사람을 몰아내는 비인간적인 개발은 탐욕스런 삽질 하나하나가 모두 참사를 부를 것이다. 결국 인간적인 길만이 참된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 그리고 정의는 평화의 다른 이름이다. 요한묵시록(18,24)에 보면 하느님의 심판을 가장 혹심하게 받는 곳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가 발견된 도성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로 흥건한 우리의 도성 서울은 어찌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