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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정유년 음력 9월 15일
(9월 15일 이면 보름달이다.)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 바다로 진을 옮기다.
벽파정 뒤에는 울돌목이 있는데,
숫자가 적은 수군으로써 명랑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를 불러 모아 약속하며 말했다.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라 했으며,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1,000 사람 이라도 두렵게 한다'함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여러분 장수들 여럿이 살려는 생각은 하지 마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다스릴 것이다.
조금도 너그럽게 용서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하다.
이 날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저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주다.
1597년 정유년 9월 16일
아침에 별방군이 와서 보고 하는데, 적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울돌목을 거쳐
곧 바로 진치고 있는 곳으로 곧장 온다고 한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3 척이 우리의 여러 배를 에워쌌다.
(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홀로 적진 속으로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비바람 같이 쏘아대고 있어도,
배 여럿은 쳐다만 보고 진군하지 안아 사태가 장차 헤아릴 수 없다.
여러 장수들이 적은 군인들로 많은 적을 맞아 싸우는 형세인 것을 보고,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물러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옆으로 돌진하면서
地자 총통, 玄자 총통 등 각종 총통을 정신 없이 쏘아 대니,
마치 나가는 것이 바람 같기도 하고,
우뢰 같기도 하였다.
군관들이 배 위에 빽빽하게 서서 빗발 치듯이 쏘아 대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갔다 한다.
그러나 적에게 몇 겹을 둘러싸여 앞으로 어찌 될지 한 가진들 알수가 없었다.
배 마다 사람들이 서로 둘러 보면서,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타 이르면서,
" 적이 비록 1,000 척 이라도 우리 배에게는 감히 곧 바로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일체 마음을 흔들리지 말고, 힘을 다해 적에게 쏘라" 고 하면서,
여러 장수들을 돌아 보니, 물러나 먼 바다에 있었다.
나는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자니, 적들이 대들 것 같아서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할 형편 이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명령하는 깃발을 내리고 또 초요기를 돛대에 올리니,
조항 참사 김응함의 배가 차차로 내 배에 가까이 오고,
거제 현령 안위의 배가 먼저 오다.
나는 배 위에서 안위에게 말했다.
"안위야 당신이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당신이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 간다고 어디가서 살 것 같으냐?" 하니
안위가 급하게 적선 속으로 돌진했다.
또 김응함을 보고 말했다.
"당신은 중군장으로 피하여 다니면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떻게 피할 것 같으냐?
당장 죽여야 겠지만, 적군의 세력이 우세하니 우선 공을 세우도록 하라" 고 하니
두 배가 곧장 쳐들어가 싸우러 할 때, 적장이 그 휘하의 배 2 척을 지휘하여
한꺼번에 개미 붙듯이 안위의 배로 매달려
서로 먼저 올라 가려고 다투었다.
안위와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죽을 힘을 다해서 몽둥이로 치고,
긴창으로 찌르고,
돌멩이를 수 없이 던져서 싸우는 바람에 배위의 사람들은 기진맥진 하였고,
안위의 격군 7, 8 명이 물에 뛰어 들어 헤엄 치고 있어도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배를 돌려 곧장 쳐 들어가
빗발치듯 어지럽게 쏘아대니,
적선 3 척이 얼추 뒤짚어 지고
녹도 만호 송여종,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줄이어 와서 적을 쏘아
한 놈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다.
항복한 왜놈 준사란 놈은 (부산 신 항 옆)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사람이다.
배 위에서 내려다 보며 , '저 무늬 있는 옷을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적장 마시다 '
라고 하다.
김돌손으로 하여금 갈구리를 던져 배 앞 쪽으로 끌어 올렸다.
그래서 곧 명령하여 토막으로 자르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꺽여 버렸다.
이 때 우리의 배들은 적이 다시 침범해 올 것을 알고 ,
일제히 북을 치며 나가면서
地자총통 玄자 총통 등을 쏘면서 화살을 빗발 처럼 쏘아댔다.
(참고 : 총통 이름은 천자문의
천지현황인데
천자는 구경은 큰데 사거리가 짧다.
현자는 구경이 작고 사거리가 길다.)
그 소리가 바다와 산을 뒤 흔들었다.
우리를 에워싼 적선 30 척을 부수자,
적들은 물러나 달아나 버리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다.
그곳에 머물려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도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가,
당사도(무안군 안태면)로 진을 옮겨 밤을 지냈다.
이것은 참으로 하늘이 도왓다.
가운데 명나라 수군 '진린' 이 적힌 곳에 '이순신 대교'가 건설 되어 있고
조선수군 '이순신' 적혀 있는 곳에 '묘도 대교'가 있다.
오른쪽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라는 글자 옆에 '남해대교'가 있다.
그러니까
묘도와 남해 대교 사이의 바다에서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 200 척은
일본 선박 500 척을 상대로 죽기까지 싸웠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최고 장수 이순신은 전사 했고,
그 외에 조선의 많은 장수와 수군들이 전사했다.
왜군은 우리 조선군과 명나라 군인들의 배가 넘는 숫자의 배들과 군인들이 죽었다.
조선 수군과 명나라 수군 연합국 전선 200 척과 일본 수군 500 척이 벌인
그 날 전쟁은 세계사에 빼 놓을 수 없는 해전이 되었다.
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자,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다.
1592년(선조 25)의 1차 침입에 이어 1597년에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였으며, 지상전에서도 점점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고전하였다.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점차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과 함께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어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수행하여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결과 고니시는 수륙양면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어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는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도록 방조하고는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통보했다.
이에 이순신은 적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음을 보고 크게 노하여 진린을 꾸짖었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泗川) 등지에 나가 있는
시마쓰[島津義弘]와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소오[宗調信]에게 연락하여
이들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동공격하면서
퇴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조·명 연합함대의 진영을 재정비하여 쳐들어올 왜군에 대비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순신은
배가 넘는 적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병사들에게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곧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들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다. 이때 진린의 명군이 와서 왜적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전사하여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 고득장(高得藏) 등 많은 명장들이 사망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시마쓰의 군사들과 함께 부산에 집결한 후 철수했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