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순과의 씨름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요즘 나는 고구마 순과 씨름중이다. 큰댁에서 고구마를 캐서 보내왔는데 자꾸만 순이 나는 바람에 씨름을 하는 것이다. 웬 생명이 이렇게도 질길까, 구차한 목숨을 구걸이라고 하는 듯 내 미니 순을 떼어내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
우선 일어나면 나는 포대부터 살핀다. 싹이 나오는 게 있나 해서다. 이만저만 귀찮은 일이 아니다. 보내준 정리로 봐서는 감사하기 짝이 없지만 신경을 쓰게 하니 고마운 줄도 모르겠다.
얼마 전이다. k시에 사는 형님이 고구마를 세 포대나 보내왔다. 도회지에 살면서 유휴지를 빌려 농사지은 수확물이었었다. 한데 이것이 말썽을 부릴 줄이야. 아직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싹을 틔우니 적잖은 분량이다 보니 순을 따내는 일이 만만치가 않다.
이즘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버릇처럼 먼저 고구마 포대부터 찾는다. 그리고는 포대를 들춰보고 밤새 싹이 났는지 살펴본다. 아니, 싹이 나는 건 기정사실이니 어느 정도 났는지 본다는 게 맞을 터이다. 싹이 트는 징후는 며칠 전에 포착이 되었다. 포대를 열어 보니 예기치 않게도 싹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실내 온도가 18도가 넘다보니 일어나는 현상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땅에서 캐온 지가 얼마나 됐다고 그예 염치불고하고 싹을 틔운단 말인가. 눈도 코도 없는 것이 기온에는 민감하여 파종시기로 착각해 훗날을 도모하려는 계략이 영악해 보이기만 했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놈들은 꽤나 종족보존의 집념이 강한 것 같다. 휴면상태도 살아있기는 하는 것이지만 기회를 엿보아 싹을 틔우려는 수작이 보통 집념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보았자 어찌할 것인가. 보이는 죽죽 내뜯기는 신세이니 자손을 남기는 일은 지난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걸 자세히 보니 그런 음모를 도모하는 녀석이 한 두 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콩나물시루처럼 일제히 트고 나오건 아니지만 그중 상당수는 뾰족 뽀족 순을 내밀고 있었다. 그걸 보니 여간 난감하지가 않았다. 이러다간 못 먹게 되는 상황을 넘어 무광 밭이라도 만들어 놓고 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힘들게 농사지어 보내준 형님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면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형님이 우리 집에 와서 이런 상황을 보다면 얼마나 실망할까. 칠칠치 못한 아우라고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미안한 생각을 넘어 당혹감이 들기 까지 했다. 해서 고구마 포대를 현관 쪽으로 옮겨 놓기로 했다. 드나드는 데는 다소 불편 하겠지만, 온도는 좀 떨어지는 곳이니 효과가 있지 않을까.
그리 해놓으니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그 바람에 그 쪽은 조금 어두운 지라 순이 나는지를 살피려면 전등을 켜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게 포대를 열어 재치고 살피는데 어긋 장을 놓듯 순을 내민 녀석이 발견된다. 그걸 보면 스치는 것이 있다. 살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여간 아니다. 자기는 죽더라도 2세는 남기겠다는 집착이 느껴진다. 여간한 집념이 아니다.
형님이 우리 집에 고구마를 보내준 것은 나의 턱없는 고구마 사랑과 애착과도 관련이 있다. 다른 것은 여느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나는 유달리 고구마를 좋아한다. 그런 내력은 집안의 어른의 식성과도 맞닿아 있다. 살아생전에 조부님은 고구마를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내가 어김없이 그것을 닮아서 식성을 잇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렸을 적에도 보면, 우리 집에는 늘 고구마가 있었다. 그 때문에 춘궁기에도 배고픔을 모르고 지낼 수 있었다. 당시 보면, 뒷방 한쪽 구석에는 대나무로 둘러쳐진 통가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확한 고구마를 저장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고구마는 서늘한 상태로 저장이 되었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썩어버리고 또 높으면 순이 나기 때문에 신경을 쓴 결과였다. 그런데 아파트는 집중난방시설이기 때문에 임의로 조정이 아니 되는 탓에 온도가 높이 오른 날은 변고가 생기게 마련이다.
고구마는 뜨거울 때 먹던지, 아니면 차게 두었다가 먹어야 제 격이다. 뜨거운 것을 잘못 먹으면 입천장을 데는 일이 있지만,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맛이 그야말로 환상의 맛이다. 한편, 차가운 곳에 두었다가 먹으면 껍질에는 당분이 배어나와 질척이지만 이것을 벗겨가며 먹노라면 홍시 맛은 저리 가라다. 고구마는 건강식품이기도 하다. 어느 책에서 보니 발암발생 억제률이 98.7%에 이르며 혈압을 낮춰주고 탁월한 변비개선 효과는 물론, 다이어트식품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종류도 밤고구마, 물고구마, 호박고구마로 나눠지는 것이 다양한 기능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고구마를 몇 뿌리씩 매일 먹는다. 주로 쪄서 먹는데, 뜨거운 걸 먹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차게 보관해두었다 꺼내 먹는다. 그러면 상태가 적당히 물컹하고 달착지근하여 입맛을 당기기 때문이다. 전부터 죽 그리 식 습관이 든 탓이다.
나는 이따금 고구마를 바라보면서 이모저모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왜 뿌리채소는 다른 열매처럼 그 속에 작은 씨를 간직해 두지 않을까. 종족보존을 위해서 다른 열매들은 대부분 씨를 그 속에 감추어 두고 있는데, 왜 물렁한 상태일까. 혹시 조물주가 일차 보호막으로 흙을 염두에 두고 흙 속에 묻어두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면 여간 흥미로운 상상이 아니다.
금년에 우리 집은 뜻밖에도 고구마 풍년이다. 그 바람에 전에 자주 발품 팔며 사서 나르던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나를 고구마 장수는 만날 때마다 빈말삼아 물어본다. "아저씨, 왜 고구마를 안 사가요" 그러면 나는 씩 웃고 만다. 누가 가져다주었다거나, 그만 먹기로 했다거나 말하기가 뭣해서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들으면 나도 몰래 흐뭇한 기분이 든다. 넉넉히 쌓아둔 분량이 부자가 된 느낌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몇 차례 밖에 꺼내 먹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순이 삐죽삐죽 나오니 이만 저만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하루도 아니고 매일 점검을 해야 하니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놈들이 참으로 끈질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물러날 내가 아니다. 간식거리이기 이전에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놈들은 계속해서 순을 내밀어 보겠지만 나는 놈들의 의도를 꿰뚫어 안 이상, 당하지 않고 바지런히 살필 것이다. 그러자니 앞으로 이러한 전쟁은 당분간 피해갈 도리가 없지 싶다.(2006)
첫댓글 선생님댁 고구마 이야기를 읽으니 옛날 할머니댁 고구마를 저장해 두던 고구마광이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아랫채 봉당에
땅을 파고 커다란 동굴을 만들어 그 곳에 고구마를 겨우내 저장해 두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들어 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었던 같아요. 옛날 선생님댁처럼 대나무로 에워싼 퉁가리에 저장하는 방법도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전에 우리고장에서는 뒷방에다가 대발을 엮어 둘러서 보관을 했지요. 읍내 친구집에 가니 동굴을 파서는 겻속에다가 보관하는걸 봤습니다. 지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모를 것입니다. 이번 여행은 오래 머물지 못했지만 즐거웠습니다.
추운 겨울에 먹는 군고구마는 별미 중에 별미가 아닐까 싶네요. 김이 모락모락나며 뜨끈뜨끈한 군고구마를 김치랑 먹는 그맛을 어찌 잊겠습니까.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저도 군고구마를 소재로 글을 써봐야 겠습니다.
저도 고구마를 좋아합니다. 전에 형님이 고구마를 보내왔는데 따뜻한 곳에 두어선지 순이 자꾸 나서 살피느라 애를 먹었습니댜. 그때보니 생명력이 대단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