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9일의 일이다. 그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있는 골프장에 갔다. 마침 날씨도 따뜻해 한창 기분이 들떠 있었다. 겨울에 골프를 치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미뤄왔던 약속이었기에 그 자리가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그날 자리를 함께 한 A씨는 골프에 있어서는 비기너(초보자)였다. 때문에 골프 매너를 잘 몰라 실수가 잦았다. 다른 멤버가 골프를 칠 때 큰 소리로 떠든다든지 함부로 라인을 밟는다든지 해서 내게 곧잘 싫은 소리를 듣곤 했다.
하지만 그 날 A씨는 유난히 매너가 좋았다. 오랜만에 치는 골프에서 A씨의 매너 점수가 급상승해 다소 의외였다. 그래서 나는 '매너가 좋아졌다'며 계속 칭찬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6번홀에서 사건이 터진 것.
16번홀은 코스와 접한 롱홀. 한참 집중하며 퍼팅하고 있는데 갑자기 A씨가 사라진 것이다. '어디 갔지?'하며 다들 자기가 친 공 지점 앞에 서 있는데 어디선가 "살려주세요"라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 설 정도였다. 지체할 겨를 없이 소리 난 지점으로 약 100m 정도 정신없이 뛰어가니 A씨가 얼음 연못에 빠져 빼꼼히 얼굴만 내밀고 있었다. 연못 옆에는 '수심 3m'라고 쓰여 있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연못은 홀 중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었다. 외국 같은 경우는 안전을 고려해 1m50을 넘지 않는데 한국 골프장은 그저 물을 많이 가둬야한다는 생각에 수심 3m 짜리 인공 연못을 만들어 사람까지 빠지게 만든 것.
A씨는 바들바들 떨며 한 손으로 겨우 옆에 있는 나무줄기를 움켜쥐고 있었고 겨우 입 위쪽만 연못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A씨는 머리숱이 적어(대머리) 머리카락을 잡아 위로 끌어올릴 수도 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손을 내밀며 "빨리 내 손을 잡아요"라고 했지만, 그는 나무줄기를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손을 놓으면 영영 연못 속으로 빠져 죽을 것 같았던 모양. 겨우 설득해 내 손을 잡는 순간, 그의 몸은 물속으로 한번 푹 빠지게 됐고 나는 허리까지 물 안으로 집어넣어 A씨의 손을 잡아 위로 끌어 당겼다.
내 허리를 잡은 다른 멤버들이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나를 끌어내자 물에 흠뻑 젖은 A씨가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때였다. A씨의 발을 붙잡고 있는 영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 놀라 숨이 턱 막혔다. 그 영가는 바로 1월 9일자 칼럼의 주인공인 '43년 만에 만난 친구' K가 아닌가.
한강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가 얼음낚시를 위해 뚫어놓은 구멍에 빠져 죽었던 K영가가 A씨의 발을 붙잡아 물속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지만 A씨가 구조되는 순간 자신도 따라서 올라왔다. 염으로 영가에게 '왜 A씨를 얼음 연못으로 끌고 들어갔느냐'라고 묻자 영가는 '물귀신은 한명이 물에 빠져야 뭍으로 나올 수 있다. 네가 A씨를 구해주는 바람에 나도 43년만에 진짜 뭍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무튼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물에 빠지기 직전 갑자기 A씨는 살얼음이 덮은 연못 위에 수북이 올려져 있는 골프공이 탐이 났다. 그래서 공을 주우러 갔다가 얼음이 깨지며 순식간에 저승 문턱까지 갔던 것. 1월 9일자 칼럼의 삽화는 한강에 생긴 얼음구덩이였다. 삽화는 그날 A씨가 빠진 얼음 연못과 일치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도 왜 얼음 연못으로 걸어갔는지 알 수 없다는 A씨는 농담 삼아 '귀신에 홀렸나보다'라는 말을 한다. 그 귀신이 내 친구 영가였다는 사실을 이번 칼럼을 통해 처음으로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