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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여러분”
정현철 (시흥안산지역지회 지회장)
“심장 박동 같은 거야. 자네가 사용할 스캐너”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스캐너는 ‘총’이다. 항상 노동자를 겨냥하고 있으며, 2분 이상 자리를 뜨면 경고를 울린다. 고객은 나의 ‘소중한 물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스캐너 위치추적장치를 통해 실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노동자인 듯 노동자 아닌 노동자 같은 ‘리키’는 ‘지점’과 대등한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었지만, 항상 이 ‘총’으로 감시당한다. 캔 로치 감독은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정보통신 혁명을 넘어 4차산업혁명 시대라 불리는 오늘을 살아가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정보통신 혁명이 노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것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불분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논의도 무성했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는 항상 감시당하며, 노동자인 듯 노동자 아닌 상태로,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가족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 옛날의 산업혁명이 자본주의의 얼굴을 하고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처럼.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말 그대로 팬데믹이다. 이를 둘러싸고 말의 향연도 무성하다. ‘세상은 코로나19 이전 세계와 이후 세계로 나뉠 것’이라고 한다. 어떤 세상이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세상이 이전보다 좋아질 수도, 더 나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총의와 힘의 크기에 의해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초기에는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총선이 끝난 지금은 이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팬데믹 초기, 상황 파악에 분주하던 제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될 사회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원격의료’를 강화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대다수 국민에게 혜택이 갈 ‘공공의료’ 강화로 갈 것인지, 소수 자본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원격의료’ 허용으로 갈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130주년 세계 노동절에 ‘코로나19 이후 세계’에 대한 작은 소망을 전해본다. 이 소망은 둘로 나눠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당장 지금 맞닥뜨리고 있는 코로나19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즉 포스트 코로나19시대에 대한 것이다. 좀 더 큰 이야기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코로나19가 던져준 화두는 깊은 성찰을 요구하기에 장단기 가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코로나19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는 분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2020년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는 흔히 3대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불평등위기, 기후위기, 평화위기가 그것이다. 재난도 불평등하다.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은 비정규직 노동자,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등 소위 취약계층 노동자다. 코로나19 이후 필자가 가장 먼저 받은 상담도 ‘5인 미만 사업장에서 해고’된 노동자였다. 고용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위기상황에서는 심각하게 도드라진다. 20년 전 IMF사태가 그랬고, 10년 전 세계금융위기가 그랬다. 두 위기를 겪으면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제도적으로 받아들였고, 비정규직이 일상인 세상이 펼쳐졌다. 기업 생존을 가장 먼저 보장하고, 기업이윤을 국가와 사회, 노동자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위기가 극복되어졌다. 그 결과 기업(이윤보장)을 위한 해고는 관대한데,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는 외면당했다. 처절한 투쟁을 동반하고서야 왜 ’해고가 살인‘인지 귀 기울였다. 이번 위기극복은 달라야 한다.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고,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 노동자가 좀 더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벌기업부터 사회적 책임을 다 해야 한다. 그동안 많은 이윤을 보장받은 기업이 이번엔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있게 위기 극복에 동참하고 가진 것을 풀어야 한다. 대기업이 자기 회사의 노동자는 물론, 하청업체인 중소 영세 기업과 상생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자본의 생리와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그래야만 지속가능한 기업이 될 것이다. 재벌 곳간부터 열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사회구성원 모두의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 기업만 특별한 수혜자가 될 수 없으며, 예외일 수 없다. 이것이 이전 (자본주의 모순에 의한) 경제위기와 이번 코로나19 위기와 차이점이다. 기업이 죽는다고 엄살피우면 노동자들은 이미 죽어있다.
누군가 제기했던 것처럼 ‘코로나 19 이전 사회가 정상상태’인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 대량생산-대량소비의 사회 시스템으로 되돌아가 가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돈이 돈을 낳고, 큰 자본이 더 큰 이윤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속성으로 인해 우리의 소비와 생활형태도 대형화되어 있다. 대형마트에서 쇼핑하고, 프렌차이즈 식당에서 식사하고, 쇼핑하듯 세계여행을 하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현대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은 불필요한 (과)소비를 조장한다. 그것은 자본이 노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불필요한 자원 낭비와 기후위기를 불러왔다. 코로나19로 인간 활동이 멈추자 지구가 건강해졌다는 보고가 세계 곳곳에서 들려온다. 인간 활동이 그동안 반 생태적으로, 지구에 해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반증이다. 이제라도 자본의 방식에 맞춰져 있는 삶의 형태를 바꾸고, 로컬과 꼭 필요한 소비를 중심으로 하는 삶으로의 변화을 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사회 전반이 재조직되어야 한다. 정보통신 혁명이나 소위 4차 산업혁명은 그런 방향에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활용 해야 할 것이다. 지구를 건강하게. 이것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모토다. 그럴러면 인간이 욕심을 줄일 수 밖에 없다. 개개인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적으로 지구와 함께 사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가 발견한 가장 놀라운 것 중 하나는 ‘국가와 사회의 역할’에 대한 것이다. 이번 사태는 국가가 왜 존재하며, 지방정부는 시민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그중에서도 전주시의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전주시는 해고없는 도시를 선언하고 고용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겠다는 선언을 했다. 고용은 기업의 역할로 이해하기 쉽지만 사실 국가의 책무다. 지방정부에서 고용유지를 위한 노력을 하겠다는 선언은 그래서 그동안 당연히 했어야 할 국가의 책무를 확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계노동절을 맞아 민주노동자 시흥연대도 시흥시에 ‘해고 없는 시흥’ 협약 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좋은 것은 널리 확산해야 한다.
재난소득은 국가와 지방정부가 시민에게 직접 생계를 보장하고 지원하는 제도다. 이전 위기에서 금융기관과 기업체(사업체)에만 지원했던 것에 비해 진일보한 조치다. 이전 위기 때 지원했던 돈들이 기업들과 임대소득업자만 살찌웠다. 그에 비해 국민들이 받는 혜택은 별로 없었다. 체감할 수 없었다. 이전 위기들이 지나간 후 기업과 국민간의 소득 격차는 더욱 크게 벌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해 논의할 때가 됐다. 좀 더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코로나19가 열어준 셈이다. 여기에 대해 코로나19가 드러낸 사회적 취약점을 제도적으로 시급히 보완해야 한다. 5인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전면적용,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 도입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생명과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교훈 중 하나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모범적인 방역에 성공할 수 이 있었던 것도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스, 메르스 등 이전 감영병에서 보여 줬던 국가의 무기력함에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또한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생명과 안전이 우선’이라는 감수성을 지닐 수 있었을까. 코로나19 방역성공은 이전 경험들과 교훈을 잊지 않고, 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공공의료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10% 수준에 불과한 공공의료기관을 최소한 30~40%수준으로 높여야 한다. 당장 시흥과 안산에도 공공의료기관이 없다.
여기에 대해 산업재해 문제도 함께 고민해야 할 숙제다. 우리나라는 매년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한다. 하루에 7명이 출근했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보다 10배나 많다. 이런 끔찍한 재해가 반복 되는 것은 미약한 처벌 때문이다. 130주년 세계노동절을 앞둔 지난 28일 이천에 참사가 발생했다. 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처참한 사고다. 사망했다기 보다는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2년 40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천에서 동일한 사고가 반복된 것이다. 사람들은 2008년 이천 참사의 처벌수위에 주목하고 있다. 당시 사고를 낸 기업은 사망자 1인당 50만원 수준의 벌금을 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기업에게 ‘벌금 내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힌다’는 시그널을 계속 던져주고 있다. 그러니 기업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생명과 안전보다는 자본의 이윤이 우선시되는 사회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코로나19를 이겨내고 있는 힘으로 산업재해도 제로로 만들기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우리 행정력이 보여준 놀라운 힘을 이제 산업현장에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코로나19는 노동(조합)운동에도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양보론으로 노동자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겻던 지난 시기 위기극복 방식을 벗어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기업은 고용을 유지할 테니, 노동자는 임금을 양보하라’는 프레임은 너무 진부한 방식이다. 고용과 노동자 생계에 대해서는 국가와 지방정부가 일정 정도 역할을 나눔으로써 기업-노동자가 졌더 무거운 짐을 나눌수 있을 것이다. 대신 기업과 노동조합과 자기의 역할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기업의 역할에 대해서는 위에서 이야기했다. 노조도 자기 역할을 해야한다. 노동조합은 단결을 생명으로 한다. 단결의 사전적 의미는 “많은 사람이 마음과 힘을 한데 뭉침”이다. 영어로 단결을 뜻하는 union은 그것 그대로 노동조합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비정규직이나 비정형 노동자가 사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이 동질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또한 기업 규모별 큰 임금 격차는 노동자를 더욱 분열시킨다. 게다가 노동자를 하나로 묶어 줄 노조 조직률도 낮다. 단결하려면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 마음으로 모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먼저 조직된 노동자가 미조직 노동자에게, 정규직 노동자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 단결은 동질성에서 비롯된다. 동질감을 느끼기 위한 사업을 펼쳐야 한다. 내가 가진 피라도 나눠야 한다. 그래서 시흥안산지역지회의 동양피스톤분회, 한국와이퍼분회, 가레트모션코리아분회에서 했던 헌혈사업은 작지만 소중한 일이다. 어려운 농가를 돕기위한 딸기, 농수산물 사기 운동, 경비노동자들에게 마스크 기부 운동 같은 좋은이웃과 안산시흥일반분회의 활동도 귀감이다. 내 것만 지키려다 보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법이다. ‘함께 살자’는 자본을 향한 구호이지만, 노동계급 내부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 연대 운동(상대적으로 임금이 높은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런 시기에 십시일반으로 연대기금을 마련, 정리해고 저지투쟁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이미 살길이 막막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가칭)연대소득이란 명목으로 소득지원하는 것)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코로나19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의 모습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미안해요. 여러분’이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토론하고 실천해야 할 시기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캔 로치 감독은 칸영화제에서 ‘미안해요, 리키’ 영화상영이 끝나고 이렇게 말했다. “When things are intolerable, we have to change them.”
첫댓글 좋은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