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랭크 와일드혼은 우리나라에서 이제 더 이상 낯선 작곡가가 아니다. 그동안 뮤지컬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회자되었던 그의 최대 히트작 「지킬 앤 하이드」가 올 여름 한국의 공연계를 후끈 달구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지난 7월 30일 프리뷰를 시작으로 8월 19일에 브로드웨이 벨라스코 극장에서 개막한 그의 신작 「드라큘라」에 관심을 쏟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주인공인 드라큘라 백작 역에는 2000년 리바이벌된 록 뮤지컬 「록키 호러 쇼」의 양성애자 프랭크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던 톰 휴잇이, 여주인공 미나 머레이 역에는 「아모르」에서 고운 목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선보였던 멜리사 에리코가 발탁되어 이번 기회에 스타로 발돋움할 것인가 하는 기대를 주었다. 토니상 한 번 못 받아본 프랭크 와일드혼이지만 지극히 팝적이면서 클래식한 감각도 얼핏 풍기려는 그의 멜로디가 이번 작품에서도 힘을 발휘할 것인가 하는 호기심도 컸다.
사실 이 작품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처음 반응은 '아니 벌써?' 였다. 사전 제작비만 1,200만 달러를 들인 초대작 「흡혈귀의 춤」이 지나치게 희화된 개작의 부작용과 스태프간의 불화로 인해 두 달 만에 막을 내린 게 고작 2002년 2월의 일이었다. 이 초대형 실패작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뉴욕 관객들로서는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 근거하여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또 다른 ‘흡혈귀 뮤지컬’의 성공에 대해서는 사실 부정적이었다. 물론 새로운 드라큘라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다. 그동안 브로드웨이에서 순탄하게 공연된 적이 한 번도 없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답게 「드라큘라」 역시 올해 봄에 공연된다는 발표가 여름으로 미뤄졌고 프리뷰 날짜도 두 번이나 연기되었으며 공연 초반에 여주인공 멜리사 에리코가 감기와 성대 이상으로 오프닝 이후 오랫동안 결장하여 생긴 엄청난 구멍은 사실은 매우기가 어려울 정도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언더스터디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닌데, 드라큘라에서의 미나 역의 언더스터디는 아무 감정도 없는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노래만 불러제껴 보는 내내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브로드웨이는 완벽한 드라큘라를 원한다!
「흡혈귀의 춤」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젊은 시절에 만든 동명의 영화를 바탕으로 했다면 「드라큘라」는 말로는 브람 스토커의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코폴라 감독이 원작자인 '브람 스토커'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것은 영화제목으로서 '드라큘라'라는 이름의 사용권 문제 때문이지 사실 해석 자체는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뮤지컬 버전의 드라큘라는 아주 한 술 더 떠서 그나마 새로운 해석도 없이(결말에 이르면 좀 다른 게 있긴 있다) 코폴라 감독의 플롯을 부끄럼 없이 줄창 따라간다. 무엇보다도 프랭크 와일드혼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플롯인 ‘문제 많은 남자주인공과 심지 굳은 여주인공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 뮤지컬은 차라리 '코폴라의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라고 하는 게 맞다.
「드라큘라」는 쇼 커튼 대신 소년, 소녀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프린트한 단단한 막으로 대체하고 있다. 마치 실존하는 조각을 사진으로 찍어 확대한 듯 매우 독특하다. 위아래 두 부분으로 나뉜 그 독특한 막 자체가 무대를 구성하는 요소이자 공연을 접하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공포감과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충분히 전달한다. 막이 위 아래로 열리면 어둠 속에서 마차를 타고 트랜실베니아의 낯선 성으로 달려가며 불길한 예감을 노래하는 조나단 하커의 모습이 드러나고 사정없이 채찍질을 하던 마부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사라짐으로서 그가 드라큘라 자신임을 암시한다. 쭈글쭈글하고 흉하게 늙은 드라큘라 백작은 조나단 하커의 짐 가운데 있던 하커의 약혼녀인 미나의 사진을 보고 전율하고. 이내 백작에 의해 성에 갇힌 하커는 백작의 세 부인에게 습격을 받는 등의 곡절을 겪는다. 그런데 문제는 백작이 쓴 가발, 의상까지 완전히 코폴라의 영화 복사판이라는 데 있다. 물론 그 시대에 유행했던 가발이나 의상 등이 분명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악마를 의마하는 두 개의 뿔이 달린 가발과, 질질 끌리는 가운을 꼭 무대버전에서마저 입혀야 했는가에 대해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런 부분은 아주 노골적으로 '어때 비슷하지? 응?' 하고 물어오는 것 같아 기가 막힌 부분.
세 부인 중 첫째 부인인 흡혈귀 여인은 백작이 하커 대신에 마을에서 가져온 어린 아기가 든 자루를 보자 자신이 인간이었을 때 가졌던 아기를 떠올리며 애절해 하지만 거기까지일 뿐, 한 때는 평범한 인간이었던 흡혈귀의 딜레마는 더 이상 아무 진전 없이 안개처럼 사라져 그런 장면을 꼭 넣으면서 시간낭비를 해야 하는지가 의심스럽다.(혹시 뒤의 장면 전환에 시간이 더 필요했나?) 조나단 하커의 목에서 피를 빨아먹은 백작이 순식간에 노인의 얼굴에서 멋진 중년의 남성으로 복귀하는 장면은 이미 피를 빨아먹으려고 고개를 숙일 때 결과를 예상할 수는 있지만 이런 마술같은 장면을 영화가 아닌 무대에서 보는 것은 사실 꽤 큰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이런 잔재주는 작품이 받쳐줄 때 더욱 빛나는 법이라서 작품이 모자라면 잔재주는 오히려 독이 될 수가 있다. 이와 비슷한 마술은 미나가 하커와 결혼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변신술을 쓸 때 다시 한 번 더욱 정교하게 사용된다. 이 드라큘라 백작은 공연 내내 두 명의 분신을 이용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연기를 펼쳐보인다. 대부분의 이야기 전개가 코폴라의 영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바로 미나의 역할이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 속에서 심지어 밴 핼싱 교수보다도 더 명민하게 빛을 발할 정도로 지적이고 결단력 있던 그녀, 하물며 코폴라 감독의 영화에서조차 자진해서 트랜실베니아로 향하는 미나와는 달리 이 뮤지컬의 미나는 전적으로 드라큘라 백작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
이 작품에서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은 드라큘라 백작이다. 그가 런던으로 향한 것도 미나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며 미나에게 자신의 피를 먹게 하여 반 흡혈귀로 만든 후 트랜실베니아로 도망치는 척 한 것도 미나를 그곳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도중에 그가 저지른 수많은 살인들은 뭔가. 루시와 함께 부른 '삶 이후의 삶'은 또 뭔가. 타고나길 악마라서? 사실 원작 소설이나 코폴라의 영화에서는 드라큘라가 밴 핼싱 교수의 공격에 의해 큰 타격을 입고 그 자신의 백그라운드인 트랜실베니아로 싸움터를 옮기는 것으로 설정되지만 이 뮤지컬의 드라큘라는 어떤 경우에도 손상받지 않는 전지전능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도망치는 시늉을 한 것은 죽은 아내의 환생인 미나의 손에 의해 자신의 고향에서 안식을 찾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스스로의 손으로 칼을 들고 자신의 심장을 친절히 겨냥해 미나의 손에 칼을 쥐어준다. 이 때 드라큘라가 하는 대사인 ‘날 자유롭게 풀어줘! Set me free’는 「지킬 앤 하이드」에서 지킬이 어터슨에게 죽여 달라며 애원할 때 소리친 바로 그 대사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다. 이 부분이 바로 코폴라 감독의 영화와 다른 해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미나는 그 자신의 의지로 눈물을 삼키며 전생의 남편이었던 운명의 사랑인 백작의 가슴을 찌른다. 주체는 미나다. 그러나 이 뮤지컬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미나가 보여주는 행태는 그야말로 화가 박박 치밀어 오르는 부분이다. 이미 백작과 깊은 공명을 나누고 있던 미나는 죽여달라는 백작을 붙들고 함께 도망가자고 애원한다. 죽지 말아달라며. 이게 뭐하는 짓이냐 말이지. 비극이 되려다 코미디가 되는 건 정말 한 순간이다. 물론 잔악한 흡혈귀가 용서받을 길은 죽음 뿐. 백작은 지킬박사가 어터슨이 거두려던 칼날에 스스로 뛰어든 것처럼 발발 떠는 미나의 손을 콱 움켜쥐고 스스로의 심장을 찌른다. 백작은 자신이 애용하던(?) 관 안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뒤늦게 현장으로 달려온 밴 핼싱과 조나단 하커 등이 흐느끼는 미나를 달래노라면 천천히 막이 내려온다. 이 결말, 엄청나게 낯익은 장면 아닌가. 지킬과 하이드 그 차제다. 결말의 고통을 극대화할 아무 넘버도 없고 밋밋하게 막 내려가는 동안 할 일이 없어 흑흑흑만 계속하는 미나와 고개 숙인 남자들(그니깐, 주인공이 못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뭐꼬, 이게!
아름다운 곡들, 그러나 여전히 식상한 주제
프랭크 와일드혼의 작품들은 웬일인지 브로드웨이에 올라올 때마다 꽤 큰 진통을 겪어왔다. 「빅터, 빅토리아」(1995)에 세 곡을 추가하는 것 으로 경력을 시작한 그의 출세작이 된 「지킬 앤 하이드」(1997)도 온갖 콘서트, 투어 버전과 브로드웨이 공연 버전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고 라이 선스로 공연된 나라마다 해석도 곡의 리스트도 약간씩 차이가 났던 독특한 공연이었다. 「지킬 앤 하이드」의 히트에 자극받아 같은 해 연달아 브로드웨이에 올라온 「스칼렛 핌퍼널(Scarlet Pimpernel)」은 공연을 두 번이나 중단하면서까지 두 번의 버전업 과정을 거쳤고 극장을 옮기기 까지 했다. 다음 작품인 「남북전쟁」(1999)은 직접 대본까지 썼지만 두 달만에 막을 내리는 참패를 겪은 후 「드라큘라」로 돌아오기까지 5년 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에 「까미유 끌로델」을 완성했지만 브로드웨이에 오지 못했고 차기작인 「시라노 드 벨쥬락(Cyrano de Bergerac)」을 준비 중이다. 프랭크 와일드혼이라는 작곡가를 좋은 관점에 보면 아무리 공연 날짜가 잡혀있다 해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는 배짱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보면 매우 무책임한 작곡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이렇게 작품을 올리기까지 수많은 곡절의 산을 넘는 와일드혼인데, 정작 올라온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어째 다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 난리를 떨면서 올린 작품들이 결국은 모두 단 하나의 주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킬 앤 하이드」를 「드라큘라」와 비교해 보면 형과 아우 정도의 차이 정도밖에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한 길을 걷는다. 차이라고 해야 「지킬 앤 하이드」의 주인공 지킬은 원래 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었다가 악한 측면인 하이드에게 자신의 내면을 빼앗기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을 저지르지만, ‘드라큘라’는 처음에는 공포의 주인공이면서 악의 화신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순수한 사랑의 힘을 믿는 사내가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이생에서의 행복을 빌며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쪽으로 변해간다는 선-악의 순서 변경만이 있을 뿐이다. 특히 장면과 장면 사이의 긴장을 유도하는 브릿지 음악은 순간적으로 「지킬 앤 하이드」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할 정도로 꼭 닮아있다. 이를테면 「지킬 앤 하이드」에서 어터슨과 댄버스경이 관객을 향해 독백을 하는 장면에 앞서 나오는 그 부분이 그대로 몇 장면의 브릿지로 쓰이고 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드라큘라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든다는 설정이나 여주인공의 허망한 흐느낌 가운데 막이 내려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로서는 다소 썰렁하기 짝이 없는 결말부분이 보는 사람의 힘마저 빠지게 한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다음 작품 「시라노 드 벨쥬락」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만약 공연이 성사된다면 이는 완전히 프랭크 와일드혼의 ‘마쵸남 비극 삼형제’라 불릴만하다. 코가 길어 슬픈 남자였던 시라노의 줄거리도 이중적인 생활을 사는 내용이며 결국 사랑하는 여인의 품 안에서 죽는다는 똑같은 결말을 갖는다. 단지 시라노는 악의 화신도 아니라 그저 좀 상당히 못생긴(결국은 문제 있는) 인물이며 자신이 연모하는 여자를 사랑하는 잘 생긴 부하를 위해 대신 연애편지를 써주는 사람이니 그 중에서 제일 안쓰러운 케이스가 될지도 모르겠다. 또한 비록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스칼렛 핌퍼널」의 주인공 퍼시 역시 평소에는 평범하지만 그 뒤에서는 조로의 모델답게 엄청난 활약을 펼치는 이중생활을 하는 인물이니, 이런 작품을 초지일관 고집하는 프랭크 와일드혼의 머릿속이 궁금하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욕망과 꿈을 파헤친 진지한 작품이 될 수도 있건만 그가 집중하는 부분은 오로지 미워할 수 없는 악당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깊이 이해하는 여주인공, 그리고 남자주인공의 죽음으로서 면죄부를 주는 결말에만 집중할 뿐이다. 혹시 그 자신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결함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지독한 컴플렉스의 소유자는 아닌지.
또다른 드라큘라를 기대한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만나기를 기다려왔던 그 「드라큘라」가 되기에는 함량미달이었지만 분명한 장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드라큘라 백작을 날아오르게 하고, 세 명의 흡혈귀 아내를 종횡무진 엄청난 속도로 공중에 띄우는 ‘플라잉’ 기술은 그동안 뉴욕에서 본 공연 가운데 단연 최고의 솜씨다. 물론 뮤지컬 전체에서 플라잉이 최고였다고 기억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이 공연에는 그 플라잉을 잠시 잊게 할만한 좋은 넘버가 몇 개 포함되어 있다.
첫 번째는 1막 끝 즈음에서 마침내 드라큘라의 희생양이 되어 흡혈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는 루시와 드라큘라가 듀엣으로 부르는 ‘삶, 그 다음의 삶(Life After Life)’으로, 곡 전체가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강렬한 곡이다. 2막에서 다시 한 번 미나와 드라큘라의 듀엣으로 반복되므로 최소한 후렴구는 뇌리에 팍 박힐 것이다. 두 번째는 미나가 드라큘라에게 홀딱 넘어가 그의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빨아먹는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언제나 내일이 있지(There’s Always a Tomorrow)’로, 장면 자체의 아이디어는 코폴라의 영화에서 그대로 따왔지만 듀엣곡의 후렴구 하나는 확실하다는 점에서 후렴구에 강한 프랭크 와일드혼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그 밖에 남자들이 드라큘라의 저택들을 습격하러 가기 전에 결의를 다지는 노래인 ‘칠흑 같은 밤(Deep in the Darkest Night)’ 등도 괜찮은 합창곡이다. 이 작품에 쓰인 곡들 의 특징이라면 곡의 제목이 곡의 후렴구를 형성하며 곡 자체의 기승전결보다는 인상적인 후렴구를 만드는데 집중했다는 데 있다. 하지만 「지킬 앤 하이드」에 비하면 독백조의 곡이 많이 줄었고, 드라마의 전개를 위해 캐릭터의 성격을 생각하며 곡을 쓰려 애썼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지킬 앤 하이드」의 경우 캐릭터의 성격과 곡이 제대로 부합하는 곡은 기껏해야 지킬이 하이드로 변할 때 부르는 ‘얼라이브(Alive)’ 정도였고 그 외의 곡들은 대부분 누가 부르든 등장인물의 성격과는 별 상관없는 곡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보니 많은 곡들이 독백일 수밖에 없으며, 음악 자체가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데 집중하는 스티븐 손드하임 스타일의 모던한 작품보다는 장르는 다르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차라리 히트곡을 만드는 데 집중한 로렌즈 하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즉, 그의 뮤지컬에는 히트곡은 있되 드라마와의 연계성은 없이 마치 독립된 곡처럼 불린다는 점이 그가 「남북전쟁」을 제외하고는 토니상 작곡상의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어쩌면 이 작품으로 그는 다시 한 번 토니상 작곡상 후보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수상은 이변이 없는 한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묘한 매력을 준다는 사실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누구나 매혹되지 않을 수 없는 드라큘라가 소재이기 때문일까? 이제 삶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하는 피냄새가 물씬한, 타인의 생명을 담보로 영원한 인생을 사는 존재인 흡혈귀를, 목욕재계하고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내 목을 콱 깨물어 내 심장을 제대로 움켜쥘 드라큘라 백작이 나와주겠거니... 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