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스센스님과의
대화에서 고려장이 나와 몇해전에 썼던 글
퍼옵니다. ----------------------------------------------------------------------------
고려장을 고려시대의 제도나 풍습처럼 역사적 사실로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경향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다양한 창작의 소재로 그 수가 늘어나더니 급기야는 인터넷에 플래시 만화로 카피되어 돌아다니는 지경에 이르러 있음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는 바입니다.
단언하건데 고려장이란 없습니다.
이에 관한 역사는 일제가 조선정신말살의 총체적계획에서 비롯되었던 것인바 그들의 무수한 조선역사날조의 실증적 증거들에서도
이미 만 천하에 드러났던 진실입니다.
일제가 제시한 역사기록이란 것이 지금 중국대륙의 군소지방에 속한 일개 부족에서 기근과
환란으로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하는 몇글자 기록이었던 것을 우리 역사에 포함시켰던 천인공노할 만행의 소치였음이 오래전에 재야사학자이신
김영주선생께서 수많은 동아시아의 역사기록을 조사하여 밝힌바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도 고려장이란 우리의 정서와 문화 관습 제도 등 어느것 하나와도 어울릴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나타나는 효의 제도나 정신은 유교적차원조차도 넘어서는 것이었음이 모든 사료에
명명백백히 드러나 있음에도 이러한 사술이 통한다는 것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도 역사를
날조하여 물증이라 제시하면 대부분은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게 됩니다. 더 나아가 제시한 물증이 허위로 판명 되더라도
민간에 설화처럼 유포시켜 놓으면 관념의 씨앗이 자라서 자연스런 사실처럼 인식하게 되는 무서운 흉계인 것입니다.
관념의 힘은
사실을 초월합니다. 수년전 회자되었던 제주도 효도관광에서의 노부모 유기나 여타 패륜의 범죄행위도 이러한 관념의 소산입니다.
한술 더떠서 이러한 자기비하관념에 힘입은듯 중국 오지에서나 있었다고 하는 오랜 옛적의 식인풍습까지 우리 역사물의 소재로
사용된 만화창작물까지 나오고 있는 가히 통탄의 도를 넘어서고 있는 현실정입니다.
이렇듯 결정적인 자기비하의 부정관념은
민족의 에너지를 옥죄일 뿐만 아니라 부정적 현실을 끌어당기는 에너지로 화하여 결국은 현실에서 그 상황들을 겪게 만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동안도 그렇고 지금도 별반 달라져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한국사 영역입니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는 교수가
강의하다 막히는 것이 있으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학자들로 부터 공부를 해와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사 자료가 한국보다 일본에 훨씬 더많고 그들이 없으면 한국사를 설명할 수 없다는 이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지금도 일부 계열의 한국사나 민속학 관련 연구자들의 소망이 일본학회의 지원을 받아 연수유학을 가는 겁니다. 한 일년만
일본을 같다와도 한국의 다른 학자들은 조무래기로 보일 정도로 일본적 시각으로 치밀하게 편집된 탈취당했던 우리 자료와 그들의 세밀한 기술에
녹아버려진다고 합니다.
일본의 조선정신말살정책은 1945년 그들의 패전과 함께 물러간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남아 다양한
창작활동을 왕성하게 전개하며 우리의 정신을 마멸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라도 깊이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국민 모두가 너나 할 것 없는 관심과 열의를 보여온 독도문제 보다도 어쩌면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는 스스로의 혼을 내어주는 자기
정체성의 붕괴를 어찌해야 좋을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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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1988 간행 졸저 조선철학에서 발췌)
원래 우리에게는 단군조선때부터 많은 역사서적들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단군조선시대에는 신지(臣智)라는 직책이 있어 매년 10월 '수두' 대제(大祭)에 우주의 창조와 조선의 건설, 조선의 지리와 성인의
위업, 그리고 후세에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것들을 들어 노래하였으며, 후세의 문인들이 그 노래를 편집하여 이두문 혹은 뜻문의 오행시로 기록하여
궁중에 비장하여 왔는데 '신지비사(神志秘詞)'해동비록(海東秘錄)' 등이 그것이다.
또한 북부여에는 단군조선 이후 자손들이
태평은부(太平殷富)로 자랑스러워 하던 중요한 사료가 많이 있었으며, 고구려 초기에는 조선상고부터 고구려 초엽까지의 정치상 사실을 기록한
'유기(留記)'라는 책이 백권 있었고, 후기에는 이문진 박사가 지었다는 '신집(新集)' 등의 책이 있었다.
백제에는 고흥 박사의
'서기(書記)'가 있었으며 신라에는 '화랑세기(花郞世紀)''선사(仙史)' 등 단군조선의 역사가 담긴 사서(史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서들은 주나라 이후 계급지배가 형성되어 침략적 마성을 갖게 된 전(前) 중국의 역대 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찬란한 역사와 전통을 시기하고 자신들의 침략과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침입과 동시에 조선역사사료를 파괴하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부여의 사료는 모용외의 난 때 소실되었고 '유기'는 위나라 장수 관구검의 침입때 파괴되었으며 그 외의 서적들은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삼국의 반쪽통일을 이룩한 당시 당나라 총관 이세적이 닥치는대로 사고(史庫)를 불태울때 소실됐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여진족의 침입, 그리고 조선왕조시대 임진왜란 때에도 남아있던 많은 사료들이 파괴되었다. 더구나 일제 침략 36년간은 거의 결정적으로
단군조선사가 뿌리 뽑히는 시기였다.
단기 4243년(서양기원 1910년)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찌 마사다께는 취임하자마자 곧 사서의
말살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6년간에 걸쳐 전국을 뒤져 51종 20여 만 권의 사서들을 압수하고 모두 소각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들은 눈을 까뒤집고 찾아내어 소멸시켰다. 그것으로도 안심할 수 없었던 일인들은 아예 사료의 변조에 착수하였으며 그 결과 삼국유사 등 많은
사료가 변조되기에 이르렀다. 단기 4255년(서양기원 1922년)에는 총독부 산하에 '조선사 편찬위원회'를 두었다가 단기 4258년(서양기원
1925년)에는 '조선사 편수회'로 확대 개편하여 조선역사를 철저히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날조하였는데 이때부터 단군조선사는 한낱 신화로 전락되고
마는 것이었다.
더욱 통탄할 일은 단군조선사의 파괴가 외래 침략자들에 의해 자행된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도
계급지배세력이 발생, 보편화 된 이후에 역대 지배층들은 단군조선의 역사와 유산을 말살하였을뿐 아니라, 춘추, 사대사관의 기치하에 자신들의
계급지배의 합리화와 안정을 도모하였다.
신라의 김춘추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당에 들어가, 자신의 아들인 법민(法敏)과
인문(仁問)을 인질로 바친 후, 본국의 의관을 벗어버리고 당나라의 의관을 착용하여 군신의 예의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진흥황 이후 본국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채용하였다. 또한 당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와 그 아류인 '사기''한서''삼국지' 등을 가져다 본국에
유포하였다.
또 고려시대 초엽부터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북진하여 옛 강토를 회복하자'는 세력들이 있어 힘을 키워오다가 묘청을
중심으로 평양에서 봉기, 북진과 고래(古來)의 사상, 전통을 되살릴 것을 주장하며 정권장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압록강 이남에 안주하려는
유학도의 두목인 김부식 등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이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에 기초하여 역사를 지어 유포하니 이것이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조선의 모든 민족을 '진한유민(秦漢遺民)'으로 묘사하고 단군조선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동, 북부여사와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서 삭제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공자의 인의(仁義)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삼국의 무사 입에서 유교경전의
관용어가 튀어나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뒤 몽골이 득세하여 위풍이 전국을 휘어잡자, 이에 밀착한 자들에 의해 당시에 저술된
'삼한고기''해동고기''삼국사' 등과 전래의 사료들이 상당수 파괴되고, 허다한 문헌 중 사대주의 고취자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그 아류인
'삼국유사' 등만이 남게 되었다. 이렇듯 고려시대도 지배층에 의한 우리 역사의 파괴와 왜곡이 진행되었으며 이런 책동은 조선왕조에서는 한층 더
심해진다.
조선왕조 초부터 중엽까지는 역사를 감추어 두던 관습이 극심해져서 '동국통감''고려사' 등 수종의 관행본 이외에는 개인의
역사저술이나 역사열람이 금지되었다.
또한 태종은 유학을 중시하고 그밖의 것은 이단시하여 조선민족의 역사와 사상의 근원이 되는
서운관(書雲觀)의 문서(신리비록이나 해동비록이 포함된)를 공자의 도에 위배된다 하여 일시에 불에 던졌으며, 세종은 역사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으나
그의 조부인 태조가 최영 장군의 북벌원정 중에 반군하여 사대의 기치를 들고 조선왕조를 창업한 고로, 정근 및 정인지로 하여금 '조선사략'을 지을
때 몽골의 압박 속에 위축되고 축소된 과거사를 그대로 의존하여 짓게 하고 이를 널리 유포하였으며, 정작 고래의 실록이 전파됨을 불허하고 규장각에
비장하여 두었다가 임진왜란 병화때 왜구들에 의해 모두 소각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하에서는 친일사학자들에 의해
식민사관이 내부에 침투해 들어오고 또 일부 지식층에 의해 서양중심의 역사관이 흡수되어지면서 단군조선역사의 연구들이
방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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