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문학 아카데미 금요포럼(2023.9.1)
토론문 :
토론자 김학면 시인
안녕하십니까? 저는 홍익대에서 재만조선인 문학과 관련한 공부를 하고 있는 김학면이라고 합니다. 『시문학』 아카데미에서 오양호 선생님을 뵙게 된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수 십년 동안 재만조선인 문학을 연구해 오셨습니다. 이렇듯 재만조선인 시문학 연구에 진력을 다하신 선생님의 『1940년대 전반기 재만조선인 시 연구』를 통해, 저는 이수형 시인의 삶과 그의 시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재만조선인 문학을 연구하시기 위해 기울이신 기간과 노력과 정성에 비하면, 저는 이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가 공부하면서 궁금했던 점 몇 가지를 『만선일보』에 게재되었던 문학 담론을 바탕으로 「억압을 헤쳐나온 사회주의자-이수형」과 관련지어 여쭤볼까 합니다.
첫째는 만주국 선계(鮮系) 문학인의 ‘국가/민족’에 대한 인식 문제입니다. 특히 『만선일보』에 문학작품을 게재했던 대부분의 문학인은 『만선일보』 기자거나 혹은 협화회, 만주국 소속의 기관이나 관련 기업에서 근무하던 인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국가/민족’에 대한 인식은, ‘만주국 선계(鮮系) 국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소속 불명인 이수형(李琇馨)의 시와 문학평론이 『만선일보』에 게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요?
둘째, 『만선일보』는 만주국 유일의 조선어 신문이라는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국한문혼용체에 버금가는 한자어 표기를 하였습니다. 『만선일보』에 실린 이수형의 「娼婦의 命令的 海洋圖」를 비롯한 『詩現實』 동인집 소재의 6편의 시(詩)도 조사와 어미를 제외한 시어들 대부분의 표기는 한자어였습니다. 이러한 표기와 관련지어 볼 때, 이수형의 시가 난해한 내용을 담은 초현실주의의 시(詩)라 하더라도, 『만선일보』의 번역, 혹은 검열 담당자들이 시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만일 문화협회 상무주사 다키무라 유조(衫村勇造)는 「동양문화의 종합적 결산-구주문화 결산과 미국문화(중)」(1940.6.27)에서 “만주 문화의 크나 큰 과제로서 각 민족이 가지고 있는 언어는 먼 장래에 있어서는 필연 하나로 변할 것이다. 혹은 그것은 하나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는 문화에 부합된 생활의 영위는 곤란할 것이다. 일본어 속에 만주어가 들어가고 혹은 조선어가 들어가고 만주어 속에 몽고어가 들어가고 조선어 속에 일본어며 몽고어가 들어가게 되어 각 민족이 한 말로 알 수 있고 혹은 거의 알 수 있는 그러한 종합적인 언어가 탄생될 것이다.”라고 하였고, 만주 신경의 『日日新聞(일일신문)』 주필이었던 다이치 다카오(大內隆雄)은 「국민문학 수립을 목표로-만주의 문학 운동과 그 지향(상)」(1940.6.22)에서 “각 민족의 각자 민족어에 의한 자유스런 문학 발전이란 만주 문학의 결정적인 요소이다. 국가가 문학에 대하여 부당한 제재를 가하는 때의 표본을 우리는 독일문학에서 여실히 보아왔다. 그곳에서는 벌써 문학다운 문학이 퇴화 멸망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문화의 세계가 사막화하여 버렸다. 문학에 합리적이기를 요구하는 때 문학은 도저히 성장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여러 개의 민족이 한 국가 안에서 각자 민족어와 개성을 가지고 문학 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만주국의 사정, 묵수를 버리고 진보에의 지향(志向)에 따른 만주국의 문화정책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특히 다이치 다카오는 “조선서 조선어에 대하여 어떤 제약을 과(課)하고 문학 발전에 다대한 좋지 못한 영향을 주고 있는 듯한데 이는 정치 문제인 만큼 나의 알배 아니지만 우리와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의견을 좀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더 개성적인 발전에의 계기 부여와 독자적 개성에의 부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국민 문화는 원활이 발전하여 갈 줄 안다.”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만선일보』는 「『詩現實』 동인집」 연재가 끝나자마자 1940년 8월 31일부터 동년 9월 5일까지 5회에 걸쳐 극언(克彦)의 「『超現實』의 시세계-『詩現實』 同人集評」을 게재하였습니다. 특히 극언은 이수형의 「娼婦의 命令的 海洋圖」를 “‘창부(娼婦)’의 두터운 화장(化粧) 같이 언어 ‘장식’의 실오리로 챙챙 감겨지다만 얼룩덜룩 고르지 못한 ‘화장술’”, “잡다스런 언어의 지방성(脂肪性)으로 수식”, “도회적(都會的) 감각이 아직도 합금의 융화를 가지지 못하는 데상력의 부족”, “이 시인의 기저를 흐르는 시정신과 시세계의 불투명과 공허성”, 즉 “본능적 육체의 지방적(脂肪的) 해양(海洋)에 음락(淫樂)하는 창부(娼婦)의 ‘숙명적(宿命的) 해양도(海洋島)’”, “어떤 시대나 어떤 이지(理智)가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둔탁(鈍濁)한 지방(脂肪)의 추잡(醜雜)스런 공허(空虛)가 언어와 감각을 학대(虐待)하는 명령(命令)인 것”, “이건 병인도 시인도 아닌 짐승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쉬운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시라고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수형을 비롯한 『詩現實』 동인들의 시는, “어떤 과도기에서 있는 이 악동시인들의 불행스런 양식(樣式)이고 그것은 역사의 이념으로 볼 때 실로 불행스런 병든 시인(詩人)”들로 규정하였습니다.
식견이 부족하여 『만선일보』의 담론을 바탕으로 장황하고 외람된 질문을 드린 점 부디 혜량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