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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연지해회(蓮池海會) 원문보기 글쓴이: 박병규
아미타경요해강의(阿彌陀經要解講義)
명 우익지욱대사(蕅益 智旭 大師)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저(著)
중화민국 원영 법사(圓瑛 法師) 강의(講義)
불설아미타경요해강의(佛說阿彌陀經要解講義)
요진삼장법사구마라집역(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譯)
명 서유사문 우익 지욱 해(明西有沙門蕅益智旭解)
상해 원명강당사문 도광 원영 강의(上海圓明講堂沙門 韜光圓瑛講)
제자 분타리자 명양 일신 기록(弟子芬陀利子明暘日新錄)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
지금 《아미타경요해》를 강의함에 있어서 크게 여섯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본경의 두가지 제목(二種題目)에 대하여, 두번째는 범어로 된 본경의 원문을 한문으로 번역하신 구마라집 법사에 대하여, 세 번째는 본경의 요해(要解)를 저술하신 지욱대사에 대하여, 네 번째는 지욱대사의 요해서문(要解序文)에 대하여, 다섯 번째는 본경해석에 있어서의 다섯가지 현의(玄義)에 대하여, 여섯 번째는 본경에 대한 본격적인 해석에 대하여 순서대로 강의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본경의 제목을 두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강의:
앞의 불설아미타경 여섯자는 경의 제목이고, 뒤의 요해 두자는 본경 해설서의 제목이다.
다시 경의 제목을 첫 번째는 각 경전의 개별적인 제목으로 두 번째는 모든 경의 공통적인 제목으로 나눌 수 있다.
강의:
경의 제목 여섯자(불설아미타경)를 다시 모든 경의 공통적인 제목과 이 경만의 특별한 제목으로 나눌수 있는데, 앞의 다섯자(佛說阿彌陀)는 별제(別題)라고 하며 이는 모든 경전과 다른 것으로서 이 경만의 특별한 제목이다. 뒤의 한자(經)는 통제(通題)라고 하는데 이는 모든 부처님 경장(經藏)에 공통되는 제목이며 부처님의 경장은 모두 경이라고 불리우기 때문이다.
다시 여기서 별제(別題:불설아미타)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한다.
강의:
이 경의 별제(別題:불설아미타)는 천태지의(天台智顗) 대사가 세운 모든 경전의 제목 분류 방법인 7종입제(七種立題)중의 단인입제(單人立題) 즉 부처님이나 사람이름에 의하여 경의 제목을 짓는 것에 해당한다. 모든 경전의 제목이 실로 무량하나 인․법․유(人․法․喩) 3자에 의하여 지어진 일곱 종류의 제목을 벗어나지 아니한다.
즉 인법유(人法喩)중 한가지씩만에 의하여 지어진 삼종(三種) 즉 단인(單人), 단법(單法) 및 단유(單喩)가 있고, 인법유(人法喩) 세가지중 두가지씩을 결합한 삼종(三種) 즉 인법(人法), 인유(人喩) 및 법유(法喩)가 있으며, 인법유(人法喩) 세가지가 모두 갖추어진 한가지(一種) 즉 구족입제(具足立題)가 있다.
단인입제(單人立題)란 무엇인가. 본경의 제목 ‘불설아미타경’과 같이, 설법주체인 석가모니 부처님과 설법의 대상인 아미타불은 모두 더 이상 갈 수 없는 최상의 깨달음을 이루신 분들이며 이 두분 부처님은 사바세계와 극락세계의 각 교주(敎主)로서 이미 구경극과(究竟極果)를 증득하신 분들인 데,경의 제목중에 법(法)도 비유(喩)도 없고 오로지 사람(人)만 있는 것을 말한다.
단법입제(單法立題)란 무엇인가.
대열반경(大涅槃經)과 같이,열반이란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法)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오로지 법(法)만 있을 뿐 사람(人)도 비유(喩)도 없다.
단유입제(單喩立題)란 무엇인가.
대보적경(大寶積經)과 같이 이것은 크나큰 보배의 무더기를 비유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오로지 비유(喩)만 있을 뿐 인(人)도 법(法)도 없다.
인법입제(人法立題)란 무엇인가.
문수문반야경(文殊問般若經)과 같이 문수(文殊)는 사람이며, 반야(般若)는 법(法)으로서 여기에는 비유가 없다.
인유입제(人喩立題)란 무엇인가.
여래사자후경(如來獅子吼經)과 같이 여래는 사람이며, 사자후는 비유로서 여기에는 법(法)이 없다.
법유입제(法喩立題)란 무엇인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과 같이 묘법은 법(法)이고 연화는 비유(喩)로서 여기에는 사람이 없다.
구족입제(具足立題)란 무엇인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光佛華嚴經)과 같이 대방광(大方光)이란 최상(最上)의 일승법(一乘法)을 말하며, 불(佛)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신 분이고, 화엄(華嚴)은 인지(因地)에서 닦은 만행(萬行)의 갖가지 꽃으로 과(果)의 무한한 덕(德)을 장엄(莊嚴)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인법유(人法喩) 3가지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이 실로 무량하나 모두 이 일곱가지 종류의 제목의 분류를 벗어나지 아니한다.
다시 본경의 경제(經題) 여섯자를 분설(分說)함에 있어서 먼저 부처 불(佛)자 (字)에 대하여 설명한다.
불(佛)은 원래 범어(梵語)로는 불타(佛陀) 2자(二字)로서 이는 깨달은 사람(覺者)으로 번역되며, 부연하면 최상의 큰 깨달음을 이룬 사람을 뜻한다.
중국사람들은 어떤 어구(語句)든 이를 간략히 부르는 습관이 있어 불타(佛陀) 2자(二字)를 불(佛) 1字(一字)로 줄여서 부른다.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을 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우리들은 제일 먼저 부처 불(佛) 자(字)의 의의(意義)를 명확하게 파악하여야만 한다.
불(佛) 자(字)의 의의는 실로 무궁하기에 그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간략히 강설하자면 불(佛)이란 깨달음을 말하고(佛者 覺也) 깨달음(覺)에는 본각(本覺), 시각(始覺) 및 구경각(究竟覺)이 있는데, 부처님은 구경대각(究竟大覺)을 성취하신 분이다.
또한 깨달음에는 자각(自覺),각타(覺他) 및 각만(覺滿)이 있는데, 부처님은 각행원만(覺行圓滿)을 갖추신 분이다. 또한 부처님은 법신(法身) 보신(報身) 및 화신(化身)의 세가지 몸을 갖추고 계신데 부처님을 믿고, 염하며,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우리들은 마땅히 부처님의 위 3가지 몸에 대하여 깊이 알고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면 본각(本覺)이란 무엇인가.
이는 우리 중생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각성(覺性)을 말하며 이 각성(覺性)은 우리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고 있는 것이기에 수행하여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본각(本覺)은 그대로 부처(佛)이고,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이러한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으므로 죄악심중한 범부(凡夫)에 불과한 사람들에게도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본각(本覺)이라고 부른다. 중생은 이러한 본각을 미(迷)한 까닭에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비록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일찍이 이러한 본각의 성품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마치 술취한 사람의 옷안에 갖추어진 밝은 구슬과 같고, 가난한 사람의 집안에 감추어진 보배와 같다. 그래서 모든 대승경전에서는 “일체중생은 본래로 부처니라.”,“중생은 본래 불도(佛道)를 이루었니라.”,“일체 중생이 갖추고 있는 본원진여(本元眞如)는 시방제불과 더불어 둘이 아니며 다르지 아느니라.”고 하셨다.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이 법(本元眞如)은 평등하여 중생이라 하여 낮은(모자라는) 것도 아니요 부처라 하여 더 높은(남는) 것도 아니니라(是法平等 無有高下).”라고 하신 것은 모두 다 위와 같은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춘 깨달음의 성품(覺性)이므로 본각(本覺)이라고 부른다.
시각(始覺)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본래로 불성을 갖추었으나 그것을 미(迷)하여 깨닫지 못한 깨닭에 홀연히 선지식(善知識)의 지도를 받거나 경서(經書)를 연구․독송하다가 비로소 중생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천진불성(天眞佛性)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래 갖춘 천진불성을 본래면목(本來面目) 또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도 부른다.
무시이래로 이러한 천진불성을 미(迷)했다가 지금에사 비로소 깨달았다(今始覺悟) 하여 시각(始覺)이라고 부른다.
그럼 구경각(究竟覺)은 무엇인가.
본각(本覺)은 이(理)에 속(屬)하고 시각(始覺)은 지(智)에 속(屬)하며,무루법(無漏法)과 불가사의한 작용을 갖추고 있으며 생사고를 염증내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본각의 차체적인 훈습의 인(內熏之因)에서 비롯되고, 선지식의 지도나 경서(經書)를 연구․독송함과 같은 외적인 훈습의 연(外熏之緣)을 만나 인연이 구족(具足) 상합(相合)하여 본각의 이(理)에 의거하여 후천적인 지(智)가 일어남으로써 비로소 깨닫게 되며, 이미 이렇게 깨달았을 진대는 지(智)로써 이(理)를 비추어(照) 때때로(時時) 마음의 빛을 되돌려 비추어(廻光返照) 일체의 망혹(妄惑)을 쳐부숨으로써 그러한 망혹(妄惑)이 멸진(滅盡)됨에 지혜(智慧)가 원만(圓滿)하여 지고 각자에게 본래 갖추어진 마음의 근원으로 다시 되돌아 가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청정(淸淨)한 심지(心地)가 드러나서 확연․철저히 대각(大覺)을 성취하게 되니 이것을 일러 성불(成佛)이라고 하며 이렇게 성불하신 분이야 말로 구경대각을 이룬 분(究竟大覺之人)이라고 부른다.
자각(自覺)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중생각자의 안에 갖추어진 본각(本覺)이 인(因)이 되고 선지식의 지도나 경서의 연구 등이 연(緣)이 되어 시각(始覺)의 지(智)를 일으켜 우리들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은 육신의 생멸에 무관하게 불생불멸 본래생의 존재로서 영존(永存)함을 확실히 깨달아 이러한 불생불멸하는 불성(佛性)에 딱 들어맞게 수행해 나감으로써 반드시 무상보리열반(無上菩提涅槃)을 증득하여 마침내 성불(成佛)한다. 이것을 자각(自覺)이라고 한다.
어떤 것을 각타(覺他)라고 하는가.
이것은 부처님이 자각(自覺)의 이(理)로써 계속적으로 다른 중생들을 교화(敎化)하여 그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도록 하거나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것을 말하여,이는 성문,연각 2승이 自覺 後에 다른 이들을 깨닫게 하거나 발심수행하게 하는 이타행원(利他行願)이 없는 것과 다르다.
각만(覺滿)이란 무엇인가.
이는 자각 각타의 이종(二種) 공덕(功德)이 원만(圓滿)한 것을 말한다. 자각원만(自覺圓滿)이란 오주번뇌(五住煩惱)를 끊고 네가지 지혜의 보리(四智菩提 즉 成所作智,妙觀察智,平等性智,大圓鏡智)를 얻는 것을 말한다. 즉 지혜를 완전히 갖춘 것을 말하는 것이다(則慧足).
각타원만(覺他圓滿)이란 삼지겁(三祗劫)이 넘는 오랜 수행과 백겁을 머물러 닦은 인지(因地)의 이타의 수행으로 모든 복(福)을 충만히 갖추어 복과 지혜를 두루 갖춤으로써 이른바 양족존(兩足尊)으로 존경받는 분이 됨을 말하며, 이런 분은 성불하신 분이며 이런 분이야 말로 각행원만(覺行圓滿)하신 분이라고 불리울만 하다.
또한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三身佛)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먼저 몸이란 무언가가 쌓여져 이루어진 무더기라는 뜻인데(身者 積聚之義) 범부(凡夫)는 업보(業報)가 쌓여 이룬 무더기로써 몸을 이루었음에 반해 부처님은 일체의 업(業)이 깨끗이 소진(消盡)되고 일체의 식(識)이 허공같이 깨끗해졌기 때문에 삼신(三身)을 구족하였다.
법신불(法身佛)은 이(理)의 무더기(積聚)를 말하는데, 부연하면 진여이법(眞如理法)의 무더기를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진여(眞如)는 원만히 청정하고 일체처(一切處)에 두루 미친다. 법신도 마찬가지이다. 고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淸淨法身 毘盧遮那佛)이라고 부른다. 범어의 비로자나는 일체처에 두루 미친다는 뜻이다.
보신불(報身佛)은 지혜의 무더기(積聚)를 말하며, 부연하면 이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무더기를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진지(眞智)가 원만(圓滿)하여 망혹(妄惑)이 완전히 멸진되고 정화되었기 때문이다. 고로 원만보신 노사나불(圓滿報身 盧舍那佛)이라고 한다. 범어의 노사나는 청정함이 충만함을 말하며 이는 결국 모든 미혹과 번뇌가 소진․정화되고 지혜만이 충만한 그런 분을 말하는 것이다.
응신불(應身佛)은 공덕의 무더기를 말한다. 즉 무량한 공덕의 무더기를 몸으로 삼기 때문이다. 삼지겁(三祗劫)의 오랜 기간동안 복덕과 지혜를 닦아 백겁종(百劫種)의 상호(相好)를 갖추어, 교화의 시기가 맞고 중생의 근기가 성숙되면 그 중생의 기틀에 응하여 몸을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고로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千百億 化身 釋迦牟尼佛)이라고 부른다. 범어의 석가모니는 능인적묵(能仁寂黙)이라고 번역되는데 능인은 성(姓)이요, 적묵은 이름(字)이다. 지금 이 아미타경을 설하시는 부처님은 다름 아닌 석가모니불이신데 이 부처님의 명호는 자비와 지혜 두가지 덕(德)과 자리타리(自利他利)의 양리(兩利)를 모두 갖추었다는 뜻이다.
석가는 능인(能仁)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자비의 덕을 나타내며, 능히 어진 은혜를 베풀어 중생을 제도하므로 이는 이타행(利他行)을 말한다. 모니는 적묵(寂黙)으로 번역되는데, 이는 지혜의 덕을 나타내며 적조(寂照)가 분명(分明)하여 지극한 이치에 묵연히 계합하였으므로 이는 자리행(自利行)을 말한다.
설(說)은 무슨 뜻인가.
고덕(古德)께서는 '설(說)'은 부처님께서 가슴에 품으신 바(本懷)를 기뻐하신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본경을 설하시기 전에는 이 원돈법문(圓頓法門) 즉 정토법문을 설할 시기(時期)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중생의 근기도 성숙되지 않아서 감추어 두고 선명(宣明)하지 아니하시고 부처님의 본회(本懷)를 드러내지 않으시다가 이제는 시기와 중생의 근기가 무르익었기에 중생들이 이 원돈법문(圓頓法門 즉 淨土法門)에 대하여 능히 스스로 믿고 신원(信願)을 갖추어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셨기에 부처님께서는 팔음(八音)과 사변(四辯)으로써 본디 가슴에 품으셨던 바를 기
쁘게 드러내어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역자주:
팔음(八音):부처님의 음성에 여덟 가지 뛰어난 특징이 있는 것을 말한다. 여덟 가지 특징을 지닌 부처님의 음성. ①극호음(極好音). 듣는 자를 불도로 이끌어 들일 수 있는 힘을 지닌 미묘한 음성. ②유연음(柔軟音). 부드럽고 온화한 음성. ③화적음(和適音). 조화된 부드럽고 우아한 음성. ④존혜음(尊慧音).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얻게 하는 음성. ⑤불녀음(不女音). 남성적이어서 외경(畏敬)의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음성. ⑥불오음(不誤音).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견해를 일으키게 하는 음성. ⑦심원음(深遠音). 심원한 도리를 깨닫게 하는 음성. ⑧ 불갈음(不竭音). 듣는 자로 하여금 다함이 없이 깨닫게 하는 명료한 음성.
사변(四辯): 사무애지(四無碍智)․사무애해(四無碍解)라고도 함. 불보살이 지닌 네가지 종류의 걸림없이 자유자재로운 이해․표현능력을 말함 (1)법무애(法無碍)는 온갖법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것 (2)의무애(義無碍)는 온갖 법의 의의(意義)를 잘 아는 것 (3)사무애(辭無碍)는 온갖 지방과 세계의 언어에 통달하여 자유자재로운 것 (4)요설무애(樂說無碍)는 이상의 세가지 지혜와 변설로써 자유자재로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는 능력을 말함.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