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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참법문(小參法門)
-2020.5.14.화엄전. 無比스님-
열 가지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이렇게 새로운 부처님을 한 분 모시고 화엄경 이세간품(離世間品) 한단락 공부해 보겠습니다.
‘열 가지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 이라는 뜻입니다.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
보살에게는 여러 가지 걸림 없는 삶이 전개됩니다.
열 가지 걸림 없는 능력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중인데 이번에는 특히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
당연하죠.
보살은 크게 깨달으신 분이고, 과거생에 많은 수행을 쌓았던 분이기 때문에 첫째 갖추어야 할 것이 지혜, 그리고 자비입니다. 지혜에 걸림 없다고 하는 것은 보살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 특히 불교의 모든 수행자들은 이 지혜를 먼저 다 깨달아서, 지혜를 잘 닦아서, 지혜를 잘 갖추어서, 어디에 치우치거나 편협하지 않고 걸림 없는 지혜의 능력을 갖추는 것이 아마 우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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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지혜의 걸림 없는 작용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무진변재(無盡辯才) 무애용(無礙用)
“이른바 다함이 없는 변재의 걸림 없는 작용과”
첫째가 다함이 없는 변재의 걸림없는 작용 그랬습니다.
무진변재(無盡辯才)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이치를 중생들에게 이해시키려면 변재에 걸림이 없어야 된다고 하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의해서 나온 교설이기 때문에 팔만장경이라고 하는 많고 많은 가르침이 있고, 특히 이 화엄경을 읽어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재가 뛰어날까, 정말 변재도 변재이지만 지혜가 밑바탕이 되어 있고, 그 지혜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는 변재의 작용, 그것이 또한 걸림이 없구나,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표현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표현하는구나 하는 것을 정말 깊이 느끼게 됩니다.
일체총지무유망실(一切總持無有忘失) 무애용(無礙用)
“온갖 것을 모두 지니어 잊어버리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과”
총지, 온갖 것을 모두 지니어, 총지(總持)라고 하는 말, 흔히 다라니라고도 하지요. 다 지니었다는 뜻입니다.
다라니, 총지(總持), 다 지니어서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인데 특히 다른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총지한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내용을 팔만장경으로 이렇게 펼쳐놨는데 그 많은 가르침들이 어디에 필요할까 싶지만 그러나 중생들의 근기가 다양하고, 또 여러 가지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저러한 경우에는 저렇게 설명해야 됩니다. 근기 따라서 상황 따라서 그들이 좋아하는 성향 따라서 다 알맞게 맞추어서 설명하려면 그렇게 많은 방편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팔만장경이 있는 거예요. 그것을 공부한 대로 다 기억하고 있어서, 적절하게 설명해야 할 장소에서 그렇게 적절하게 설명을 한다면 참 좋죠.
보살은 공부한 것은 다 지녀서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걸림 없는 지혜의 작용인 거죠.
능결정지결정설일체중생제근(能決定知決定說一切衆生諸根) 무애용(無礙用)
“일체 중생의 모든 근성을 분명히 알고 분명히 설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일체 중생의 근성을 결정하게 알고, 결정(決定)이라고 하는 말을 썼지만 ‘분명히’ 입니다.
확실하게, 분명하게 이것이 결정이라는 뜻입니다.
일체중생들의 근성을 우리가 사람을 안다 해도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죠. 또 분명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대충 압니다.
그렇게 대충 알아가지고는 거기에 적절한 설명이 나올 수가 없죠.
여기 보살들은 일체 중생의 모든 근성을 분명하게 알고, 분명하게 거기에 맞는 설법을 할 줄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보살의 경계, 말인즉슨 보살의 경계라고 했습니다만 화엄경은 부처님이 설한다고 하기 보다는 부처님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불설경(佛說經)이 아니라 설불경(說佛經)이다’ 이런 표현들을 잘 하지요. ‘부처님의 정신세계’를, 그리고 ‘부처님의 의보(依報)와 정보(正報)’를 ‘남김없이 다 드러내 놓고 설명하는 경전이다’ 이런 표현도 합니다.
여기도 ‘보살에게는 열 가지 걸림 없는 지혜의 작용이 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이것이 완벽하게 깨달은,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정신에 이르렀을 때 이러이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중생들의 모든 근성을 분명히 잘 알고 그 근성에 맞게 분명하게 잘 설법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일념중(於一念中)이무애지(以無礙智)지일체중생심지소행(知一切衆生心之所行) 무애용(無礙用)
“잠깐 동안에 걸림 없는 지혜로써 일체 중생의 마음에 행하는 것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일념 중에, 잠깐 동안에 무애지(無礙智) 걸림 없는 지혜로써 일체 중생의 마음에 행하는 바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이 중생들의 업으로 쌓여있는가, 무엇이 그 중생의 번뇌인가, 무엇이 그 중생의 병인가, 그 중생의 됨됨이를 속속들이 다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중을 모아놓고 경전에 근거해서, 경전을 겨우겨우 해석해서 소개하는 데 불과하지만 어떻습니까?
보살은 중생을 대상으로 해서 법을 설한다면, 그 중생을 확실하게 교화시키고 깨닫게 하고 감동시키고 감화시키고 그래서 결국은 인격향상이 되도록 성숙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떤 습관이 있는가?
어떤 업이 있는가?
어떤 카르마가 있는가?
그런 것을 환하게 속속들이 아는, 그래서 거기에 적절하게 약을 처방하는, 설법의 약을 처방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이런 뜻입니다.
지일체중생욕락수면습기번뇌병(知一切衆生欲樂隨眠習氣煩惱病) 수응수약(隨應授藥) 무애용(無礙用)
“일체 중생의 욕망과 따라다니면서 잠자듯이 하는 것과 습기(習氣)와 번뇌의 병을 알고 알맞게 약을 주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여기에 자세히 나왔네요.
일체 중생의 욕망, 어떤 하고자 하는 바가 있고, 무엇을 즐기는가 그리고 따라다니면서 잠 자듯이 하는 것 그랬는데 이것은 수면(隨眠)이라고 해서 번뇌가 수면번뇌 이런 표현이 있는데 번뇌의 일종입니다.
왜그런고 하니 번뇌는 늘 중생을 따라다니면서 떠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항상 따라다닙니다. 또 그 작용이 아주 은밀하기 때문에 알기가 어렵습니다. 마치 잠자는 상태와 비슷하다 그래요.
그래서 수면이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참 미세한 번뇌지요. 미세한 번뇌인데 그것이 쉽게 드러나지도 않고 중생들은 이 번뇌가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습기, 습기가 뭡니까? 자기 익힌 대로, 지은 업대로 그것이 습기입니다.
모든 것이 번뇌의 병인데 본래 사람들은 그냥 태어난 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본능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크게 판단력도 없이 그냥 아무거나 좋아하고 또 인연 닿는 대로 그냥 좋아하고, 좋아하다 보니까 그것이 하나의 습관이 되어서 자기 익힌 대로 그만 좋아하고 그렇게 살아왔어요.
모든 사람들이 다 거의 그렇게 삽니다.
그것이 업이 되어버렸어요.
업이 되고 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가면 거기에 길이 납니다. 그래서 길 난대로 자꾸 다니는 거예요.
그게 습기고 업입니다.
참 신기하지요.
그게 그만 익숙하니까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되고 부정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이 습관이 되다 보니까, 그새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무심코 아무 판단력도 없이, 음식이 됐든 행위가 됐든 말하는 것이 됐든 간에 그렇게 무심코 막 씁니다.
참 그게 큰 문제지요.
예를 들어서 곤충을 죽인다든지 무슨 살생하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살생이 아무리 미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생명체인데 생명을 빼앗는 일인데 미물이고 곤충이고 개미고 벌레고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하찮은 것이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동등하지요. 생명은.
그런데 그러한 것을 무심코 사정없이 살생하고 죽이고 저부터라도 모기가 물면 본능적으로 무는 데 손이 가서 딱 때리죠. 그런 습관이 있습니다. 그게 습관입니다. 길이 돼서 그래요.
크게 무슨 모기가 내 생명을 해치거나 모기가 좀 문다고 해서 큰 병이 옮아오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를 조금이라도 해롭게 하고 해치려고 하는 것은 본능적으로 반응을 하고 그것을 물리치려고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이지요.
보살은 그러한 것을 잘 알고 거기에 적절하게 알맞게 약을 주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
중생들의 각양각색의 번뇌의 병을 잘 알아서 거기에서 알맞게 적절하게 약을 처방해서 주는 걸림 없는 지혜의 작용이 있다.
참 그래야겠죠.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조금이라도 중생들에게 또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나는 인연들에게 어떻게 하더라도 좀 불교적인 도움을 주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그게 잘 통하지가 않습니다.
물론 내가 덕이 없어서, 덕이 부족해서 감화를 못 줘서 그런 것이 첫째 원인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표현한 대로, 보살들이 그러한 중생들의 번뇌의 병을 잘 알아서 거기에 알맞게 약을 처방한다고 하는 걸림 없는 지혜의 작용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쌓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많이 해서 빠른 시일내에 그런 지혜를 구축하는 것, 이것만이 우리가 할 일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자꾸 갖는 것이고 화엄경과 같은 최고의 가르침을 자주 접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일념(一念) 능입여래십력(能入如來十力) 무애용(無礙用)
“잠깐 동안에 여래의 열 가지 힘에 능히 들어가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보살의 십력이 있고, 여래의 십력이 있습니다.
열 가지 힘은 비슷한 뜻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는데, 부처님, 또는 여래를 열 가지 힘이라고 하는 말로 잘 표현합니다.
열 가지 힘의 사람, 열 가지 힘,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말 대신에 열 가지 힘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화엄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죠.
그런데 이것이 부처님이 가지신 열 가지 힘이 돼놔서 우리가 어떤 구체적인 힘인가 쉽게 이해는 안됩니다만 이해되는 것만 말씀을 드리면 제가 자주 첫 번째 힘인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을 이야기 합니다.
이거 하나만 우리가 이해를 해도 된다 그런 표현을 하는데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잘 아는 지혜의 힘 그런 뜻입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그것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의 힘, 그래서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된다’ 제가 이렇게까지 우리 입장에 맞춰서 설명하기도 하는데 그런 것이 첫째 있고요.
그다음에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이라고 해서, 업이 달리 성숙되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는데, 그 친절이 큰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경우도 있고, 또 차 한잔으로써 친절을 대신 받게 되는 경우도 있고, 사이다 한 잔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참 업 우리가 말은 쉽게 합니다만 업의 결과가 여러 가지로 익어갑니다.
그것이 달리 익어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꼭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가 아니지요. 예를 들어서 말 한마디 딱 했는데 꼭 그 결과가 말로써만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서 주먹이 돌아올 수도 있고, 또 합장하고 절을 하는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말을 했는데 말을 했으면 꼭 말이 돌아와야 옳을 것 아닙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하는 그 원리로써 업으로 설명한다 하면 꼭 그렇게 돼야 할텐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숙(異熟)입니다.
달리 성숙됩니다. 달리 성숙돼요.
말 한마디 했는데 주먹이 돌아올 수 있고, 합장하고 공경하는 그리고 영원히 상대를 존중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고, 그런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친절을 베풀었는데 거액의 유산을 또 받을 수도 있고 참 알 수가 없습니다.
업력난사의(業力難思議)라 그러지요.
업력이야말로 사의하기 어렵다. 그런 것도 있고요.
그런데 그러한 것을 환하게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환하게 다 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인연으로 지금 금생에 이러한 내 모습을 하고 있고, 내가 이러한 일을 하고 있고, 여기에 종사할 수 있고, 또 이 사람과 이러한 인연을 맺어서 싫든 좋든 우리가 더불어서 그렇게 사는가 하는 등등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지혜의 힘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십력의 세 번째는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정려, 해탈, 등지 그건 선정과 정과 혜를 함께 가진 그런 지혜의 힘을 말하기도 합니다.
정려 즉 고요히 생각하다 그게 뭡니까? 삼매입니다.
그리고 해탈 해탈을 얻었다.
그리고 정과 혜 선정과 지혜를 동시에 다 지녔다. 그래서 등지(等持) 같을 등(等)자 가질지(持)자.
옛날에 해인사에 퇴설당에서 장경각으로 올라가는 옆문이 조그만한 게 하나 있어요. 거기에 보면 등지문(等持門)이라 써붙여 놨었습니다. 그 밑에서 우리가 주로 참선을 하고 올라가면 팔만대장경을 모셔놓은 장경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의 작은 문이 등지문이예요.
가나 오나 선정과 지혜, 정과 혜를 동시에 지녀야 된다.
동시에 지니는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이다.
또 예를 들어서 선방에서 참선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등지(等持) 선정과 지혜 그것을 동시에 구축하는 수행이다 하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말고 그 현판을 볼 때나 그 문을 지나갈 때 늘 잊지 말라고 하는 의미의 편액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는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이라고 해서 근기가 또는 그 근성이 어떤 정도인지 상중하 중에 상근인지 중간 근기인지 하근기인지 참 살다보면 사람들의 근기가 각양각색이죠. 그러한 것을 환하게 꿰뚫어 아는 지혜의 힘이다.
또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라고 해서 가지가지 수승한 이해를 환히 아는 지혜의 힘이다.
어떤 중생은 무엇을 잘 알고, 어떤 중생은 무엇에 소질이 있고, 어떤 중생은 무엇에 소질이 없고, 정말 무슨 인연으로 불교 안에서 부처님의 밥을 먹고 살지만, 도대체 불법에 대해서는 신심도 없고 이해도 없어서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국을 평생 떠다 나르지만 국의 맛을 모르는 국자와 같다. 부처님이 오죽하고 그런 표현을 했겠습니까?
그러한 것들까지도 환하게 부처님은 알고 있는 지혜의 힘이다. 하는 등등으로 해서 열 가지 힘을 이야기 합니다.
여래의 그러한 열 가지 힘 속에, 보살은 충분히 그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살림살이로 하고 있는 걸림 없는 힘이다. 걸림 없는 작용이다. 그러한 작용이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무애지(無礙智) 지삼세일체겁(知三世一切劫)급기중중생(及其中衆生) 무애용(無礙用)
“걸림 없는 지혜로써 세 세상의 모든 겁과 그 속에 있는 중생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걸림 없는 지혜로써 삼세일체겁에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세월 속에서 또 그 속에 있는 중생들, 과거 중생, 현재 중생, 미래 중생, 별의별 중생들 그 많고 많은 중생들을 환하게 알아보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사람들도 지역 따라서 사람들의 근기가 다르고 습관이 다르고 업이 다릅니다. 지역 따라서도 그러려니와 같은 한국에 산다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서 전혀 다릅니다.
우리 어릴 때 살던 생각하고 지금 생각하고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저절로 달라지기도 하고요. 또 어떤 사람은 변하지 않고 옛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여기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세월 속에서 그 가운데 있는 중생들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환하게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어염념중(於念念中) 현성정각(現成正覺) 시현중생(示現衆生) 무유단절(無有斷絶)무애용(無礙用)
“잠깐잠깐마다 바른 깨달음의 이룸을 나타내어 중생에게 나타내 보이되 끊어지지 않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라.”
염념 가운데 정각을 이루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중생들에게 그 정각 이루는 모습을 다 나타내 보이되 그것이 어느 한 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고 나타내 보이는 걸림 없는 작용이다 그랬습니다.
아침이면 아침, 낮이면 낮, 밤이면 밤 끊임없이 자연 현상계만 가지고도 우리가 무수히 깨달을 수가 있고, 세상의 변화에서도 우리가 무수히 깨달을 수 있고 또 사실은 깨달음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른 깨달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자연현상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죠.
어느 날만 그런 것도 아니고 어느 해만 그런 것도 아니고 끊임없이 쉬지 않고 그렇게 우리에게 깨달음의 모습을 사실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것을 다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그렇습니다.
어일중생상(於一衆生想) 지일체중생업(知一切衆生業) 무애용(無礙用)
“한 중생의 생각에서 일체 중생의 업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과”
한 중생의 생각 속에서 일체 중생의 업을 아는 걸림 없는 작용 그랬습니다.
이건 참 그렇죠.
불보살들이 우리 중생을 볼 때 어떻습니까? 중생들이 하는 짓 뻔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 정도의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나를 빼놓고 누구누구와 어디서 얼마 동안 있다가 왔다, 또 어디에 가서 여행을 했다 그러면 ‘아 거기가서 무엇을 봤을까?’‘어떻게 재밌는 일이 있었을까?’ 그거 상당히 궁금해 하는데 알고 보면 하나도 궁금해 할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만치, 그 사람 상식만치 수용하고, 그 사람 상식만치 보고, 그 사람 상식만치 알고 오는 거예요.
그 외 없습니다.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한계를 벗어납니까?
궁금해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평소에 그 사람을 아는 그 정도 수준입니다.
그렇게 생각해야 돼요.
여기에 보면 한 중생의 생각에서 일체 중생의 업을 안다 그랬습니다.
중생이라는 거 뻔한 거 아닙니까?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더라도 그 중생들은 모두가 거기서 거기니까, 거기서 어떤 업을 표현하는가? 어떤 업을 짓는가? 어떤 업의 과보를 받는가? 이러한 것을 보살은 환하게 아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그렇습니다.
어일중생음(於一衆生音) 해일체중생어(解一切衆生語) 무애용(無礙用)
“한 중생의 음성에서 일체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마지막에는 그렇습니다.
한 중생의 음성에서 일체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걸림 없는 작용, 그렇지요. 중생의 말은 일체 중생의 말이 그 속에 다 포함됩니다.
그것은 한국어를 쓰느냐 영어를 쓰느냐 중국어를 쓰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중생들이 생각하는 대로 말이 표현이 되지요.
그러니까 중생의 어떤 정신세계 그 정신이 나름대로 말로 표현되니까 한 중생의 말을 들어보면 일체 중생의 말도 거기에서 벗어나지가 않는다.
그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한 중생의 음성에서 일체 중생의 말을 이해하는 걸림 없는 작용이 있다 이렇게 말하고 계십니다.
걸림 없는 작용을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보는데 참 보살은 걸림 없는 경지가 많고 많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여기에 열 가지를 표현하면서, 쭉 며칠 전부터 이 열 가지 걸림 없는 문제에 대해서, 전체가 100가지가 되겠지요. 한 가지에 예를 들어서 열 가지가 들어있으니까 전체가 100가지가 되겠습니다.
그것을 쭉 이렇게 공부하는 중입니다.
이것도 강의를 한 두 번 들어서 될 일도 아니고, 이것을 녹취를 한다든지, 경문을 우리가 보면서 깊이 생각하고 또 우리들의 삶에 대입시켜서 견주어 보고 해석해 내고 하는 노력이 있음으로 해서, 좀더 깊이 폭넓게 이해가 될 줄로 믿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첫댓글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大方廣佛華嚴經...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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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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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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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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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嚴經 離世間品 眞如相廻向
<열 가지 지혜의 걸림없는 작용>
치우치거나 편협하지 않고 걸림 없는 지혜
끊임없는 수행으로 완벽하게 깨달아, ‘인간이 이르러 갈 수 있는 최고의 정신' '부처님의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까...
할수 있다고 믿고 묵묵히 해 나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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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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