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19.첫째 날
결코 나에겐 없으리라 여겼었던 역마살이, 훈련에 들어간다는 현길 형을 만나고서 기어코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교환학생 1년 과정 때문에 재학생 신분으로는 마지막 연맹훈련이라 볼 수 있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함부로 마지막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선 안 되겠다 싶다. 15년 하반기부터 체력이 급하강되어 처음 하는 동계훈련이 겁나지만
지금까지 산악부에서 함께하며 배웠던 가장 큰 가르침, 먼저 부딪치고 봐라 라는 생각을 가슴에 새기고서 설악산으로 출발한다.
조심, 또 조심해서 다녀와야겠다.
20.둘째 날
새벽, 우제가 아침을 먹으라고 깨웠다. 신기하게도 설악에 들어오면 5시까진 공복으로 버텨도 말짱하다가 저녁시간이 되면 밥통에 기를 쓰고 달려들게 된다. 결국 입맛이 없어 아침을 거르고, 맘에 드는 조로 가라는 연맹회장님의 말씀에 백중이에게 운행일정을 물었다. 2박3일 용대리 코스라 답한다. 잽싸게 경대조로 발을 옮겼다.
본 일정은 환승을 하여 채석장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입산 통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베이스로 돌아와야 했다.
도착하자마자 박철융이 부산스레 움직이더니 부원들을 모아서 이퀄라이징 교육을 한다고 외쳤다. 이퀄라이징 시스템을 배우고 처음으로 바일을 얼음에 찍어보는데 생각보다 잘 박히지 않아서 금세 다음날 운행이 걱정 된다. 백중이는 지금쯤 덜덜 떨고 있을까?
21.셋째 날
드디어 처음으로 본격적인 빙벽을 하는 날이다!
토막골로 가는 어프로치는 두 시간 반 정도, 전날 현길 형이 텐트에서 걱정하셨던 대로 뒤쳐져 걷다가 잠시 길을 잃었다. 앞에 파란 옷을 입은 부원이 아른거리기에 눈대중으로 쫓아갔는데, 알고 보니 우제가 볼일 볼 자리를 찾아 헤매는걸 뒤따라간 것이었다. 결국 우제가 응아하는 모습을 보고 외마디 비명을 질러버렸다.
미안해..근데 형 시력 안 좋아!
형제폭에 도착하여 민철형께 기본 등반 법을 배웠다. 처걱처걱 얼음에 날이 박히는 소리가 좋아 빨리 등반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팔에 힘이 빠지고 얼음에 발이 일자로 박히지 않았다. 배운 대로 했는데도 힘이 연습했을 때 보다 두 배는 더 들어가 이내 하단에서 매달리고 말았다. 후배들은 같은 길을 두 번 오르면서도 잘 올라가는데 중간에서 숨을 고르는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렇게 나는 1학년 시절로 돌아가 비명 반, 등반 반으로 버둥버둥 얼음을 찍고 올라갔다. 이 페이스로 상단까지 올라가면 운행이 더 느려질 것 같아 하단에서 하강했다.
하산 길에 혜영이와 나란히 길을 걸어가는데 교정형이 설악가를 청곡 하셨다. 내심 혜영이의 설악가가 듣고 싶어 가만히 있으니 혜영이가 설악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1학년 설악에서 슬랩 교육을 받고 오리걸음으로 하산하던 모습이 기억 나 잠시 우습다가 씁쓸해졌다. 산악부 생활은 줄을 달고 바위를 오를 때 빼고는 모든 순간이 함께였는데 이렇게 생생한 순간들도 모두 추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설악가를 배우며 열을 맞춰 걸어가는 1학년들이 너무 부러워졌다.
22.넷째 날
복에 겨웠다가 미지근(?)해진 날이었다. 전날 요리대회에서 닭전으로 2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정형님께서는 우리를 해수피아로 인도해주셨다. 그렇게 꿈같던 목욕을 끝내고 찜질을 시작하기 위해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1시가 다 되었다. 6시 기상인데..
다음날 아침 비몽사몽으로 씻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얼굴이 많이 부어있었는지 다들 몸무게를 묻는다.
경멸하듯 쳐다보는 박철융 눈땡이를 쳐주고 싶었다.
오늘도 입산통제로 인해 등반을 못하게 되었다. 일단 아침을 먹고 일정을 정하기로 하고 베이스로 돌아와 보니 길형은 야영장을 떠나고 없으셨다.
23.다섯째 날
연맹 마지막 날이다. 일정은 천와대 3피치 였는데 등반시간이 많이 지체되어서 1피치에서 탑로핑 하기로 했다. 손바닥과 암벽화로 짚으며 올라가던 길을 바일과 크램폰을 차고 삐대며 올라가려니 역시나 힘이 많이 들었다. 또 바람이 많이 불어서 1피치 중간 즈음엔 손가락이 꽁꽁 얼어 감각이 없어졌다. 교정형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어 하셨다.
중간에서 바일을 거는 것으로 씨름을 하고 있는데 맙소사, 크램폰이 벗겨졌다.
결국 중간 턱에서 하강해야했다. 이로써 첫 빙벽훈련에 와서 완등을 하나도 못 한 셈이다.
내려오는 길에 아쉬워서 한숨을 푹 쉬었다.
하산주를 하고 어느 정도 마시다가 산행평가가 시작되었다. 순조롭게 넘어오다가 내 차례가 되었는데 느낀 점을 말하다가 울고 말았다. 어쩌면 과 생활보다 더 많은 의미를 두었던 산악부 활동이 허무하게 끝나버릴까 두려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길형에게 전화를 걸어 이러한 일이 있었다 말했는데 그건 내 스스로 선을 긋는 행동이라며 훈계를 주셨다. 통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졸업을 한다고 해서 산악부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울고 마음을 추스르다가 누가 따라줬는지 모르겠지만 양주를 샷으로 때리고 기절하듯 필름이 끊겼다. 다음날 여기저기서 나타난 제보자들이 나의 만(취)행에 대해 일일이 다 말해주어서 너무부꾸뎌워땅>0<
처음은 아니니 동생들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쨌든 비록 완등은 못했지만 왜 형들이 여름보다 겨울을 더 기다리시는지 바로 이해가 될 정도로 빙벽은 매력적인 등반이었다. 만약 1학년 동계에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몰래 따라왔다면 아마 그 다음해부터 억지로라도 동계 훈련을 자처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1학년보다 많았던 동기들 덕에 1학년 동계훈련을 미약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어 좋았다.
첫댓글 수고하셨어요 형!!
효죵아 지리산 GA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