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간다. 한번이 두 번 되고 세 번 되어 어언 70번째이다. 억겁의 무한한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토막 내어 초, 분, 시간…… 년, 세기로 나누고, 작은 토막마다 의미를 부여해 연말, 하지, 동지 등의 이름을 붙인다. 수십 번 맞이하는 연말이지만 항상 처음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연초에 품었던 다짐이 연말이 되면 되돌이표가 되고, 후회를 거듭하다 현실과 타협한다.
꿈에 부풀어 세상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겠다는 희망찬 청춘이 지나고, 돌아볼 새도 없이 장년이 지나 은퇴를 하니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이 무력감을 준다. 세상을 바꾸기거나 인생을 바꾸기는커녕 내 주위의 것들 – 가정이나 사회 등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겨우 집안 가재도구나 이리저리 바꿀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퍼진다.
불리는 이름이 어린이에서 총각으로, 또 아저씨에서 어르신으로 바뀔 동안 머리는 백발에 눈자위가 꺼지고, 얼굴엔 심술 주머니(하안검)가 불룩해진다. 팔자(八子) 계곡이 깊어지고 이마와 눈가엔 자글자글 주름살이 늘어난다. 지인 전화번호도 기억 못 하고 대화에‘거시기’가 늘어난다. 쉽게 삐치고 고집불통이 되어가고, 기회만 있으면 젊을 적 자랑질에 주위의 눈초리가 싸늘해진다.
어렸을 적엔 밥 굶는 사람들이 주위에 널리고 걸인들이 대문에 줄을 이었다. 칡과 삘기로 배고픔을 달래고 송기(소나무 속껍질)와 쑥버무리로 보릿고개를 넘겼다. 한입이라도 줄이려고 자식들이 여남은 살(10여 세)만 되면 남의집에 일하러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 왜 나를 버렸나요. 한도 많은 세상 길에 ....”,“하늘마저 울던 그 밤에 어머님을 이별을 하고 …” 하는 노래가 회자되었다.
밥 한 끼 하려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쌀을 씻어서 솥에다 앉히고 땔감으로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목욕은 연례행사로 명절이나 되어야 하는데, 솥에 물을 끓여서 형제들 차례차례 어머니가 목욕을 시켰다. 산에서 구한 땔감으로 군불을 지펴 방을 덥혔고, 빨래는 우물가나 물을 길어다가 했다. 흐릿한 등잔불 밑에 길쌈을 하고, 전화를 걸거나 받으려면 이장 집을 찾거나 읍내 다방을 찾았다.
선조들과 우리 세대의 노력이 곁들여져 후진국, 중진국을 거쳐 선진국이 되었다. 예전 세밑엔 캐럴이 넘쳐나고 성탄, 연하 카드가 성행했다. 카드 글귀 쓸려고 머리도 쥐어짜고 다른 사람 글귀도 커닝했다. 연말 모임이 넘쳐나 일정 조정하느라 즐거운 고민을 했다. 성탄절이 외국풍이고 과소비라 해도 좋으니 불황에 짓눌린 잿빛 거리에 캐럴이라도 울렸으면 좋겠고 그 시절이 그립다.
갈수록 바쁜 세상이 되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성탄 카드나 연하 엽서도 사라지고 저작권 문제로 거리의 캐럴도 없어졌다. 이젠 연말연시라야 SNS에 떠도는 알량한 동영상을 받아 전달한다. 동영상이 의례적이고 천편일률적이라 요즘은 그마저도 안 보낸다. 간단한 안부 메시지는 성의가 없어 보이고, 친한 사이가 아니면 전화 통화도 난감해 인간관계가 삭막해지는 것 같아 아쉽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길이는 같지만, 나이가 들면 세월이 빠르게 느껴진다. 도파민 분비가 약해져 자극 강도가 약해져 기억이 희미해져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흥미롭거나 충격적인 일은 오랫동안 기억하지만 반복되는 일에는 반응하지 않고 상실감 등의 감정이 많아져 시간이 빨리 가는 것으로 느낀다. 뇌가 한 가지 순간을 온전히 느끼지 못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나이 든다는 것은, 내 곁에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둘 떠나보내는 것이다. 생의 목표가 사라지고, 의욕도 엷어지고, 희망이 사라지는 나이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현실을 인정하자.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내일을, 우리는 매일 누리고 있다. 남은 생애 십여 년, 하고 싶은 것 하고 건강관리에 집중하자. 수억 개의 토막중 한 개, 다시 못 오고 사라져갈 2023년이여, 잘 가라! 행복하였다, 그리고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