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화(李世華, ?~1238)는 고려 후기 문신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 열전에는 등장하지 않으나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이세화 묘지명」(『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2)을 통해 상세히 알려집니다.
정주이씨(貞州李氏, 본관 정주·현재 개성 개풍 일대)의 시조로 전하며, 자는 거실(居實)입니다. 아버지는 검교대장군을 지낸 인물(이름은 미상), 어머니는 해양군부인 김씨입니다.
무반 가문 출신으로 추정되나 문과를 통해 관직에 올랐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습니다.
주요 인적 사항과 관력
- 1198년(신종 원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202년(신종 5년) 병과로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 희종 때 다방·내시 등을 거쳤으며, 강종 사후 잠시 면직되었다가 견주 감목 등을 역임했습니다.
- 1216~1217년(고종 3~4년) 도병마녹사로 정융분도원사 조충(趙沖) 막하에 들어가 거란 유종(거란 잔당) 토벌에 참여했습니다. 조충의 천거로 대영서승이 되었고, 이후 백령진장으로 나가 향교를 처음 세워 향리 자제들을 교육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이 경험이 훗날 대몽 방어에 도움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 이후 신호위 녹사·도병마 겸직, 우정언·우사간 지제고, 전중시어사, 남원부사, 동주목사 등을 지내며 행정력과 선정으로 평판을 얻었습니다.
최충헌 집권기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최우 집권기에 능문능리(能文能吏)로 인정받아 승진했습니다.
- 1231년(고종 18년) 경상도 안찰사로 있을 때 제1차 몽골 침입 시 신속히 군사를 이끌고 구원군에 합류해 지휘력을 발휘했습니다.
- 1232년(고종 19년) 예빈소경·어사잡단을 거쳐 광주부사(또는 안무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강화 천도 후 중부 지방의 핵심 거점이었던 광주(廣州, 현 경기도 광주 일대)를 지키게 된 것입니다. 1235년 조산대부 예부시랑·우간의대부· 보문각직학사·지제고로 승진했고, 이부시랑 등을 지냈습니다.
1237년(고종 24년) 청주산성을 방어한 뒤 사재경 등에 올랐습니다.
- 1238년(고종 25년) 음력 8월 15일 집에서 달구경을 하다 갑자기 쓰러져 다음날 새벽에 사망했습니다.
핵심 업적: 1232년 광주산성 전투
이세화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제2차 몽골 침입(1232년, 살례탑 지휘) 때의 광주산성 방어전입니다. 강화 천도로 몽골이 강화 위반으로 간주하고 재침했을 때, 조정은 중부 요충인 광주를 지킬 적임자로 그를 파견했습니다. 그해 겨울 11월 몽골 대군이 수십 겹으로 포위하고 여러 달(약 2개월 이상) 동안 온갖 계략으로 공격했으나, 이세화는 밤낮으로 성을 수리·방비하며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과 기이한 계책을 구사했습니다. 몽골군을 다수 사로잡거나 죽이는 전과를 올려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했습니다. (묘지명 기록: “밤낮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며 상황에 따라 대처하되 기이한 계책을 내어 혹은 사로잡고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오랑캐들이 불가능함을 알고 드디어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 전투는 고려 중부권 최초의 승전이자, 몽골 주력의 진로를 교란하고 병력 분산을 유도한 점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했습니다. 살례탑이 이후 처인성으로 남하하다 전사한 배경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광주 주민(입보민)과의 일체된 항전이 결정적이었고, 그 공으로 1235년 광주민에게 상요·잡역 면제 등의 집단 포상이 내려졌습니다.
이세화 자신은 전투 후에도 3년가량 광주에 남아 만일의 사태에 대비 했습니다. 1237년 제3차 침입 때도 청주산성을 굳게 지켜 몽골군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역사적 평가
이규보는 그를 “문·무를 겸전하고 행정력과 군사적 재능까지 갖춘, 당대 보기 드문 온전한 인재”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정사에 열전이 없는 것은 사료 선택의 한계나 무신정권기 기록의 편향 때문일 수 있으나, 묘지명을 통해 대몽 항쟁 초기 중부 방어의 숨은 주역임이 분명합니다. 거란 유종 토벌 경험과 지방 행정 경험이 결합된 실무형 인재로서, 최우 정권하에서 문무 겸비의 관료상을 보여줍니다. 정주이씨의 시조로 후손들이 이어졌으며, 그의 활약은 대몽 전쟁에서 관군과 지방민의 협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사료의 한계로 생년 등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02년 급제와 1238년 사망을 기준으로 보면 대략 50대 후반~60대 초반에 생을 마친 것으로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