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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 영성의 현재와 미래
I. 기독교 영성에 대한 도전적 요소
오늘날 종교다원주의적인 문화나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평가하기를 영적인 메마름과 갈망을 반영하는 대항운동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들은 지성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 교회를 향한 저항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를 향한 영적부흥에 대한 강렬한 요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영성이라는 말은 매우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이제는 매우 자연스럽게 널리 사용되어지고 있다.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하여 膾炙하고 있는 “영성”은 오늘의 신학과 교회를 향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상징적인 용어로 이해할 수도 있다. 현대 교회의 영성의 상태를 점검하고 영성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재확인 함으로서 복음에 충실한 활기찬 교회를 기약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오늘의 교회 현실을 한 마디로 일컬어 영성의 위기시대라고 한다. 도날드 블러쉬(Donald G. Bloesch)는 그의 저서 [The Crisis of Piety (경건의 위기)]라는 책에서 현대 개신교가 점점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 그 주 원인을 경건생활의 결여에 두고있다. 그는 ‘현대 개신교 신학교들이 경건한 사람들을 양성하기보다는 신학자들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개인의 영성생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예의인 것처럼 되어 있다'1)라고 신학교육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성향이 교회 전영역으로 확산되어 개인의 신앙생활에 대해서도 침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신교 교회는 내면세계나 영성생활에 대한 탐구나 훈련보다는 외적인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그러한 경향은 개혁 교회 노선에 속한 교회일 수록 더욱 심화되어 있다고 블러쉬는 지적한다.'2) 영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가 깊게 성찰해야 할 문제는 이렇다. 내적으로는 편협적인 신학이해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것이냐의 문제와 외적으로는 오늘 기독교의 정체성에 도전해 오는 새로운 시대 사조를 어떻게 소화하고 극복하느냐의 문제이다.
첫째는 개혁 신학의 핵심인 은총과 以信稱義에 대한 편협적인 이해가 능동적인 내면생활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혁신학의 우파 쪽에 속해있는 소위 신정통주의자인 칼 바르트에게서도 그러한 경향이 역력하게 나타난다. 그는 稱義와 마찬가지로 聖化도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에 능동적인 영성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 신학에서 발전된 계시의 탁월성에 대한 강조와 아울러 인간종교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능동적인 경건훈련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할 수 밖에 없다.3)개혁가들이 재발견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以信稱義의 위대한 진리와 능동적인 영성생활과의 관계가 상호보완적이지 못하고 갈등 관계 속에 있다는 증거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개혁신학의 오해의 측면을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가능한한 고생을 하지 않고서 기독교인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세속성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성은 루터를 주목하여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며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냈다. 모든 것은 오직 신앙으로 말미암아 임한다!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우리는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루터 만세!’ .... 이것이 기독교를 개혁한 하나님의 사람 루터의 삶의 의미이다.”4) 키에르케고르의 날카로운 이 지적은 곧 본훼퍼가 [제자의 길](Cost of Discipleship)에서 밝힌 ”값싼 은혜(cheap grace)“라는 지적과 같은 맥락에 서있다.5) 본훼퍼의 값싼 은혜란 영적인 훈련을 하나의 ’공적사상‘으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개혁사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모호한 당시의 신학적인 입장에 대한 반성의 소리이다.
두번째는 사회 참여적인 신학의 대두가 내면 경험의 필요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신학의 패턴이 위로부터의 신학이라면 참여적인 신학의 패턴은 아래로부터의 신학이다. 위로부터의 신학이 계시의 주도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였고, 그 도전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신학함(Doing Theology)이 좌파로부터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로부터 출발하여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로의 흐름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 대신에, 수직적인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곧바로 대체하고자 했다. 그러한 참여적인 신학은 존재문제 이전에 행동에 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토마스 머튼은 기도를 통해서 얻은 내적인 자유와 평화, 영적인 통찰력과 내면적인 변화없이 사회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는 오히려 그 사회를 타락시킬 수 있는 요인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6)
세번째는 영성에 대한 오해가 개혁교회 안에서의 영성훈련을 소홀히 하게 하고 있다. ‘영성’이라는 말만 들으면 습관적으로 극단적인 이원론과, 금욕주의적인 중세 수도원적 영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인상은 단순히 선입견만은 아니다. 개혁가들이 일찌기 신비경험의 극단적인 일면을 위험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중세 신비주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물론 중세 신비주의자들 중에는 계시의 주도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영혼에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을 과대 평가하여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일치(union)의 가능성과 친밀감(intimacy)을 강조함으로서 삼위일체적인 신관을 무너뜨린 신비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신비경험의 절정에서는 인간성이나 신성이 구분 없이 연합됨으로서 각 영혼이 지닌 독특한 인격성을 상실하고 마치 인간의 신성화(divinization)를 주장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7)그러나 아씨시의 프란치스꼬(Francis of Assisi)나 존 웨슬리나 살레의 프란치스꼬(Francis de Sales)8)등이 영성훈련으로서 금욕적인 삶을 중시 했지만, 그것은 적극적으로 죄된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정화함으로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풍요로움과 일체성을 경험하고자 함이었다. 수직적인 일체성을 경험한 신비가들은 수평적으로 이웃과의 일체성으로 연결되곤 하였다.
알리스터 맥그라드(Alister McGrath)는 개혁주의적인 영성에 바탕을 두고 발전되어 온 복음주의의 한계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복음주의가 이신칭의 교리와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등과 같은 핵심교리는 개혁주의자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루터와 칼빈과 같은 제일 세대 종교개혁가들은 기존교회(로마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주관심사였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을 회심시키려는 복음전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것이다.9)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개혁가들이 주창한 교리나 성서적 원리를 복음전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복음전도에 헌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의무라고 생각한다.10) 즉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적인 회심과 복음전도에 대한 헌신을 그 생명으로 삼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의 중심 관심은 사람들을 세속으로부터 끌어내어 그리스도의 신앙에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복음전도라는 주님의 지상명령과 복음의 능력이라는 성서의 권위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복음주의의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주의에는 영성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무엇을 두고 영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인가? 알빈(Alvin)은 ‘기독교 영성의 시금석은 우리의 마음과 삶을 주 예수의 인격과 그에 대한 고백에 일치시키는 것이다’11) 라고 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세속사회로부터 이끌려 나와 복음으로 회심된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책임있는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충분히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삶 속에서 겪어야 하는 다양한 내적인 번민과 혼란스러움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12)
닫혀진 사회 속에서는 교회의 전통이나 교리적인 권위가 개인의 내적 번민이나 회의를 압도했다. 그러나 열린 사회에 직면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객관적인 권위보다, 심지어 성경의 권위보다도 내면적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전통들과 종교들에 공개적으로 노출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적인 삶의 결단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성찰이나 자기인식에 더욱 충실해야 하며, 상황인식에 민감해야 한다.
II. 칼빈의 영성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영성”이라는 용어를 반가와 하지 않는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는 “영성”이라는 말은 물질적인 생활이나 현실적인 삶과 분리되는 또 다른 영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성에 대한 분리적 사고는 매우 편협된 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영성이란 초월적인 세계나 하나님의 실존(divine reality)과 관련된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영성이라 하지 않는다. 고든 웨이크필드(Gordon Wakefield)는 “영성”이란 “사람들의 생활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들로 하여금 초감각적인 실체들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태도와 믿음과 실천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고 했다.13)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영성이란 우리의 삶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자각이며, 그것은 현실적인 삶으로 스며들어와서 창조적이고도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두 번째 “영성”이란 깊은 사고 보다 느낌을 더 선호하는 감정주의적 성향이 짙으며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주관주의적이고 자기도취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을 중요시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영성이라는 내적 경험을 강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성경을 무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한다. 다른 한편의 목소리는 ‘말씀중심을 강조하는 이들은 모든 기독교적인 삶을 말씀이라는 지적 동의로 이해하며 순전히 이론적인 접근을 함으로서 그리스도인의 경험과는 유리될 수 있다‘고 한다.14) 이 양극화 현상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고 조화의 문제이다. 영성이 감성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사실이나 결코 지성적인 작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머리와 가슴의 조화점과 상호관계성을 역설하면서, “이해에는 감정을 뜨거운 열뿐만 아니라 빛도 있어야만 한다. 빛은 없고 열만 있는 곳에는 그 가슴속에 신적인 것이나 천상의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만 있고 열이 없으며, 머리는 관념과 사색으로 가득차 있고 가슴은 냉랭한 그 빛 속에서는 어떤 신적인 것도 있을 수 없다.”15)고 했다.
조화로운 영성이란 내면과 관련된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으로 통합되어지는 삶의 방식을 의미하며,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체험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지성적이고 객관적인 통찰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할지라도 개혁주의 전통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영성”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자체가 뚜렷하게 개인적이기보다는 공동체적이고, 감성적인 체험보다는 객관적인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체험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투쟁하는 수도자의 영적인 움직임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히려 공동체를 책임 지고있는 목사들의 관점’으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이다.16) 후기 중세 시대 특히 스콜라 주의 시대의 영성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17) 에 그 초점이 있었다. 영성을 논할 때 그 중심점이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개혁가들에게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느냐’에 그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후기 중세시대의 영성은 내면 세계에 대한 탐구와 그 의미를 강조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일치 경험을 추구하였고 따라서 내면적인 신비경험을 영성경험의 중요한 우선 순위로 보았다. 그러나 개혁가들의 영성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과 그 주도권이 무엇보다 우선 순위였다. 예를 들자면 예정론이나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론 등이 바로 이러한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발붙일 곳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주관적인 경험에 의존하기보다는 객관적인 계약신학에 의존한다.18) 즉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기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의 백성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서 계약백성으로의 관계가 성립된다.
중세적인 분위기의 영성이란 하나님 그 자신을 추구하고 열망했던 것에 비하여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소명의식을 강조했다. 개인적인 영성의 변화나 성장보다는 하나님의 계약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명의식의 실현이 더 중요한 일이었다. 존 레이드(John Leith)는 개혁가들의 소명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구별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일이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역은 인간의 삶을 향상시키고,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고,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 차이란 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있고, 그 성향에 있다.....결국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인격을 하나님에게 맡기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역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19) 개혁가들의 경건이란 소명의식의 실현이며 그것은 내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외적인 것이요 관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활동적인 삶을 의미한다.20) 즉 개혁교회의 경건이란 신앙적인 확신에 의하여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감당하는 것과 관련된다.21)
이러한 경건에 대한 이해는 내면적인 전인성을 추구하는 영성--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영성--으로서의 이해를 간과하고 있는 듯하다. 주관적인 종교 경험을 말하기보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한 객관적인 수용을 통해서 경건의 삶을 확인해 가는 것에 강조점을 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 개혁 영성을 단정해 버린다면 개혁 영성을 충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비교적 경험과 지식의 양쪽 측면을 견지하고 있는 종교개혁가 존 칼빈의 신학을 통하여 다른 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칼빈의 신앙적인 통찰력은 신학적인 논쟁 가운데에서 태동되었다. 특별히 그는 로마 가톨릭과 재침례파 사이를 오가는 논쟁에서 어느 한 부분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일이 없이 할 수 있는 만큼 신앙의 경험에 관한한 중간의 위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고 애를 썼다.22)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조화로운 영성의 개념을 찾아보고자 한다.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칼빈에게 있어서 주관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빠져있는 재세례주의자들(Anabaptists)은 매우 위험한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칼빈 당시 “스위스의 형제들”(Swiss Brethren) 혹은 냉소적으로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s)"이라고 불렀던 극단적인 재세례파들이 활동하고 있었다.23) 어떤 의미에서 개혁가들은 로마 가톨릭보다 재세례주의자들을 더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신학논쟁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칼빈에게 있어서 ‘영성”이라는 용어 자체에 호감을 가질 수 없으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의 영성의 의미를 극복하고 그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하려 할 때 칼빈의 “경건”의 의미를 추적해 봄이 좋을 것이다. 칼빈의 신학을 한 마디로 대언하고 있는 용어가 ’경건‘이다. 이 용어는 칼빈 자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미 중세기 때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거스틴의 신학을 인용하면서 경건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24) 그리고 ’경건‘에 대해서 그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던 게르송(Jean Gerson: 1363-1429)이 있다.25) 그는 끊임없이 신학과 내적인 영성생활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게르송은 당시 스콜라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과도한 사색과 사변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립되는 말과 개념을 찾다가 발견한 용어가 ’경건‘이다. 이 경건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념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면서 어거스틴과 보나벤투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26) 루키안 리차드(Lucien J. Richard)는 칼빈의 영성을 연구하면서 칼빈의 ’경건‘은 후기 중세의 신학자들, 근대경건(The Devotio Moderna) 운동가들 그리고 특히 게르송의 ’경건‘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했다.27)
칼빈은 [기독교 강요] 곳곳에서 ‘경건’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화의 생활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우리의 전생활에는 어떤 경건의 실천이 있어야 한다”28) 라고 할 정도로 경건이 칼빈 신학의 근간이다. 그가 딤전 4: 8절을 주석하면서 "경건만이 인간을 완덕(complete perfection)에로 인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끝이다. 그것이 완성되는 곳에 부족한 것이란 없다“(딤전 4: 8)라고 말했듯이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29) 칼빈은 [기독교 강요] 의 어디에서도 “경건”이라는 항목을 따로 다루고 있지 않지만,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하여 경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30) 그는 기독교 강요를 출판하면서 프랑스 국왕 프란시스 I세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는 글에서도 [기독교 강요]를 쓰는 목적은 “종교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참된 경건의 생활”31) 을 이루게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의 제목을 “경건의 개요와 구원의 교리에서 알 필요가 있는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 강요”(1936년 라틴어판) 32) 즉 칼빈 자신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를 ‘신학의 총서’(summa theologiae)라기 보다는 ‘경건의 총서’(summa pietatis)라고 했다.33) 그의 신학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경건에의 열망과 가르침이 깊고 넓게 깔려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의 신학 특히 그의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이해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개혁주의적인 영성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그 통찰력으로부터 영성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 개혁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윌리암 부스마(William Bouwsma)는 칼빈의 자서전에서 칼빈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양쪽에서 볼 수 있는 대단히 복잡한 인물중의 한사람이라고 했다. 그 양면중의 첫째는 중세 스콜라주의의 전통아래에 서있는 고정된 원칙주의자로서 칼빈을 이해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靜的인 정통주의를 지향하고 기독교인은 어떤 신분을 부여받은 사람이다.”34) 라는 이해가 그것이다. 칼빈의 이런 면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질서와 이해성과 확실성을 열망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입장에서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말한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경외감 외에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인다. 칼빈주의자들은 초월적이고 절대 타자적인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내재성을 통한 하나님 경험을 간과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의 또 다른 측면은 신앙경험의 모호성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거부하고 믿음 중심의 역설과 신비를 예찬하는 경향이 있다. 부스마는 칼빈은 “또한 이론에 대항하여 경험과 실천의 우위성을 주장했으며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상당한 관용성을 가지고 있었다.”35)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독교 강요]의 저술 목적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의 일치된 삶을 향해 순례여행을 하는 동안 영적투쟁을 겪어야 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36)라고 했다. 일치의 삶이란 외적인 경건뿐만 아니라 내적인 신비적 경험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성도들의 그리스도와의 일치된 삶을 ‘성령의 내주하심’ 혹은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 표현하고 있다. 칼빈은 영성생활의 최고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최고로 중요시 한다.”37)고 했다. 그리스도의 내주하는 방식에 대해서 칼빈은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38)고 했다. 이것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가 경계했던 오시안더(Osiander)의 주장처럼 실체와 실체와의 연합은 아닐지라도39) 단순히 법적인 개념을 뛰어넘어 역동성을 지닌 의미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음을 통하여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존재 안으로 날마다 스며들어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이다.40) 이 신비적 연합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의적인 개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단순히 믿음 안에서 저절로 되어지는 수동적인 일만도 아니다. 칼빈은 칭의론을 다루기에 앞서 [기독교 강요]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길: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효력이 따르는가?”라는 제하인 제 삼 권 제 1-9장까지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 자기를 부정하고 내세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허무한 현세생활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고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적극적인 성화와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결코 극적인 변화의 경험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완전한 덕을 향해서 계속적으로 성화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칼빈은 이 성화의 길을 위해서 ‘분투 노력해야 할 목적지를 정하고 느릴지라도 전진을 위해서 영적여행을 떠나라고 권고한다. 자기 만족에 빠지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분투 노력하며 , 거룩함과 의로움을 체득하기 위해서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한다.41) 현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공유하고 있는 육신이 역사적인 예수의 삶과 십자가에서의 고난 당하신 예수와 부활하신 예수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가 교제하고 있는 역사적인 예수는 바로 승천하시고 영광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연장이기 때문이다.42)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역사적인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할수록 천상으로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영광과의 신비적인 일치도 증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과의 완전한 연합은 “육체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 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만”43)가능하다.
칼빈의 서로 다른 듯한 이 두 견해는 “지식”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로 만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거듭 ‘하나님의 지식’과 ‘자아의 지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신에 대한 지식의 우선순위를 명백히 하지 않는다.44) 그는 “하나님을 응시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 없다”고 언급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한...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라고 했다.45) 하나님을 아는 것은 자아를 아는 것이고 자아를 아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안다’라는 용어를 순수하게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지작용으로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칼빈은 신지식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주장하기 때문에 그가 ‘안다’라고 하는 말은 실존적인 경험을 의미한다.46) 바우스마는 칼빈의 지식이란 ‘안다’라기보다는 차라리 ’경험한다‘라는 말이 더 적합한 이해라고 했다. “믿는 자들은 그들이 천둥을 경험하듯이 ---종교 경험에 대해서 칼빈이 가장 좋아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하나님을 경험한다.”47) 칼빈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결코 명제적인 진리에 관한 문제이거나 논리적인 추론을 수반하는 이성적인 작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종교 혹은 경건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48)라고 했다.
칼빈신학에 기초한 개혁교회의 영성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경건에의 경험과 실천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소명의 실현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이다. 이 외적인 경건의 실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인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경건은 내면적인 하나님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계시에 대한 인지와 주관적인 하나님 체험, 그리고 지성적인 추구와 동시에 감성적인 경험이 조화를 이룬 것이 본래 칼빈의 신학을 기초로 한 개혁교회 영성의 진면모다.
III. 새로운 시대에 대응하는 기독교 영성
개혁교회의 영성이란 ‘이신칭의’를 근간으로 삼아야 하지만 이신칭의에 대한 적합한 응답을 위하여 기꺼이 이신칭의를 내면화 하는 성화 작업과 관상생활(contemplative life)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신칭의는 지적인 동의에 의해서 시작될 수 있지만, 결코 칭의에 대한 실존적인 체험은 그러한 동의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 의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영성훈련을 통해서 내면화하고 성화시켜야 하는 일은 개인의 책임이다.
사회적인 책임과 사명인식을 강조하는 개혁신학을 단순한 행위 문제로만 귀착시켜서는 안된다. 관상과 활동이라는 두 요소는 서로 조화할 수 없는 갈등적인 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조화를 이루어 한쪽이 다른 한쪽의 성숙을 역동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할 때 건강한 관계가 된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가 형성되고 동시에 그 내면형성의 결과로서 행위적인 열매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기독교 영성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이 행위는 다시 존재를 형성하는데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영성적 행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케 하는 물러감의 영성(수직적 영성)과 이웃과의 관계를 형성케 하는 나아감의 영성(수평적 영성)이 상호 역동적이 작용이 있을 때 가능하다. 이러한 조화로운 기독교 영성의 전통은 이미 주지하는 바대로 칼빈의 경건의 영성 속에 깊히 뿌리박혀 있다. 열린 눈으로 개혁교회 영성의 전통을 바라본다면 내면적이고 존재적인 영성을 근간으로 한 소명실현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오늘 우리는 외적 내적으로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대변혁의 시대 속에 살고있다. 정신적, 종교적 흐름은 보이는 국경선이 없기에 어느 분야보다도 세계적인 교류가 신속하게 일어나고 있다. 초기 기독교가 당시대를 풍미하던 영지주의에 의해서 수많은 도전을 받아던 것처럼, 이 시대는 동양의 신비종교나, 내면 세계를 추구하는 경험의 종교가 외형적인 형식에 치우쳐 있는 현대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그 동안 제도권 교회가 심도있는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일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나 수피 이슬람, 그리고 한국의 선불교적인 요소등이 새로운 세대에 매력을 주고 있다. 오늘 이 세대는 이러한 세계적인 흐름을 타고 종교 다원주의적인 사고에 깊이 물들어 가고 있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한다. 절대적인 가치관이 있다는 것에 회의를 표명한다.
오늘 이런 시대적 흐름을 향하여 오늘 교회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는 무조건적인 거절이나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과 이 시대 사조와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무엇인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연속성이 있다면 기독교 가치관 안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조처를 찾아내고 개발해 주어야 할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 등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적인 자각과 깨달음의 문제 등은 기독교 영성과 상당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 교회가 지나치게 값싼 은혜를 남발하고 결단없는 자동적인 믿음을 선포하는 동안 기독교가 새로운 세대들에게 왜곡되어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자신의 내면세계로 돌아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경험과 믿음의 자각이 일어날 수 없다. 내적인 자각운동이나 깨달음의 운동은 기독교적인 믿음이나 신조들을 보다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하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기독교 영성은 성경 중심적이어야 하며, 그것에 의한 신학적 진술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나 신학적인 진술들이 회심한 이들에게 역동적인 삶의 원리로 작용하기 위해서 내적이고 감성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기독교 영성사 안에는 내면 형성을 지향하고 경험주의를 추구했던 건전한 영성적인 유산이 속에서 그 통찰을 얻을 수 있다. 특히 칼빈의 경건주의 영성은 단순한 명제적 진리나 법적인 개념의 교리주의나 권위적인 전통에서 탈피하여 과감히 기독교 전통 안에 숨겨져 있던 지성을 포함한 경험주의적 영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다.
주
1) Donald G. Bloesch, The Crisis of Piety (Grand Rapids: Eerdmans, 1968), P. 37-38.
2) Ibid., pp. 63-76.
3) Donald G. Bloesch, The Reform of the Church, 오성춘, 최건호옮김, [목회와 신학] ,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2), p.198.
4) Dallas Willard, The Spirit of the Disciplines, 엄성옥옮김, [영성훈련](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3), p. 51.
5)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the Discipleship (New York: Macmillan Publishing Co., 1963), pp. 45-60을 참고하라.
6) Harvey D. Egan, Christian Mysticism: the future of a tradition (New York: Pueblo Publishing Co., 1984), pp. 234-236.
7) 중세 신비가들을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거짓 신비가(pseudo-mystic)와 기독교적인 신비주의(Christian mystic)로 분류해서 생각해야 한다. 전자는 다분히 범신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데, 그들은 신비적 절정을 신성의 본질(divine nature)과 인간성의 본질(human nature)의 연합이라고 보았다. 즉 신성과 인성이 구분없이 혼합됨으로서,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신이 되는 순간이 신비경험이다. 후자는 신비경험의 절정의 상태를 영적인 결혼(spiritual marriage)이라는 유비적인 언어로 표현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의지(divine will)와 인간의 의지(human will)의 일치로서 본질적인 연합을 경계하고 있다. 전자의 주장은 이미 교회사적인 입장에서 정죄되었고, 후자의 입장이 오늘 우리에게 건전한 기독교 신비가들로서 전해지고 있다.
8) Francis de Sales, Jane de Chantal, Letters of Spiritual Diection (New York: Paulist Press, 1988),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를 참고하라.
9) Alister McGrath, Evangelism & the Future of Christianity, 신상길, 정성욱 옮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p. 22-23.
10) Ibid., pp. 111-112.
11) T. R. Alvin, "Spirituality," S. Ferguson and D. F. Wright(eds), New Dictionary of Theology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88), pp. 656-658.
12) Alister McGrath, op. cit., p. 139.
13) Gordon Wakefield, ed., The Wester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Spirituality (Philadelphia: Westerminster Press, 1983), p. 361.
14) Alister McGrath,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 신상길ㆍ정성욱 옮김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7), p. 76; Gordon Fee, "Some Reflections on Pauline Spirituality," in Alive to God, ed. James I. Packer & Lorebn Wilkinson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1992), pp. 96-107 참고.
15) Jonathan Edwards, Religious Affections ed. John E. Smith, vol. 2,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New Haven, Conn.: Yale University Press, 1959), p. 120.
16) Fritz Busser, "The Spirituality of Zwingli and Bullinger in the Reformation of Zurich," in ed. Jill Raitt,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New York: Crossroad, 1987), p. 301.
17) 중세의 감성적인 경험에 기초를 둔 영성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람중의 하나는 Bernard of Clairvaux(1090-1153)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 사랑’이다. 주 저서들로서는 Treatises on Loving God, Sermons on the Song of Songs 등이 있다: Bernard of Clairvaux, "The Classics of Western Spirituality,"(New York: Paulist Press, 1987) 참고하라.
18) Robin Maas & Gabriel O'Donnell, eds., Spiritual Traditions for the Contemporary Church (Nashville: Abingdon Press, 1990), p. 206.
19) John H. Leith, The Reformed Imperative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88) pp. 94-95.
20) Robin Maas & Gabriel O'Donnel, Op.Cit., 214.
21) Ibid., p. 202.
22) Interpreting John Calvin, ed. Robert Benedetto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Company, 1996), p. 299.
23) William Klaasen, "Anabaptist Hermeneutics: The Letter and the Spirit," Mennonite Quarterly Review 40 (1966), p. 91; 프랑스 왕 프란시스는 프랑스의 개신교인들을 극단적인 제세례 주의자들과 동일시 함으로서 개신교인들의 박해를 정당화하고 있었다(E. J. Furcha, ed. In Honor of John Calvin, 1509-64: Paper from the 1986 International Calvin Symposium McGill University (Montral: McGill University, 1987), pp. 163-166). 이에 대하여 칼빈은 프랑스 국왕에게 개신교인들과 재세례파 주의자들과는 동일시 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변호의 글을 썼다: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이후로는 Institutes 으로 표기할 것임),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no., 7, p. 27.
24) 토마스 아퀴나스는 De Pietate(경건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바가 있다.
25) A. Combes, "Gerson et la naissance de l'humanisme," Revue du Moyen Age latin I [1945], pp. 281-283 in Lucien Joseph Richard,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Atlanta, Georgia: John Knox Press, 1974), p. 49. 그는 파리대학의 총장이면서 당시 스콜라 주의가 지향하는 하나님과 신앙에 이르는 방식과는 달리 외적인 효과보다 내적인 경험, 지성보다 감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영적 저서’를 남긴 사람이다. 루터(Luther)와 멜랑히톤(Melanchthon)이 그의 저서들을 오랫동안 인용하고 사용할 만큼 많은 영향을 미쳤다:
26) Lucien Joseph Richard,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Atlanta, Georgia: John Knox Press, 1974), p. 88: Steven Ozment, The Age of Reform, 1250-1550: An Intellectual and Religious History of Late Medieval! and Reformation Europe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80), pp. 73-74: 여기에서 오즈만은 게르송의 저서를 인용하여 스콜라주의 신학자들(scholastic theologians)와 영성신학자들(mystical theologians)의 차이점을 나열하고 있다.
27)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chapter II, III 참고.
28) Institutes, III, xix, 2.
29) John Calvin, Commentaries on the Epistles of Paul to Timothy, Titus, and Philemon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9), Tim. 4: 8, p. 109.
30) 이수영, “깔뱅에 있어서의 경건의 개념,”[교회와 신학] 1995년 (제 27집), p. 348.
31) Institutes I,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 of France," pp. 9.
32)“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mbracing almost the Whole Sum of Piety, and Whatever is Necessary to Know of the Doctrine of Salvation: A Work most Worthy to be Read by all Persons Zealous for Piety....": Battles, Ford Lewis, op.cit., pp. 91-93 참고.
33) Institutes, introduction,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XX., p. li
34) William J. Bouwsma, John Calvin: A Sixteenth Century Portrait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8), p. 230.
35) Ibid., p. 231.
36) 칼빈의 “프란시스 1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기독교 강요]를 쓰게되는 그 의도와 목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특히 ‘핍박을 받고 있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이라는 항목에서 더욱 그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Institutes I, "Prefatory Address to King Francis I of France," pp. 9-31.
37) Institutes, III. xi. 10.
38) Institutes, III. xi. 5.
39) Institutes, III. xi. 5: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수동적인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본질적인 의”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칼빈은 단호히 반대입장을 취하였다.
40) W. Kolfhaus, Christusgemeinschaft bei For. Calvin, p. 45 in Wendel, Francois. Calvin: Origin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 Trans. Philip Mairet (Duram: The Labyrinth Press, 1987), p. 238.
41) Institutes, III. vi. 5.
42) Robert C. Doyle, "The Preaching of Repentance in John Calvin: Repentance and union with Christ," in Peter T. O'Brien and David G. Peterson, eds. God Who is Rich in Memory (Grand Rapids, Michigan: Baker Book House, 1986), p. 298.
43) Institutes, III. vi. 5.
44) Institutes, I. i. 1: 칼빈은 ‘이 두 지식(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자신에 관한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산출해 내는가를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45) Ibid.
46) John T. McNeill, ed. Institutes I, i, note no. 1.
47) William Bouwsma, "The Spirituality of John Calvin," in Christian Spirituality: High Middle Ages and Reformation, vol. 17, World Spirituality: An Encyclopedic History of the Religious Quest, ed, Jill Raitt, Bernard McGinn, and John Meyendorff (New York: Crossroad, 1987), p. 323.
48) Institutes, I. ii. 1.
유해룡 교수
첫댓글 설 명절을 앞두고 후원에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후원 참여가 전혀 없습니다 명절이나마...
먹을것도 장만하고 공과금과 치료비 난방비 월세를
내도록 도와주세요,,,
후원은 카페지기에게 큰힘과 용기가 됩니다
이달에도 치료약값이 필요합니다 많이 힘이드네요...
카페지기는 지병.때문에 매달 치료비가 많이듭니다
매월 공과금과 LH.주거임대 임대료 관리비 마련이 어렵습니다
먹을것 반찬거리도 사야 살아가는데 지병과 장애 나이도
들다보니 수입이 전혀 없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카페지기 전화입니다 010.2261~9301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농협 233012-51-024388 예금주.황종구